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와 지브롤터에 서서… 전쟁만이 세계사를 바꾸는구나!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트라팔가와 지브롤터에 서서…  전쟁만이 세계사를 바꾸는구나!

집시여인이 혼을 다해 추는 플라멩코는 나의 숨을 멎게 했다. 정열의 춤사위에 이끌려 그 옛날의 추억도 주마등처럼 함께 흘렀다. 이제 스페인 남서해안을 따라 나폴레옹의 꿈이 무산된 현장, 트라팔가 등대 앞에 선다. 조금 더 내려가면 내 젊은 시절을 바친 ‘제의 2고향’ 아프리카가 육안으로 보이는 지브롤터 해협이다. 지브롤터 언덕에 오르는 것은 거인이 되어 지구본을 밟고 서는 것과 같다. 발 아래로 두 대양, 두 대륙이 펼쳐지고, 어느 바다 어느 땅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은 폐부 깊숙이까지 파고 든다  

UpperRock에서내려다본 까마득한 환상도로

 

나라마다 고유의 자랑스러운 춤이 내려온다. 그중 스페인의 플라멩코도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낄 것 같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무어인의 지배시절부터 관용의 땅으로 알려졌다. 이슬람교는 물론 가톨릭, 힌두, 유대교… 모두 포용할 때 많은 집시들이 흘러 들어왔다.

코르도바(Cordoba)를 떠나기 전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유랑의 피, 대를 이어 내려오는 희망 없는 삶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표출했다. 이 춤이 스페인 전통 춤으로 인정받은 것은 오래전이 아니다. 그만큼 긴 세월 음지에서 살아오던 집시들은 이제 정식으로 ‘양지’의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된 희망이었다. 눈앞에서 집시가 추는 플라멩코를 보는 것은. 집시에게 일조(一助)하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이 춤, 플라멩코를 보지 않고서는 코르도바를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춤
집시는 천부적으로 음악적 소양을 타고났다.
내가 즐겨듣는 ‘지고이네르 바이젠(Zigoiner weisen, 집시의 노래)’은 집시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무곡(舞曲)을 바탕으로, 1878년 파블로 사라사테가 작곡했다. 세계적 피겨 선수들도 경기중 즐겨 채택하는 곡이기도 하다. 도입 부분은 느리고 왠지 마음이 착 가라 앉는 선율로 시작되다가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빠른 리듬이 전개되면서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가 펼쳐진다.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5번’ 역시 헝가리 전통음악이 아닌, 그곳에 정착한 집시들의 음악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음악이 있다면 춤이 빠질 수 없다. 플라멩코의 원천은 집시였다. 애조 띤 집시 음률에 맞춰, 무희가 정열적으로 온몸을 흔들어댄다. 그 이름조차 불꽃 또는 열정을 뜻하는 플라마(flama)에서 왔다. 손가락에서 발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란한 몸놀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멎을 정도로 집중력을 끌어낸다. 

‘영혼을 울리는 춤’이란 말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인데, 주인공 캐롤 베이커가 집시들과 함께 격정적으로 추던 플라멩코는 아직까지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올드팬이라면 혹시 이 영화를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번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영화의 무대였던 수녀원을 찾아보리라 계획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춤추는 집시여인
표정도 플라멩코의 중요한 일부
표정도 플라멩코의 중요한 일부


추억의 스페인 영화 <기적, The Miracle>
“때는 19세기 초, 장소는 마드리드 인근의 ‘미라플로레스 수녀원.’
어느 봄날, 테레사 예비수녀(캐롤 베이커 분)가 살고 있는 수녀원 인근에 나폴레옹 군대에 맞설 영국군대가 잠시 주둔한다. 이때 테레사의 눈에 띈 젊은 꽃미남 장교 마이클 대위(로저 무어 분)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테레사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마이클 역시 청순한 ‘성(聖) 처녀’ 테레사의 매력에 빠져든다. 선남선녀가 만났으니 불꽃이 튈 수밖에. 마침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부상을 입은 마이클은 수녀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테레사는 마이클을 극진히 간호하며,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기도 때문이었을까 마이클은 건강을 되찾았고, 수녀원을 떠나야할 시간이 왔다. 짧은 기간 싹튼 사랑의 감정을 뜨거운 키스로 석별의 정을 나눈다.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테레사는 뜨거운 피를 주체 못해 파계(破戒)를 결심, 마이클을 찾아 수녀원을 떠나고 만다. 이때 수녀원에서는 성모 마리아상이 사라지는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 이는 영화에서 던지는 암시, 불길한 징조다.

테레사는 마이클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다 집시들과 유랑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타고난 노래와 춤의 재능이 있었다. 호구지책으로 집시와 손을 잡고 시작한 춤과 노래가 스페인은 물론 전 유럽에서 반향을 불러왔다. 그간 그녀의 미모와 가창력, 춤에 반해 프러포즈하고 사랑을 나눈 뭇 남자들이 있었다. 헌데 이 남자들이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로 종말을 맞이했다. 테레사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고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다.

그러던 중 테레사와 마이클은 워털루 전투를 목전에 둔 시기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렸던 만남인가! 인고의 시간 동안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처절한 춤, 플라멩코였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웰링턴 장군 휘하의 마이클 대위는 나폴레옹 군과의 치열한 전투도중 대포가 말발굽 아래서 터지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 기적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테레사는 크게 깨닫는다. 자신은 운명적으로 ‘종교에 귀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마이클이 청혼하지만 테레사는 눈물로 거절한다. 이는 ‘속세’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과거 몸담았던 수녀원을 향해 길을 떠난다. 수녀원 일대는 그녀가 떠난 이후 4년 동안 한 방울 비도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져있었다. 

돌아온 탕녀, 수녀원에 들어가 제단에 엎드려 눈물로 참회의 기도를 올린다. 이때 사라졌던 성모마리아 상이 어디선가 나타나 원래자리에 놓여진다. 그리고는 자애로운 눈길이 엎드린 테레사를 응시하는데, 성가가 울려 퍼지며 단비가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신다. 강복(降福)으로 수녀원과 마을은 평화로웠던 지난 시절로 돌아간다.

노마드 인생
실제로 미라플로레스 수녀원(Miraflores Convent)에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종교색 짙은 영화였다. 종교영화는 대개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종교의 숭고함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벤허나 십계만큼의 대작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왔다. 나는 이 영화를 춘천에서 군복무 할 때 ‘소양극장’에서 보았으니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 그 시절 춘천에서의 일들….
플라멩코는 의식의 흐름을 타고 지난날의 향수를 불러왔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공지천, 그 호수에서 같이 보트 타던 아가씨는 지금 어디서 늙어가고 있을까. 겨울이면 얼음판으로 변한 그 호수에서 스케이트 타며 앞날을 설계하던 친구 최인환 군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스페인 여행기를 마무리할 무렵, 어디론가 또 떠나야만 할 것 같다. 아마 나에겐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쯤 섞여있는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본능과 질서에 채워진 족쇄를 풀고 삶을 사랑하며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했다. 이 말을 확인하기 위해 에게해에 떠있는 크레타 섬에서 영면하고 있는 그의 묘소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묘비에는 역시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라고 씌어 있었다. 묘비명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의 거울이다. 

“밥값 생각하면 춤은 덤이요”
춤의 본고장에 왔으니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묵었던 호스텔 데스크에 “값이 적당하고 춤을 잘 추는 집시 무희(舞姬)가 있는 곳 좀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빙그레 웃고는, 그럼 “'타블라오'로 가시지요”라고 했다. 타블라오(tablao)란 스페인어로 ‘멍석(을 깐다)’을 뜻하는데 우리식 표현은 ‘극장식 식당’이다. 말하자면 식사하며 감상하는 소규모 공연장이다.

물론 마드리드나 세비야 등에는 수백, 수천 석 규모의 플라멩코 전문 공연장이 있기는 하다. 남녀 춤의 고수들도 많을 것이다. 코르도바는 작은 도시여서 크고 작은 타블라오가 몇 군데 있을 뿐이다. 그가 추천한 곳은  ‘파티오 데 라 후데리아(Patio De La Juderia)’로 “그 집은 식사도 훌륭하다”면서 ‘식사와 姬’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밥값 생각하면 춤은 덤”이라며 웃었다. 그는 나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차린 머리 좋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블라오는 예약이 필수다. 호스텔 데스크에서 모든 예약(식사 종류 및 음료까지)을 마쳤다. 가격은 30유로. 생각만큼은 비싸지 않았다. 

극장식 식당 ‘파티오 데 라 후데리아’에서
상호가 말해주듯 타블라오는 유대인 거리(La Juderia)에 있었다. 예로부터 코르도바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AD 73년 팔레스타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대거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몰려올 때부터였다.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관용의 무어인들이 통치하고부터 유대인들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1492년 레콘키스타(Reconquista,가톨릭의 국토수복) 이후 이들은 정든 땅을 또다시 떠나야만했다.

타블라오는 ‘파티오’ 안에 있었다. 파티오(Patio)란 스페인어로 ‘위쪽이 트인 건물 안의 정원’이란 뜻이다. 아랍의 영향을 받은 건축양식인데, 이 타블라오를  굳이 우리말로 하면 ‘유대인의 정원’이 될 것이다.
제법 큰 정원에 작은 목조무대를 향하여 1층에 4인용 테이블 10개가 놓여있다. 2층 발코니 3면에도 10개. 최대 수용인원은 70~80명 될 것 같다. 

플라멩코 감상은 밤이 제격이다. 태양이 없는 동굴이 분위기를 더해 준다. 원래 이춤은 그라나다 알바이신 언덕과 사크로몬테 언덕 동굴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안달루시아 정착 초기, 집시들이 그곳 동굴에서 살았다). 

나는 일찌감치 가서 무대 바로 앞에 자리했다. 공연시간인 8시30분이 되니 50명 정도는 되어 공연을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한 명의 무희와 3인의 악기 연주자(남자, 이중 한명은 가끔 무희와 파트너가 되어 춤을 췄다)가 무대에 올라와 인사를 했다. 예상대로 무희는 퇴기(?)로 40대 후반에서 50초반 정도로 보였다. 영화 속 캐롤 베이커를 기대했던 나의 소박한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데… 그 오해가 풀어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 <기적> 의 캐롤 베이커
<기적> 의 한 장면. 4년만의 재회
넬슨의 기함, 빅토리아호
넬슨. 그는 젊은시절 전투에서 한 팔을 잃었고, 눈도 하나 잃었다
넬슨이 사랑했던 엠마 해밀턴. 처음엔 영국정부도 상속권 인정을 거부했다. 기함에서 부관에게 유언도 했건만


‘안달루시아의 영혼’ 플라멩코
춤이 시작되자 무희는 눈을 감은 듯 지긋이 내리깔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얼굴에는 굴곡진 인생의 회한 같은 슬픔이 감돈다. 존재의 슬픔, 고단했던 삶의 역정 혹은 흘러간 사랑의 아픔일지도 모른다. 나는 차라리 나이 지긋한 무희가 집시의 한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또 하나, 힘차게 돌아가는 중년여인의 풍만한 S 라인 엉덩이는 뇌쇄적이었다. 스페인 여행 중 처음으로 강렬한 성욕을 느꼈다. 그간 외로웠나보다. 외로울 때 인간은 성욕을 더 느낀다고 프로이트는 이미 설파했지 않는가.

남자들의 반주와 노래 톤이 올라가자 무희의 춤은 더욱 힘을 받는다. 그녀의 현란한 몸놀림은 나의 기대를 넘어섰다. 살아있는 ‘혼의 플라멩코’를 보여주었다. 바로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큰 콧잔등과 이마엔 땀이 송송 솟아났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내 테이블 위에는 미리 주문했던 먹음직스런 스페인의 전통요리 소꼬리 찜(Rabo de Toro)이 있었지만, 쉽게 손이 가지지를 않았다. 혼신을 다해 춤추는데, 복잡한 꼬리 찜을 썰어 먹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플라멩코는 보통 3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칸테(cante, 노래), 바일레(baile, 춤), 토케(toque, 연주)인데 이날의 무희는 노래 없이, 즉 바일레 플라멩코로 전신은 물론 피토스(손가락 튀기기), 팔마스(손뼉치기), 시피테아토(발구르기)까지 총동원했다. 플라멩코는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된다. 그래서 더 자유롭다.

열정적인 춤사위에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파티오 위로 보이는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케아트레(Que Arte, 이건 예술이야!)! 오트라 오트라!(Otra Otra, 재청이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왔는지 야간공연을 기다리는 많은 관객들이 입구부터 서있다.

‘빛의 해변’을 달리다
아프리카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열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땅, 안달루시아 지방도 이제는 눈에 익숙해졌다. 이 지역은 젊은 날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낸, 아프리카와 멀지않다. 지척의 바다만 건너면 나의 ‘제2의 고향’ 검은 대륙이다. 그곳과 마주한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카디스(Cadiz)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남 스페인의 아름다운 바다를 섭렵하기 위해서다. 

출발지 카디스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일찍이 BC 1100년경 페니키아 상인들이 세웠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물자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관문역할을 했다. 트라팔가 해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가 발진했던 곳이기도 하다. 1812년에 세계 최초의 자유헌법인 라 페파(La Pepa)를 이곳에서 채택했다. 그 후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조선업과 어업, 무역항으로 각광받고 있다. 도시에 진입할 때 우리 서해대교 같은 최첨단 사장교(斜張橋)를 달려 보고는 도시의 역동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 루트를 잡을 때 즐겨 ‘물’을 선호한다. 강은 아기자기한 여성스런 맛이 나 기분이 착 가라앉고, 남성스러운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달리면 모든 시름이 저 바다 멀리 사라진다. 카디스부터 트라팔가를 지나 타리파(Tarifa)까지는 대서양이다. 이 바다의 이름은 ‘빛의 해변(Costa De La Luz)’이다. 트라팔가 곶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리면 나라가 바뀐다. 영국 땅 지브롤터이다. ‘유니온 잭’도 구해야하고. 나라가 바뀌는데 하루 쉬어간들 어떠하리. 

지브롤터 해협(The Strait of Gibraltar)을 지나면 지중해가 시작된다. 그러면 바다이름도 또 바뀐다.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으로. 거기서 더 가면 남프랑스의 절승, ‘꼬뜨 다 쥐르(cote d'Azur)’ 쪽빛바다가 나오고 거기서 또 더 가면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리구리아(Liguria)’ 바다이다. 발음하기조차 힘든 바다 이름의 향연은 인식의 경계일 뿐, 무심히 흐르는 푸른 물결의 경계는 아니다.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그곳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정밀지도에만 작은 글씨로 트라팔가 곶(Cabo de Trafalgar)이 표시되어있을 뿐이다. 관광지는 물론 아니다. 영국인이라면 몰라도, 스페인은 치욕의 역사적 현장을 기념할 이유가 하등 없다. 외로이 우뚝 서 있는 트라팔가 등대만이 전적지 아닌 전적해(戰跡海)를 향해 서있다. 그곳마저도 가는 길이 모래로 덮여 있어 자전거로 가기는 어려웠다. 

인근 마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자전거를 카운터 옆에 맡기고 걷기 시작했다. 아스라이 보이는 등대는 생각보단 훨씬 멀리 있었다. 워낙 바람이 센 지역이라 곳곳에 형성된 사구(砂丘)를 넘어야했다. 맨발이 걷기에 더 수월했다. 이따금씩 몰아치는 일진광풍에 굵은 모래알이 얼굴을 때렸다. 그때도 이런 바람이 불었겠지… 영국함대를 위해서!
1805년 10월 21일, 내가 서있는 이곳 앞바다, 트라팔가 곶.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 33척과 영국함대 27척이 전열을 가다듬고 교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은 국운을 건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전 함대원에게 전투개시를 알리는 메시지를 하달했다. 당시는 무전이 없었으므로 깃발을 올렸다.
“영국은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곧이어 나팔수들의 <영원하라, 영국이여!>, <파리의 멸망>이 힘차게 울려 퍼졌다. 12시경 영국의 기함 빅토리아 호에서 첫 대포가 발사되었다. 계속 포격을 하며 연합함대의 기함 뷔상토르(Bucentaure) 호를 향해 돌진했다. 거기에는 빌뇌브(Pierre Villeneuve, 1763~1806)가 지휘하고 있었다. 적 함대의 중심 깊숙이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전열을 와해시킨 다음 각개 격파하는 전술이었다. 함대원들의 일치단결된 분투정신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전술이다. 하지만 넬슨은 이것이 먹혀들어갈 것으로 확신했다. 그만큼 전 대원들의 사기는 충만해 있었다. 

마침 바람까지도 뒤에서 힘차게 불어왔다. 서로 치열하게 포탄을 주고받았지만,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전세는 기울었다. 이 와중에 기함 바로 뒤에 있던 루드터블 호에서 날아온 총탄에 넬슨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도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5시30분경 연합함대 기함에서 백기가 올라가고, 빌뇌브가 포로로 잡히자 전투는 끝이 났다.
  

좌절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
해상왕국 영국과 육상왕국 프랑스가 바다에서 격돌했으니 영국의 승리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 나폴레옹은 왜 이런 싸움을 걸었을까. 

그는 오만한 영웅 심리에 도취되어있었다. 1803년, 영국이 먼저 프랑스에 대한 평화 협정(Peace Of Amiens, 아미엥 협정)을 깨고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자 정복욕에 불타던 나폴레옹은 바다 건너 영국 침공 계획을 세웠다. 전통적으로 해군력이 강한 영국을 치기위해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 아일랜드 침공 계획 등을 구상했다.

나폴레옹은 영불해협을 몇 시간만이라도 장악하고 영국에 들어가면 쉽게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낙관해했다. 그는 천재적 전략가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해군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영국은 넬슨이라는 걸출한 해군 제독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를 무한 신뢰하는 국가와 부하들이 있었다. 넬슨은 과감하게도 이 해전에서 전통적인 종렬진을 버리고 횡렬진으로 공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전법이 주효해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결과로 나폴레옹의 유럽제패 기도는 좌절되고, 스페인은 유럽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하는 해상강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넬슨, 그는 누구인가
런던 중심가 트라팔가 광장에 높이 56m의 넬슨 탑이 우뚝 솟아있다. 넬슨은 영국 역사상 가장 강한 해군을 창건한 인물로 해전의 영웅을 넘어 ‘국가의 혼’으로 추앙받고 있다. 단순히 적과의 싸움에서 이긴 장수가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신, 조국, 의무 이 세 가지 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 1765~1815)이라는 젊고 미모의 정부(情婦)가 있었다. 혼외자식도 있었다. 남편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것도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 윌리엄 해밀턴 경. 그러나 모두 눈을 감았다. 그의 태산 같은 업적 앞에 불륜은 작은 돌멩이 정도로 격하되었다.
서구인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의도적으로 영웅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커스터 장군도 그렇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자만심에 가득 차, 자신이 이끄는 제7기병 연대 병력이 인디언에게 포위되어 몰살당하고 만다. 미 육군 역사에 성조기와 부대기를 동시에 빼앗기고, 연대장마저 죽은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도 그를 장군으로 진급시키고 영웅으로 만들었다.

넬슨은 목사의 여섯 번째로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해군장교의 꿈을 키웠다. 12살 때부터 해군에 입대해 바다를 익혔다. 해군 대령이었던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양친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후일 트라팔가 전투 마지막 날 기함에서 적탄을 맞아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나는 내 임무를 다했다. 신에게 감사한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의 리더십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감성의 통솔이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부하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을 거쳐 결정했다. 부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자질과 태도는 ‘널슨 터치(The Nelson Touch)’라는 새로운 전술을 창안해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1794년에는 코르시카 섬 해전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는 오른쪽 팔을 잃었다. 기함에서 전사한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프랑스 함대에서 노획한 브랜디 술통 속에 담아 런던으로 운구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특별조항을 만들어 왕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국장으로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거행되었다. 그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숨을 끊은 가슴에 박힌 탄환은 현재 윈저 성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그가 지휘하던 빅토리아 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내 왕립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영원히 기억하리”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유사 이래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국사와 세계사를 배웠지만 ‘전쟁의 역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하기도 싫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은 철칙이다. 그래서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말은 지극히 타당성이 있다. 한 예를 들면 이웃나라 중국을 보는 시각이다.
1952년 겨울, 자유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남침으로 자유통일의 천재일우(千載一遇)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중국은 이런 나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학창시절에 이런 부분을 더욱 철저히 교육한다면 학생들의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한층 고취될 것이다. 

전사(戰史)는 사관생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는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할 때 전쟁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은 거의 들러본다. 특히 6·25 참전 16개국의 경우는 각별하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맞서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국민들을 “조국은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는다.”는 모토로 추념하고 있다.  이름도 처음 듣고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국의 꽃다운 청년들…. 미국과 영국은 물론 ‘프랑스대대’, ‘터키여단’ 그리고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까지! 
뉴질랜드의 수도 오클랜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추모공원에는 내 키보다 큰 참전 기념비석에 한국어로 ‘영원히 기억하리’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두려워 말라”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두려워 말라.” 독일의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Carl Clausewitz)의 말이다. 그는 전쟁을 정치의 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런 극단적인 정치 행위를 할 때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충성과 애국으로 영토사수를 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이런 일은 없겠지만), 일본이 독도에 “우리도 군대를 주둔시키겠다”고 하면 전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든 마찬가지이다. 영토란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많을 수밖에 없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인 원인도 있지만 아직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단일 민족이 둘로 갈라져 있는 것도 큰 요인이다. 

개인도 운명이 존재하듯 국가도 국운이 있다. 누구든, 어느 나라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전쟁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이유로 위정자들은 “전쟁만은 피해야한다”고 강변하지만, 피치 못 할 경우라면 해야 하고, 한다면 이겨야한다. 민족의 사표 이순신은 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必死則生, 必生則死”를 외치지 않았던가.

스위스는 누구나 다 아는 영세중립국이다. 얼마 전 이 나라 국방부장관이 “우리는 육군 56만명, 공군 6만명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이 터져도 700만 국민이 안전하게 한 달 이상 지낼 수 있는 지하대피시설이 구축되어있다.”고 발표했다. 죽음이 두려워 회피한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긍정하고 가까이 할 때 삶이 더 소중하고 진지해지는 법이다. 전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평화는 온다. 

세계 6대 해전
과거 세계의 전쟁은 바다를 통한 세력 확장과 이해의 충돌이 잦아, 무수히 많은 해전이 있었다. 세계사를 잘 살펴보면 꼭 군사 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세계 6대 해전’을 꼽을 수 있다.
발발 시대 순으로 1) 살라미스 해전 2)칼레해전 3)한산도 해전 4)트라팔가 해전 5)쓰시마 해전(혹은 대한해협해전) 6) 미드웨이 해전 등이다. 딱히 정한 기준은 없을지라도, 이 해전들의 결과로 패전국의 운명과 그로인해 세계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경우다.

◈ 살라미스해전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 vs 페르시아의 크세크세스
기원전 480년, 지중해의 도시국가 그리스와 동방의 제국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약 400척의 함대로 약 800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맞아 살라미스 섬의 좁은 바다로 유인, 격파시켰다. 이로 인해 동방의 서구 침공은 좌절된다. 페르시아제국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되는 반면, 그리스는 지중해 패권을 쥐게 된다.

◈ 칼레해전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 vs 스페인의 시도니아 
1588년, ‘무적함대’를 보유한 대제국 스페인과 작은 섬나라 영국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이 싸움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칼레(Calais)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갤리온(Galleon) 선은 단거리에서 포격한 다음 쇠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겨 백병전을 벌이는 낡은 전술이었다. 영국의 해적 왕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이를 대비해 이미 사정거리가 긴 포와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기동력 우수한 배를 투입했다. 게다가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攻)으로 스페인 함대를 모두 불바다로 만든 영국의 압승이었다. 이 전쟁 이후 ‘해가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은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 한산도 해전
이순신(1545~1598, 시호는 충무) vs 와카자카 야스하루(拹坂安治)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 58척(탑승 수병 1만2000 추정)이 일본 수군 73척(탑승 수병 5만8000 추정)을 대파한 전투였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쓴 전법이 ‘학익진’이다. 도주하는 척하며 적선을 유인해, 어느 정도 걸려들어 왔다고 판단되면 뱃머리를 돌려 학이 날개를 편 대형을 유지하며 적선을 향해 접근, 공격하는 방식이다. 이런 전법으로 적선 59척을 대파하고 왜군 4만1800명을 수장시켰다. 일부는 한산도에 상륙하여 솔잎으로 연명하다 뗏목으로 탈출해 목숨을 구했다고 일본 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남해의 제해권을 차지함으로써 적은 병참선이 끊어졌다. 그와 함께 기세도 꺾여버렸다. 한산도 승전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지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왜군은 강화교섭을 서두르는 등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 들었다.

◈ 쓰시마 해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朗) vs 러시아의 로제스트 벤스키
1905년 5월, 러시아 발틱 함대의 노란 마스트가 새벽 안개 속에 위용을 드러내며 대한 해협에 진입했다. 7개월 전, 북유럽 발틱 해 리에파야(당시는 리바우) 항구를 출발해 약 2만5000km를 달려왔으니 수병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인류역사상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군 통수권자는 없었다. ‘홈그라운드’에서 기다리던 도고는 전투개시를 명했다. 이때도 역시 수기를 내걸었다. “황국의 운명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전 수병은 맡은바 임무를 다하라.”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내건 명령과 비슷하다.
도고는 전술 면에서 로제스트 벤스키의 발틱 함대를 압도했다. 종대의 발틱함대를 횡대로 막아서는‘ T’자 혹은 ‘丁’자로 전투 대형을 펼쳤다. 넬슨의 ‘넬슨 터치’와 유사한 전법인데 원조는 이순신의 학익진법 전투대형이다.
한나절 동안의 전투에서 러시아 함대의 2/3가 침몰하고 6척은 나포, 3척만이 겨우 패주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했다. 러시아에게 이 해전은 뼈아픈 패배였다. 극동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던 러시아의 희망은 좌절되고, 일본은 조선과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

◈ 미드웨이 해전
미국의 니미츠 vs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941년 12월7일 일본은 하와이 미군기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제해권을 빼앗긴 미군은 절치부심했다.
이듬해인 1942년 6월 5일 태평양의 전략 요충지인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의 항공모함 4척이 미국 항공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궤멸된 전투다. 미군은 일본 함대간의 무선교신을 감청, 암호를 해독해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항공모함이 없어진 일본은 제공권마저 상실했다. 설상가상 이 전투에서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도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는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미국은 태평양에서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뉴질랜드 수도 오클랜드에 있는 6 · 25 참전기념비
트라팔가를 찾아가는 마지막 이정표
트라팔가 등대 앞에서
저기 외로운 저 나그네 213년 전 치열했던 전투를 머릿속에 그려보나…


트라팔가에서 떠오른 우리의 ‘군신(軍神)’
영국에 넬슨이 있고, 일본에 도고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순신이 있다. 넬슨이나 도고는 통치자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승리했다. 반면 이순신 장군은 어떠했나? 군의 통수권자에게서 버림받았다. 사령관이 ‘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만난을 극복하고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해전은 육전과 또 다르다. 더 비참하고 출구가 없다. 승리냐 죽음이냐 둘 중 하나다. 배를 타고 나갈 때 육지의 삶은 완전히 지휘관에게 맡겨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렇게 독전(督戰)했다. “죽기를 각오하는 자, 반드시 살 것이다!”
23전 23승. 전승이다. 인류역사상 이런 기록은 없다. 넬슨이나 도고는 이순신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이순신에 대한 찬사는 우리만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 함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연합함대의 참모장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는 기함에서 이순신의 제를 지내며 무운을 빌었다. 물론 도고와 야마모토(후일 태평양 전쟁 시 해군 총사령관, 당시 소위)도 예를 표했을 것이다. 

한국역사에 능통했던 저명한 역사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언덕위의 구름>이라는 러일전쟁을 다룬 소설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완벽한 장수였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이미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이 인물의 존재는 한국인에 있어서는 잊혀지지 않겠지만, 일본 역시 그에 대한 존경심이 계승되어서, ‘메이지유신’ 기간에 근대 일본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이순신에 대한 업적과 전술은 앞으로도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발틱 함대를 깨고 돌아온 도고는 승전 기념식장에서 “당신은 영국의 넬슨이나 조선의 이순신을 능가하는 명장”이라는 찬사를 받자 정색을 하며 “넬슨에 나를 비견하는 것은 인정하나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부사관)도 못된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에 비견될 인물은 없다. 나는 살아 이렇게 호사를 누리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라고 말했다. ‘적국의 장수’지만 멋지다. 솔직담백한 면은 일본인의 특성이기도하다.

이순신과 넬슨 그리고 도고
도고는 임진왜란의 이순신, 꼭 100년 전 트라팔가의 넬슨을 멘토로 삼아 전투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순신과 넬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상할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다. 혹시 넬슨이 이순신을 알고 흠모하며 벤치마킹 했던 것은 아닐까, 강한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한번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전투대형이나 창의성, 부하통솔, 국가관, 사생관, 그리고 죽음까지…. 둘 다 기함에서 분전하다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이점은 확실히 다르다.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지만 넬슨은 죽고 이겼다.

영국의 해군 제독 발라드(G. A. Ballard)는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순신은 서구 전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전략적 상황을 잘 파악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전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의 기본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따라 부하들을 통솔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 제독과 견줄 수 있는 해군 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금 모두들 나라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런 뛰어난 리더가 나와야만 할 때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흠모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이국땅 황량한 트라팔가 해변에서 느끼는 감회는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각별했다.

 

카디스 진입을 위한 대형 사장교
알헤시라스에서 만난 스페인 라이더. 그는 친절하게도 지브롤터까지 안전한길을 안내했다
지브롤터 국경검문소에서 영국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여권검사는 하나 스탬프는 찍지 않았다
입국검문소를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조형물


정복자 타리크 이븐 지하드
트라팔가를 출발해 남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A2231 지방도는 노면 요철이 심하고 업다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횡풍(橫風)은 전진의 큰 걸림돌이었다. 풍광은 좋지만 너무 힘들어 자하라(Zahara)란 곳에서 좌회전 해 A2227번 지방도로 바꾸었다. 그러면 1급 국도 N340과 만난다. 이 도로를 따라 계속달리니 인구 10만 정도의 항구도시 알헤시라스(Algeciras)에 도착했다. 

이름이 말해주듯 아랍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여기서는 모로코 탕헤르 간에 왕복 배편이 수시로 있다. 오래된 항구도시라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어디가 고속도로이고 일반도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도심을 빠져나와 1시간 정도 달려 '영국'을 앞둔 스페인의 마지막 마을 라 리네아(La Linea)에 도착했다.
711년 북아프리카, 모로코 일대를 지배하던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아드(Tariq Ibn Ziyad)는 지척의 바다를 건넜다. 1000여기(騎)의 강인한 카르타고의 피를 받은 베르베르족 무장 병력이 뒤를 따랐다. 정복자 무어인들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 800년 이슬람 통치의 서곡이 울리는 순간이다. 

첫발을 디딘 타리크 장군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자, 자신의 이름을 따 헤벨타리크(Jebel Tariq, 타리크의 산)라 이름 지었다. 아랍어로 헤벨(jebel)은 '산'이란 뜻이다. 영어식 ‘제벨타리크’가 오늘날 지브롤터(Gibraltar)가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히브랄따르’라 부른다.

신화(神話)로 만든 스페인 국기
지브롤터는 그리스 시대부터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지중해와 대서양을 막고 있는 산을 뽑아 없앤 다음 바다(지브롤터 해협)를 내고 두 대륙 끝에 거대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항우가 산을 뽑아버릴(力拔山) 정도의 괴력이 있었다는 중국식 과장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그리스신화는 여기서 정확히 일치했다. 어쨌든 기둥 하나는 지브롤터이고 나머지 기둥은 바다건너 모로코 예벨 무사(Jebel Musa)에 있다.

스페인 국기를 보면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두 기둥이 있다. 기둥마다 빨간 리본으로 두 번씩 감겨있다. 리본에는 플러스 울트라(Plus Ultra, 라틴어로 ‘저 너머’ 란 뜻)라고 쓰여 있다. 원래 문장은 ‘넌 플러스 울트라(Non Plus Ultra)’였다. 지브롤터가 세상의 끝 하데스(Hades, 지옥)로 가는 입구라고 믿었는데,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자 오랜 믿음이 깨져버렸다. 신화와 연관된 이 지역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현실의 역사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쟁에 패한 스페인은 눈물을 머금고 자국의 일부를 영국에 내주고 말았다.

지브롤터는 왜 영국 땅이 되었을까
지브롤터는 스페인 남단에 있는 작은 반도(과거에는 섬)로, 높이 425m의 바위산 ‘지브롤터 바위(The Rock Of Gibraltar)’가 기둥처럼 삐죽 솟아있다. 면적이 6.7㎢로 서울 여의도 면적 두 배가 조금 넘는 정도다. 그렇지만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군사 요충지이다. 해양강국, 영국은 일찍이 이런 지리적 이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더구나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그 중요성은 한층 커졌다.
이 조그만 반도가 영국의 손에 들어간 것은 1704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 참가한 영국 해군이 이 근처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영국 국기를 처음으로 꽂았다. 9년 후인 1713년 4월 11일 프랑스-스페인과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Treat of Utrecht)’으로 이 땅은 영국 식민지로 편입됐다. 영국은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서양과 지중해의 해상권을 쥐는 기반를 마련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본국함대에 버금가는 수준의 대 함대를 상시 배치할 정도였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가할 때는 영국연방국가(Commonwealth Nations)들이 50개국이 넘었다. 영연방이란 자발적 연합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과거 영국 영토였고 지금은 몇 군데를 빼고는 다 독립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지브롤터를 비롯, 버진 아일랜드, 포클랜드 제도, 버뮤다, 샌드위치 제도 등은 영국 영토로 남아있다. 

스페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여러 차례 지브롤터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3만명 정도의 주민 대다수가 영국 잔류를 원한다”는 사실을 들고 나오니 스페인은 속만 끓이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주민들은 2002년 투표로 영국 잔류를 분명히 했다. 압도적 지지는 경제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스페인이 강력하게 요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바다 건너 모로코의 세우타(Ceuta. 18.5㎢, 인구 8만)를 자국영토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 때였으니 스페인이 한창 잘 나갈 때였다. 2차 세계대전 후부터 모로코 역시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스페인은 내줄 생각이 전혀 없다.

카디스의 스페인 광장. 1812년 채택된 스페인 최초의 근대헌법 기념탑
스페인 국기와 왕실 문장
런던의 상징 빨간 전화 박스. 여기서 스페인기를 내리고 유니온 잭으로 바꿔달았다
어퍼록은 원숭이 천국. 먹이를 주었다가는 무사히 귀국하기 힘들 것이다

 

‘거대한 지구본’ 위에 서서
자전거로 오르려니 경사가 너무 급해 단념하고 말았다. 자전거에 틀림없이 무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케이블카를 타고 ‘어퍼 록(Upper Rock)’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정상에 올랐다. 

아…! 감탄과 함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일망무제! 지중해와 대서양 그리고 스페인, 고향땅 아프리카 대륙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구상에 두발 딛고 서서 두 대륙과 두 대양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축지법을 쓴 도인마냥 거대한 지구본 위에 올라 서 있는 느낌이다. 내려가면 추억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행복감이 밀려왔다. 애마 ‘로시난테’가 없어 아쉬웠지만, 그간 열망했던 ‘버킷 리스트’의 한 페이지는 또 넘어갔다.

정상 부근은 야생 원숭이들의 천국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유럽에서 유일한 바르바리 원숭이, 즉 꼬리 없는 원숭이의 최대의 서식지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거나 공격적이지도 않았다. 옆에 가도 미동도 없다. 원숭이에 관한 재미있는 속설이 내려온다. ‘이 산 정상에 바르바리 원숭이가 살고 있는 한, 스페인은 이 땅을 넘보지 못한다.’ 인데 금쪽같은 땅을 영구히 소유하려는 영국의 속내가 숨어있다. 

한때 원숭이 숫자가 3마리까지 줄어 멸종 직전, 처칠의 특명으로 모로코에서 같은 종의 원숭이를 긴급 공수해 다시 개체수를 늘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일대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는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 400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한다’는 강력한 조치를 발동하고 있다.

여기서 통용되는 화폐는 물론 영국 파운드다. 이곳 지브롤터는 전 지역이 보세구역이라는데 일반 물가는 스페인보다 훨씬 더 비싸 이박(二泊)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지브롤터 환상도로를 달리며 셀카 한장
이 한장의 사진이 지브롤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다. 환상도로 라이딩은 삼가하기를 강추한다. 위험한 터널이 너무 길고 또한 많기도 하고
지브롤터의 메인도로. 자동차와 대형 여객기가 같이 쓰는 세계유일의 국제공항이기도 하다

 

우리 남해(南海)에도 ‘지브롤터’가 있었다
오후에 도착해 하룻밤만 자고 ‘영국’을 떠나려니 미련이 남는다. 나라를 한 바퀴 돌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행장을 꾸려 해변 환상(環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지중해바람, 대서양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다.

페달을 돌리며 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세계를 경영하려 들었다. 이 제국주의의 손길이 지구 반대편 조선에도 뻗은 적이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고흥반도로부터 남쪽으로 40㎞ 지점에 있는 거문도(巨文島)였다. 고도, 동도, 서도의 세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면적은 지브롤터의 두 배 정도 된다. 

고종 22년인 1885년,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조정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대를 주둔시켰다. 1000여명의 수병을 실은 전함 6척과 수송선 2척을 동원했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이름도 자기네 마음대로 해밀턴 항(Port Hamilton)으로 ‘작명’까지 했다. 수심 깊은 천연 양항인 이곳을 ‘동양의 지브롤터’로 만들려고 2년 동안 함대를 주둔시킨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침략’이나 마찬가지다(영국의 입장에서는 1883년 맺은 조영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한 것이라 강변할지 모른다). 본국과 거리도 멀고 주위의 만만찮은 나라들이 이미 조선에 ‘뜸’을 들이고 있어, 별 소득이 없겠다 생각했는지 1887년 철수하고 만다. 

그후 자기네들과 죽이 맞는 ‘같은 섬나라’ 일본을 앞세워 대리전을 하게 만들었다. 두 번에 걸친 영일동맹이나 쓰시마해전에서의 함선과 신형포탄은 거의 영국제였다. 한때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세월은 흘러 36년 후인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일대 미국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일본은 곧바로 싱가포르에 주둔중인 영국의 주력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와 리펠스 호를 격침시켜버린다. 이른바 ‘말레이 해전’인데 영국군은 힘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는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호를 격침시킨 영국의 자존심이었다.  아침 식사 중 보고를 받은 처칠은 놀란 나머지 “아니, 일본이!” 하며 커피 잔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아마도 국제관계에 있어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다음호에 계속)     
  
협찬 :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포메라스포츠, IL인터내셔날

 

역사속의 도시 카디스
거문도에 남아있는 영국군의 주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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