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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3(칠곡 · 성주 · 달성 · 고령 · 합천 · 의령 · 창녕)자유대한을 지킨 피의 방어선, 낙동강 허리

낙동강3(칠곡 · 성주 · 달성 · 고령 · 합천 · 의령 · 창녕)
자유대한을 지킨 피의 방어선, 낙동강 허리


칠곡을 지나면 낙동강은 더욱 비장해 진다. 유장한 물줄기 아래 가라앉은 고난의 역사는 고희를 앞두고 더욱 아프다. 아는지 모르는지 강은 흘러간다. 낙동강의 피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기억도 자꾸 가물가물 멀어진다. 달성 사문진 나루로 올라오던 물산과 주막의 풍정을 기억해 내려는 노력만큼 낙동강이 겪은 민족 수난사도 잊어선 안 된다.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 군번줄 하나 없이 묻힌 국군을 찾아내려는 안간힘을 낙동강은 지켜보고 있다. 그저 진초록 산하를 즐거워만 할 수 없 이유가 한반도 남쪽, 호랑이 허벅다리 낙동강 여기쯤에 있다

 

 

낙동강(유로연장 510.36km, 유역면적 23,384.21㎢)
-  ‌국가하천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 ~ 낙동강하구둑(외곽선)

- 지방하천 :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용수골 ~ 낙동강(국가하천기점)
- 발원지 : 태백시 황지
- 최장발원지 : 태백시 화전동 싸리재, 천의봉(1443m) 북동 능선 근처
- 지류 : 781개 지류 하천,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다.
〔한국하천일람, 2012. 국토교통부〕

 

넉넉한 물을 모아준 보는 서럽다. 칠곡보 바로 강 건너 백포산이 기차 운행시야에 방해가 된다고 왜관역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석전리에 지어졌다. 1905년의 일이다(칠곡 왜관)

 

새벽부터 달려와 왜관을 떠나 남으로 향한다. 6·25 전쟁에서 워커중장이 지휘했던 낙동강방어선을 따라서다. 왜관전투는 하도 처절해서 왜관철교를 폭파한지 닷새 만에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넌다.
일본 요코다와 가네다 공군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 29대가 왜관 서북방 67㎢에 26분간 900톤의 폭탄을 투하한다. 인민군 3만 명이 죽었다. 1초에 19명, 1분에 1140명이 전사한 셈이다. 인민군은 보복으로 미군을 찢어 죽이기까지 했던 전투였다. 국군도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칠곡은 6·25때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관은 80%가 초토화되었다. 



외인(外人)들의 흔적, 왜관과 미군부대 후문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왜관’이 여러 곳 있었다. 부산 왜관이 가장 컸고 서울 남산 아래에도 있었다. 약탈자 왜구에서 상거래를 할 수 있는 파트너로 왜인을 인정하자, 그들이 머물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원래 왜관은 강 건너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다. 지금의 왜관이 생겨난 것은 순전히 경부선이 낙동강을 건너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왜관역을 구 왜관에 설치하면 칠곡보 바로 건너 백포산이 기차운행 시야를 방해해서다. 결국 대구 쪽에서 보면 강 건너기 전에 왜관역을 지어 강 동편 칠곡군 파미면 회동에 신도시를 만든 셈이다. 1905년의 일이다.

왜관의 숙명이 그러한가. 왜인들의 물류창고인 왜물고(倭物庫)와 왜관 미군기지는 묘한 연관이 있다. 미군 캠프 캐롤은 전쟁비축물자 저장기지다. 모두 낙동강 주운의 혜택과 대구공군기지가 인접한 것도 그 이유다. 나도 군대시절(공군수송관리실) 군용차량을 기차에 실어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특히 왜관은 ‘요주의’ 지역이었다. 왜관을 그냥 지나가면 다행이지만 한 동안 정차하는 경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차량절도꾼은 군용물 장물아비들의 비호 아래 눈 깜짝할 사이에 바퀴며, 배터리나 주요 부속 따위를 떼어내 사라져 버리기로 유명했다.

어디나 미군부대는 후문 쪽이 소소한 음료, 먹거리, 전기제품 같은 미제들이 흘러나오는 뒷구멍이 되기에 적합했다. PX 철조망에 매달려 살아가는 ‘미제아줌마’들의 ‘나와바리’였다. 왜관도 후문이 예전만은 못해도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남북 화해는 왜관 경기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종전선언’이 점쳐지는 이때, 이미 ‘주한미군감축설’은 먹구름처럼 다가온다.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은 가족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에 이른다. 2만2000명 이하로는 감축할 수 없다는 ‘국방수권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지만 그대로 따른다 해도 6500명은 감축 가능한 숫자다.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트 3국이 미군주둔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이니 왜관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한국 사전배치물자를 철수하고, 미국 조지아주 포트스튜어트 기지 소속인 순환배치군 4000명이 감축 1순위이니 말이다.

서글픈 얘기로 말이 길어졌다. 왜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300년 전 광주목사를 지낸 이원정이 돌밭마을(석전리)에 정착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후손들에게 “강바닥이 높아져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돛대가 마을에 앉아서도 보이면 다른 돌밭으로 이사를 가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천정천인 낙동강에 모래가 쌓여 홍수가 나면 떼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선견지명이었다. 진짜로 낙동강 배들의 돛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 초기부터였다니 1920년대 어간이겠다.

6·25의 상처를 고스란히 몸으로 떠안아야 했던 칠곡. 경부선 상행열차도 왜관철교에서 낙동강과 헤어진다(칠곡 왜관)
왜관읍에 있는 캠프 캐롤 후문. 미군부대 후문은 부대 담장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망이자, 생존이었다(칠곡 왜관)
미군부대 후문 근처에서 만난 셋방 광고. 투룸, 쓰리룸은 알겠는데 ‘미투’는 뭐지?(칠곡 왜관)

 

참외만큼이나 ‘사드’로 유명해진 성주
달성군 하빈에서 성주로 건너가는 성주대교다. 성주는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1430m)이 등을 보이고 돌아 앉아 있는 형세다. 예로부터 ‘반촌이 많고 역사에 큰 사건도 변화도 없는’ 조용한 고을이었다. 성산 이씨, 성산 여씨, <삼국사기> 도미의 전설로 유명한 성주 도씨 같이 여러 성이 관향으로 성주를 삼고 있는 것만 봐도 반촌이다. 낙동강으로는 대가천이 물을 보태고 1950년대부터 수박이 유명하던 곳이 1970년대를 지나면서 참외의 주산지로 돌아섰다. 척박한 토양에도 재배가 가능하고, 수확기 출하량을 조절할 수 있으며, 부피가 작아 흠집 날 염려가 없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원래 경부선 철도를 대구에서 곧바로 백천을 따라 김천으로 연결하려 했었다. 한 개(大浦) 나루 근처의 양반들이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낙동강 쪽 지반이 연약해 교량가설이 어려워 왜관 쪽으로 놓여 졌다는 설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성주가 최근에 더 익숙한 이름이 된 건 ‘사드배치’ 지역으로 선정되고 나서다. 휴전선에서 260km나 떨어져 있고, 한반도 대부분을 커버하며, 성주가 그나마 중국에서 가장 멀다는 이유였다. 안보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성주 사람들 입장에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일단 사드는 들어왔다. 나라의 영공을 지키지 않을 도리도 없다. 이 땅 어딘가는 받아 들여야 하고, 당연히 그 지역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우연일까, 이름이 ‘롯데스카이힐성주CC’다. 스카이힐이니 ‘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언덕’ 아닌가. 게다가 초전면(草田面)이니 한자로야 다르지만 이왕 배치된 사드가 150km 고공에서 적 미사일을 초전에 박살내주기 바란다. 롯데는 또 무슨 죄인가. 남양주에 있는 국방부 부지와 교환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소학교까지 롯데불매운동이 벌어졌다. 111개 중국 롯데쇼핑 매장은 95개가 문을 닫아, 2조원의 손실을 낸 채 중국진출 11년은 허물어진 꿈, ‘중국몽’이 되었다.

 

강정고령보 직전에 있는 강정취수장. 먹는 물의 보호는 절대적이다. 자전거도 새장에 갇힌 채 지나가야 한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고(달성 다사)
사문진주막에서 쉬어가는 것은 낙동강 중하류 여정에서 귀한 쉼표다. 참 오래 살아남은 팽나무 노병,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지나온 500년이다(달성 옥포)
사문진나루의 상징이 되어버린 피아노. 미국인 선교사가 돛단배로 들여온 피아노를 ‘귀신통’이라고 불렀다는 구한말 조선 사람들. 100년 남짓한 옛 이야기다(달성 옥포)
트랙터까지 드나드는 비닐하우스. 한 철 농사가 끝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달성 논공)

 

금호강을 품에 안는 경치, 화원·옥포
강정고령보에 두 바퀴를 얹는다. 금호강이 포항에서 영천·대구를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이다. 한때 금호강의 오염은 지독해서 곡창 강창벌은 천수답처럼 되기도 했었다. 거의 10리나 되는 모래톱은 가늘고 길게 드러누웠다. 모래가 퇴적되는 지점이다. 화원(花園)이다. 신라왕이 꽃구경을 왔다가 황홀경에 취해 죽게 되어 그 자리에 묻혔다는 말이 전해온다. 다시 사문진교를 건너 사문진 주막촌에서 잠시 배낭을 벗어 놓는다.

사문진 나루는 낙동강 최대의 물류거점이자 세종대왕 시절 왜물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근처 인흥사로 가는 관문이라 사문진(寺門津)이라는 설과 소금배와 물산이 드나드는 모래 포구라 사문진(沙門津)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어쩌면 다 맞는 말이다. 500년 팽나무 고목 그늘에 복원된 주막은 비교적 꼼꼼하다. 초가의 벽에 그려진 풍속화의 세필 터치가 야무지고, 소원을 비는 창호지가 부적처럼 꿰어져 있다. 1900년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 보탐 부부가 최초로 피아노를 배로 들여와 대구 약전골목으로 옮겼는데 이를 처음 본 인부들이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1932년 이규환 감독이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벼랑길을 올라 무심사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풍경은 스님의 독경소리와 잘 어울린다. TV문학관 ‘바라암’의 촬영지이기도 한다(창녕 이방)

 

곰탕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현풍 곰탕
금포천을 끼고 있는 옥포 마갯들은 도시 근교 농업이 집약된 벌판이다. 온통 비닐하우스 천지다. 하우스 안으로 트랙터까지 드나드는 기업농 수준이다. 도시란 이런 수고 덕분에 푸성귀를 손쉽게 얻어 살아갈 수 있다. 

점심의 이정표는 곰탕으로 정한다. 해주·나주와 더불어 전국3대 곰탕에 든다는 현풍곰탕이다.  자전거길과도 그다지 엇 나지 않는다. 나름 소문난 집을 찾으려면 원조전쟁에 이긴 집을 찾아야 한다. ‘원조현풍박소선할매집곰탕’ 꽤나 길기도 한 이름이다. 소송까지 가서 찾은 이름이다. 일미식당 할매곰탕 맛이 구마고속도로 건설 인부들의 입소문과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전국으로 알려졌다. 맛의 깊이를 몰라서일까 허기만 채우고 또 갈 길을 재촉한다.

다람재에 올라 정자에서 쉬어간다. 제법 큰 고개다. 김지하 시인의 ‘현풍을 지나며’도 아마 이 고개에서 강물을 바라보아야 나올 법한 선시에 가깝다.
 

산 아래 구름 있어 / 현풍이다 / 바람도 바람 / 
검은 바람 / 내 배 아래 바람 / 누이 바람 / 산위에 / 
물 있고 / 물아래 산 있어 / 기이하다 / 오늘 / 
여기 지나는 / 인연이 기이하다 / 훗날 / 
다시 오는 날/ 흰 구름이 / 발끝을 적시리 / 
산 위에 / 내 넋 높이 떠나리 
(김지하, ‘현풍을 지나며’ 전문)


다람재에 터널을 뚫기 시작했으니 머지않아 오르막의 수고를 던 채 도동서원에 바로 닿으리라.  도동서원은 거유 김종직 문하인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서원이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계보다.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의 제자가 정암 조광조이니 그가 바로 이미자의 노래로 익숙한 ‘정동대감’이다. 

정적 속에 굴러가던 자전거는 구지면 ‘대구국가산업단지’를 만난다. 우선 그 광활함에 놀라고, 겨우 몇 업체만 들어서고 남은 땅의 황량함에 더 놀란다. 자동차 성능계측을 위해 달리는 차량의 질주 소음이 아니었다면 따분하게 고요했을 것이다.

잠시 자전거길에서 벗어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묘소를 지난다. 임진왜란에서 관군이 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대항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다. 세계사를 살펴봐도 관군이 패했는데  백성이 스스로 군사가 되어 싸운 의병은 유례를 찾기 어렵기에 더욱 귀하다. 


무심사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그 유장함
우곡교를 지나 무심사로 가는 길은 고요한 위로다. 목탁에 맞춰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스님의 목소리가 녹음일망정 낙동강 벼랑에 맑게 흩어진다. 무심사에 올라보면 굽이굽이 낙동강의 한 모습을 본다. 고령에서 흘러 내려오는 회천과 낙동강 사이에 우곡면은 소 무릎뼈 모양을 한 반도의 형세다. 169m에 불과한 산이지만 강바닥에서 직벽으로 솟아오른 자리에 용케도 절이 앉아 있다. 그러면 그렇지. ‘TV문학관’에서 김원일의 소설 <바라암>을 촬영한 무대이기도 하다.

다시 이 언덕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본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 강의 오염에 걱정이 많다. 4대강 사업이 버려놓은 결과라고 뭉뚱그린다. 20년 전 신문이나 책에서 만나는 낙동강도 비관적이기는 매 한가지다. ‘낙동강오염벨트’와 ‘썩어가는 낙동강’, ‘낙똥강’이라는 비하가 대책 없이 서글프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고, 썩어가는 곳이 있다면 도려내야지. 이 강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아닌가.

그린 코리아, ‘밝은 미래로 달성보가 여러분을 인도합니다’는 카피가 어쩐지 색이 바랬다. 물·생명 그리고 인간,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은 없는데(달성 논공)
보리를 수확하고 여름 파종을 위해 보리밭을 불태우고 있다. 타닥타닥 보리대궁 타는 소리 참 오랜만이다. 가까이 가서 코를 벌름거렸다(달성 현풍)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마늘을 수확하고 있다. 작황은 나빴다. 아직 마늘 금(값)은 잘 모른다(달성 현풍)
다람재를 애써 올라 낙동강을 조망하는 시원한 바람, 그 고마움도 잃어버릴 것이다. 터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달성 구지)
달성 구지의 국가가업단지. 거창한 마스터플랜에 비해 아직 비어 있어 제 모습을 갖추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달성 구지)

 

우리나라 최대의 습지 보물,  우포늪
합천창녕보를 건너 합천 청덕으로 강 따라 내려가는 정해진 길을 벗어난다. 작년 이맘 때 ‘황강’ 여행에서 가본 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최대의 습지 ‘우포늪’을 낙동강 종주에 넣을 심산에서다. 이방면으로 접어든다.

이방초등학교 앞에는 색다른 안내가 발길을 잡는다. ‘산토끼 노래발상지’다.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아는 노래 ‘산토끼’는 오랫동안 작자 미상의 구전동요처럼 불렸다. 그러나 1928년 이 학교(이방공립보통학교)에 재직 중이던 이일래(1903~1979) 선생이 만든 곡임이 1975년 발간된 <조선동요작곡집(1938)> 영인본에서 밝혀졌다. ‘뒷동산 토끼처럼 자유를 누리고, 민족혼을 일깨우자’고 만든 동요였기에 일제는 금지곡으로 처분했다. 

67번 국지도와 1080번 지방도 따라 우포늪에 들어선다. 우포늪은 1983년 한 식물학자에 의해서 1억4천만 년 전에 만들어진 국내최대 자연습지로 확인되었다. “우리 동네 어느 면은 물이 반, 늪이 반이다.”라는 공무원의 말을 듣고 알아낸 것이다. 이방면 등 3개면에 걸친 75만평 5개의 늪이니 여의도보다 조금 작다. 식물 480여종, 조류 62종, 어류 28종 등 수서곤충,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까지 다양한 식생이 존재한다. 1998년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등록되고, 2011년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524호)이 되었다.
우포늪 서단을 돌아서 다시 적포교로 돌아오는 10여km가 아깝지 않다. 이홍희 여행가가 말한다. “아 재미난 이정표네요. ‘장마면’이라, 큰물 지겠는 걸….” “그럼요. 그 옆에 ‘진창리’란 동네도 있어요. ‘유어면’도 있구요.” 그렇네. 장마가 지면 진창이 생기고, 물고기도 헤엄칠(游漁) 게 아니겠는가.

대구시내 중학생들이 연수차 왔다가 도동서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 예절교육을 비롯해 의무적으로 2박3일 연수를 한다(달성 구지)
낙동강에서도 종종 국토종주 팀을 만날 수 있다. 한전 광주전력 직장동호회 팀이다(의령
남지개비리길 입구의 정자. 이 싱글트랙은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도 좋다. 개비리길의 누렁이 전설을 곱씹어 보면서 사색할 수 있는 최고의 구간이다(창녕 남지)

 

진등고개, 박진전투, 잠시 땀 흘린다
적포교를 건너면 의령군 낙서면이다. 낙동에 대칭하는 낙서를 참으로 오랜 시간 기다려 만났다. 정곡제방을 지나는 20여리의 강둑길을 밋밋하게 가던 두 바퀴는 박진고개를 만나면서 거친 숨소리로 변한다. 시멘트벽 위 수많은 음각 글씨는 오르막의 수고와 희열을 새기고 있다. 내리막길을 달려 박진교를 건넌다. 6·25 창녕지구 전투 속에 박진전투는 ‘박진전쟁’으로 그려져 있다. 때마침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의식이 오늘 진행된다. 기어이 ‘6·25’를 ‘한국전쟁’이라고 고쳐 부르는 겉멋이 참 거북한 세태다. 왜 국가보훈처가 ‘6·25전쟁’이라는 단어를 공식으로 쓰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6·25’ 우리는 그 날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8·15’ 광복의 기쁨처럼 말이다. Korean War를 그대로 번역한 ‘한국전쟁’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객관의 자리에서 서 있는 듯 엉덩이를 빼고 진술하는 ‘과객(過客)’의 용어다. 

이름도 어여쁜 ‘청아지, 영아지’ 마을 이정표로 접어든다. 자전거는 산길로 가라고 안내하지만 벼랑으로 난, 걸어가는 길 안내가 유혹한다. ‘남지개비리길’ 6.5km이다. 한두 번 계단에서 자전거를 업는 수고만 빼면 매력 만점의 싱글트랙이다. 

개비리길의 유래가 감동이다. ‘비리’는 벼랑의 영남사투리다. 옛날 영아지 마을 황씨 집 개 누렁이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젖이 10개뿐이라 막내는 젖배를 곯아 ‘조리쟁이’(못나고 볼품없는 새끼를 뜻하는 사투리)가 되어 산 너머로 시집간 황씨 딸이 친정에 왔다 데려다 키웠다. 하루는 어미 누렁이가 젖을 물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누렁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한번 젖을 먹이려고 벼랑길로 오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그 후로 산길을 마다하고 ‘개비리길’이라 이름 짓고 다녔다는 것이다. 누가 ‘개 같은 놈’이라고 함부로 말할수 있겠는가. 개를 참으로 사랑한 시인은 말한다.
 

여우꼬리는 유혹 / 뱀꼬리는  음흉 / 
고양이 꼬리는 도도 / 
사람의 꼬리는 야비 / 
개의 꼬리는 사랑
(서기흔 시집 <오마이독 오마이갓>  중에서)


자전거가 교행할 수 없으니 당연히 관청은 추천할 리가 없다. 그 중 3km 구간은 자전거를 끌고 사색하면서 지나가더라도 그 값을 한다. 이내 남지 읍내가 보인다. 낙동강 하안 충적평야에 자리 잡아 농산물이 풍부하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이 예로부터 컸다. 무거운 발을 씻고 동행과 나누는 술 한잔에 객창의 밤이 나른하다.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경상북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낙동강역사문화 탐사, 신정일, 생각의 나무, 2003
3. 정충신의 밀리터리 카페, 문화일보, 2018. 6. 1.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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