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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전 유럽인이 꿈꾸는 휴양지 스페인‘태양의 해변’에서 짙은 선글라스가 필수인 이유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전 유럽인이 꿈꾸는 휴양지 스페인
‘태양의 해변’에서 짙은 선글라스가 필수인 이유


스페인 남부 ‘태양의 해변(코스타 델 솔)’은 아름다운 경관에 연중 300일 이상 태양이 내리쬐어 전 유럽인이 꿈꾸는 휴양지다. 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수면, 토플리스의 미녀가 한가로운 백사장, 미려한 호텔과 별장의 도열… 숨 돌릴 틈 없는 절경과 비경, 매혹의 연속이다. 태양의 해변의 백미는 ‘유럽의 발코니’라는 네르하. 이제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가장 스페인적인 것이 다 모여 있다는 세비야에 입성한다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네르하. 백색 회랑의 아치 너머로 펼쳐진 대서양에는 태양이 가득하다



스페인 속의 영국, 지브롤터를 떠난 자전거는 다시 스페인을 달린다. 지브롤터를 기점으로 대서양의 ‘빛의 해변(Coasta De La Luz)’이 끝나고 이제는 지중해의 ‘태양의 해변(Coasta Del Sol)’이다. 


태양과 빛 없는 바다가 어디 있으랴! 
유독 스페인 남부의 ‘태양 빛’을 즐기려 세계 각국에서 앞 다투어 모여든다. 나도 이번 여정을 ‘이베리아 반도 인문탐사기행’이라는 테마를 잡았지만, ‘태양의 해변’만은 애마와 함께 무념무상 질주해보기를 오래전부터 갈망해 왔다.

이 길은 '간단한 해변'이 아니다. 무려 300km가 넘는다. 우리 동해안 7번국도, 속초에서 구룡포까지 될까. 길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명멸했던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이슬람, 가톨릭 문명에 이르기까지 아픈 역사를 이 바다는 오롯이 지켜보았다. 해변 길에 피카소를 낳은 도시 말라가(Malaga)를 지나면, ‘유럽의 발코니’라는 휴양도시 네르하(Nerja)에 이른다. 이 일대의 해변사진은 누가 찍어도 ‘작품’이다. 

바닷길이 진저리쳐질 무렵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 안달루시아의 심장이라는 세비야(Sevilla)에서 스페인 남부 여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 다음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달리기 위해 북부로 올라가려는 개략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 여정도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코스타 델 솔’ 유감?
그동안 달려본 아름다운 해변길의 추억이 떠오른다. 미국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에 이르는 해안도로 US101을 비롯, 남프랑스의 쪽빛해안이라는 코뜨 다 쥐르,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해변, 라트비아의 리에파야 가는 발틱 해변길, 영국 에딘버러에서 애버딘 가던 북해(北海) 해변길,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 가던 세토내해…. 여기에 제주도 환상(環狀)도로 중 차귀도 해안길도 빼놓을 수 없다. 

태양의 해변(Coasta Del Sol)은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해변이다. 특히 북유럽 은퇴자들이 여생을 보내고 싶은 선망의 장소 1위다. 물가도 적당하고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연중 300일 이상 내려쪼이는 태양 때문이다. 그들은 기나긴 겨울밤, 태양을 동경하며 살아왔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역동적인 해양 스포츠를 즐기려는 유럽 젊은이들에게 여름휴가 ‘1번지’이기도 하다. 하룻밤에 20유로짜리 저렴한 숙소에서, 1000유로가 넘는 럭셔리 호텔까지 다양하게 있으니 말이다.

그림 같은 야자수 그늘 카페에서 세르베사(Cerveza, 생맥주)에 하몽(Hamon, 염장 돼지고기) 몇 조각 놓고 쉬어간다. 뜨거운 지중해의 태양 아래 하얀 모래와 색색의 비치 파라솔, 그 아래 간이침대에서 반라(半裸)로 누워있는 육덕 좋은 여인들…. 엎어져 누워있는 여인은 ‘토플리스(!)’임에 틀림없다.
한수 더 떠 ‘벌건 대낮 태양 아래’ 선남선녀의 대담한 스킨십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문득 영화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푸른 파도 일렁이는 요트에서 벌이는 정사장면. 사위(四圍)는 수평선, 오직 태양만 보고 있다…. 


붉은 태양 아래 푸른 바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발동시킨다. 우선 거추장스런 옷부터 벗겨 놓으니까. 왜 ‘대책 없는’ 솔로 라이더 눈에만 이런 광경이 자주 보일까. 또다시 ‘무념무상 페달링’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시선처리를 위해 짙은 선글라스는 물론 팔, 다리 토시에다 얼굴을 가리는 버프까지 뒤집어썼다. 더위보다는 태양빛 차단이 더 급했다. 갈 길이 멀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차게 페달을 돌린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별장과 호텔, 하얀 집들이 숲속에 저마다의 디자인과 개성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리에는 잠시도 눈길을 뗄 수 없는 호화 요트 해변과 카페, 레스토랑, 명품 부티크 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을 비롯, 왕족들이 여름휴가에 수백억원을 뿌렸다는 바로 그 바닷가다. 선조들의 고향이기도 한 이 일대에는 역시 아랍식 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코스타 델 솔 중 전망 좋은 해변에는 고급숙박업소가 즐비하다
태양의 해변의 자유분방한 청춘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 새하안 백사장과 격조있는 건물이 조화를 이룬 코스타 델 솔의 해수욕장
말라가 중심거리는 젊은이들로 늘 붐빈다

 

과거의 적이 오늘은 구세주
스페인은 일찍이 관광산업에 눈을 떴다. 오랜 농업 국가이던 이 나라가 서유럽 국가처럼 부국의 길로 가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름다운 해변과 해수욕장들이 이어진 ‘태양의 해변’은 여러 도시를 품고 있다. 그중 말라가는 길고 긴 해변의 ‘대문’ 역할을 하고 있다. 1950년 스페인 정부가 관광정책을 편 이후 한가로운 어촌이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팽창했다. 말죽거리가 지금의 양재동이듯.

말라가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세비야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스페인에서는 여섯번째로 크다. 항구로는 바르셀로나에 이어 두번째다. 도시의 역사 또한 길다. 유적지와 풍부한 산업, 예술적 토양이 해변 휴양지와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도시다. 레콘키스타(카톨릭의 국토수복) 이후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활발한 교역의 관문으로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그 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또다시 도약하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두 개’의 적(敵)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바다와 태양이다. 바다를 통해 쳐들어온 이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고,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은 삶의 의욕마저 꺾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둘이 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부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한해에 3500만명이 스페인을 찾아오는데 그중 반만 이곳에 와도 충분하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도 ‘빛’을 팔아 떼돈 버는 이들 앞에서는 “큰형님!”하며 넙죽 엎드릴 것만 같다.



말라가(Malaga) vs 마쓰야마(松山)
말라가는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고향이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피카소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이름을 내건 가게들이 많다. 피카소 카페를 비롯, 레스토랑, 피카소 이발소, 피카소가 세례 받은 성당… 그 외 기념물, 엽서 등등 홍보물(?)이 넘쳐난다. 태양과 바다만 가지고는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피카소는 열 살에 이곳을 떠났다. 그러니 그의 ‘예술작품’ 하고는 관련이 없다. 주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키웠다. 23세 때는 아예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영구이주를 결심했다. 그는 고향에 대한 애착은 없었던 것 같다. 

피카소는 90평생에 5만점이란 다작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00점 정도의 드로잉과 습작, 판화, 조각 등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것들을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 Malaga)에 기증한 정도였다.
몇 년 전, 일본의 시코쿠 마쓰야마(松山)를 여행할 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를 가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日樕石, 1876~1916)의 간판이 걸려 있고 소세키의 이름을 딴 기념품이 넘쳐났다. 마쓰야마 상인들은 유명 문인과의 인연을 최대한 활용해 상품화하고 있었다. 

소세키는 도쿄에서 나고 자라 대학도 그곳에서 마쳤다. 마쓰야마와의 인연이라면 그가 젊은 시절 마쓰야마 중학교에 영어선생으로 부임해와 1년 지낸 것이 전부다. 그는 무료했던 이 기간 동안 자전적 소설 <도련님>을 썼다. 작가는 물론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 거리, 자주 다니던 목욕탕, 타고 다니던 ‘꼬마열차’ 모두 상품화에 동원되었다. 시당국이 펼치는 문화 도시, 작품 속의 무대라는 긍정적인 측면은 이해가 갔지만, 유명인과의 짧은 인연을 물실호기 삼은 마케팅 공세는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코스타 델 솔의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
말라가 시절의 어린 피카소
말라가의 피카소 미술관
고향 말라가에 돌아온 피카소
예술의 도시 말라가
과거 무어인들이 구축해 놓은 말라가의 성채 알카사바


성당 하나 짓는데 254년!
먼저 알카사바(Alcazaba)를 찾았다. 8세기에 무어인 지배 당시 건설한 통치자의 궁전과 군사용 방어시설이다. 작은 도시 말라가에서는 자전거만큼 이동하기에 좋은 수단이 없다. 특히 옛 성터나 전망대를 찾아 갈 때는 더욱 그렇다. 간만의 ‘업힐’은 비타민 격이다.  오르막에는 울창한 숲과 정상부의 잘 가꿔진 공원은 관광객뿐 아니라 말라가 시민들의 휴식처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정상에 오르니 말라가 시내와 탁 트인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행 안내소에서 얻은 시티맵을 정치(定置) 시킨 다음, 꼭 가볼 곳을 표시했다. 이렇게 하여 방위를 파악한 후, 다음 행선지로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나의 오랜 습관이다. 유럽의 어느 역사도시도 마찬가지지만, 일단 두오모나 대성당을 찾으면 나머지는 술술 잘 풀린다.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생기고 도시가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말라가 대성당’은 도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슬람 무어인들로부터 말라가를 탈환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사원을 허물고 1528년부터 짓기 시작해 1782년에 완공했으니 무려 254년이 걸렸다. 건물 하나에 몇 대(代)를 걸쳤단 말인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조상들이 이런 것을 물려주었으니 후손들의 살림살이에 많은 보탬이 되는 것 같아 부러웠다. 좌절만 할 것이 아니다. 이들이라고 왜 아픔과 갈등이 없었겠는가.
‘흙수저’가 성공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우리는 비록 초가(草家)를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 후손에게 더욱 풍요로운 터전을 남겨야 할 것이다.



유럽의 발코니(Balcon De Europa)
말라가를 떠나 자전거는 계속 동진(東進)이다. 태양의 해변을 따라 달리다보면 크고 작은 해변(해수욕장)을 수도 없이 지나는데 유독 멋진 곳이 있다. 수심이 얕고 백사장이 넓어야 하며 주위에 나무가 우거져 있으면 좋다. 만(灣)처럼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 파도가 적어 최적의 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다 갖춘 곳이 있다. 바로 네르하(Nerja)란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별칭이 ‘유럽의 발코니(Balcon De Europa) 마을’이라 불린다. 

카스티야의 군주였던 알폰소 11세가 이곳의 전망에 감동 받아 이런 표현을 했다니 지역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실제로 바다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식의 거대한 발코니를 만들었다. 전방의 아득한 수평선은 물론 좌우의 아름다운 해변을 조망할 수 있다. 물론 알폰소 11세의 상(像)도 흐뭇한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한 마디로 ‘태양의 해변’ 중 백미다. 과거 하와이 제도를 여행할 때 들린 오하우(Ohau) 섬의 절승,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를 연상케 했지만 규모면에서나 경관은 비길 바가 아니었다.
활처럼 굽은 에메랄드빛 만(灣)에 왜 네르하가 ‘초대형 발코니’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약 16km에 달하는 긴 모래해안은 해수욕뿐만 아니라 수상 레포츠를 즐기기에도 최적의 환경이다. 주변에 종려나무가 우거져있고, 해안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기암괴석이 널려있다. 그 사이사이 은밀한 곳에는 연인들이 쌍쌍이 누워있다. 


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먹는 집’이 없다. 욕객(浴客)들도 ‘먹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작은 생수통, 큰 타월과 책, 선탠 크림이 전부다. 지나온 해수욕장들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다. 먹은 게 없으니 화장실이 필요 없다. 청결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겠는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도 이젠 세월의 흐름에 ‘보릿고개’와 같이 박물관으로 보내 할 사어(死語)가 되었다.
 


안달루시아의 심장, 세비야(Sevilla)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모두 품고 있는 도시가 바로 세비야이다. 투우, 플라멩코, 무어인의 찬란한 유산, 스페인 최대의 성당, 화가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고향,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돈조반니>, <카르멘>의 무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항해사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흔적…. 더 무엇이 필요할까.
대개의 도시가 그렇듯 세비야도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을 끼고 발달했다. 이 강은 전장 657km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가장 크고 길다. 강물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북쪽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코르도바, 세비야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나간다. 과거에는 무역을 비롯 내륙 수운(水運) 역할을 했으니 세비야가 번성하기까지 많은 기여를 했다.


잘 정비된 강변도로를 자전거로 두어 차례 왔다 갔다 하며, 다리이름을 몇 개 꿰고 나니 세비야 구시가지 전역이 대강 머릿속에 들어온다. 먼저 산 베르나르도(San Bernardo) 지구에 있는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을 찾았다. 

최근에 모 전자회사 휴대폰 CF를 찍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광장’이란 고유명사 같지만 스페인의 웬만한 도시(로마에도 있다) 중심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으니 보통명사로 불러야하나. 어쨌거나 ‘세비야 스페인 광장’이 제일 크다. 무엇보다 미려한 건축물과 ‘물’이 어우러진 탁월한 경관은 여타 ‘스페인 광장’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비야의 랜드마크격인 이곳은 원래 시립공원의 자리에 1929년 세계 박람회를 유치하며 본부 건물로 만들어졌다. 광장의 원래 의미는 상품을 사고팔며 교환하는 기능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광장을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 장터)라 부른다. 

건물 아래쪽 반원을 따라 스페인에서 한가락 하는 도시들의 문장(紋章)과 역사적 사건의 한 장면을 타일 위에 모자이크로 새겨 놓았다. ‘비주얼’로 스페인을 알리는 멋진 착상이다. 이것만 다 이해해도 스페인 역사는 웬만큼 파악할 것 같다.


기마상(騎馬像)에 얽힌 이야기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말을 탄 형상의 조각물을 흔히 만난다. 주로 역사적 장소나 거리인데, 군주도 있지만 전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둔 장군들이 많다. 말의 형상을 보면 그 장군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다.
말의 네다리가 모두 땅에 붙어 있으면 마상(馬上)의 장군은 천수를 누린 것이다. 말이 한 다리를 들고 있다면 장군은 전투 중 부상을 당한 것이고, 앞의 두 다리를 들고 서 있으면 전사한 장군이다. 이런 원칙이 있지만 예외도 있다. 천수를 누린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건국의 아버지’라 칭송 받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의 기마상은 말이 두 다리를 치켜들고 있어 역동성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을 떠나 ‘레알 알카사르’로 향했다. 가는 도중 라운드(교차로)에서 멋진 기마상 하나를 만났다. 한손에는 방패, 다른 한 손에는 긴 창을 들고 곧 달려 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맹스런 역사속의 장군으로 직감했다. 말이 앞의 한 다리를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가까이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스페인의 민족적 영웅인 '엘시드'였다.
“내가 찾던 인물, 바로 이거다!” 하며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거리 이름도 ‘엘시드가(Ave. El Cid)’였다.

 

알카사바 전망대에서 본 지중해
간식타임! 세비야 가는 1급 국도. 이베리아반도도 대륙이었다
세비야 가는 길에서 만난 친절한 라이더

 

민족의 영웅, 엘시드(El Cid)
엘시드는 국토수복 전쟁 기간에 산티아고(Santiago, 성 야고보)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던 실제인물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 1043~1099)인데 용맹과 충성심, 가족사랑 그리고 적까지 포용하는 중세 기사의 전형이었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에 비유될 정도로 스페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스페인 출신의 미국 이민자들이 뉴욕에도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을 정도니까.

‘엘시드란’ 말은 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무어인들을 쳐부수는데 용감했던 중세 스페인 역사 속 인물이 왜 우리에게 알려졌을까? <엘시드>란 영화로 여러 번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벤허>나 <십계>의 반열에 끼지는 못하지만,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 등 대스타들이 열연했다.
영화는 엘시드를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시기는 11세기경, 장소는 안달루시아지방. 무어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귀족 가문의 기사 로드리고(찰톤 헤스톤 분)가 무어인들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로드리고가 무어인 적장(敵將)을 포로로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관례대로 처형을 주장 하지만, 로드리고는 다시 마을을 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이들을 풀어준다. 이에 감명을 받은 포로 중 한 사람이 로드리고에게 아랍어로 존경의 표시인 ‘군주’란 뜻의 엘시드라는 칭호를 준다. 하지만 이 일로 로드리고는 고국인 카스티야 왕국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혀 투옥된다. 그의 아버지도  ‘배신자의 아버지’란 오명을 쓴다. 

엘시드는 아버지에 대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 결투로 왕실의 실권자 고메즈를 죽이게 된다. 고메즈는 약혼녀 시멘(소피아 로렌 분)의 아버지였다. 사랑하는 약혼자이지만 신념을 버릴 순 없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약혼자는 떠나갔다.

부왕 페르디난드가 죽자 ‘왕자의 난’이 벌어진다. 동생 알폰소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로드리고는 신념대로 알폰소에게 충성을 거부한다. 대역죄로 추방을 감수하면서.  비록 자신의 부친을 죽였지만 올곧은 신념과 강직함에 감복한 약혼자 시멘은 다시 로드리고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이 전쟁을 치르게 되는 상황이 오자 알폰소 왕은 다시 엘시드를 카스티야 군 총사령관으로 기용한다. 용맹과 덕을 겸비한 엘시드는 발렌시아 함락전투에서 가슴에 활을 맞고도 솔선수범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받들기까지 한다. 평판이 하늘을 찌를듯했지만, 로드리고는 아무런 사심 없이 알폰소 왕에게 공을 넘긴다. 부하들과 아내, 두 자식의 만류에도 중상을 입은 몸으로 결전장으로 나간다. 사기충천한 카스티야 군은 무어인을 격퇴하지만, 엘시드는 숨을 거두고 만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산타크루즈(Santa Cruz) 지구의 대성당(Caterdral). 스페인에서 성당 방문은 신물(?)이 나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꼭 한번 들러볼만하다. 인근에 무어시대의 궁전인 레알 알카사르와 부속정원(Real Alcazar & Jardines del Alcazar)이 있다. 이는 대성당 자리가 과거에는 대사원 자리였음을 말해준다.

대성당은 글자 그대로 ‘대성당’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톨레도 대성당이나 말라가 대성당은 ‘게임’이 되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며 웬만한 크기의 성당에는 ‘면역’이 되어 눈도 꿈쩍 않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안에 들어가 기둥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과거 일본을 여행할 때였다. ‘축소지향의 일본인’만 생각하다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불상 크기에 깜짝 놀랐던 그때와 지금 심경이 ‘오버랩’ 되었다.


일반적으로, 크기로 본 세계 5대 성당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 순이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1402년부터 짓기 시작해 100년이 걸렸다지만 수세기에 걸쳐 증, 개축을 했으므로(지금도 공사중이다)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서구 건축양식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또한 스페인의 내로라하는 역대 유명 화가들의 명화(주로 성화)로 장식되어 장중함을 더해 준다.


내가 이 성당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시신이 안치되어있기 때문이다. ‘안치’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공중에 ‘떠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4명의 왕이 관의 한쪽 모퉁이씩을 들고 서있다. 중세에 스페인은 4개의 나라로 분할되어 있었다. 앞의 두 명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고 뒤의 두 명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네 명 다 벌(罰) 받고 있는 모양새다. 역사 속의 형량이니 ‘영겁의 세월’이다. 죽어서 받았으니 사면도 있을 수 없다.
왕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 대성당에서 영면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도대체 과거에 콜럼버스를 둘러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계에서 세번째 큰 세비야 대성당
대성당 내부의 우람한 기둥
콜럼버스의 유해가 든 관. 네명의 과거 스페인 왕이 들고 있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 우리의 광장과는 개념이 다르다
엘시드 기마상. 세비야 구시가 중심거리에 있다

 


“나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라.”
그는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 등 3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후엘바(Huelva) 인근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 항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스페인(당시는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의 공동통치)의 후원을 얻어낸 결과였다. 무엇보다 이사벨 여왕(Isabella, 1451~1504)의 영향이 컸다.

콜럼버스는 각고 끝에 인도라고 알고 도착한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연 원주민들을 인도인 즉, 인디언이라 불렀다(지금은 미국이나 중남미에서는 ‘인디언 혹은 ‘인디오’를 원주민 즉 ‘Native American Tribes’라 부른다). 세기의 대착각을 한 것이다. 그가 처음 상륙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조그만 섬이었다. 그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란 뜻)라 명명했다. 거의 모든 선원이 초죽음 상태에서 발을 디딘 육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수식어도 많았다. 탐험가, 모험가, 항해사…. 그러나 탐욕 많은 욕심쟁이, 잔혹한 리더, 전도를 빙자한 원주민 학살자, 대착각자 등 ‘안티’가 많았다.
후세의 평가 역시 아직도 엇갈린다. 허나 인류역사 큰 족적을 남긴 선구자임은 분명하다. 선구자가 겪는 고초일까, 그는 만년에 비참했다. 모든 재산과 지위를 박탈당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복에 나선 것이다.


빛나는 업적도 여왕이 살아 있을 때의 과거지사에 불과했다. 그는 마드리드 외곽도시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죽었다. 얼마나 스페인에 한을 품었으면 이런 유언을 했을까. “나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라.”
살아서도 파란만장했지만 죽어서는 더 파란만장(?)했다. 한 곳에서 영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았으니 말이다. 1537년 그의 며느리 마리아는 자신의 남편과 시아버지 유해를 세비야주 카르투시안 수도원에서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봉안함으로써 유언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1795년 도미니카공화국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그의 유해는 당시 스페인 식민지이던 쿠바 아바나 성당으로 옮겨졌다(이 대목에서 도미니카공화국 측은 다른 사람의 유해를 가져갔고, 진짜 유해는 자기네들이 잘 보관하고 있다고 밝혀 유해 진위여부는 세기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DNA 유전자 감식기술이 급 발달하고부터다). 어쨌거나 모두 그가 살아생전 ‘주름잡았던’ 서인도제도였다.  

다시 한 세기가 흘러 쿠바문제로 스페인이 미국에 전쟁을 걸었으나 완패하고 말았다. 이 결과 쿠바는 독립하고 필리핀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유해는 근 380여년 만에 대서양을 건너 ‘한 맺힌’ 스페인 땅으로 원대복귀하고 말았다. 그런데 연고 있었던 많은 곳을 두고 왜 세비야로 왔을까. 그 이유는 세비야야말로 대항해시대 스페인의 영광을 가장 크게 누린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내가 지금 서있는 바로 이곳에서 ‘떠’ 있다. 유언이 반은 지켜지고 반은 희대의 희극물로 희화화되어버렸다.

높이 60m로 우뚝 솟은 콜럼버스 동상. 바르셀로나의 중앙통, 람브라스 거리의 출발점에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그의 도전정신과 과감한 실천이 세상을 바꾸었다
산타페 협약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영화 <엘시드>의 포스터

 


콜럼버스, 그는 누구인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영어식 이름에 익숙하지만, 그의 모국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hristoforo Colombo)라 불린다. 몇 년 전 제노아를 들린 적이 있는데 도시는 완전 ‘콜롬보’ 판일 정도였다. 당시는 도시국가 형태였으니 제노아는 그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인생 후반부를 보낸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롱(Christobal Colon)이다.
‘크리스토퍼’란 말의 원형은 크리스토-퍼런스(Christo-ferens)인데 이는 ‘예수전도자’란 뜻이다. 그가 신대륙을 찾아 대서양 항해에 나섰던 이유는 가톨릭 전파라는 ‘종교적 동기설’이 설득력 있다.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콜럼버스가 부친의 전기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타고난 항해사요 모험가였다. 임진왜란이 나기 정확히 100년 전에 범선으로 세계일주의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허나 꿈은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희박했다. 그는 젊은 항해사 시절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을 탐독하며 지구둘레와 바다의 거리를 추산했다(그러나 실제 거리보다 1/4로 축소 계산하는 착각을 범하고 말았다). 또한 같은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 <동방견문록>을 읽으며 신항로를 개척해 황금, 향신료 무역 등으로 대박의 꿈을 키웠다. 지금으로 말하면 ‘뱃심 좋은 벤처 사업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30대 중반부터 이런 지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대서양 탐험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당시로는 ‘이런 사업’은 한 나라의 왕의 후원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처음으로 접촉한 사람은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바다로 팽창하려는 해상강국에서 ‘퇴짜’를 맞았으니 그의 실망은 컸다. 그러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 때마침 1492년 1월,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에 버티던 최후의 이슬람 왕조를 무너뜨리고 국토수복의 역사적 쾌거를 이룬다. 실은 몇 년 전부터 왕실을 접촉했으나,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포르투갈과 ‘바다’를 놓고 경쟁에 돌입해야만 했다.

왕실은 콜럼버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라나다 함락을 위한 야전본부가 있던 산타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는 이를 ‘산타페 협약’이라 부른다. 이 문서는 2009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산타페’는 H회사 자동차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원래 스페인어의 뜻은 ‘신성한 믿음’이다.
협약의 골자는 “스페인 국왕은 콜럼버스에게 귀족 칭호를 내리며, 앞으로 이끌 선단의 제독으로 보임한다. 그리고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면 총독 및 부왕(副王)의 지위를 준다. 그곳에서 나오는 금, 은 등 재화의 1/10을 소유하며 이 모든 것들이 자손에게 상속된다.”라고 명시했다. 


여왕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줘, 무려 12년에 걸쳐 4차례나 항해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는 콜럼버스의 오랜 꿈과 열망 그리고 스페인 왕실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스페인 영화 <1492>를 두 번이나 보고 나왔다. 여기에서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무한 신뢰는 물론이고 연정(戀情)을 품은 듯 한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온다. 과연 그것이 어디까지 사실이었을까.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인 당시로서 가능한 일이겠는가.


여왕은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과 별거 아닌 별거 중이었다. 여왕과 콜럼버스는 1451년생 동갑(필자 보다 정확히 500년 연상!)인데, 이건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여왕은 국익과 맞아떨어지고 그의 지력(智力)과 목숨을 건 과단성에 매료되어 네 번에 걸친 후원 결과가 그런 의심(?)을 낳았을 것이다. 영화는 무엇인가를 암시하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착각’이 낳은 인류의 위대한 사건
성서가 인류 역사상 베스트셀러 1위이듯, ‘예수 탄생과 죽음’은 인류 최대의 사건이다.  그 다음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인류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 대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첫 항해 때 ‘범선 3척의 초라한 선단’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며 ‘무적함대’를 거느릴 스페인 해상강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걸음이었다. 동시에 소수의 유럽인을 위해 그들의 20배가 넘는 ‘신대륙’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제국주의의 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스페인은 식민통치의 목표로 ‘3G’를 천명하고 무자비하게 다스렸다. 3G란 Gospel(선교), Glory(국왕 찬미), Gold(황금 약탈)였다. 배교(背敎)자는 화형으로 다스렸고, 사금(砂金) 채취에 게으른 자는 가차 없이 두 손목을 절단했다. 그리고 짐승사냥 하듯 원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넘겼다. 


1492년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을 때, 산토도밍고의 인구를 20만 정도로 추정했으나, 30년 뒤에는 1만5천만 남았고 다시 10년 뒤에는 불과 수백 명만 남아 거의 멸종 상태였다. 면역이 전혀 없던 이들에게 서구의 각종 병균을 옮겨준 것도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예일대의 역사학자 데이비스 박사는 이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종 학살”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콜럼버스는 첫 항해 이후 12년 동안 세 차례나 탐험을 더 했는데, 1506년 죽는 순간까지 인도라고 믿었다. 첫 항해 때는 거리를 축소 계산한 착각 속에 모험을 결행하게 되었고 발견 또한 착각이었다. '착각'이 역사적 사건의 위대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1498년 인도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의 실체가 알려졌다.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탐험으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고의 이름을 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콜럼버스는 무척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카리브해와 바하마제도 일대를 서인도(West Indies)라 부르게 되었고, 북미에서 남미에 이르기까지 콜럼버스란 지명이 무수히 많다.

 

모스크의 첨탑인 히랄다 탑. 세비야의 랜드마크로 높이가 98m나 된다

 

인명(人名)만 알아도 이해가 쉬운 유럽사
현재 수십 개의 국가를 이루는 유럽은 과거에 같은 기독교 문화권에 속했다. 지역마다 사투리가 달라지는 정도로 하나의 문명권이었다. 넓은 의미로 아시아는 영토개념인데 비해 유럽은 분권적 왕가(왕조) 개념이었다. 왕위 계승전쟁으로 맺어진 유트레히트 조약에 의거 지브롤터가 영국 영토가 되었듯이, 중세부터 유럽은 왕통을 잇는 문제로 자주 충돌을 빚었다. 

유럽은 중세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배 권력 면에서 확고한 왕국이 없었다.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확고한 위상의 왕국의 잣대로 보면 안된다. 지금 유럽의 나라들은 중세에는 나라이기보다 지역, 지방 이름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럽은 인명(人名) 하나만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존(John)은 영국과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쟝이라 하고  독일에서는 요한, 동유럽에서는 얀, 스페인에서는 후안, 포르투갈에서는 주앙,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가 된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는 또 다른 오페라 <돈 후안>이 아니다. 이 오페라는 전설적인 스페인의 바람둥이 귀족 돈 후안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두 사람이 같다는 것을 모르면 헷갈리기 짝이 없다.
예를 더 보자. 영어의 찰스(Charles)는 프랑스의 샤를이다. 독일은 카를,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이다. 영어의 윌리엄은 독일의 빌헬름, 프랑스에서는 기욤, 이탈리아는 굴리예모, 스페인은 기예르모이다. 영어의 헨리(Henry)는 프랑스에서는 앙리, 독일은 하인리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엔리케가 된다. 


하나 더, 영어의 피터(Peter)는 프랑스에서 피에르, 스페인에서는 페트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이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니 근원을 올라가보면 성서가 원천이다.
또 하나의 뿌리는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였다. 그러니 중세 왕족들의 이름은 존, 헨리, 찰스, 윌리엄, 루이스, 에드워드, 리처드, 프레데릭 등이 지역마다 조금씩 변형되었을 뿐이다. 물론 이것들은 다 퍼스트 네임(First Name)이다. 패밀리 네임은 직업이나 출신 지역에서 유래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가드너는 정원사, 테일러는 양복쟁이, 스미스는 대장장이, 레이너(rainer)는 기후제 지내는 사람 등이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 ‘샤를 드 골’(골은 영어의 갈리아 즉 프랑스의 옛 이름이고 de 는 of)은  ‘프랑스 사람 찰스’란 뜻이다. 


인명만 잘 파악해도 유럽사는 이해가 쉽다. 과거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이 이것부터 가르쳐 주고 수업을 시작했다면 얼마나 유럽역사 시간이 재미있었을까. 아쉬움 안고 다시 안장에 올라 유럽 역사 속으로 페달을 돌린다. (다음호에 계속)      

 

무어인들이 예배 전 손발을 씻는 오렌지 정원(Patio de los Naranjos). 찬란했던 무어인시대의 흔적이다
과달키비르 강변의 파수꾼, 황금의 탑(Torre del Oro). 무어시대의 유물이다

 

차백성 편집위원  cbs61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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