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만발한 네덜란드 풍차가 여기에?! 외딴섬 바닷가의 몽환경

신안 최북단에 자리한 임자도는 광활하고 한적한 대광해변이 섬 전체 해안선의 1/4이나 될 정도로 장대하다. 대광해변 초입에 조성된 튤립공원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원색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튤립축제에 맞춰 찾은 대광해변에서, 한편 꽃에 취하고 한편 파도에 취해 세속의 시름을 잊었다. 전장포를 향해 백사장에 남긴 두 줄기 기나긴 바퀴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글·사진 김병훈(본지 발행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백사장, 인적은 물론 인공의 소음이란 완벽하게 단절된 해변, 겹주름으로 밀려드는 대양의 파도, 말갛게 씻긴 맨얼굴을 드러낸 무인도의 무질서한 열병…. 말문이 막히고 눈이 믿기지 않아 한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후 그 바닷가는 내게 동경의 풍경이 되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슬며시 눈을 감으면 환상처럼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지곤 한다. 현실에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은 일상의 권태와 압박을 견딜 수 있는 사소하지만 넉넉한 여백이 된다. 그곳은 바로 신안 임자도 대광해변이다.

잊지 못할 광막한 해변

추억과 동경의 무대로 뇌리 바닥에 배경지처럼 잠겨 있는 그런 바닷가 풍경은 내게 몇 곳 더 있다. 태안 몽산포, 비금도 명사십리, 영덕 고래불도 내게 그런 해변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몰려들고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들 해변에서 적막감은 많이 퇴색했다. 그나마 섬으로 동떨어져 있어 한적한 자연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임자도 대광해변과 비금도 명사십리다. 둘 중에 좀 더 마음이 가는 곳은 대광해변이다.

이름은 조금 촌스럽지만 대광해변은 말 그대로 크고 넓다. 국내최대 해변에 대해서는 설이 여럿 있는데 관광객 수와 지명도에서는 단연 부산 해운대지만 백사장 규모는 강릉 경포대를 중심으로 북쪽 사천해변에서 남쪽 안목해변까지 약 10km에 달하는 해변이 가장 길다. 하지만 백사장 폭이 50~60m에 불과해서 광막한 느낌은 떨어진다. 태안 몽산포는 길이 7km에 최대폭 600m의 광활한 백사장을 자랑하고 ‘꿈의 산 포구’란 이름부터 매혹적이다. 임자도 대광해변은 흔히 ‘30리(12km) 백사장’이라지만 실제는 7km 정도이고 최대폭은 약 200m이다. 길이와 폭, 외딴 섬의 고적한 분위기까지… 현장에서 육안으로 보는 광막함은 대광해변을 국내최고로 꼽고 싶다.

임자도는 외지인에게 생소하지만 해변의 화원에서 펼쳐지는 튤립축제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튤립축제는 12만㎡(약 3만6천평)의 바닷가 구릉지에 똘망똘망 색색의 선명한 꽃을 피워낸 300만 송이의 튤립이 이국적인 동화의 나라를 이룬다. 꽃밭 중심에는 새하얀 풍차가 서 있어 어느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을 뚝 떼어온 것 같다.

10여년 만에 임자도를 다시 찾은 것은 4월 중순에 열리는 튤립축제에 맞춰 대광해변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속의 심사가 어지러워 동경의 무대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꽃밭의 마력

1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에서 임자도는 최북단에 자리한다. 그러고 보면 신안은 보통 넓은 것이 아니다. 육지와 가까운 섬 무리만 봐도 임자도 북단에서 남쪽의 신의도 남단까지 직선거리로 70km나 되고 남서단의 가거도까지는 150km가 넘는다. 자동차로 임자도에서 신의도로 가려면 승선시간을 포함해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신안의 바다 면적은 전남의 육지 면적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기초단체 중에서 가장 광대한 영역이다.

서울에서 임자도로 가려면 무안을 거쳐 해제반도와 지도의 구릉지를 한참 지나야 배가 출발하는 점암선착장에 닿는다. 올해 튤립축제는 4월 11일부터 22일까지 12일간 열렸고, 일행이 찾은 것은 12일 평일인데도 점암선착장에는 차량이 긴 줄을 섰다. 뜻밖에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거대한 연륙교(임자대교) 공사가 한창이다. 2013년에 착공되어 2020년 9월 완공예정이란다. 사장교와 현수교로 이뤄진 두 개의 해상교량만 1.92km에 접속도로 3.07km를 포함해 총연장 4.99km의 대역사다. 이제 임자도의 외딴섬 운명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10여년 전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점암선착장에는 허술한 가게 몇 곳만 있고 수도와 임자도는 낙도 분위기가 완연했지만 이제 상전벽해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선착장에 기대 사는 사람들, 배를 운행하는 사람들은 2년 뒤 어떻게 될까. 디지털혁명뿐 아니라 오프라인혁명도 오지에 격변을 만들고 있다.

임자도는 놀랄 만큼 깨끗하고 산뜻해졌다. 원래는 깨가 많이 나서 깨의 한자명인 임자(荏子)를 따서 섬 이름이 되었지만 지금은 온통 대파밭이다. 대파 농사로 소득이 높아 임자도는 신안에서도 가장 부유하다고 한다. 그런 여유와 풍족을 바탕으로 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절박하고 다급할 때 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공으로 조성하긴 했지만 쨍할 정도로 선명한 원색의 대향연 앞에 눈과 마음은 저절로 정화되어 차분하면서도 설레는 무드에 빠져든다. 단아한 그릇 모양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몸매로 발산하는 빨강, 노랑, 분홍, 주황, 보라 빛의 원색은 먹구름 아래서도 화사하고 강렬하다. 외곽에는 유채밭까지 샛노랗다. 하얀 풍차를 중심으로 수십겹의 동심원을 이룬 꽃밭은 동화의 무대에 들어선 듯 비현실적이다. 이런 꽃밭에서는 아무리 포악한 악인이나 큰 걱정거리를 짊어진 우울증 환자라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와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만사가 귀찮고 울적할 때 꽃밭은 시각을 통한 치유제가 된다.

꽃밭 너머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진 바다가 원경으로 편안함을 더해준다. 해변의 꽃밭은 매력 정도가 아니라 은근한 마력이다.

무인지경의 백사장 라이딩

튤립공원은 대광해변 남단 초입에 조성되어 있고 주변 해변만 사람들이 보일 뿐 북쪽으로 1km 지점에 돌출한 산자락만 돌아서면 무인지경의 광활한 적막강산이다. 물에 살짝 젖은 백사장은 단단해서 바퀴는 얕은 자국만 남길 뿐 페달링이 가뿐하다. 안장 위에서 살갑게 밀려드는 파도와 술래잡기를 즐기며 백사장을 북상한다.

기나긴 해변은 직선과 곡선으로 거듭 형상을 바꾸며 섬의 북단까지 이어진다. 비금도와 마찬가지로 임자도도 막 비상하는 새의 날개 모양인데 비금도가 독수리 날개라면 임자도는 갈매기를 닮았다. 크기마저 비슷한 두 섬은 신안의 섬 무리를 서쪽으로 이끌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지도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육지에서 꼭 붙들어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중국의 산동성쯤으로 가버릴 것 같만 같다. 착착 들어서고 있는 연륙교, 연도교는 섬무리의 탈출을 막는 일종의 결박이다.

대광해변이 끝나는 북단에서 동쪽끝 전장포 사이에는 100~300m 정도의 초생달 같은 작은 해변이 줄줄이 숨어 있고, 내륙은 온통 대파밭이다. 휴양과 일상이 근접해 있으니 경계는 무너지고 서로를 쉽게 넘나든다. 외지인에게는 아득히 먼 이 경계를 일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축복이다.

뭔가 극적인 사연이 깃들었을 것만 같은 전장포는 한때 새우젓 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냉장고가 보급되기 전, 신선한 상태로 새우젓을 숙성시키기 위해 주민들은 포구옆 솔개산에 길이 100m, 높이 2.4m, 폭 3.6m의 토굴 4개를 파기도 했다. 임자도 주변은 작고 하얀 백화새우의 서식지여서 한창 때는 전국 새우젓 수요의 70%를 생산했다. 특히 5월과 6월에 잡히는 살찐 새우젓은 ‘오젓’ ‘육젓’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금도 육젓은 일반 새우젓보다 4배나 비싸다.

진리선착장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뒤늦게 추수중인 대파밭을 만났다. 밭고랑에 퍼질러 앉아 파를 정리하는 여인들의 명랑하고 왁자한 소리가 흥겹다.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 밭고랑으로 들어섰더니, 이럴 수가…! 여인들이 나누는 말은 중국어였다. 인력이 부족해 중국인이 단체로 와서 일을 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신쿨러, 시에시에!”(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하고 중국어로 인사했더니, 와~ 하고 웃음이 터진다. 설마 임자도가 벌써 산동반도로 옮겨온 것은 아니겠지….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북무안IC에서 점암선착장까지는 약 35km 거리. 선착장에서 매시 30분 임자도 진리선착장 카페리가 운행한다. 15분 소요, 편도 3200원, 승용차 2만원. 진리선착장에서 대광해변까지는 약 6km이며 식당과 가게는 진리 면사무소 주변과 대광해변에만 있다. 숙박업소는 대광해변뿐이다. 진리선착장~대광해변~해변 라이딩~전장포~진리선착장 구간은 약 28km, 남쪽의 검무산과 해안길을 포함하면 50km 정도의 코스가 되지만 서두르면 서울에서 당일 코스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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