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담은 정열의 눈빛, 카르멘이 춤추던 거리는 어디쯤일까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태양을 담은 정열의 눈빛, 카르멘이 춤추던 거리는 어디쯤일까 매혹의 안달루시아 지방 중심으로 들어선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론다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는, 투우 원조도시이기도 하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곳이 바로 여기다. 코르도바는 무어인들이 8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첫 수도로 삼은 역사와 문화, 종교의 도시다. <카르멘>이 떠오르는 집시의 땅, 안달루시아에서 두바퀴는 낭만의 해일에 흐느적거린다  

 

해바라기 군락지를 지나며

 

찬란했던 800년 영화(榮華)가 덧없다.
강대하고 화려했던 시절,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맺힌 알람브라 궁전을 뒤로하고 자전거는 북서로 기수를 잡았다. ‘안달루시아의 꽃’이라 불리는 론다를 향해 달려간다. 가는 길에 올리브 나무가 천군만마처럼 끝도 없이 도열해 있다. 열병식이 끝날 무렵 이번에는 해바라기 군락지가 나를 반긴다. 활짝 웃고 있는 해바라기가 북한산 늦가을 낙엽만큼이나 많다. 

해바라기는 애모(愛慕)의 상징이다. 벌써 서울에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 얼굴이 해바라기 마다 박혀있다. 돌아갈 날은 아직 아득한데….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고향생각에 눈물짓던 두보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오버랩 되었다.

 

끝없이 늘어선 올리브나무. 스페인은 양질의 올리브유 생산이 세계적이다

 

론다의 누에보 다리 위에서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론다(Ronda)
론다는 기원전 9세기부터 사람의 주거 흔적이 있으니,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과거 촌락 형성의 첫째 조건은 ‘방어’였다. 톨레도나 세고비아처럼 평야를 눈 아래 두고 고지대에 터를 잡아 식량 자급자족과 적의 방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아룬다’라고 불리었으며, 이슬람시대에는 코르도바 왕국에 속했던 이 작은 도시는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자랑한다.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이 도시의 매력은 좁고 깊은 계곡으로 두 마을이 나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산 넘어 산, 계곡에 계곡이 이어지는 경이로운 모습은 도저히 묘사가 불가능합니다.”  
론다를 사랑했던 독일의 서정시인 릴케는 1912년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대문필가도 이렇거늘 감히 내가 무엇을 쓸까마는, 나의 느낌은 아름답고 로맨틱하기보다는 ‘극적이고 스릴 넘치는 긴박한 도시’라 말하고 싶다. 

과달레빈 강(Rio Guadalevin)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타호 협곡(El Tajo Canyon)위 해발 800여m 높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절벽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도시의 명성을 더해준 것은 바로 누에보 다리(Puente Nuevo)이다.

펠리페 5세 때인 173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3년에 완성된 다리를 보는 순간 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본 교량 중 최고의 미교(美橋)란 생각이 들었다. 다리 밑으로 ‘헤밍웨이 산책로’가 나있어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 만든 위대한 건축물, 그 옛날 중장비가 없었던 시절 절벽과 절벽을 연결하는 이런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경이롭다. 당시 건설 장인(匠人)은 이런 난공사를 위해 평생을 바쳤을 것이다.

 

헤밍웨이 산책로에서 본 누에보 다리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스페인 사정에 정통한 작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역시 론다를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 칭찬했다. 

그는 이곳에 장기간 머무르며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를 집필했다. 소설의 컨셉트는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존 던이 늦은 밤 명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를 듣는다. 사동(使童)을 불러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고 오렴”하고는 곧바로 “아이야, 그만두어라! 그 소리는 바로 나를 위해 울리는 소리려니….”라고 했다.
성공회(English Church)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의 <죽음에 임하는 기도> 중 일부이다.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대륙의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나가면
유럽도 그만큼 작아진다.
땅의 모래톱이 그렇듯
그대 친구들의 영지(領地)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에
어떤 한 사람의 죽음도 나를 그만큼 감소시킨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지 알 필요 없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헤밍웨이는 스페인내전 때, 해외지원군 즉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 소속으로 참전했다. 직접 총을 들고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서 싸웠다. 그는 신념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는 ‘행동파 지성인’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무기여 잘 있거라, 1929년 작>란 소설을 남겼다.

1940년에 간행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7년 5월 말의 토요일 오후부터 그다음 주 화요일 낮까지 3일간을 그린 작품으로, 스페인 내전의 잔학상을 리얼하게 전 세계에 알렸다. 론다 시청 앞 스페인 광장에서 반란군이 파시스트들을 잡아 몽둥이 린치를 가하고는 까마득한 협곡 아래로 던지는 끔찍한 대목도 나온다.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한 흘러간 명화
동명(同名)으로 제작된 영화의 ‘라스트 신’인 다리 폭파 장면은 헤밍웨이가 누에보 다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미국인 스페인어 강사이자 폭약 기술자 조던(Jordon, 게리쿠퍼 분, 그는 헤밍웨이와 ‘절친’이었다)이 현지인 길잡이 안젤모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던은 집시를 주축으로 한 게릴라 부대와 함께 다리 폭파임무를 부여받았다. 반란군의 주력 탱크부대가 통과하는 시점이다. 폭파부터 탈출까지 주어진 시간은 3일. 그 짧은 시간 중에도 파시스트에게 아버지를 잃은 젊은 여성 마리아(Maria, 잉그리드 버그만 분)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삭발 후 성폭행까지 당한 아픈 과거가 있다.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주며 전쟁이 끝나면 미국으로 함께 갈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이 대목에서 순박한 시골처녀 마리아의 명대사 한마디, “제 코가 큰 데 키스할 땐 어떻게 하나요?”가 기억에 남아있다.

조던은 성공적으로 다리를 폭파하지만 철수 도중 적탄에 중상을 당하고 만다. 적군의 부대가 점점 다가오자 조던은 자신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함께 탈출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남게 해주세요! 당신과 함께 남게 해주세요! 나는 당신을 두고 갈 수 없어요!” 울부짖는 마리아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마리아,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요. 당신이 가면 나 또한 함께 가는 것이오. 당신이 있는 곳 어디에나 내가 있어요!”
먼저 짧은 기간이나마 한솥밥을 먹었던 게릴라 동지들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게릴라 리더 격인 집시 여장부 필라에게 절규하는 마리아를 맡겨 떠나보낸다. 

이제 혼자다. 죽음이 임박했다. 조던은 희미한 정신 줄을 붙잡고 적군을 향해 마지막 남은 한발까지 기관총을 발사한다. 마리아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화면 가득 차지한 종(鐘)은 힘차게 울리기 시작한다.

스페인을 너무도 좋아했던 헤밍웨이. 1954년 <노인과 바다>로 노벨상을 받았다. 전직 신문기자로 론다에서 <누구를 위하야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한 장면

 

투우의 ‘원조 도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여기에 있다. 1785년에 문을 열었는데 인구 3만5천의 작은 도시에 무려 5천석 규모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투우장이 누에보 다리건설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스페인에는 이런 말이 내려온다. “안달루시아 남자들은 주말 아침에 성당에 가 미사를 드리고, 오후에는 투우를 관람하고 저녁에는 홍등가에 간다.”

과거엔 동서양 구분 없이 남성위주의 사회였나 보다. 어쨌든 현재 투우의 룰이 여기서 나왔기 때문에 론다를 ‘스페인 투우의 원조’라고들 한다. 이곳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Pedro Romero)는 이 경기장에서 6천여 마리의 황소를 단 한 번의 부상도 없이 죽였다. 믿기 힘든 숫자지만, 이러니 누가 론다를 ‘투우 도시’라 칭하지 않겠는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비상구 없는 도시와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하는 투우는 서로 맥이 통해 있다.

 

론다의 스페인 최초 근대식 투우장에 있는 황소상

 

안동 소싸움이 ‘진짜 투우’다!
스페인어로 ‘투우’는 Corrida de Torros이다. 직역하면 ‘(황)소와 달린다’라는 의미인데 소와 ‘싸운다’는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동물 중 소는 지금까지 우리와 적이 된 경우가 없다. 그 선한 눈망울에는 무한 복종의 암시가 어린다. 그저 성실하게 한번 반항 없이 묵묵하게 인간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서도 한 점 버리는 것이 없다. 오죽하면 ‘밤 까먹은 자리는 있어도, 소 잡아먹은 흔적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소와 달린다’라는 거짓포장으로 소를 화나게 만들고, 소를 마구 찔러 마성(魔性)의 흥미를 유발해 죽음으로 몰아넣는 빌미를 만든다. 광란하는 소를 잠재우기 위해, 혹은 흉기 같은 뿔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소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런 다음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투우사를 등장시켜 열광하는 관중에 화답이라도 하듯 소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우리는 영어의 Bullfight를 번역하면서 자연스럽게 투우(鬪牛)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안동이나 청도의 전통 소싸움 즉, ‘소끼리의 대결’이 진정한 투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번 여행길에 나는 투우장에 가지 않았다. 볼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도 가볼 생각이 전혀 없다.  

과거, 가족과 함께 해외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였으니 오래전 일이다. 이미 결혼해 세 살배기 아들을 둔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니. 여름휴가차 가족과 함께 스페인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본 투우 관람기인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광경이 생생해 최근에 본 것과 진배없이 써내려 갈 수 있다. 당시 마드리드 지사에 주재하던 회사동료가 관광일정을 짜주었다. 마드리드에서 관광 하이라이트는 단연 ‘투우 관람’이라고 했다(그때는 그랬다). 그러면서 스페인을 넘어 세계적 명소라는 모뉴멘탈 투우장(Plaza de Torros Monumental de las Ventas)을 예약해주었다. 동료는 "1년 내내 열리는 것이 아니고 마침 시즌에 온 너는 운이 좋다.”고 했다.

4층 규모의 객석에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축물로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라 모래가 깔린 아레나(Arena) 즉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했다. 좌석은 그늘이 들고 저층이었으니(Sombra) 최고 비싼 S석이었다. 소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지근거리였다.

 

안동 전통 소싸움

 

투우, 그 불평등한 게임
행진곡인 파소 도블레(Paso Doble)가  연주되기 시작하자, 검은 황소가 경기장 모래판에 뛰어 나왔다. 기다리던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고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법석을 떤다. 소는 허둥지둥 경기장을 왔다 갔다 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큰 함성 때문이 아니고, 갑자기 눈가리개를 벗겨 눈이 부시기 때문이다. 경기를 앞둔 4, 5년생 황소는 며칠 전부터 굶기고, 예리한 뿔을 갈아내며 안대를 씌워 빛을 차단해 공포심을 줘 광기를 키운다. 

이때 말을 탄 창잡이(Picador, 삐까도르)가 등장했다. 말이 겁먹지 않게 얼굴은 눈만 보일 정도의 가면을 씌우고, 몸통은 두꺼운 보호대를 둘렀다. 소의 공격에 대비함이다.  창잡이는 소에 접근해 긴 창으로 등, 배 등을 마구 찔러댔다. 그냥 찌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찔러 비틀어 구멍을 내니 터진 상수도 마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불의의 습격에 정신이 없는 이때, 날렵한 작살잡이(Banderillero, 반데리예로) 3명이 뛰어나와 각자 2개씩의 깃털 장식을 한 작살을 박아 넣었다. 작살의 목표는 조금 전 창잡이가 찌른 상처 부위였다. 그리고는 단거리 선수마냥 잽싸게 경기장내 대피소로 숨어버렸다. 

고통스러워 몸부림 칠 때마다 작살들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그럴수록 미늘 같은 작살은 더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검정 소는 검붉은 소로 변했고, 투우장 바닥의 모래는 피로 흥건했다. 내가 보기에는 출혈 과다뿐 아니고 전 장기들이 파괴된 것 같았다. 육중한 체중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리는 흐느적거렸다. 소는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그 아픔만큼이나 출혈량만큼이나 관중들의 흥분도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 가족은 처참한 광경을 차마 응시하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좌석 근처의 어떤 여성은 울음을 터뜨리며 퇴장해버렸다.
소가 모래판 위에서 만신창이가 된지 한 20여분 흘렀을까. 이때 경기의 주역, 투우사(Matador, 마따도르. 스페인어로는 똘레로 torero라고도 함)가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천천히 걸어 경기장 중앙으로 등장했다. 단단한 몸매에 미남배우 같은 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붉은 망토(Muleta, 물레따)를 흔들며 소에게 바싹 다가섰다(소는 색맹이므로 붉은색 천을 보고 흥분한다거나 덤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소와의 춤을…
투우사는 보조자(Peneo, 빼네오)로부터 칼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소의 급소에 칼을 꽂기 전 소와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펼친다. 가급적 몸을 움직이지 않고 슬쩍 소를 피할 때마다 관중들은 ‘올레!’를 외친다. 이때가 투우 경기의 하이라이트인데 스페인 사람 중 투우 예찬론자는 이 장면을 투우사가 소와 ‘춤을 춘다’고 표현한다. “투우는 신비로운 예술이다. 마치 발레와 같다”라고.
경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투우사는 죽음 앞에 정신이 혼미한 소를 노려보며 찔러야할 급소를 찾고 있다. 

관중, 투우사, 소 모두 미동도 없다. 적막이 흐른다. 잘못 찔러 소가 날뛰거나 칼을 떨어뜨리면 낭패다. 일격에 해치워야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고통의 시간을 줄여 소를 위한 마지막 ‘자비’다. 그러려면 소의 목 뒤를 뚫고 들어가 정확히 심장에 칼을 박아야한다. 이 정적의 순간에 나는 투우사가 이렇게 속이는 것만 같았다.

“소야, 움직이지 말고 나를 믿고 도와줘. 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장 영광스런 순간에  숨통을 일격에 끊어줄테니까”라고 말이다.
순간 마따도르의 칼은 손잡이만 남기고 소의 몸에 세차게 파고들어갔다. 무릎을 꿇은 소는 피를 토하며 아름드리 통나무 쓰러지듯 옆으로 뒹굴었다. 아레나의 주인공 마따도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관중의 환호에 답했다. ‘불평등의 극치’… 한 게임이 끝난 것이다.

곧이어 말 탄 삐카도르들이 이번에는 비무장(?)으로 다시 등장해 죽은 소를 끌고 나갔다. 그다음 밀대를 든 사람들이 ‘다음 소’를 위해 피 묻은 모래를 치웠다. 이런 식으로 6마리의 소가 죽어나가면 투우장의 하루 경기는 모두 끝이 난다.

스페인의 전통문화인가, 동물학대의 유혈극인가!
투우는 고대 종교의식에서 유래되었다고들 한다. 이 설(說)에 나는 일부 공감한다. 북아프리카에서 ‘피를 뿌리는 의식’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라면 무어인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다.
과거 아프리카 수단에 파견되어 근무할 때였으니 풋풋한 젊음일 때다. 포트수단(Port Sudan)이라는 홍해에 면한 이 나라 유일한 항구도시에 ITMD란 브랜드의 타이어 공장을 지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효자 수출품 1등은 타이어였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아예 여기에다 공장을 지어, 생산품을 아프리카 전역에 공급키로 계획한 것이다. 물론 기술과 원부자재 공급은 전부 한국에서 왔다.

공사 금액이 거금 8천800만 달러였고, 아프리카 땅 최초의 타이어 공장이었다. 홍해 물을 끌어다 담수화 플랜트를 만드는 등 최신 설비의 공장이었다. 그런데 기공식은 고대 종교의식처럼 너무 끔찍해,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수단 대통령을 비롯,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기공식에 초청되었다. 행사 시작 직전에 건장한 수단 사람이 큰 황소를 한 마리 끌고 식장에 나타나, 앞발 뒷발 꽁꽁 묶어 식장 연단 앞에 놓아둔다. 나는 잔치 날이니 행사가 끝나면 잡아서 나누어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잠시 후 이날의 최고 귀빈 대통령이 도착했다. 이를 본 소를 끌고 온 자는 허리춤에서 큰 칼을 빼더니 누워있는 소의 심장을 힘차게 찔렀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소 주위 땅을 흥건히 적셨다. 소는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경련으로 몸부림쳤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선혈 위를 자와파르 대통령이 힘차게 뛰어넘자 참석한 내빈들이 일제히 힘찬 박수를 보냈다. 제주(祭主) 대통령을 위한 박수이자, 행사축하를 위한 ‘피의 의식’이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투우는 스페인의 오랜 전통이자 대표 볼거리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 중엽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소 전문가들이 투우 전용소인 토로 브라보(toro bravo) 종을 만들어 냈다. 세비야에 투우사 양성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고 이때는 연간 4만여 마리의 소가 투우장에서 죽어 나갔다. 카를로스 3세 때 잠시 투우가 금지된 적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투우를 보기위해 스페인을 찾기도 하지만, 실상은 스페인 사람들 중에 투우를 즐기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젊은 층은 15%만 투우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이 EU로 통합되면서, 투우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러면서 80년대 들어 동물 학대와 잔인성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었다. 아레나에 등장한 소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하지만 하루 6마리 중 1, 2마리는 ‘경기 룰을 어겨가며 황당하게’ 죽었다. 이것이 더 비참했다.

내가 본 그날의 경기에서도 한 마리가 마따도르가 찌르려고 자세를 취하려는데, 공포의 눈망울이 커지며 오줌을 쫙 싸더니만 그대로 푹 주저앉아 숨을 거두었다. 머쓱해진 투우사는 그냥 퇴장했고, 우리 가족은 경기장을 나와 다른 관광일정을 취소하고 그냥 호텔로 돌아왔고, 가족 모두 저녁식사도 건너뛰고 말았다.

동물학대와 잔혹함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투우

 

투우장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소 앞에서 오열하는 버지니아 루이스의 모습. 이후 투우 금지 논란은 가속화되었다

 

<워낭소리>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2015년 스페인 어느 투우장에서 작은 해프닝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커져만 갔다. 마따도르에 의해 쓰러져 죽음을 목전에 둔 소를 향해 버지니아란 여성이 모래판에 달려 나와 소를 끌어안고는 통곡을 했다.
“불쌍한 소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마따도르는 어쩔 줄 몰랐고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다. 급기야 버지니아는 투우장에서 쫓겨나고 업무방해죄로 800만 원 가까운 거금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스페인은 물론이고 멕시코나 남미 일부 ‘투우 국가’에도 파장이 미쳐 투우경기 반대시위가 잇달았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일부 투우장만 문을 열뿐, 스페인의 투우 관련 산업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매력적인 관광 상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은 아예 법으로 투우를 금지했다. 이런 추세라면 몇 십 년 안에 지구상에서 투우는 거의 사라지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스페인 신문들은 투우소식을 스포츠나 오락면이 아닌 문화면에 싣는다. 나는 남의 나라 전통문화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할 생각이 없다. 다만 기회가 된다면 나는 이들에게 국산영화 한편을 소개하고 싶다. 2009년 우리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이다. 

한 늙은 농부가 기르던 소 ‘누렁이’와의 40년 우정을 그렸다. 물론 노인은 배우가 아니었다. 소가 늙고 병들어 거의 움직이지 못하자 할머니는 소장수를 불렀다. 죽기 전 다만 얼마라도 건지려고. 헌데 노인은 펄쩍 뛰었다. 마흔 살 소는 노인과 자식 이상의 관계였다. 노인과 할머니의 갈등은 이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이고 내 팔자야! 영감, 그라믄 죽은 소를 우짤끼요?”
“장사지내고 묻어 줘야제. 내가 상주질 할끼구마.”

영화는 스토리가 없으니 반전(反轉)도 없다. 갈등이라면 노부부 간의 말싸움인데, 할아버지가 늘 당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봉화읍내에 나갔던 노인이 약주에 취해 달구지에 잠이 들어버렸다. 소는 달구지를 끌고 수 킬로 떨어진 집까지 잠든 노인을 모셔왔다. 할머니 잔소리에도 노인은 이런 ‘절친’이 있어 행복했다. 
영화가 나를 비롯,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왜일까?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동물사랑 즉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잠재되어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진대, 오락으로 혹은 유희적인 기분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문제다. 그리고 죽여야 할 생명체가 클수록 죄의식을 더 느끼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워낭소리>를 스페인 동물보호협회(ADDA, 동물보호와 투우반대운동을 이끄는 단체)를 통해 투우가 행해지는 모든 나라에 수출한다면 공감을 불러오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워낭소리>의 한 장면. 누렁이가 죽고 얼마 후 최노인도 세상을 떠 그 옆에 묻혔다

 

오렌지 향기 흩날리던 코르도바(Cordoba) 
코르도바는 오렌지가 도처에 널려있다. 공원에도 거리에도…. 많은 도시를 다녔지만 이런 경이로운 광경은 처음이다. 제주도 한라봉처럼 먹음직스럽게 생긴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으니 이 무슨 횡재인가! 그러나 먹을 수는 없는 종이다. 냄새만은 진배없으니 그게 어딘가. 도시 어디를 가도 오렌지 향기가 진동했다. 그래서 지금도 코르도바 하면 메스키타보다 거리에 널린 오렌지가 먼저 떠오른다.

8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교도들은 첫 수도를 이곳 코르도바로 정했다. 메마른 사하라사막에 살던 무어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과달키비르 강(Rio Gudalquivir)이 흐르고 곳곳에 널린 과실수를 보고는 천국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0세기에는 인구가 50만 명으로 늘어났다(당시 런던이나 파리 인구를 3~5만으로 추정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왕국 중심지로 떠오르며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과 어깨를 겨룰 정도였다. 이슬람 사원이 700개, 병원이 50개, 대학이 7개, 그에 따른 도서관도 상당수일 정도로 예술, 문화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

그라나다에 알람브라 궁전이, 세비야에 대성당이 있다면 코르도바에는 메스키타가 있다. 이것은 코르도바의 랜드마크이자 아이콘이다. 정확한 명칭은 메스키타 카테드랄 데 코르도바(Mezquita Catedral de Cordoba)이다. 메스키타란 스페인어로 모스크를 뜻하는데 고유명사로 쓰이면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지칭한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강대했던 무어인들의 찬란했던 시절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압둘 알라흐만 1세는 최대의 이슬람 사원을 지을 목적으로 8세기 중반부터 메스키타를 짓기 시작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듭해 10세기 말에는 2만5천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초대형 사원을 완성했다. 건물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당시 기둥이 1293개였는데 지금은 856개만 남아있다. 이슬람 율법은 예배드리기 전 얼굴, 목, 손, 발 네 부분을 정갈하게 씻어야한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이나 지근거리에 ‘함맘(간이 목욕탕)’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오렌지 정원(Patio de los Naranjos)에는 그 흔적만 미미하게 남아있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는 1492년 그라나다를 먼저 함락하고 바로 코르도바를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메스키타 중앙부를 허물어내고 가톨릭성당을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이민족의 유물을 다 부수고 새로 짓든지 아니면 그대로 보존하고 다른 곳에 성당을 짓든지! 양자택일이 아닌 어정쩡한 절충식을 택한 것은 왜일까.

후에 카를 5세는 이를 두고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라고 탄식했다. 어쨌든 ‘한 지붕 두 가족’의 이 유적은 두 문화(종교)가 혼재한다는 측면에서 또다시 세계 ‘어디에도 없는 건축물’로 자리매김 했다.

 

오렌지향기 흩날리는 코르도바

 

말(馬) 다루기의 명수, 무어인들
내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늘 궁금했던 것이 메스키타 내부의 독특한 아치였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굽형태의 아치 색깔이었다.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백색돌과 적색돌을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짜 맞추어 놓은 것이 아닌가. ‘염료 칠이 아닌가’하는 오랜 의문이 풀렸다. 

말발굽형 아치는 무어(아랍)인의 전유물이다. 말과 함께 이동과 공격의 상징인 자신들의 기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아랍인들은 말(馬)을 잘 다루었다. 몽고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거칠고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말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전쟁을 하고 이동하려면 순종적이고도 영리하며 스피드와 인내력을 갖춘 좋은 말이 필요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품종개량에 힘을 기울여 명마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안달루시안(Andalusian), 서러브레드(Thoroughbred) 등이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는 아랍의 말 상인으로부터 백마 네 마리를 빌어 메살라와의 목숨 건 전차경주에서 승리를 거둔다. 메살라는 쉬지 않고 채찍질을 해대지만, 벤허는 ‘말’로 했다. 말없는 말과 교감한 것이다. 말은 영리한 동물이기에. 네 마리 말은 다 이름이 있었다. 알타이르, 리겔, 안타레스, 알데바란… 모두 별자리 이름이다. 사막이 많은 아랍은 밤에 별자리에 의지해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도 좋은 말이 등장한다. 

당시 세계 2대 도시인 코르도바에는 얼마나 많은 말이 있었을까! 그러면 말가죽도 넘쳐났으리라. 프로스페르 메르메(Prosper Merimee)의 중편소설 <카르멘, Carmen>에서 집시 여인 카르멘을 묘사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카르멘은 세련된 모습에 작은 몸집을 가졌고, 관능적인 큰 눈 속에 때로는 난폭한 빛을 띤다. 이런 여자가 입에 아카시아 꽃을 물고 주먹을 허리에 댄 채 마치 ‘코르도바의 목장에 있는 젊은 암말처럼’ 허리를 흔들며 걸어온다.”
이 소설을 토대로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는 4막으로 된 오페라 <카르멘>을 만들었다. 이 오페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수백 군데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을 것이다.
 

메스키타의 독특한 기둥

 

메스키타내 가톨릭 성단

 


고도방 가죽과 카스테라
과거 우리에게 구두는 사치품이자 부의 척도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착화식(着靴式)이란 말까지 있었다. 물론 공장제품이 아닌 수제화로 패션보다 내구성이 더 중요할 때였다. 그러려면 비싸지만 훌륭한 품질의 가죽이 필요했다.  ‘마카오 신사’까지는 올라가지 않더라도 60, 70년대 멋쟁이에게 ‘고도방 구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말 엉덩이 부분이었는데 한 마리로 겨우 한 켤레만 만들 수 있으니 그 값은 보통 소가죽 구두의 10배가 넘었다. ‘고도방’은 코르도바의 일본식 발음이다. 

유럽 문물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15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도쿠가와 막부정권은 쇄국정책을 지향하며 선교를 일삼는 스페인을 배척했다. 17세기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막부는 종교 대신 ‘비즈니스’에만 전념하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만 나가사키 앞바다의 조그만 섬 데지마(出島)로 국한해 서구를 향한 작은 문을 열어놓았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마드리드 일대 카스티야 지방의 전통 빵이 일본에 와서는 ‘카스테라’가 되듯 이곳 코르도바 산 가죽이 ‘고도방 가죽’으로 굴절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무렵 유럽 상류층이 즐기던 당구(撞球)도 일본에 전해졌다.

관용의 땅, 안달루시아
무어인 지배시대에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유대인도 많이 살았다.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흩어질 때 이교도에 관용적인 이슬람교도들은 이들을 수용했다.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사람들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단, 어느 종교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사회적 혜택은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거리를 형성해 시나고가(Sinagoga,유대교 예배당)를 세우고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기 즉 1492년까지는 이슬람교, 가톨릭교, 유대교가 평화롭게 공존했던 시대였다.

여기 ‘관용의 땅’에 빠질 수 없는 종족이 몰려들어 둥지를 트니 바로 집시들이다. 특히 안달루시아 일대에 많이 모여 들었다. 더위는 ‘없는 자’가 살기에 유리한 점이 많다. 집시의 기원은 인도 북부, 펀잡 일대라는 것이 정설이다. 짙은 구릿빛 피부와 숱이 많은 까만 모발과 눈썹, 무엇보다 강렬한 특징은 맹수 같은 그들의 눈빛이다.

영어권에서는 집시(Gypsy, Egyptian 즉, ‘이집트를 거쳐 온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라 불리지만 유럽, 체코에서는 보헤미안, 헝가리는 치가니, 프랑스는 지땅, 스페인은 히타노, 독일은 치고이네르(사라사테가 작곡한 ‘치고이네르바이젠-집시의 노래’를 생각하면 기억하기 쉽다)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그만큼 각 나라에 고루 퍼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동유럽 영주들의 용병으로, 궁정 음악가로 화려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오면서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시들을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몰았다. 잇단 추방령과 인종말살정책으로 이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집시 사회는 지나간 과거를 기록해두지 않았다. 그래서 집시는 언어나 종교, 영토처럼 한 국가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요소가 없으면서 견고한 문화적 구조를 보여주는 독특한 민족이다(그들 고유의 언어 로마니-Romany 어가 있기는 하다). 늘 쫓기는 삶을 살며 되풀이되는 불행한 운명을 견뎌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다.

 

메스키타 경내의 오렌지정원

 

잘 정비된 코르도바의 유대인거리

 

집시, 이들이 살아가는 법
핏속에 흐르는 유랑의 DNA를 타고난 사람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동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노마드처럼 살아가는 집시들, 얼마나 낭만적인가! 얼핏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삶은 현실이다. 이들은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나 땜장이, 동물 조련사, 가축 중개인, 여성들은 일용직 점원이나 손금을 봐주거나 별점 복채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이런 부류는 그래도 성실한 축이다. 많은 집시들이 구걸(갓난 애기를 안고), 좀도둑이나 소매치기, 야바위꾼으로, 젊은 여성이라면 매춘을 하며 손님 물건 도둑질도 하는 ‘투 잡’을 뛴다.

70, 80년대 일본이 먼저 유럽을 휩쓸고 다닐 때 집시는 특수(?)를 맞았다. 뒤를 이어 우리도 집시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사람이나 우리나 유럽에서 주눅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체로 다니면 좀 덜할까, 홀로 여행자라면 거의 집시의 ‘밥’이었다. 당시 유럽 출장자나 홀로 여행자에게 한두 가지 쯤은 집시와의 가슴 쓰린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안 당한 사람이 이상할 정도였으니.

현지 경찰도 단속하지 않았다. 내 느낌엔 거의 방관수준이었다. 한번은 로마에서 경찰에게 집시를 왜 방치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좀도둑이나 소매치기일 뿐 강도치상이나 폭행을 하지 않으니 각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탈리아인이 아니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몸은 무사하더라도, 해외여행 중 지갑이나 여권, 카메라, 배낭 등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황당한가!

강인한 아랍말
영화 <벤허> 중 전차경기 장면
집시여인의 치장

 

‘잠자는 집시여인.’ 앙리루소의 1897년 작품.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와 기타, 물병이 전부다. 무서운 사자가 삶을 위협하지만 자는 모습은 평온하다
과거 집시의 가옥이자 이동수단. 영국을 여행할 때 어느 캠핑장에서 찍었다

 


‘자전거 집시’를 만나다
나는 그간 유럽을 여러 차례 여행하며 ‘집시 대처’에는 이골이 났다. 유럽 대도시에 명소나 관광객이 모이는 유적지에는 어김없이 대(代)를 이어 내려오는 상주(常駐) 집시가 있다. 이를 먼저 파악한 후 관광이든 기행을 시작해야한다. 나는 외국사람 얼굴이나 행색, 어투 등으로 어느 나라 출신인지 혹은 어떤 인종인지, 나아가 집시인지 아닌지 이제야 좀 감이 온다. 다년간의 노하우가 쌓이지 않으면 분별하기 힘들다. 

집시에 대한 나의 오래되고 나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뉴질랜드 남 섬을 여행할 때 찾아왔다. 태즈먼 국립공원 내 마라하우(Marahau)란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골든 베이(Golden Bay)의 포하라(Pohara)는 해안 경관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 곳으로 가는 방법은 배를 타거나, 내륙 길로 한참을 돌아가는 것이다. 배를 타려니 요금이 무려 50달러나 되었고 심지어 자전거도 사람과 똑같은 요금을 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며 항의하고 있었는데, 한 솔로 바이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봐, 친구~ 돈 들여 배 타고 갈 것 없이 나랑 자전거로 슬슬 구경이나 하면서 저 언덕 넘어 함께 갑시다!”라고.
보아하니 10년도 넘었을 듯한 낡은 자전거에 초라한 행색이었다. 헌데, 그의 유쾌한 표정과 지적인 목소리, 유창한 영어는 사람을 끄는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나는 흔쾌히 동의하며 통성명을 했다. 그의 이름은 게르하르트, 오스트리아에서 온 ‘집시 자전거 여행가’였다. (아니 집시가!) 몸에 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아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때 그는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집시 집안에서 자랐지만, 전기 기술자로 공사 현장에서 돈도 번다. 이번 뉴질랜드 여행을 위해 두 달을 열심히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말을 듣자 선입견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솔직하고 순수해보였다.
자전거와 건설의 유유상종, “나도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며 우리는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안장에 올랐다. 

게르하르트, 이 남자의 생존 자전거 여행
한참을 달리던 그가 뭔가를 발견하더니 길가에 자전거를 세웠다. “오늘 횡재했네! 내 점심은 이거야!” 그러더니 길가에 무성하게 자란 야생 블루베리를 따기 시작했다(힘든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끼니를 저런 걸로 때우다니…).

“쉬었다 갑시다.”하며 풀밭에 앉아 내가 즐겨먹는 ‘또르띠야(통밀전병)’와 캔 소시지 등을 권했다. “그 블루베리는 디저트로 먹읍시다.” 하니 그는 파안대소했다.  

씻지도 않은 야생 베리를 같이 나눠 먹으며 그는 ‘생존 자전거 여행의 방법’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한 달 넘게 여행하는 동안 잠은 텐트에서 자고, 끼니는 대형 마켓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공짜 식품이나, 과수원의 낙과, 야생 열매를 먹었다. 그래도 체력엔 전혀 문제없고 더 건강해졌다.”며 여기서 겨울을 나고, 유럽이 따뜻해지는 4월 말쯤에 스페인으로 갈 예정이라 했다.

“당신 자전거가 내 전 재산보다 더 무겁네!”
포하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폭양 아래 오르막만 16km인 타카카 언덕(Takaka Pass)! 배 요금이 왜 그렇게 비쌌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런데 문제는 언덕이 아닌 상처받은 자존심이었다. 집시가 너무 빨리 달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그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같이 출발하곤 했지만 보조를 맞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 내 자전거는 낡고 무거운 그의 것에 비해 XT와 XTR을 조합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었다. 짐 가방 또한 1시간 폭우에도 견디는 유명제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괴나리봇짐 같은 허름한 쇼핑백 두 개가 전부였다. 

잠시 쉬는 시간에 그는 자전거를 들어보며 “이야! 내 전 재산보다 무겁네!” 하며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 이야기를 했다.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온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땐 빈손이란 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네." 그리고는 “친구, 마지막 갈 때도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갈 건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내지~” 하며 껄껄 웃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물론 내색은 않았지만, 좀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한 마음 한켠에선 ‘그게 말처럼 쉬운가? 당신은 집시니까 그렇지, 집시가 꽤나 유식하네…’ 하는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포하라에 갈 때까지 10kg짜리 내 배낭을 그가 대신 메고 달렸다. 그 덕에 보조를 맞춰 목적지에 함께 도착할 수 있었다. 헤어질 땐 섭섭해, 여벌의 옷과 견과류, 통조림을 건넸다. 그는 “고맙지만, 그냥 받을 수 없으니 복채로 생각하겠다. 원래 집시는 점술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다.”며 나의 별점(horoscope)를 봐주었다. “친구는 처녀자리(Virgo)이므로 매사에 완벽을 추구해 실패가 없다. 그러나 심신이 고달프다”고 해서 나는 “어느 정도는 맞다”고 동의해주었다. 물건을 그의 괘나리 봇짐에 넣어주고는 힘찬 포옹으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시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는 ‘사람을 외모나 소유의 유무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아무 가진 것 없는 그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이었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 잘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언제고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것저것 가져온 짐들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꼼꼼한 게 아니라 욕심과 집착의 한 단면이었다. 인생의 짐도 마찬가지 아닐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굴레를 만든다. 그만큼 내가 누릴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 세상 길바닥에서 터득한 나의 ‘도철학(道哲學)’이다. (다음호에 계속)       

협찬 :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포메라스포츠, IL인터내셔날

 

뉴질랜드에서 만난 자전거 집시족 게르하르트. 윗도리는 낡아 구멍이 나 있지만 표정만은 부자 저리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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