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보현산 ~ 청송 면봉산

영천 보현산 ~ 청송 면봉산 
지상에서 허공으로! 실로 엄청난 고도감  
     
국립천문대가 자리한 영천 보현산(1126m)과 면봉산(1120m)을 동시에 오른다. 천문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막힘이 없으며 맑은 날도 많다는 뜻이다. 보현산은 두터운 가죽 코트를 걸친 듯 골짜기가 별로 없는 밋밋한 산록에 둔중한 덩치로 웅크렸다면, 면봉산은 하늘을 찌르는 첨봉으로 고고하게 솟았다. 성격이 판이한 두 산은 천문대와 기상레이더 덕분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저 별을 따서 네게 줄게. 저 별처럼 우리 사랑은 영원할거야.” 
“백조자리의 X-1은 최초로 발견된 블랙홀이야. 6100광년 떨어져 있고 X선을 뿜어내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 별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다. 사랑에 빠진 연인과 감수성 예민한 10대는 상상과 동화의 이미지로 별을 느낄 것이고, 천문학자는 냉엄한 연구 대상으로 볼 것이다. 예전에 천문대에서 근무하던 천문학자를 실제 만나보았는데, 그도 어릴 때는 감상적으로 별을 보다가 학자가 되면서 연구대상으로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별이라는 우주의 신비는 우리의 상상력과 감성을 무한 자극한다. 

지상의 오염과 빛으로부터 훌쩍 떨어진 산꼭대기에 자리한 천문대는 어떤 방식으로든 ‘별을 따기’ 위해 우주와 연결된 특별한 곳이다. 우주를 향한 지상의 관문이자 통로랄까, 내륙의 고고한 등대랄까. 보현산천문대로 향하는 우리가 여느 때보다 설렌 것은 별이 갖는 특별한 매혹 때문일 것이다. 
  

천문대 입지가 말해주는 것 
1996년 천문대가 들어서기 전에 보현산(1126m)은 높이에 비해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교통이 불편한 내륙지대에 자리한데다 수량이 풍부한 골짜기도 없고, 큰 산마다 빠지지 않는 그 흔한 사찰마저 없으니 등산객도 관광객도 외면한 것이다. 천문대 자리로 확정되었을 때 등산계나 환경단체의 반대가 별로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소백산에 이어 새로운 천문대를 설치하기 위해 전국의 100여 개 산을 검토해서 최후로 간택한 곳이 보현산이다. 천문대가 들어서려면 맑은 날이 많고 구름이나 안개가 잘 끼지 않아야 하며, 야간에 관측을 방해하는 불빛(대도시)이 멀어야 한다. 바로 보현산은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가까운 대도시라야 대구와 포항인데 각각 40km 정도 떨어져 있고, 소도시 영천도 20여km 거리에 있어 도시의 불빛에 방해받지 않는다. 주변에 더 높은 산도 없어서 사방으로 일망무제의 조망은 발군이다. 바로 옆에 비슷한 높이의 면봉산이 있지만 별도의 산이라기보다 같은 산의 두 봉우리로 보는 것이 맞을 정도로 서로 가깝다. 다만 행정구역상 보현산은 영천, 면봉산은 청송에 든다.

보현산에는 정상에 자리한 천문대까지 진입로가 나 있고, 면봉산은 정상에 있는 기상레이더 관리도로가 있어 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1100m를 넘는 두 산을 한번에 오를 계획인데, 두 산이 가까이 있고 연결되는 안부도 높아 두 산을 합쳐도 실제 올라야 하는 비고는 1200m 정도로 큰 무리는 아니다. 보현산 아래 보현산천문과학관에서 출발해 면봉산과 보현산댐을 거쳐 일주할 경우 48km 정도의 꽤 먼 거리가 된다. 길고 가파른 업힐이 많아 배터리를 절약하며 최대한 페달링으로 올라야 하는 부담은 따른다.

 


감춰진 우복동’ 지형 
통행이 힘든 협곡 안쪽에 갑자기 널찍하게 펼쳐진 지형을 소 뱃속과 비슷하다고 해서 우복동(牛腹洞)이라고 한다. 난리가 끊이지 않던 엣날에는 피난지로 좋다고 해서 길지로 여겼던 땅이다. 보현산 남쪽의 정각리도 전형적인 우복동 지형이다. 영천에서 화북면소재지를 거쳐 진입하면 한참 좁은 골짜기를 지난 다음에 갑자기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타난다. 남쪽은 기룡산(961m)이, 북쪽은 보현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물이 빠져나가는 서쪽의 협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통로는 모두 고개를 넘어야 벗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우복동이다. 

작은 마을은 온통 ‘별’이다. 별빛테마마을이 조성되어 있고 식당이나 가게 이름에도 별 아니만 천문대가 들어간다. 
마을 옆에 있는 보현산천문과학관을 기점으로 잡는다. 과학관이 이미 해발 450m나 되어 업힐의 부담을 덜어주지만 압도하듯 치솟은 보현산은 고도차가 700m도 안 되는데 까마득히 높아 보인다. 
천문대 방향으로 2.1km 올라가면 보현산웰빙숲 간판과 함께 임도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도로를 따라 오르고, 웰빙숲으로 우회전하면 임도 구간이다. 차량 통행이 없는 임도로 진입하면 한적하고 풍성한 숲 사이로 완만한 오르막이 꾸준히 이어진다. 간간이 트인 숲 사이로 천문대와 시루봉(1124m) 간 주능선이 성큼 다가선다. 

숲길을 4.6km 오르면 해발 760m 지점에서 차도와 다시 만나고 두마리 방면 임도도 분기하는 사거리에 이른다. 두마리 임도는 나중에 면봉산으로 갈 때 이용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 한동안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 급사면을 지그재그로 감아 오르는 길은 경사가 몹시 가팔라 하늘 깊숙이 들어서는 것만 같다. 고도 860m 지점의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비온 다음 날이라 대기가 쾌청해 포항시가지와 영일만, 장기반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정상에 서면 더 멋진 조망이 펼쳐질 것이다. 
  

일망무제영남알프스~팔공산이 한 눈에  
예전에는 천문대까지 진입이 가능했지만 탐방객이 많아지자 500m 전에 주차장을 만들어놓고 탐방객은 산책로를 통해 도보로만 올라야 한다. 주차장이 해발 1050m이니 정상까지는 지척이다. 
천문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이 1.8m 광학망원경동으로 바로 옆에 보현산 정상이 있지만 천문대 때문에 분위기가 여의치 않아 남쪽으로 500m 떨어진 시루봉(1124m)이 사실상의 정상 역할을 한다. 시루봉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이용된다. 산의 남쪽에서 보면 시루봉이 곧추 선 꼭대기를 이뤄 정상처럼 보인다. 

시루봉에 올라서니 천하가 발밑이다. 날카로운 원추형의 면봉산이 천문대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 있고, 남쪽으로는 영남 중부지역이 다 드러난다. 영일만에서 토함산~영남알프스~팔공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하나의 장엄한 스카이라인을 그린다. 경산의 압량벌을 가로지르는 KTX 선로에 비친 햇살이 가느다란 금속광을 발한다. 
천문대로 들어가 1.8m 망원경동 옆의 진짜 정상에 올랐지만 공간이 협소하고 숲에 가려 조망은 시루봉보다 못하다. 대신 북쪽으로 청송 일원의 첩첩산중이 광막하다. 동쪽의 고봉은 내연산(930m)이고, 북쪽으로 아득히 보이는 고봉은 주왕산 최고봉인 왕거암(907m)일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면봉산은 단아한 원추형 산체가 주는 고도감이 대단하다. 그 험준한 기슭을 거대한 뱀이 흐느적거리듯 대형 지그재그를 그리는 산길은 자연미를 해친다기보다 위용과 입체감을 더해준다. 정상에 버티고 선 백색 레이더도 풍력발전기처럼 독특한 미감과 신비감을 치장한다. 산악지형 자체의 매력은 보현산보다 면봉산이 더 어필한다.

 

 


eMTB도 힘겨운 면봉산 업힐 
앞서 지나온 두마임도사거리에서 왼쪽으로 진입해 1.3km 내려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길이 보현산~면봉산 간 안부를 넘어 면봉산으로 이어진다. 사실 지도와 위성사진에는 이 길이 나와 있지 않아 취재팀은 천문대 주차장에서 능선을 따라 등산로를 거쳐 안부로 내려왔다. 길이 거의 묻힌데다 급경사에 나뭇가지와 잡초까지 자라 ‘끌바’조차 힘겨운 난코스였다. 이 구간 때문에 코스로 소개하면 안되겠다 싶었는데 안부에 도착하니 떡 하니 새로운 임도가 나 있다. 

안부에서 면봉산 도로까지 700m 구간은 시멘트 포장된 임도인데 관리가 되지 않아 도로가 엉망이다. 수풀이 무성해 가시가 팔과 다리를 할퀴고 나뭇가지는 머리를 때린다. 한여름에는 돌파가 쉽지 않겠다. 하지만 면봉산 도로를 만나면 고생 끝이다. 널찍한 시멘트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런데 업힐이 상상을 초월한다. 경사도가 20%에 육박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여서 eMTB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내겠다. 이 이사와 나는 “eMTB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극심한 경사로 헤어핀을 돌 때마다 하늘이 불쑥 다가서고 세상은 저 아래로 가라앉으니 정말 허공에 뜬 느낌이다. 지금껏 느껴본 지상의 고도감으로는 국내 최고다. 
  

산꼭대기의 등대지기 
“경치가 이렇게 멋진데서 근무하니 좋으시겠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요. 이런 경치도 하루이틀이지요….”
면봉산 꼭대기에는 대형 축구공 같은 기상레이더가 있고, 울타리를 지나야 정상으로 갈 수 있는데 열쇠가 잠겨 있어 근무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가 잠시 얘기를 나누게 됐다. 평일에는 등산객도 없는 이 산정에서 사람이 그리웠던지 마흔 전후의 그는 살갑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단문으로 물으면 장문으로 답을 한다. 

그러고 보니 레이더 지킴이는 내륙의 등대지기였다. 기상레이더는 오지의 산꼭대기에 있으니 외딴섬 끝자락에 있는 등대처럼 속세와 격리된 점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겨울철 폭설이라도 내리면 완전 고립 아닌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관악산과 화천에서 근무했던 얘기도 들려준다. 레이더는 반경 200km를 커버해서 이 한 대로 영남 전역을 감당하고도 남는다.
힘겨웠던 업힐은 반대로 내려갈 때는 최고의 보상을 약속한다. 장쾌, 통쾌, 쾌속의 5km 다운힐로 순식간에 면봉산을 내려섰다. 

보현산 북릉을 넘어 갈천교에 이르면 이제부터는 도로 구간이다. 보현댐으로 생겨난 산중호수는 물이 말랐지만 산협에 좁게 갇혀 신록은 심연까지 어려 있다. 보현산 중턱에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국내최장의 1.4km 짚와이어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입석리 고개를 넘어 보현산천문과학관으로 돌아온다. 높이가 520m에 달하는 입석리 고개는 최후의 난관이다. 힘겹게 페달링을 한 덕분에 배터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스케일이 큰 에픽 라이딩 끝에는 언제나 허망함, 허탈감이 남는다. 잠시 동안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붕 뜬’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가 정말 별 가까이, 하늘 깊숙이 다녀왔기 때문이다. 
    

 


 <여정
상주영천고속도로 덕분에 서울에서 보현산천문과학관까지 4시간이면 족해서 수도권 기준으로 당일 투어도 가능하다. 시간과 체력을 아끼려면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천문대 주차장에서 라이딩을 시작해도 된다. 다만, 보현산과 면봉산 사이 안부(해발 790m)에서 면봉산 도로까지 700m 구간은 임도 관리가 안 되어 있어 노면이 거칠고 수풀이 무성해 한여름에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돌파할 수 있다. 면봉산은 차량은 진입할 수 없다. 천문관 주변에 펜션과 식당이 몇 곳 있다. 평일에도 문을 여는 행복식당(054-336-2873)과 계곡가에 자리한 별빛촌펜션(010-4521-1175)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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