섬진강 (상)(진안·임실·순창·남원·곡성)

진안고원에서 시작하는 섬진강 오백오십리
섬진강 (상)(진안·임실·순창·남원·곡성)

섬진강은 괜시리 눈물 고이는 강이다. 저 가슴 깊숙이 숨죽이고 있던 알 수 없는 설움 같은 걸 이 강 어디쯤에선가는 씻어낼 수 있을 거라 믿게 만든다. 섬진강 아랫녘에서 꽃이 눈을 뜨면 이 땅의 봄은 기지개를 켜고, 겨울은 서둘러 떠난다. 자전거로 우리 산하를 누비는 여행자들이 마지막 여정으로 남겨놓는 강, 섬진강댐 아래서 시작하는 자전거길은 강의 속살을 반절만 보여준다. 암수 마이산의 정령과 성수의 풍혈냉천, 관촌 사선과 인사조차 못하고 마는 것이다

 

섬진강을 가장 ‘한국적인 강’이라 하는 것은 강물과 사람이 어깨동무하며 갈 수 있어서다

 

지난 가을의 여운이 그대로 얼었다 녹은 섬진강, 연무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길이다

 

 

이쯤 했으면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물러갔으려니 했다. 한반도에서 7번째로 긴 강, 남한에서 4번째 강, 섬진강으로 가는 길이다. 강둑길 순례자도 뒤로 숨겨둔 강이다. 역시 긴 강의 발원지로 가는 길은 멀다. 진안 팔공산(1147m,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자락까지 가야 한다.  
보통 오계치 쪽 데미샘(봉우리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에서 유래)을 발원지로 하지만 최장 발원지는 서구리재를 넘어가다 팔공산 북사면에 있다. 이홍희 자전거여행가와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데미샘 끝까지 오른다.

겨울이 얼어 있는 섬진강의 시작
눈 덮인 산길은 한겨울이 여전히 움켜잡고 있다. 너덜이 품고 있는 온기가 그래도 골짜기를 덮고 있다. 홑겹 안개 이불이다. 샘은 물이 말라 엉덩이가 하늘을 향하지 않으면 맛 볼 수 없다. 내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지 않으면 귀한 물 한 모금 줄 수 없다는 심산의 오기다. 금강 발원지인 뜬봉샘이 채 이십리(8km) 못 되는 산 너머 남동쪽이니 수분(水分)의 육덕 좋은 산이다. 내려오면서야 올려다 보이는 선각산(1140m)이 팔공산에 버금가는 높이란 걸 알겠다. 

자전거를 타면 백운면 소재지를 눈앞에 둬야 강둑길로 접어든다. 온통 인삼밭이다. 1963년 금산이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호적을 옮기자, 인삼의 본고장을 놓쳐버린 전라북도는 인근 진안·임실에 인삼을 심어 그 허전함을 달랬다. 그 기운이 ‘호남의 지붕’이라는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고원을 더욱 살찌운다.   백운면은 무진장(무주·진안·장수) 골짜기에서도 섬진강 쪽으로 펼쳐진 서쪽 끄트머리다. 관청도 예술가들도 백운면을 그리운 고향으로 만드는 작업을 일찍이 해 왔다. ‘백운(白雲)’은 덧없는 세월뿐만 아니라 고귀한 신선의 세계 저 편이다. 판화가 이철수가 일찍이 터 잡고 앉은 ‘울고 넘는 박달재’ 아래 제천 백운도 같은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다. 관상·작명가들이 저마다 ‘백운학(白雲鶴)’이라고 간판을 내걸고 하는 영업도 원조 백운학의 전설과 흰 구름 속 신묘에 의탁하는 전략이다. 진안 백운 간판정비 작업은 조선조 궁녀들이 쓰던 한글궁체로 동화풍의 그림과 함께 향수를 자극했다. ‘백운정류장’ ‘백운떡방앗간’ ‘6번집’ 등 두런두런 얘기 하는듯한 간판은 흘러간 시간 속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여행자들까지 불러 모았다. 옛 간판이 노쇠했는지 새로 붙인 간판은 도무지 정이 가질 않는다. 궁체가 너무 백운에 각인되었나 보다. 

 

멀리 보이는 숫마이와 암마이의 두 말귀는 진안의 상징이다(진안읍)

 

데미샘 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하는 섬진강 오백오십리 여행의 첫걸음이다(진안 백운)

 

진안 백운이 오래된 산촌임을 증명하는 풍경(진안 백운)

 

진안고원과 마이산의 정기도 섬진강으로
백운면과 마령면에 걸쳐 펼쳐지는 들판은 진안고원보다는 한 단계 낮아지지만 해발 300m의 충적지가 만들어낸 풍요다. 땅뙈기가 힘이고, 권력이기는 여전하다. 이 궁벽한 산촌에 이만한 땅이 있는 것은 오로지 마이산 산신령의 힘이라고 믿은 모양이다. 이름도 마령면(馬靈面), 마이영봉(馬耳靈峰)에서 따왔다. 

진안의 상징인 마이산을 가까이서 만져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흔히 보는 화강암이나 현무암과는 감촉이 확연히 다르다. 한마디로 자갈에다 레미콘을 들어부어 굳힌 느낌이다. 실제로 이 산의 역사가 그렇다. 1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백악기다. 진안에서 임실은 거대한 마름모꼴 호수였고 여기에 쌓인 자갈과 모래는 침하 과정에 지열로 익혀져 거대한 역암(礰岩) 덩이가 된다. 연한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강한 자갈덩이가 남은 수성암이자 퇴적암이 바로 마이산의 정체다.

말귀를 닮은 숫마이(680m), 암마이(686m) 봉우리의 귀 씻은 물은 북쪽에서 세동천과 어우러지고, 남쪽도 원동 앞을 지나는 은천이 되어 귀산서원이 있는 강정리에서 합강한다. 둘러싸고 있는 마을도 예사롭지 않다. 북으로는 부귀(富貴)면, 서로는 성수(聖壽)면, 동으로 백운(白雲)면이 싸고 있다. 마이산의 기운은 노령산맥 만덕산 줄기가 기운차게 뻗어 내려 관촌·성수에서 가로 막을 때까지 이어져, 섬진강은 게걸음으로 여러 차례 몸을 비틀면서 골짜기를 빠져 나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풍혈냉천’이 있다. 늘 섭씨 4도의 바람이 나와 천연 냉장고인 풍혈과 손발을 오래 담그기 어려운 냉천이니 겨울만 빼면 꼭 들러 지나가야할 명소다.

 

네 신선이 놀던 ‘사선대’, 멀리 구름이 깃든다는 ‘운서정’이 보인다(임실 관촌)

 

한 시절,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하던 다리건설 공약은 공약(空約)이 되기 일쑤였다(임실 운암)

 

진메마을에 김용택 ‘시인의 집’이 있다. 문학관이 아닌 것은 얼마나 시적인가. 이 느티나무는 김 시인이 나던 해 심었으니 고희를 넘겼다(임실 덕치)

 

섬진강댐이 수문을 열거나 할 때는 모두 잠기는 다리다. 섬진강의 매력이다(순창 적성)

 

화탄 잠수교 같은 다리가 많을수록 강과 다리는 더 자연에 가까워진다(순창 적성)

 

관촌, 떠오르는 <관촌 수필>의 기억
관촌이 눈앞에 들어오면 섬진강은 잠시 이름을 오원천으로 빌려준다. 아니다, 원래 오원천이 제 이름을 접고 섬진강이 된 것이다. 같은 강에 제 마을마다 이름을 붙이는 건 자연스러웠다. 임실 운암면에서는 운암천, 순창 적성면에서는 적성강, 곡성 고달면에서는 순자강이다. 관촌에 들어서면 ‘사선대’가 맞아준다. 사선대(四仙臺)는 진안 마이산의 두 신선과 임실 운수산 두 신선이 어울려 놀았다는 곳이다. 직벽 위에 세운 운서정(전북유형문화재 135호)은 전통 조선양식이기는 하나 일제 때인 1928년에 지어져 우국지사들이 빼앗긴 나라의 운명을 탄하기도 했다는 곳이다.    아는 게 병인가. 관촌에 들어서면서부터 입에 도는 이름이 ‘관촌수필’이다. 한글전용의 효험은 이런 때 나타난다. 한글만이 주는 상상력의 세계는 ‘꼬꼬영’(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의 전개와 닮았다. 전혀 관련 없는 것들이 굴비두름이 된다. 물론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관촌(冠村)은 충남 보령(대천) 갈머리이니 임실 관촌(館村)과는 서로 한글 종씨일 뿐이다. 

잠시 옆길로 새자. 그 골짜기가 그 골짜기 같은 강물과 더불어 흘러가는 페달 위 지루함을 잠시 떨치자. <관촌수필>은 이름은 수필이나 연작소설이다. 우리 동네 황씨, 정씨, 류씨 이야기가 질박한 충청도 말로 펼쳐진다. 이문구는 한내 앞 바다 속 깊이 묻힌 토속어를 가장 원형에 가깝게 채굴한 언어의 광부가 아닐까. 환갑을 갓 넘기고 세상을 떠난 그가 너무나 아깝다. ‘자실’(자유실천문인협회)의 간사를 맡아 궂은일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살다간 그의 인생을 내가 만난 것은 이미 몸이 병약해진 그가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로 이주하면서다. 그는 정보형사가 감시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초임 경찰관으로 먼발치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통 큰 문인다웠다. 서울로 나들이를 하는 날이면 미리 담당형사에게 전화를 해서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가 함께 내려왔다.    그가 고료를 받고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정형사는 3층 당구장에서 당구를 쳤다. 더 자세한 그는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표지로 한 산촌수상록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에서 만났다. 남로당 예비 검속으로 총살당한 아버지, 징용 갔다 실종된 큰형, 보령신사에 방화했다 체포되어 옥사한 둘째 형의 역사는 우리 현대사 비극의 한 단면이다. 그의 일생을 지배했을 가장 끔찍한 기억은 좌익의 아들로 가마니 속에 묶여 대천 앞바다에 수장된 셋째 형이었다. 그래도 그는 소설가 김동리의 <역마>에 감명 받아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의 문하가 된다. 노고산 공동묘지 이장을 하는 잡부를 하면서도 소설을 쓴 그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된다. 그가 대학 2학년 때 쓴 습작소설을 읽은 교수 김동리가 그 학기 중간고사로 “동급생 이문구의 소설을 읽고 평론하라.”고 출제한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좌와 우의 골짜기를 넘어 우리 문학사의 또 다른 걸작을 많이 낳았을 텐데 말이다.

 

나이백이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 무던함에 고개 숙여진다(진안 성수)

 

전북의 큰 호수 옥정호, ‘선거다리’에서 돌아가다
요기를 하고 문을 나서니 전라선 철도가 가로 막는다. ‘풍년호’가 달리던 전라선도 이제는 여수엑스포행 KTX까지 달리도록 고속화 되었다. 관촌역을 지나 745번 지방도로 접어들면 섬진강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강둑길을 처음 만난다. 강변으로 내려선 자전거길은 몇 번의 토끼굴과 숨바꼭질하면서 선거교에 이른다. 옥정호의 시작이다. 여기서 운암천이라는 이름마저 사라진다.  운암댐은 1920년에 이미 ‘동진농조’가 쌓았다. 산 너머 정읍 동진강 유역에 벼농사를 지으며 올막졸막 사는 사람들은 늘 물이 부족했다. 물줄기 하나를 돌리려고 임실 강진면 옥정리에서 정읍 칠보면 시산리에 걸쳐 6.2km의 도수로를 파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칠보수력발전’(현 섬진강수력발전)이 탄생한다. 한글의 상상력 확장이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한다. 선거교란 이름에 쓴웃음 짓는다. 선거 때만 되면 놓아주겠다던 다리가 드디어 완공되었다는 의미일까. 옥정호의 큰 덩치에 겁을 집어먹고 질러가는 길로 접어들 어서야 미안해졌다. ‘선거(仙居)마을’비석이 동네 초입을 지키고 있다. “아, 신선이 사는 마을을 그리 속되게 해석했으니 용서하시라.” 

등재를 넘어 청웅면을 지나면 이십리 남짓 강진교에서 다시 섬진강을 만난다. 거기에서 섬진강 자전거길이 비로소 시작된다. 1961년, 운암댐 만으로 물이 부족해서 그 아래에 다시 섬진강댐을 만드는 기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다. 태극기를 흔들며 참석한 중학생 김용택이 구름 같은 인파 속에 박대통령도 작고, 자신도 작아서 대통령 얼굴조차 못 봤다고 추억하는 그 댐이다. 4대강 종주를 끝내고 남은 스탬프를 마저 찍으려는 자전거객이 아는 섬진강은 대개 여기서 부터다.
 

시인 김용택의 강, 진메마을 협곡으로 숨는 섬진강
강진교에서 다리를 건너 강변으로는 자전거길이 다시 잘 정비되어 있다. 덕치면이다. 여기서부터는 시인 김용택의 그림자가 회문산 산그늘 못지않게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가 섬진강을 오롯이 독채 전세 낸 것은 시인이 떠나지 않고 지킨 세월 값이다. 하기야 평생을 섬진강가를 떠나지 않고 산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마는 그가 섬진강과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은 섬진강을 닮은  연작시 때문이다. 

그의 시와 닮은 시를 쓸 수는 있으나 그의 시 속에 살아 있는 섬진강을 누구도 옮겨올 수 없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김용택이 덕치국민학교에 선생이 되어서도 걸어 다닌 좁은 들판 ‘일중들’에 들어서면 설렌다.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겨대다 ‘내집평’이란 이름을 갖게 된 들에서 너남직 할 것 없이 배고팠던 시대를 다시 떠올린다. 사철 문학기행의 중요한 목적지가 되는 질메마을 장산이다. 그의 섬진강 이야기는 오래 전 사두고 제대로 읽지 않아 누렇게 바랜 산문집 ‘섬진강이야기’에서 다시 들춰보는 것이 제격이다. 시인이 아낀다는 시 한 편을 다시 읽는 것도 예의다.

달이 높다/추수 끝난 우리나라/ 들판길을 홀로 걷는다/보리씨 한 알 얹힐 흙과/ 보리 씨 한 알 덮을 흙을/ 그리워하며 나는 살았다. <김용택, 보리씨 전문>

이 시 한편에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고, 우리의 할아버지가 살아있다. 순창농고를 나온 그가 단기강습을 거쳐 초등학교 교사가 된 시대는 이 땅 베이비붐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산업화의 자장 속으로 빨려들어 떠나간 마을 사람들, 그가 고스란히 몸으로 앓은 농촌의 피폐한 풍경이기에 그의 시 속에 섬진강은 풍자와 저항의 흑백 영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김용택이 굳이 문학관이 아니라 ‘시인의 집’이라고 문패를 단 것도 좋다. 중앙 문단의 거대 권력과 이격거리를 유지하니 그의 자연이 더 돋보였고, 그는 수백 년 된 질메마을 느티나무와 고희를 넘긴 동갑내기 새끼 느티나무와 더불어 넉넉하게 늙어갈 수 있다. 시인의 수많은 문학강연에 등장하는 섬진강, 덕치초등학교, 느티나무, 진메마을, 물고기 잡이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너스레를 떠는 여유, 번뜩이는 그의 위트 속에, 때론 보이지 않는 유리조각의 날이 날카롭다. 

날이 저물어 ‘시인의 집’에 들리지 못한다. 휘익 둘러보기에 시인의 세월이 너무 무겁다. 그가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서 ‘넓은 들’만 빼면 바로 여기가 그 무대라고 한 섬진강, 지줄대는 개천, 마른 강을 막아서는 긴 산을 휘감아 돌면 섬진강의 또 다른 절경이 펼쳐지는 시오리 협곡이다. 구담에서 천담마을로 뻗친 장산은 하늘에서 보면 영락없이 밤새 오줌 참다 일어난 네 살 박이 고추다. 산허리로 올라붙은 길은 용케도 풍광을 찾아 든 사람들의 별장으로 이어진다. 더는 이 풍경이 일그러지지 않기를 바란다. “자전거는 현수교를 건너가라”고 안내하지만 그냥 내려간다. 건너편 길은 가드레일이 강물과 자전거를 나눈다. 강물과 어깨동무하며 갈 수 있는 것은 섬진강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물이 불어나면  모두 통제되는 길이지만 이 겨울가뭄 끝에 추위를 견디며 강바닥 길을 누리는 건 큰 기쁨이다.
 

박정희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기념하는 비석, 하기야 이 산촌에서야 경사 아니었겠는가(진안 백운)

 

섬진강이면 됐지 ‘섬진강천’은 또 뭔가. 관청의 식자우환이다(임실 관촌)

 

진메마을 초입에 새로 놓은 자전거전용다리. 아마도 최고급 사양이 아닐까. 자전거가 이렇게 대접을 받다니(임실 덕치)

 

‘순창군수배 전국유소년야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섬진강체육공원. 부모들은 제 자식이 제2의 이대호나 추신수가 되길 소원한다(순창 유등)

 

순창을 빙 둘러가는 섬진강, 체육공원의 봄
내월교와 화탄잠수교를 지나면서는 충적평야가 제법 넓게 펼쳐져 여느 강들과 진배없이 약간은 지루하다. 적성을 지나 유등에 다다르면 순창이 가깝기는 해도 십리 서쪽이다. 4km라고 적으면 될 걸 굳이 십리(十里)라고 고집하는 것은 3.93km가 주는 부정확한 옛 측지 단위의 여백 때문이다. 건조한 km 속에는 말맛이 없다. 국물 없는 비빔밥처럼 뻑뻑해서다.

유천대교를 건너 넓은 둔치 ‘섬진강체육공원’으로 내려간다. 유소년야구대회가 열리고 있어서다. 아직 겨울이 머뭇거리는 강변에서 노란 유니폼을 만나는 일은 이른 봄 먼저 피는 개나리를 보게 된 기쁨이다. 올해로 3회째인 ‘순창군수배전국유소년야구대회’다. 전국에서 98개 팀이 참가하는 대회이니 간밤에 순창읍내 여관이 초저녁부터 ‘빈방 없음’이라 써 붙이고 카운터가 잠든 이유를 알겠다. 프로야구시대를 만끽하며 자란 젊은 부모들이 제 자식도 그리 한번 키워보고 싶은 욕심도 담겨있으리라. 

강 건너 불구경인가, 벼랑 끝으로 가는 타이어
대풍교를 지나니 자전거길은 산으로 올라붙는다. 강둑길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그렇게 밖에 갈 수 없는 지형이다. 섬진강자전거길의 수려한 쉼터 ‘향가유원지’다. 제법 긴 터널(384m)과 목재 데크를 깐 다리로 강을 건넌다. 자전거로 누리는 굉장한 호사다. 담양·순창과 전라선 남원을 이어 물산을 실어 나르려던 일제의 철도공사는 8·15 광복으로 정지화면이 되었다. 70년 세월이 흘러서야 자전거에게 큰 선물로 돌아왔다. 

큭 웃음이 터져 나오는 동네이름 ‘대가리’를 떠난다.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大佳里)가 향가유원지의 문패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제 동네 이름 바꿔달라는 사람도 없다. 남원 대강에서 강 건너는 곡성 땅이다. 옥과천이 합류하고, 입면농공단지가 펼쳐져 있어 사람 사는가 싶은 동네인데 어두운 그림자 하나 선명하다.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이다. 

적자 2000억을 기록한 금호타이어의 운명이 바람 앞 등불이다. 아무도 맡으려하지 않는 금호타이어를 중국의 ‘드블스타’가 다시 입질하고 있다. ‘먹튀’한 쌍용이나 GM대우 꼴 날거라고 노조는 철탑위에 올라가 ‘해외매각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더는 못 붓겠다. 작자 나섰을 때 팔자.”는 채권단에 “총파업을 앞당기겠다.”며 노조도 완강하다. 유일한 방산업체 금호타이어의 기술유출은 어떡하나. 연평균 임금상승률은 13%인데 시장점유율은 떨어진다. 갈 데까지 가보자면 그 끝은 법정관리와 청산절차라는 절벽이다. 진짜 ‘강 건너 불구경’을 해야 하는 자전거 페달이 무겁다.
 

남원 대강면에서 금지면에 이르는 이십리 길은 섬진강변에 귀한 숲길로 독특한 풍치를 자랑한다(남원 대강)

 

늙어 쓸모없어진 금곡교. 남원과 곡성을 이어주는 다리다. 전북과 전남의 경계이기도 하다(남원 금지)

 


강변 숲길 산 그림자, 곡성까지 20리
13번 국도를 끼고 섬진강은 크게 한번 허리를 비튼다. 신덕수변생태공원과 강 건너는 제월수변생태공원이다.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들면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호젓한 강변 숲길은 좀해서 만나기 힘든 풍경이다. 큰 강일수록 넓은 습지나 아니면 둔치가 차지해 시원스럽기는 하나 단조로운 민대머리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곡성 쪽 강 건너 동악산(735m) 줄기가 뻗어 내린 산 그림자가 섬진강을 덮어 거대한 차광막을 드리운 듯하다. 

이 서늘한 이십리 풍경도 전라선 열차를 만나면서 끝난다. 금곡교를 지나면서 금강 뜬봉샘 뒤편에서 발원해 남원 광한루를 지나온 여뀌강 요천(蓼川)이 섬진강에 발을 들여 놓는다. 남원 세전들은 넓고 넓다. 하동포구까지 가야할 길이 먼 사람들은 물길 따라 어울려가고, 곡성을 둘러봐야할 우리는 은퇴한 옛 금곡교를 건너 장산들로 향한다. 섬진강변에 가장 넓은 충적지 평야를 품고 자리 잡은 곡성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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