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불통의 심산유곡 100리길

강릉 닭목령 ~ 삽당령 
휴대폰 불통의 심산유곡 100리길

닮목령과 삽당령은 백두대간 등산객에게는 친숙한 지명이다. 강릉 근처에서 해발 700m 전후로 아득하게 솟은 두 고개는 대관령(832m) 못지않게 높고, 깊이도 하염없다. 두 고개 사이에 솟은 화련봉(1069m)~석두봉(991m) 북쪽에는 장장 36km에 달하는 임도가 복잡한 능선과 골짜기를 한 자락도 놓치지 않고 옹골차게 휘감아 돈다. 도시가 지척인데 휴대폰이 통하지 않고 인적은 완전히 사라진 이 깊은 산속에서 바퀴의 무한 원운동과 가쁜 호흡만이 소음과 생기의 원천이다

 

삽당령~닭목령 간 100리 산길에서 간만에 트인 조망. 뒤편의 높은 봉우리는 강릉 남쪽의 만덕봉(1035m)이다. 그 오른쪽의 세 봉우리가 삼지창을 닮았다는 삽당령 이름의 유래가 됐을까


예상을 하고 들어서긴 했지만 휴대폰이 되지 않으니 갑자기 긴장감이 더해진다. 조금 전에 만난 산불감시 아저씨가 “요즘은 낮에도 출몰하니 멧돼지 조심해요!” 하는 말이 내내 머리속에 감돌아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상기운이 없나 민감하게 살피고 있는데, 만약 일이라도 생기면 실로 난감해진다. 순천 모후산에서 멧돼지와 조우한 후 혼자서는 산악라이딩을 아예 삼가고 있기도 하다. 임도에 진입하기 전, 이 이사에게 “멧돼지가 나올지 모르니 가능하면 같이 움직이자”고 당부 겸 부탁을 했지만 이 야생의 사나이는 ‘뭘 그런 걸 걱정하느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다.   
다행히 지도 앱은 작동을 해서 위치를 확인해 보니 이제 겨우 초입이다. 세상에, 도로와 연계되지 않은 순수 임도 구간이 36km나 이어진 곳이 국내에 얼마나 있을까. 등산로 하나 겹치지 않으니 인적이 있을 리 없고 양끝은 차단기로 막혀 있어 차량이 들어올 리도 없으니 완전히 자전거 차지이긴 하다. 
 

해발 700m의 닭목령 정상.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지만 대관령처럼 발달하지는 못했다

 

닮목령에서 삽당령으로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인 닭목령과 삽당령을 잇는 순환코스를 잡았을 때 고원지대와 심산유곡을 아우르는 특별한 코스를 상상하면서도 나와 이 이사는 “임도가 너무 길어 배터리가 걱정”이라고 함께 탄식했다. 과연, 기복이 많은 50km의 산악코스를 하나의 배터리로 완주할 수 있을까. 방법은 최대한 어시스트 강도를 낮추고 대신 다리 힘을 많이 써서 배터리 소모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출발지는 닮목령이다. 강릉시내에서 25km 남짓 떨어진 이 고개는 대관령, 삽당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강릉의 주요 길목이다. 정확히 해발 700m, 서쪽에는 고랭지 채소밭으로 유명한 안반데기가 고루포기산(1238m) 8~9부 능선에 펼쳐져 있다. 대관령과 마찬가지로 고개 북쪽(바다쪽)은 가파른 골짜기로 왕산천 상류를 이루고, 남쪽은 해발 700m 내외의 완만한 고원지대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에 속하는 이 고원지대는 고랭지채소밭과 강원도 감자원종장, 중요한 수목의 종자를 키우는 채종원(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 강릉지소)이 모여 있다. 지대가 높아 주변을 에워싼 1000m급 산들이 심심한 야산으로 둔중하다.
지형이 닭의 목을 닮아서 닭목령이라지만 어떻게 닮았는지는 오리무중이다. 한자로는 계항치(鷄項峙)라고 하는데 넓은 대기리 고원에서 강릉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여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건 아닐까 싶다. 대관령보다 낮고 짧은데 더 발달하지 못한 것은 고개를 넘어 서울 방면으로 산악지대가 더 험하고 멀어서일 것이다.
닭목령~삽당령 임도는 시작점이 삽당령 쪽이 해발 780m이고, 닭목령은 고개 아래 500m 지점이어서 삽당령에서 진입하는 게 그나마 다운힐 위주의 코스가 된다. 닭목령에서 삽당령까지는 백두대간 주능선 옆으로 대기리 고원을 횡단한다.
강릉에서 닭목령을 넘어 600m 가면 오른쪽으로 강원도 감자원종장이 나오는데 정문을 지나 150m 가서 왼쪽 시멘트길로 들어서면 고랭지밭 사잇길이다. 도중에 갈림길이 여럿 나오지만 꾸준히 직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천히 고도를 높여가며 고랭지밭 사잇길로 6km 가면 채종원 입구 임도차단기가 나온다. 잡초가 자라 있는 거친 길을 200여m 가면 다시 편안한 임도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고 다음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다소 힘든 오르막이 벌떡 서 있는데, 올라서면 이번 코스에서 최고점인 해발 940m 지점의 고개 삼거리다. 산불감시 아저씨를 만난 곳이 여기다. 채종원 직원도 마주쳤는데 혹시 귀한 종자를 반출할까 걱정되는지 출입금지 구역이라며 좋은 말로 설명했다.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면 미리 채종원에 연락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 강릉지소 033-648-8704).
하지만 바로 옆으로 백두대간 등산로가 지나가서 출입통제가 유의미한지 모르겠다.

닭목령에서 삽당령 가는 고랭지밭 길. 뒤편으로 고루포기산(1238m)과 풍력발전기가 도열한 고랭지밭 ‘안반데기’가 보인다
초록이 묻어날 듯 짙고 깊은 산길에는 인적이 아예 없다

 

삽당령에서 임도 시작, 언젠가 끝은 있겠지
채종원 940m 고개에서 100여m 내려가면 삼거리인데 왼쪽으로 계속 다운힐 하면 삽당령으로 내려선다.
삽당령은 닭목령과 지형과 분위기가 흡사하다. 주변 산의 생김새가 삼지창을 닮아 삽당령(揷唐嶺)이라고 했다지만 아무리 봐도 이름과 뜻이 통하지 않는다. 실제 그렇다면 고개 동쪽의 만덕봉(1035m) 주변 봉우리가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대동여지도>의 삽운령(揷雲嶺)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구름이 끼는 고개, 구름 속에 파고든 고개…. 높이는 721m로 알려져 있지만 고개에 설치된 수준점(측량을 위해 설치한 기준점. 정확한 고도와 경위도 표시)을 보니 685m이다.
백두대간을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지나 왼쪽(성황당 있는 쪽)으로 진입한다. 오른쪽은 두리봉(1034m)~만덕봉~칠성산(981m)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며 숲 속에 숨은 고랭지밭을 지나 해발 780m의 고개를 넘어선다. 낙엽송이 늘씬한 길목에 임도 차단기가 나오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100리 산길이 시작된다.
임도는 가능하면 수평으로 길을 내서 등고선처럼 들쭉날쭉 헤어핀 코너가 수없이 이어진다. 숲은 짙고 조망은 막힌 데다 인적마저 없어 세상과 동떨어진 비밀의 공간으로 들어선 것만 같다.

왕산리 삼거리를 지나 마지막 업힐 중이다. 소나무 뒤편의 능경봉(1123m) 아래로 대관령을 넘는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왼쪽 산자락 너머로는 “이제 다 왔다!”는 걸 알려주는 희망봉 같은 고루포기산이 살짝 드러났다

 

적막한 숲속을 질주하는 환상의 다운힐 14km
어느 순간 보니 휴대폰은 불통이고 인간의 손길은 고사하고 눈길이 미친 것이 언제인지 모를 원시림만이 사위에 가득하다. 한동안 내리막이던 길은 오르막으로 바뀌어 고도를 높여가는데 한없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길은 석두봉 바로 아래 해발 880m까지 올라섰다. 여기가 임도 구간에서는 최고점이다. 배터리를 아끼느라 어시스트 1~2단으로 올랐더니 체력적으로 다소 힘겹지만 상쾌한 공기 덕분에 기분은 가뿐하다.
이제는 도중에 왕산리로 하산하는 삼거리까지 14km에 달하는 다운힐이 기다린다. 삼거리가 해발 420m이니 고도차는 460m에 달한다. 거리에 비해 고도차가 작아 100% 내리막은 아니지만 이번 코스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구간이다.
나는 사진을, 이 이사는 동영상으로 서로를 찍어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행하는데 주로 내가 앞서 가서 좋은 포인트를 찾아 모델이 되어줄 이 이사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달린다. 한동안 앞서 가서 이 이사를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다. 멧돼지도 겁나고 해서 진행을 멈추고 있지만 10여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으니 연락할 방법도 없다. 펑크나 고장이 났나 싶어 덜컥 걱정이 된다. 아니면 아까처럼 갓 새순이 올라온 두릅을 따느라 시간 가는 줄 잊은 건가.

 
인간 야생마의 어이없는 실수
이 이사를 찾아 되올라가자니 배터리가 걱정되지만 도리가 없다. 별일이 아니길 기도하며 한참을 거슬러 올라 이 이사를 소리쳐 불렀는데 이윽고 대답이 돌아온다.
‘인간 야생마’ 이윤기와 10여년 간 국내외를 자전거로 돌아다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자전거는 넘어져 있고 그는 팔꿈치를 심하게 긁힌 채 바닥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여기서 넘어졌어요. 그 충격으로 동영상 카메라의 리모컨이 사라졌네요.”
별일 아닌 듯 말하지만 10여분을 이렇게 찾고 있었을 테니 얼마나 다급하고 짜증났을까. 하필 값비싼 부품이라 나도 함께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팔의 상처는 찰과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도로는 물론 험로에서도 수없이 라이딩을 하면서 나는 여러 번 낙차했지만 이 이사가 넘어지고 다친 건 처음이다. 노면이 거칠거나 급커브도 아니어서 도저히 넘어질 만한 곳도 아닌데 왜 넘어졌을까. 산악라이딩의 귀재인데, 특히 다운힐의 고수가.
“타이어 바람을 너무 많이 빼는 바람에 커브에서 타이어가 눌려 접지력을 잃은 것 같아요.”
철인 같던 그도 쉰을 넘기면서 몸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가 오는 모양이다. 손목이 좋지 않은 그는 노면 요철이 심하자 타이어 공기압을 빼서 충격을 줄이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바람을 너무 많이 빼서 지켜보던 나도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자전거는 이상이 없어 우리는 안장에 올라 다운힐을 계속 했다. 왕산리 삼거리에서는 다시 업힐이다. 닭목재 아래 임도 종점이 해발 500m이니 업힐은 심하지 않을 것이다.
군데군데 조망이 트이면서 대관령을 오르는 고속도로와 능경봉(1123m)이 웅장하다. 이윽고 산줄기 너머로 고루포기산의 풍력발전기가 보이자 ‘이제 다왔다’는 안도감이 몰려온다. 닭목령은 고루포기산 동쪽 능선에 있다.
산길을 벗어나 일정을 마무리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배터리를 아끼느라 힘을 많이 쓴 것도 있지만 역시 마음과 달리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언제까지 이렇게 산길을 누빌 수 있을까. 사실 몇 년 전에 체력과 안전 문제로 산악라이딩은 그만 뒀지 않은가. 그나마 이렇게 산길을 달릴 수 있는 건 전기MTB 덕분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력이 떨어질수록 새삼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리지 않는 이동의 자유와 스릴을 감당할 자신감을 다시 찾아줬으니…. 

 

쭉쭉 뻗은 낙엽송 숲을 지나는 삽당령(685m)
100리 임도에서 가장 저지대에 있는 왕산리 삼거리(해발 420m). 삽당령에서 27km 들어온 곳이다

 


여정
닭목령에서 대기리 고랭지밭과 채종원을 거쳐 북쪽 임도를 통해 순환하면 총거리는 50km에 이른다. 여유 있게 4시간반 정도는 잡아야 한다. 임도에서는 휴대폰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유의한다. 닭목령에서 강릉 시내 방면으로 중간지점인 성산면 구산리에 있는 성산막국수(033-644-8001)를 추천한다. 강릉 시내에서 30분 거리여서 시내나 바닷가에 묵어도 좋다.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