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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제7화 스페인인류 최초의 걸작 알타미라 동굴 벽화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제7화 스페인

50년 기다림 끝에 드디어 보는구나
인류 최초의 걸작 알타미라 동굴 벽화


스페인 북부 기행을 시작한다. 북부는 동(東)에서 서(西)로 바스크(Basque), 칸타브리아(Cantabria), 아스투리아스(Asturias), 갈리시아(Galicia) 등 크게 넷으로 나눈다. 이번 호는 바스크와 칸타브리아를 달린 기록이다. 바스크 지방에서 또 다른 스페인을 경험하고, 인류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부터 중세의 건축물과 가우디의 유산까지 숨 돌릴 틈 없는 미학의 제전이 펼쳐진다

50년 그리움 끝에 드디어 앞에 섰다. 알타미라 박물관

 

스페인 땅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방대했다. 기후대(帶)에 따른 자연경관도 다양해, 이베리아 반도가 ‘소대륙(小大陸)’이란 말을 실감했다.
이제까지는 주로 마드리드 남쪽을 여행했다. 안달루시아 평원 위로 펼쳐지는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의 눈 덮인 봉우리는 장엄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아프리카를 지척에 둔 지중해의 매력적인 해변들은 유럽 사람들의 여름휴가 일번지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그곳은 800년을 지배했던 아랍의 영화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북부로 올라오니 분위가 완전히 바뀐다. 아랍의 흔적은 거의 볼 수 없다. 마치 스페인 특유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산간지방에는 험한 고산준령들이 늘어서 있다. 해변은 자연의 걸작, 해식애(海蝕崖)가 절승을 이룬다. 이 지역은 나에게 미지의 땅, 이제 막 스페인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마저 들게 했다. 

나는 이제 이런 ‘낯선’ 길을 달릴 것이다. 바스크의 빌바오에서 시작하여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피레네 산맥의 숨 가쁜 언덕길과 깎아지른 대서양의 해안길,  여행자의 영혼을 울리는 ‘산티아고 순례길’ 오래전부터 갈망하던 바로 그 길이다.
신자(信者)는 아닐지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옛날 야고보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러갔던 길을 두 바퀴로 달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스페인 여정을 마무리 할 예정이다.



스페인 속의 이방인, 바스크
바스크 지방(Basque Country)은 스페인에서 이단(異端)이다.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은 아프리카 북부에서 건너온 이베로(Ibero, ‘이베리아’의 기원) 족과 피레네산맥을 넘어온 켈트족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바스크 인들은 수천 년 전부터 피레네산맥 인근지역에 따로 모여 살면서, 고유 언어인 에우스케라(Euskera) 어를 사용해왔다. 로마시대에서 프랑코 독재정권까지 바스크 지역은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면서 독특한 문화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피비린내 나는 무장투쟁의 결과였다.

‘ETA(Euskadi Ta Askatasuna, 자유조국 바스크)’ 조직이 결성된 것은 프랑코 독제시대였다. 이들은 바스크를 억압했던 철권통치에 맞서 싸웠다. 급기야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부탁해 무장투쟁의 본산 게르니카 마을을 공중폭격,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이를 그린 것이 피카소의 역작 <게르니카>이다.

바스크는 에우스케라 말로 ‘엘 빠이스 바스코(El Pais Vasco, 바스크의 나라)’라고 한다. 지금도 공공연히 이렇게 쓰고 있다. 인종, 문화 등이 남부와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특유의 전통 복식에 베레(beret) 모(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전통 놀이인 ‘통나무 썰기’도 그들만의 전통이다. 현재도 스페인어 아닌 바스크 고유의 말이 공식적으로 통용된다.  이 지역에서 바스크어를 할 줄 모르면 공무원 등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고 한다.

지형적으로는 대부분 산악에다 북쪽은 대서양 비스카야(Vizcaya) 만(灣)에 면해 있다.  이 지역은 철광석 등 지하자원은 물론 산림, 어업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산업이 발달해 한동안 호시절을 구가한 적이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품고 있는 카탈루냐 지방과 더불어 스페인에서  부유한 지방에 속했다. 지금 스페인의 ‘뜨거운 감자’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지방이 따로 살림을 차리겠다는 것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스크 지방이 같은 문제로 스페인 중앙정부를 골치 아프게 했다. 

뿌리 깊은 과거사도 있지만, 두 지역 모두 경제적 부의 편차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2011년 ETA는 무장투쟁의 종식을 선언, 갈등은 일단 봉합 상태이다.

업다운이 심한 북부 대서양길. 바람도 강하고
산티야나 델 마르 구시가지의 공용샘터. 중세 분위기가 물씬하다

 

어느 나라나 지역 갈등은 있기 마련인가
스페인은 국토수복 500년을 기념하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했다(몬주익 언덕에서 황영조 선수의 쾌거!). 그러나 ‘마드리드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한 번도 올림픽이 열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역시 나라를 가르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과 남의 지역감정이 심각하다.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유한 지역이 “왜 우리가 열심히 일해 낸 세금으로 남부 ‘게으름뱅이’들을 먹여살려야하느냐고 볼멘소리가 많다. 나폴리, 시실리 등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마피오조(마피아 조직)를 암묵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영국의 경우도 스코틀랜드가 줄기차게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영국을 여행할 때 실제 겪은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쓰던 돈을 런던에서 받지 않아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고성’ 끝에 해결은 되었지만, 그러고 보니 스코틀랜드 파운드와 잉글랜드 파운드가 도안이 약간 달랐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인종, 언어, 경제 등의 문제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정식이혼’ 해서 서로 마찰음 없이 잘 살아가는 성공사례를 남긴 케이스도 있다. 최근의 사례로는 필자가 10년의 세월을 보낸 아프리카 수단이다. 남수단(South Sudan)이 독립함으로써 둘로 쪼개졌다.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문제. 쥬바(Juba)를 중심으로 남부에 대규모 유징(油徵)이 확인되고서부터 갈등이 격화되었다.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나름 외국의 지역감정은 대충 알고 있다. 여행자이니만치, 시치미 뚝 떼고 이 지방 저지방 아픈 데를 찌르는 질문을 해본 결과이다. 어느 나라나 지방색은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굳이 성악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갈등하고 싸워 ‘정복’하는 것이 인간 바닥에 깔린 본질이기도 하다.“왜 우리만 이 작은 나라에서 지역감정으로 대립하나…”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축의 도시, 빌보(Bilbo)
바스크 여행은 빌바오(Bilbao)부터 시작했다. 바스크 어로는 ‘빌보’라 한다. 이 사람들에게 짐짓 모른 척 하며 '빌보'를 써보았다. “빌보가 고향입니까?” 혹은 “빌보에서 추천할만한 호스텔이 어디 있나요?” 하며 상대의 표정을 살핀다. 무심한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윙크를 하며 호감을 표시했다. 여행이 무료할 때 이런 것들이 '차백성표 양념’이다. 

도심에 들어서니 새로 신축한 독특한 외관의 빌바오 구장이 눈에 확 들어온다. 6만 명을 수용하는 큰 구장이다. 인구 35만의 도시에 축구장 하나가 이렇게 크다니! 이들의 축구 사랑은 이것만 봐도 알만하다. 1898년 창단된 명문 구단 ‘아슬래틱 빌바오’는 바스크 인들의 자부심이다. 

빌바오는 신개념 건축으로 한때 ‘암울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태어난 도시이다. 나는 건설회사에서 오래 몸담았던 까닭에 주택 건설이나 도시 개발에 관심이 많다. 도시 건축에서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 라는 용어가 있다. 문화와 예술이 도시 개발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데,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시설인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 등을 유치하여 도시의 부흥을 이끈 결과를 말한 것이다.


‘빌바오 효과’
70~80년대 빌바오는 지금과는 딴 판이었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철강, 조선업의 쇠락으로 도시는 활기를 잃고 사회적으로도 불안했다. 사람이 떠난 폐가도 많았고 녹슨 고철더미가 여기저기 산을 이루었다. 시당국은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Bilbaoria2000(빌바오리아 2천)’이라는 도시재건을 위한 기구를 발족했다. 때마침 미국의 구겐하임 재단은 유럽에 미술관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빌바오 도시재건 팀과 구겐하임 재단은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캐나다 출신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프랭크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1989년 수상한 명망 있는 건축가였다. 국내에서도 쟁쟁한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알베르토 팔라시오(Alberto Palacio) 등이 도왔다. 이들은 한마음으로 도시재건 설계에 매진했다. 

기념비적 건물은 한번 지으면 100년, 200년을 넘게 간다. 유럽인들의 안목이다. 설계에 시간이 걸리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시당국의 판단은 옳았다. 그 결과물로 1997년 네르비온 강변(Rio Nervion)에 거대한 구겐하임 미술관(Museo Guggenheim  Bilbao)이 탄생, 도시의 이미지를 확 바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빌바오에 와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들르지 않는다. 미술관을 보러 빌바오에 오는 것이다.


건물 자체가 예술품
나의 첫 느낌은 지금까지 본 여타 미술관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풍스럽고 과거지향적인 종전의 개념을 뒤엎어버렸다. 우선 미래지향적이고 초현대적이며 엄청난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켄셉트조차 과거 산업 폐기물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이런 대형 미술관을 지은 것이다.
마침 햇살을 받아 외관은 수천마리의 은빛 물고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바로 옆에 강이 흐른다. 프랭크 게리가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고기를 보며 받은 영감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비늘처럼 보이는 최첨단 소재 티타늄 조각들로 외관을 치장했다. 


무수한 티타늄 조각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된 강철못의 개수는 26만4천개. 티타늄과 못의 틈은 아스팔트의 원료인 역청으로 막았다. 철골(鐵骨) 표면에 특수 광물섬유를 덧입혀 장시간 화재에도 건물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했다.
자연친화적인 설계와 현대 건축술이 만나 미술관 자체가 설치미술 작품이 되었다. 건물 앞에 모성을 상징하는 대형 거미 상, 마망(Maman)이 곧 기어갈 태세를 취하고 있다. 징그러운 느낌은 들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 웅장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실내 광장의 높이는 무려 45m! 유리천장으로 자연 광선이 쏟아져 내린다.
미술관 전시품도 파격적이다. 압권은 두께 30cm의 철판이 미로처럼 이어져있는 작품이다. 과거 이 지역의 화려했던 철강산업을 상징하고 있다. 좀 과장하면, 큰 배 한척은 만들 수 있는 철판이다. 아마 전 세계 미술관 작품 중 가장 무거울 것 같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형 작품. 작품치고는 투박하다
6만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규모의 빌바오 아슬랙티스 구장

 

빌바오 vs 나오시마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니 일본 시코쿠에 있는 나오시마(直島)가 떠올랐다. ‘모방의 천재’ 일본인들이 빌바오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 했다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의 좁고 긴 바다를 ‘세토 내해(瀨戶 內海)’ 라고 한다. 이 잔잔한 바다 위에는 수많은 섬들이 흩뿌려져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오시마이다. 둘레가 16km이니 크다고 할 수는 없다. 젊은이는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사는 전형적인 시골 어촌이었다. 한때 '바다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불릴 정도로 환경오염의 폐해가 심각했다. 하지만 교육, 출판 사업을 주로 하는 베네세 그룹과 건축가 안도 타다오(安藤忠雄)가 손을 맞잡았다.


죽어가던 섬이 ‘자연과 빛’ 이라는 주제의 예술의 섬으로 변신했다. 특별한 건축이 공간에 매력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빌바오 효과’의 대표적인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한해 50만 명이 ‘문화와 예술의 섬’을 찾아오고 우리나라에서도 나오시마 패키지 여행상품이 있을 정도다. 안도의 작품이 우리나라에도 많아서일까. 제주도에 본태 박물관(Bonte Museum)이나 글라스 하우스, 원주에 뮤지엄 산(Museum SAN) 등 여러 곳에 있다.

안도는 젊은 시절 프로 권투선수에서 피나는 독학으로 건축학을 공부했다. 후일 프리체커 상을 받는 등 세계적 건축가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건축물의 목적과 재료, 공간, 주변 환경의 관계설정을 중요시여긴 그는 주로 미술관, 박물관, 문학관 등을 설계했다. 일찍이 친자연적인 요소인 물, 광선, 하늘 등의 개념을 도입한, 그 방면의 선구자이다. ‘빌바오의 설계자’ 프랑크 게리와 통하는 점이 많다.
‘빌바오’와 ‘나오시마’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지만 시공(時空)을 넘어서 설계자와 설계자의 기본개념과 결과는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미술관의 상징인 거미 조형물, 마망
빌바오 시청앞. 시공무원들이 미술관을 유치해 빌바오를 살렸다

 

칸타브리아 지방
“까마득한 옛날,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발견된 곳이 칸타브리아 지방이다. 대서양과 면해있고 내륙으로는 산림이 우거진 국립공원이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한다. 산과 숲과 바다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기에 적합한 조건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대서양 해변을 따라 아름다운 도시들이 줄지어 있다.


산탄데르(Santander)는 인구 15만의 칸타브리아의 주도(州都)이다. 과거 로마인들이 ‘포르투스 빅토리에(승리의 항구)’로 건설해 지금까지 내려오니 역사가 깊다. 현재의 ‘칸타브리아’란 이름은 1982년까지 ‘산탄데르’라 불렀을 정도로 이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산탄데르는 자연경관, 특히 해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북부 스페인에서는 여름 휴양도시로 첫 손가락을 꼽는다.
자전거도로가 해변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도시를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도로를 따라 막달레나 반도(Peninsula de la Magdalena)에 들어가니 막달레나 궁전(Placio de la Magdalena)이 위풍당당 자리 잡고 있다. 입장료가 없어 좋았다. 그러나 자전거는 입장 불가! 마침 자전거를 타고 온 일단의 그룹이 있어 그들의 자전거와 함께 묶어두고 도보로 입장했다.


이 궁전은 산탄데르 시가 왕실에 헌납한 것으로 1930년대까지 매년 왕족들의 여름별장으로 이용되었다. 이제는 여름동안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하는 ‘아카데믹’한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나는 이런 곳에 오면 원주민이나 이곳에 여행 온 외지인들과 대화하기를 즐긴다. 이 궁전은 수백 년 혹은 그 이상 이곳에 존재하겠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만은 ‘애마의 안위(?)’가 걱정되어 속보, 아니 뛰다시피 경내를 돌며 사진만 몇 장 찍고는 바로 나오고 말았다. 이럴 때가 바로 ‘홀로 여행’의 맹점임을 절감하면서…



‘세 가지 거짓말’을 하는 마을
인구 1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 산티야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에 유명한 것이 둘 있다.
첫째는 마을 이름이 ‘세 가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마을은 바닷가(Mar)도 아니고 성스럽지(Santi)도 않고, 평지(Llana)도 아니다. 그저 내륙에 있는 중세풍의 작고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 마을이다. 특징이라면 영화 세트장으로 만든 마을로 의심이 들 만큼 완벽하게 중세마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 했다.


나는 여행 중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이 골목 저 골목 다 돌아보았다. ‘관광용 세트’인지 알아보려고. 모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도 사는데 별로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이 찾아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호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곳에 와 보고는 “스페인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 극찬했다. 그는 <벽>이라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고, 헤밍웨이만큼이나 스페인을 사랑했다. 
시당국은 보물 같은 구 시가지를 보존하기 위해 외곽에 외부차량을 위한 대형주차장을 만들어 차량진입을 막고 있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알타미라 박물관(Museo De Altamira)을 감상할 수 있는 거점 마을이다. 인류사 첫 페이지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구석기인들이 남긴 찬란한 작품! 중,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동굴 벽화 사진이 실려 얼마나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던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구상 최초,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직접 한번 보기를 오랜 기간 갈망해왔다. <플랜더스의 개>의 소년 넬로가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싶어 했듯이. 소년은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나는 이제 자전거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다.
부푼 가슴을 진정하고 박물관을 찾아들었다. 하지만 ‘실물’은 볼 수 없다는 말에 야속하고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습기와 사람들이 내뿜는 일산화탄소 등으로 훼손될 우려가 있어 1977년부터 공개에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고고학 연구 등 소수 전문가에게만 미리 신청을 받아 공개한다고 했다.
대신 박물관 안에 거의 유사하게 ‘모조 동굴’을 재현해 놓았다.  말하자면 아파트 ‘모델 하우스’ 격이다. 이것을 스페인어로는 ‘네오 쿠에바(Neo Cueva)’라 하며 모든 것이 같다고 박물관 관계자는 강조했다.

산탄데르 자전거 전용도로
산탄데르의 막달레나 궁전
진품은 보존을 위해 출입금지이고, 복제로 만든 알타미라 동굴
알타미라 동굴의 최초 발견자 부녀. 사우투올라와 마리아

 

동굴은 인류의 고향
1878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장. 프랑스관 한쪽에 자리 잡은 석기시대 유물관에 한 신사가 전시품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우투올라(Marcellino De Sautuola)로 산탄데르에서 온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마제석기(磨製石器)나 뼛조각 전시품을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자에게 여러 질문을 했고 자신도 이런 일에 관심이 많으니 도움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프랑스 학자는 “동굴은 인류의 고향이다. 나도 주로 프랑스 남부 동굴에서 발견했으니, 당신이 사는 지역 동굴에도 분명 옛 사람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행운을 빈다.”며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이때 사우투올라 머릿속에는 한 생각이 떠올라 무릎을 탁 쳤다. 취미로 하는 사냥 동호인 친구로부터 산티야나 델 마르 인근에 동굴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동굴은 자신이 사는 산탄데르에서 30여km 떨어진 곳이었다.

“아빠! 소!”
이듬해인 1879년 11월의 어느 날, 어두운 알타미라 동굴 안에서 사우투올라가 램프를 밝혀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린 딸 마리아가 있었다. 소녀는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다녔지만 곧 지루해져 혼자 동굴 안을 여기저기 다니며 놀았다. 문득 소녀는 아버지가 든 램프불빛에 비친 천장에 자기가 평소 그리던 소 그림이 보였다. 그러자 소녀는 “아빠! 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며 램프를 들고 딸이 가리키는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들소를 비롯 수많은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사우투올라는 쾌재를 불렀다.
어둠속에서도 그것은 방금 그린 것처럼 색채가 선명했고,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리얼했다.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진 그림들은 외부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검정, 빨강, 갈색으로 그려진 매머드와 들소, 사슴, 멧돼지 등은 생생한 묘사와 입체감도 있어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었다.  


동굴 길이는 270m. 여기에는 예상대로 선사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칼이나 뼈조각, 나무토막 등이 발견되었다. 인류 최고의 미술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최초 발견자는 바로 어린 딸 마리아로 해야 할까. 박물관에는 ‘공동발견자’로 부녀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1만5천년 전 구석기인의 솜씨라고는 믿기 어려운 예술성과 완성도의 알타미라 벽화, 소
한폭의 동양화 같은 상 빈센테 마을
6세기에 최초 건립된 바르케라 다리. 아직도 거뜬하다
프랑스 출신의 솔로 바이커 까밀양. 그녀의 도전정신에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불행했던 최초 발견자
사우투올라는 이 사실을 자신이 직접 스케치해 책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리스본에서 열린 고고학회에 보고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현장을 방문하고는 곧바로 진위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구석기 시대의 작품이 색채가 너무 선명하고 작품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사우투올라가 명예욕에 눈이 멀어 몰래 그림을 그려놓고는 거짓말을 했다고 매도해 버렸다. 급기야 사기꾼으로 몰려 피소(被訴)까지 당했다.

논란에 휘 말린 지 몇 년 만에 사우투올라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임종을 앞두고 얼마나 억울했을까. 귀족(자작)에 변호사에 고고학자로 잘나가는 인생이었지만 만년에  ‘벽화발견’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다. 진실이 밝혀졌을 땐,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저명한 고고학자 브외이으(Henri E Breuil)가 프랑스 남부 동굴에서 석기시대 동물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대해 “매우 진지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므로 동굴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절묘한 곳에 있었다. 게다가 빙하시대부터 줄곧 땅속에 묻혀있었으므로 색깔이 바래거나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현대 과학으로 밝힌 연대는 약 1만5천 년 전. 현재에 이르기까지 손상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그림의 붉은 색 안료는 철 성분을 지녔으며, 흑색 안료의 성분은 이산화망간으로 밝혀졌다. 그 일대의 많은 적토(赤土)에서 추출했다는 가정이다. 그래서일까, 프랑스의 테니스장은 ‘붉은색 클레이(앙뚜까)’ 코트가 많다. 관리가 번거롭지만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은 늘 적토 코트를 고집한다.
아무튼 그 당시 구석기인들의 회화능력과 동시에 훌륭한 공구와 안료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구석기인들은 왜 벽에 그림을 그렸을까? 이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답변은 “사냥 성공은 물론 무사 귀환을 담은 주술적 의미”였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 1902년 고고학회는 정식으로 실수를 인정했고 고인의 업적에 존경을 표시했다. 죽어서라도 명예회복은 이루었으니, 사우투올라는 명부(冥府)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20년이라는 인고(忍苦)의 시간! 그러나 벽화가 동굴 안에서 ‘잠자던 시간’에 비하면 찰나(刹那)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덧없다.


불후의 대작 <소> 앞에서 흘린 실소(失笑)
오매불망 그리던 벽화 앞에서 나는 비시시 혼자 웃고 말았다. 한 스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하던 외국인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나의 실소는 멈출 줄 몰랐다.
중광(重光), 벌써 타계했지만 살아생전 방랑과 기행으로 세상을 거침없이 산 스님이었다. 괴짜 중, 걸레도인(盜人). 오염된 사회를 마음의 걸레로 닦아보겠다고 스스로 ‘걸레스님’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적 너무 가난했다. 그는 표현대로 “*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했다. 밥을 먹기 위해 군대를 갔는데 그것도 해병대에 가서 많이도 두드려 맞았다고 했다. 


26세 때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였으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기죽지 않았다. 기죽기는커녕 ‘가면’을 벗어던진 그는 더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한때 ‘한국의 피카소'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 그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고, <나는 세상을 훔치며 산다> <허튼소리> <도적놈 셋이서> 이런 책도 남겼다.


중광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자질이 있었다. 정규 미술교육은 언감생심,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 그가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를 받았다.
막걸리 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말술’과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백담사에 들어가 입적 때까지 달마 그림에 몰두했다. 


내가 생뚱맞게 알타미라 박물관에서 중광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미술에 대한 그의 비수 같은 촌철 때문이다.
그가 어느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진행자가 물었다.
“스님은 미술대학도 안 나오셨는데, 그림으로 더 유명해지셨습니다. 그 비결이 뭔가요?” 스님의 평소 기행을 비꼬는 듯한 질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중광은 젊잖게 반문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린 사람이 미대 나왔다는 소리 들어보았소?”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를 듯한 산책 길
알타미라 박물관을 나오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50년 묵은 버킷리스트의 또 한 페이지를 넘겨 속이 후련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아니 페달링도 가볍게 1시간 정도 달리니 자그마한 어항(漁港)이 나왔다. 

칸타브리아 지방을 여행하며 너무나 인상 깊었던 해변 마을이 있었다. 상 빈센테 데 라 마르케라(San Vincente de la Barquera)라는 긴 이름의 마을이다. 국립공원(Parque National de la Oyambre) 중앙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여기에 들어오려면 ‘바르케라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가 명물이다. 6세기에 처음으로 놓여져 15세기에 다시 만든 유서 깊은 다리다. 다리에서 마을을 보는 경관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꼭 한 번 더 와보고 싶다! 혹은 이런 곳에 몇 달만이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큰 도시가 아니라 번잡하지 않아 물가도 저렴했다. 싱싱한 해산물도 많을 것이고.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마을에 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어 시상이 절로 떠오를 듯 했다. 더구나 대서양의 파도가 만든 절승의 해변길도 가까우니 금상첨화다. 나 같은 둔필도 여기서 잠시 ‘죽돌이’가 되어 다음 여행기 단행본을 준비한다면 술술 글이 써질 것만 같다.


베품의 선순환
호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 라이더’가 말을 걸어왔다.
“제 자전거가 문제가 있는데 혹시 고칠 수 있으세요?”
프랑스에서 온 까밀(Camilletoutloff)로 자전거 순례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내 행색으로 보아 ‘대단한 경력자’로 판단한 것 같았다.


“봉쥬르! 좀 아는데…. 한번 봅시다.”
그녀의 자전거는 ‘셜리’. 투어 전용 브랜드였다. 뒷바퀴를 잡아주는 브레이크 슈(brake shoes)가 다 마모되어 제동력은 물론 림(rim)도 손상되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나요? 비 많은 곳에서 슈는 자주 점검을 해야 되는데.”
“잡음이 들리기는 했는데… 처음 떠나온 장거리 여행이라서요.”
이럴 땐 여분의 슈(패드)로 교환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전거는 디스크 브레이크이므로 슈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설명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요?  근처에 바이크 샵도 없을 것 같은데….”
“한번 찾아보죠. 나는 없는 것 빼고 다 가지고 다니니.”
너스레를 떨며 공구함 꺼내 열었다. 조그만 ‘펑크 패치’ 통속에 한 조(組)가 소담스럽게 누워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 사실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성의 정도 표시하려 공구함을 열었던 것인데 말이다.
슈를 주고는 “운이 좋은 줄 아세요, 그런데 직접 해보세요, 다음엔 혼자 해야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 스스로 해보도록 가르쳐 주었다. 작업이 끝난 후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메르시 보끄‘를 연발했다. 그리고는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부품 값으로?”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말했다(원래 ‘프렌치’는 이렇다. 도도하고 받는 것도 싫고, 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No Problem at all!  내가 까밀에게 해준 것은 사소한 일이에요. 앞으로 당신도 길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친절을 베풀면 돼요.”
그러자 그녀는 “아름다운 상 빈센트와 함께 당신의 친절을 기억할게요!”라고 말했다. 나 역시 “행운을 빕니다! Good Luck n 브엔 까미노!(순례 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하고는 자전거에 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해오며 많은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이 빚은 그것을 준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느끼는 기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버킷리스트 답사, 절승, 맛난 음식, 쾌주(快走) 등등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얻는 감동만한 것이 없다. 감동을 느끼려 여행을 떠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베품의 선순환’이 널리 퍼져 감동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면, 이 세상은 한층 살만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북부 해안을 따라 코미야스 가는 길
가우디가 설계한 저택, 엘 카프리초 데 가우디. 동화의 집처럼 천진난만하다

 

엘 카프리초 데 가우디(El Capricho de Gaudi)
코미야스(Comillas)는 인구 2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산티야나 델 마르와 규모면에서 비슷한 고만고만한 마을인데, 가우디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벽촌에서 대가의 작품이 만날 수 있다니!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6)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건축계의 세계적인 거장(巨匠)이다. 여행 중에 받은 뜻밖의 선물이다. 먼저 그의 작품이 있는 ‘엘 카프리초 데 가우디’를 찾았다. ‘카프리초’는 ‘뛰어난 혹은 천재성이 있는’이란 뜻이다. 


마을 중앙광장 호야킨 델 피에를 나와 왼쪽으로 조금 가면 입간판이 나오고 화살표를 따라가면 독특한 형태의 건물에 다다르게 된다. 작은 마을이라 찾기 쉽다. 건물은 해변에서 좀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유로를 내고 표를 사서 입장하니 기묘한 건물이 앞을 막아선다. ‘너무 튀어’ 가우디의 작품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초록바탕에 요철을 살린 노란 해바라기 타일이 돋보인다. 한껏 치장을 한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집 같은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붉은 벽돌 탑은 이슬람 영향을 받은 무데하르(Mudejar) 양식인데, 그도 아랍 문명에선 자유로울 순 없었나보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 부를 만큼 그의 작품이 많다. 그런데 코미야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무려 800여km나 떨어진 먼 거리다. 그럼 왜 가우디는 이 먼 시골구석에까지 자신의 작품을 남겼을까? 이 건물의 설계를 의뢰한 사람은 코미야스 출신의 안토니오인데 그는 가우디의 후원자 팔라우 구엘(Palau Güell)의 장인이었다. 대도시에서 자수성가하여 부를 일궜지만 향리에 별장을 짓고 싶어 했다. 이를 안 사위 구엘은 가우디에게 설계를 부탁했던 것이다. 1883년이었으니 가우디 나이 31세였다. 거의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우디의 생애를 연구하는 건축학도에게는 빼놓을 수없는 ‘모멘텀적인’ 작품일 것이다.



‘구엘’을 만나면서부터
가우디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부터 시작된 선천성 관절염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학교도 자주 결석해 성적도 좋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명문 바르셀로나대학 이공 학부를 마쳤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건축전문학교 시절부터였다. 대담하고 혁신적인 설계로 매번 논란을 일으켰다.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무렵 부유한 은행가이자 건축을 잘 아는 구엘은 그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후원자가 되어준다. 이 대목에서 나는 구엘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구엘의 도움으로 돈 걱정 잊고 설계에 전념한 그는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냈다. 바르셀로나의 아이콘격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聖가족 대성당)를 비롯 6층짜리 아파트 ‘카사밀라’, 기묘한 창문으로 유명한 ‘카사 바트요’, 후원자 구엘을 기념하기 위한 ‘구엘 공원’ 등을 남겼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삶은 청빈 속에 종교와 건축이 전부였다.

젊은 시절의 가우디
가우디가 후원자 구엘을 기념해서 만든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가우디의 설계로 135년째 공사중인 바르셀로나 성가족 성당

 

아직도 가우디는 살아있다?
죽음 역시 천재는 남달랐다.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노면전차에 부딪혀 크게 다쳤다. 전차 기사는 걸인으로 생각하고 길옆에 팽개치고 현장을 떠나버렸다. 지나던 행인들이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지만 승차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4번째로 잡은 택시기사가 병원 2곳에 갔지만 이번에는 진료 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기사는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빈민을 위한 무상병원에 두고 가버렸으니. 겨우 의식을 차린 가우디는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놀라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다.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겠다.” 
결국 3일후 빈민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4세, 당시로는 살만큼 살았지만 그래도 애통한 죽음이었다.
1926년 6월 13일 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가 설계해 공사 중인 성가족 성당에서였고, 유해는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연필 몇 자루와 설계도면, 제도판 그리고 낡은 침대가 전부였다. 


내가 30년 전인 1988년 성가족 성당에 갔을 때는 한창 공사 중이었고, 이번 여행길에서도 역시 공사 중이었다.
그는 아직도 살아, 타워 크레인 속에서 공사 현장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공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영면(永眠)에 들지 못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135년째 계속되고 있는데, 언제 완공의 그날이 올지…. (다음호에 계속)    

   
협찬 : 벨로스타, 참좋은여행, 포메라스포츠, IL인터내셔날

 

차백성 편집위원  cbs61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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