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생폼사!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아니) 다치기 전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나에게 무심했다. 사실 나는 그가 환갑에 얻은 단짝이다. 그것도 일본 도쿄까지 유학 가서 큰 손으로 더듬더듬 깎아 만든 생애 첫 자작 연인이다. 
MTB 취향인 그지만 자전거학교의 과제가 로드바이크여서 벌레 씹은 것 같은 물컹함이야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쓱싹쓱싹 그의 땀으로 A 등급은 받았지만 싸구려 200엔짜리 다이소 페인트를 뒤집어쓰고는 뼈대만 앙상한 채 3년을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며 살았지. 애고 내 팔자야.

세상일은 우연이 운명의 스위치인가 보다. 발정 난 들개처럼 쏘다니던 그의 눈에 어느 날 창고에서 긴 잠을 자고 있던 휠세트 형제가 들키고 말았다. 주민증을 보니 캄파롤로 1984년생이다.
여인의 가냘픈 허리모양 장구통 허브를 보는 순간 조강지처가 떠올랐던 거야. 빈티지? 앤틱?도 아니고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줄여서 레트로! 트롯스타 영웅의 육체에 배호의 피가 흐른다고나 할까. 그래서 ‘레트로 바이크’란다. 순전히 자기 생각이다.
아무튼 나의 은인은 이태리에서 온 바퀴 브라더스라고 할 수 있지.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12단 스프라켓 족이 날아다니는 21세기에 1970년대 8단 스프라켓을 구한다고 동네가 시끄럽다. 하긴 쫄쫄이 6단보다는 훨씬 낫고 카세트 허브시대를 열었다는 8단이라 나름 의미는 있다.
처음에는 갑자기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이러다 제풀에 쓰러지겠지 했지. 근데 나를 초선이처럼 아끼면서 다듬고 들락날락 하면서 좋은 것들을 사와서 이리저리 치장을 해주는 거야. 마침 나의 풍요롭고 귀티 나는 갈색 피부에 걸맞게 긴팔에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싸주고 손목 부분에는 다칠세라 한 번 더 자주색 가죽끈을 둘러주었어. 리벳을 박은 가죽 안장에 그의 문장이 새겨진 가죽 가방도 귀고리처럼 살랑거리고.

 

 

불바를 뒤집어 높게 만든 핸들은 그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세상을 더 도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다운튜브에 붙어 있는 스틱 변속 레버는 내가 손을 길게 뻗어 남들이 눈치 채기 전에 작동시켜준다.
오늘은 황금색 종을 사와서는 내 목에 걸어준다. 머리에는 옛날 포탄 모양의 큼지막한 헤드라이트를 턱하니 달아주네. 그리고 그는 나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
그는 나를 남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을 인텔리로 대우했다.

XTR 체인도 끊어지는 수가 있나보다. 우리의 허니문을 와장창 깨뜨린 건 천호대교였다. 대교 갈림길 좁은 틈에 나의 하이 휠이 끼면서 가차 없이 나가 떨어졌다. 나는 털털 털고 일어났지만 그는 날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쇄골이라는 어깨뼈가 부러져 수술을 해서 쇠못도 박고 3개월 라이딩 금지 딱지도 받았다. 
내가 미안하다. 나는 두려웠다. 모처럼 찾아온 사랑을 이번 사고로 잃을까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라는 자책의 회초리도 아팠다.
허나 그는 역시 나의 남자였고 위기에서 기회를 정제할 줄 아는 멋진 NOM이다. 54T 큰 체인 휠이 펜타곤 체인 커버로 바뀐 것도 이 즈음이다. 그리고 원망은커녕 오히려 나에게 이름을 선사해주었다. 
쇄골은 빗장뼈, 그리고 빗장수비는 이태리 축구의 카테나쵸(Catenaccio)! 앞으로 잊지 말고 방어 라이딩 하자구요! 부러진 어깨뼈가 어쩌다 이태리까지 날아가게 되었는지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나의 이름은 카테나쵸다. 카테나쵸!

지프를 몰면 밀리터리 룩을 걸치고 세단에 오르면 정장을 차려 입는다 했는가. 자기가 무슨 유명 선수인양 민망 쫄바지에 요란무쌍 저지로 무장하고 라이딩 하던 그가 변하고 있다.
세월과 맞짱뜨면 주름이 패이고 세월을 안아주면 분위기가 생기는 걸 눈치 챈 그다. 이제 그의 자전거 철학은 ‘속력보다는 품격! 기력보다는 기품!’ 시쳇말로 ‘폼생폼사’다.
그래서 그는 격조 있고 우아한 나와 어울리는 패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전거가 신사까지 만들 줄이야. 
좀 더 갖춰 입은 듯 실용적인 트위드 재킷에 플랫 캡 그리고 가죽 장갑, 갈색 앵클부츠로 그만의 시그너쳐를 살리려는 노력에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주변에 그와 같은 사토리얼리스트가 늘어날수록 우리 자전거족이 도시의 풍경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PS : 얼마 전 타계하신 숀 형의 명복을 빈다. 그의 인생 멘토이자 ‘자전거를 사랑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영원히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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