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막던 비바람도 어느새 친구가 되다니… 이렇게 끝인가

시코쿠 방랑적 일주
길을 막던 비바람도 어느새 친구가 되다니… 이렇게 끝인가 

시마나미해도에서 사흘을 보내고 돌아서는 길, 이 아름답고 정감어린 길은 끝내 눈물로 나를 배웅한다. 울지마, 꼭 다시 올테니! 이제는 시코쿠 북부 해안을 횡단한다. 비와 바람은 끝까지 나를 괴롭히지만 어느새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여행이 일상으로 느껴지는 순간, 이별을 예감하게 된다

 

14일차
싱거운 사람이 ‘짠돌이’ 되는 법?

춘래불사춘! 남쪽나라의 봄볕은 나도 모르게 긴팔을 치렁치렁 감아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해가 서산에 떨어지면 산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겨울이 덮쳐온다.
추워서 잠을 깼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텐트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양말을 신다가 그제야 핫팩이 생각났다. 얼른 뜯어서 발, 가슴, 등에 붙였다. 은지야, 고마워!! 은지는 도쿄 메구로 대학 영상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한국학생이다. 하잘것 없는 내 자전거 인생 이야기를 영상에 담는단다. 그래서 나라 케이블TV에 방송까지 할 예정이란다. 혼자서 각본 쓰고 카메라 촬영에 섭외 등 만능 엔터테이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밤샘 알바도 하고…. 내가 보기엔 본인이 출연해야 할 정도다. 아무튼 이런 것까지 챙기는 걸 보니 조만간 베니스에서 영화 감독상을 거머쥐는 뉴스를 접할 것 같다. 

마을을 통과하는 자전거길
편의점에서 궁합이 맞진 않지만 소시지와 된장국으로 아침요기를 하고 어제 사진의 배경이 된 타타라 대교를 오른다. 어제와 달리 하늘엔 짙은 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그래도 비 예보는 없으니 안심이다.
일요일이라 마치 봄을 처음 보는 양 다들 흥분 일색이다. 자동차 · 오토바이 · 자전거 그리고 한가하게 걸어가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날을 즐기고 느끼고 있다. 가볍게 건네는 인사에 환한 미소로 답한다.
섬을 다시 내려가는 길에 반대편에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는 가족이 보인다. 꼬마에게 “화이또(파이팅)”했더니 웃으며 페달에 힘을 준다. 섬 마을이 떠들썩하다. 오렌지 축제다. 이곳 세토나마을이 일본에서 최초로 오렌지를 재배한 곳이란다. 무대에서는 꼬마들이 애교를 뽐내고 주민들은 손수 만든 과자며 토산품을 내놓아 자전거를 세워 놓고 굴구이에 홀딱 빠진 관광객도 있다. 왁자지껄하다. 

바로 이 모습이다. 자전거길을 자연스럽게 섬마을을 통과하게 만들어 섬 풍경도 만끽하고 지역 주민과도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상점이 모여 있는 부둣가에는 ‘사이클 터미널’이 있고 각 상점은 ‘사이클 오아시스’로서의 제 몫에 충실하고 있다. 이런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전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시코쿠에서 출발한 시마나미해도는 어느새 행정구역이 바뀌어 히로시마현을 달리고 있다. 이대로 달려 히로시마에 가서 ‘원폭 라면(?)’을 먹고 싶었지만 자전거를 돌렸다. 인노시마대교는 자동차도로 밑에 터널처럼 또 다른 길을 만들어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다니게 되어 있다. 다시 내려서서 섬을 한 바퀴 돌고 다리를 건넜다. 

‘시마’는 섬이다. 일본 자체가 섬이어서 그런지 섬이 엄청 많다. 9000여개나 된단다. 그 섬 이름만 다 깨우치면 일본어가 유창해 질려나.
시마나미해도의 숨결을 오늘밤에도 계속 간직할 수 있겠다. 오미시마의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1층 로비는 여행객들이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바닷가에 있는 온천에 갔다. 해풍에 찌든 소금기를 없애려고…. 그런데 웬걸 해수탕이란다. 노천탕은 전망탕이라 하여 출렁이는 바닷물과 내 몸이 수평이다. 마치 바다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평소에 싱겁다는 나를 이번 기회에 소금에 진하게 저려 볼까나! 그럼 짠돌이?

오시마대교. 자동차전용도로인데 갓길에 자전거도로를 만들었다
자전거 여행자가 많이 찾는 게스트하우스
인노시마대교는 복층구조로 아래층에 자전거도로와 보행로가 있다
세토내해는 섬과 수평선이 엇갈리는 먼 곳으로 지는 석양이 아름답다

 

15일차
울지마 시나마니짱, 또 올게

오늘은 월요일 또 하나의 매듭을 짓는 날이다. 꿈에 그리던 시마나미해도를 전부 마스터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달리는 중간에 비가 오면 대책 없이 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출발부터 비가 시작되면 먼 길을  떠나는 님을 붙잡는 아낙네의 손길처럼 망설여진다. 하지만 노란 비옷은 어서 가자고 소매를 잡아끈다. 그래도 바람 없이 오는 비는 고맙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는 꿈꾸듯이 가물가물하다. 평탄한 해안도로를 빗소리 들으며 천천히 나아간다.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라 혼자 피식거린다. 오시마섬을 한 바퀴 돌아 타타라 대교 앞의 휴게소(미치노에키)에 다다랐다. 벌써 11시다.
아침겸 점심을 해결하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런 눅진한 날은 조개탕 같은 국물이 좋은데… 하지만 나베요리가 없다. 그래서 빠삭빠삭한 히라매(넙치?) 튀김정식을 시켰다. 이 넙치는 바다에서 축구장으로 쓰였나 보다. 넙치가 남아 밥을 더 달라했더니 실실 웃으면서 210엔이란다. 이런… 주인 얼굴 한번 쳐다보고 넙치 대가리를 씹는다.

자전거의 도를 깨우친 소녀 
도로의 파란선은 자전거코스 표시다. 그 파란선은 내게는 희망이 되어 꿈틀거리며 손짓하고 있다. 방파제를 따라 난 자전거길 옆에 창고가 늘어서 있다. 선창이니 당연히 상자 안에 펄떡거리는 생선이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박스마다 노란 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앞바퀴는 도로의 물웅덩이에서 물레방아처럼 연신 물을 퍼올린다. 청바지는 물먹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신발은 찰랑찰랑 물이 넘치는 고무신으로 변한지 오래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은 퉁퉁 부어 남의 것인양 느껴진다. 그래도 전혀 찝찝하지가 않다. 오히려 평온하고 아늑한 꿈속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 쿠루시마 대교를 건너려고 오르막을 오른다. 앞에서 힘겹게 오르는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나고야에서 처음으로 왔단다. 혼자만의 자전거여행도 즐겁고 빗속을 누비는 건 더욱 즐겁단다. 8단 내장기어 자전거가 무거워 보이지만 표정은 해맑은 소녀다. 예쁘지만 무섭기도 하다. 이런 즐거움을 깨우친 자전거 고수를 여기서도 만나다니.

쿠루시마 대교에 올라 뒤를 돌아본다. 섬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갈 때는 못 본 쌍둥이 등대도 눈에 불 켤 준비를 한다. 3km가 넘는 쿠루시마 대교를 달린다. 이제 곧 다시 시코쿠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빗방울도 굵어진다. 작별은 이렇게 요란해야 하는가?
사흘 동안 162km를 오가면서 쌓은 정이 이렇게 깊을 줄이야. 첫날은 반가워서 햇살 쨍하더니 둘째날은 미리 가는 걸 짐작하고는 구름 모아 찡찡했구나. 마지막 가는 길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야 분이 풀린단 말인가. 시마나미짱! 섬은 외롭기 때문에 섬이란다. 언제나 떠나만 보내지, 바닷물이든 배든 사람이든. 하지만 언젠가는 다들 돌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잖아!

사랑을 잃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랑을 꽉 쥐고 놓지 않는 것이고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날개를, 페달을 달아 주는 것 아닐까.
내가 그리던 것 이상으로 가슴 뭉클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한 시마나미해도! 꼭 다시 올게. 사요나라!

넙치 정식. 밥을 더 달랬더니 210엔이란다
자전거여행자를 위한 휴게소, 사이클오아시스가 곳곳에 있다
단차를 두고 2개가 나란히 있는 쌍둥이 등대
창고와 방파제 사이에 조성한 자전거도로

 

16일차
비바람을 뚫고 1000km 돌파

어제는 다시 돌아온 이마바리에서 머물렀다. 이마바리는 본토와 연결되는 시마나미해도의 관문이지만 우리네 읍 같이 고즈넉한 분위기다. 내가 묵었던 이마바리역 앞의 스테이션 호텔도 한적한 곳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가 프론트에서 나를 맞이한다. 뒤편의 벽에는 스티브 맥퀸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반가웠다. 대학 때 스크린 잡지에서 스티브 맥퀸 포스터를 하숙방에 붙여 놓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카우보이 차림의 말보로 담배 선전 때문에 구름과자도 시작했었는데. 하기사 그 낭만은 니코틴과 가래뿐인 걸 깨닫고 마흔에 싹둑 끊어 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스티브 맥퀸을 엄청 좋아한다는 노 사장은 맥퀸 일본 버전이다. 내 사무실에도 지금 숀 코네리의 포스터가 걸려 있지. 나이들어갈수록 중후하고 더 멋있게 익어가는 숀을 닮고 싶어서… 근데 머리만 빠지네. 

숨겨진 맛집
비는 멈췄지만 오후 3시경부터 비 예보가 있어서 7시경 서둘러 호텔을 나왔다. 하늘은 시커먼 구름 일색이다. 이른 시간에 노란 모자를 쓴 초등학생들의 등교를 위해 교차로에서 깃발을 드는 것은 여기도 어르신들의 몫이다. 여중생들은 해군 세일러 교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간다. 전부 헬멧을 쓴 채로.
38번 도로를 따라 타카마쓰로 향한다. 바로 이어지는 11번 국도에도 자전거가 그려진 그 파란선이 보인다. 출근시간대인지 왕복 2차선 도로는 차들이 연속해서 지나간다. 게으른 산봉우리는 아직도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온통 뿌연 느낌이다. 젖은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에도 물기가 잔뜩 묻어 나온다. 그래도 도로는 평탄한 편이라 혼자만의 라이딩을 즐길만하다.
스키야란 체인점에 들어가 ‘규동’을 시켰다. 처음 일본에 와서 이 규동이 우동의 사촌인줄 알았다. 사시미동. 덴뿌라동 등의 동은 우리네 덮밥 같은 음식이다. 샘물 ‘정(井)’에 가운데 점 하나 찍은 일본식 한자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한자지만 ‘퐁당 퐁’이라며 재미있어 했었다. 위에는 소고기가 있고 그 아래 밥이 있는 규동을 젓가락으로만 먹으라니… 그냥 밥그릇을 들고 입속으로 밀어넣는 수준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바로 뒷통수에 불이 났을 거다. 어딜 채신머리 없게 밥그릇을 쳐들고 데끼 노~움!
오후부터 내린다더니 벌써 비가 뿌린다. 하긴 위에 계신 저 분이 일기예보를 보실 리는 만무하다. 우의를 걸치고 습관처럼 페달을 밟으며 주변을 관찰하기도 하고 생각으로 빠져든다. 갑자기 대형트럭이 량데뷰를 시도한다. 위험! 그나마 시내에는 갓길이 있으나 외곽으로 나오면 갓길은 좁아진다. 특히 군데군데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려다 사고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타이어에 비를 타고 들어온 모래가 연약한 튜브를 사각사각 갉아 먹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 놓으시라. 인생은 스페어가 없어도 튜브는 예비용이 있으니.
겨울이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발가락 손가락이 시리다 못해 얼얼하다. 미시마(三島)의 임해공단을 통과할 때는 최악이다. 갓길은 없는데 대형 트레일러는 줄을 잇고 비는 세차게 퍼붓고 강풍주의보는 맞아 떨어져 추위에 몸은 사시나무로 변하고. 소위 말하는 시코쿠의 중앙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 사이요와 미시마, 가와노에의 3개 시가 통합해 시코쿠 중앙(四國中央) 시가 되었단다.
결국 오후 3시경에 항복선언했다. 그래도 80여km를 달려 드디어 1000km를 넘어섰다. 그런데 이 시골 촌동네에 기막힌 맛집이 있을 줄이야.

시코쿠 중앙 시의 벚꽃축제 포스터
도대체 일본에는 신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이처럼 작고 소박한 신사도 지천이다
나무판자로 벽채를 만든 가옥
파출소를 코방(交番)이라고 하는데 영문도 ‘Police’가 아니라 ‘Koban’이다

 

 

17일차 
그래도 나는 달린다

어제 저녁 호텔 근처 외진 곳의 라멘집에 들어갔다. 따끈한 국물이 간절했던 나의 눈에 짬뽕이란 메뉴가 확 들어왔다. 벌건 국물에 해산물이 가득한 그 짬뽕말이다. 하지만 희멀건 국물에 양배추와 오징어 다리 대신 돼지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좋게 봐주면 우동이다. 매운맛은 없지만 국물은 정말 담백 시원했다. 다시국물은 생선으로 우려냈단다. 결국 밥까지 말아 한국식 짬뽕밥이라고 주인 노부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다.

요즘 왜 이리 춥냐고 하니까 졸업시즌이라 그렇단다. 12월 입시 때도 춥단다. 마침 TV에서 오늘 졸업식이 있는 마쓰야마 대학의 졸업 풍경이 나온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졸업생은 남자친구가 준 장미 100송이를 안고 자랑스럽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요즘 이게 유행이라며 어르신들한테 인터뷰를 청하니 “돈 낭비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국에선 벌써 옛날 얘기이고 심수봉은 장미 100송이가 아니라 100만송이를 노래한 게 몇 십 년 전인데 이렇게 낭만이 없어서야…. 

어디 불어봐라, 바람아
이제 출발시간이다. 물범벅이던 청바지, 장갑, 양말이 바싹 말라 출동대기 상태다. 허나 신발은 아직도 축축하다. 어제 청바지와 함께 건조기에 신발을 넣었더니 쿵쾅쿵쾅 살려달라고 야단법석을 떨기에 꺼내 줬더니 아직도 그때의 충격에 땀을 흘리고 있다. 호텔 방에는 불경과 성경이 종교분쟁 없이 나란히 놓여있다. 두 경전을 쓰다듬었을 뿐인데 효험이 나타난다. 비라던 일기예보와 달리 그냥 흐린 상태다. 할렐루야, 아미타불~

오늘은 11번 국도를 타고 타카마쓰까지 가기로 한다. 비가 일찍 그쳤는지 도로는 연한 색깔로 말라 있고 물웅덩이도 사라졌다. 하지만 하늘은 곧 구름이고 구름은 곧 검은 색이다. 비는 가면서 바람은 데려가질 못했나 보다. 오히려 비가 없는 자리에 바람은 폭군처럼 날뛴다. 그것도 정면 도전이다. 3시간을 열심히 페달링했지만 겨우 30km의 진도다. 그래, 불어라 바람아. 난 동네 마실 나온거니까. 아예 방파제 옆의 오솔길을 천천히 달린다. 가다보니 방파제에 막혀 길이 사라졌다. 고맙게도 누군가가 ‘개구멍’을 뚫어 놨다.
하늘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파란 얼굴을 내비치지만 바람은 갈수록 위력을 더한다. 오르막에서는 뒤에서 잡아당기고 굵은 빗방울을 양념처럼 흩뿌린다. 언덕에 올라서니 세찬 바람이 오른쪽 귓구멍으로 파고들더니 앞골, 뒷골, 숨골 머리속을 샅샅이 헤치고는 왼쪽 귀로 빠져나간다. 벌어진 입속으로 들어간 바람은 오장육부 곳곳을 다니며 빠짐없이 인사를 한다. 일본에 와서 온천으로 몸을 씻고 바람으로 머리통과 내장 세척을 하다니… 훨씬 상쾌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제 에히메현을 지나 카가와현이다. 간온지시(觀音寺市)에 들어서니 순례객 쉼터가 보인다. 긴 의자에 푹신한 방석 그리고 각종 정보가 벽에 붙어있다. 관음사시, 선통사시(善通寺市) 등 이곳은 도시이름 자체가 절 이름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듯이 옛날 큰 절이 있으면 그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듯이.
앞에 순례객이 홀로 걸어가고 있다. 도쿠시마에서 시작한 순례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 이곳 카가와현이 막바지가 된다. 그렇다면 8부 능선을 넘고 있는 저 순례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을까? 어느듯 타카마쓰 시내에 다다랐다. 오늘은 본토의 오카야마와 카가와현 사이 세토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느껴본 날로 기억되리라.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바닷가의 신사
시코쿠 88사 순례객을 위한 쉼터
짬뽕집 내부
허여멀건 일본식 짬뽕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 신호등

 

18일차
다시 도쿠시마로

사실 어제 페달을 밟으면서 고민했다. 아니 고민이라기보다는 결정해야 될 일이다. 타카마쓰에서 페리로 세토해협을 지나 고베에 닿아 오사카로 가느냐, 아니면 맨 처음 계획대로 시코쿠만 돌고 가느냐이다. 결국 시코쿠에 만족하기로 했다. 교토의 벚꽃은 아직이라 오사카를 거치기엔 일정이 애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기분이다.
자전거 타는 것도 힘들지 않고 비가 와도 불편하지 않고 뭔가 무덤덤해지는 느낌? 뭔가 불편해야 아이디어가 나오고 부족해야 동기부여가 되는데…. 작은 별의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 지지 않으려 하듯이 나 또한 이 여행에 길들여지기 싫다. 무뎌진 연필로 제대로 된 글씨를 기대할 순 없다. 돌아가서 칼을 찾아 봐야 겠다.

일본판 무릉도원
길을 정하고 나니 잠자리도 편하다. 일찍 일어나 호텔 간편식을 먹는다. 근처의 리쓰린(栗林) 공원을 둘러본다. 이슬비가 분위기 잡으며 동행을 자처한다. 리쓰린 공원은 타카마쓰 시내 구릉지에 조성된 특별 명승지다. 23만평의 넓은 부지에 정원을 조성하고 무려 400여년 동안 이렇게 잘 가꾸어 왔다는데 놀랄 뿐이다. 미슐랭 가이드에 당연히 선정될 만하다.   
밤나무는 보이지 않고 푸르른 소나무 일색이다. 1400여본의 소나무가 있고 그 중 1000여그루를 몇 백 년에 걸쳐 손질을 해왔단다. 굵고 휘어진 둥치에는 거북이가 촘촘히 붙어 있고 영겁의 이끼가 송송한 소나무숲. 한그루 한그루가 산신령의 모습이다. 이렇게 만들어준 정원사들은 이미 어딘가에 묻혀 백골난망 신세지만 이제는 바람 되고 비로 변해 어루만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하!” 감탄하게 만드는 영국의 자연풍경식 정원도 보이고 6개의 연못를 파고 13개의 산을 만든 그야말로 ‘축산산수형’의 중국식 정원을 업그레이드한 일본풍 무릉도원이다. 한발을 뗄 때마다 절경이요 발가락으로 셔터만 눌러도 그냥 작품이다.
  
바람과 친구되어 
오늘도 찌푸린 하늘에 바람도 세차다. 하지만 홀가분한 내 마음처럼 오늘 바람은 순풍이다. 어제의 징그럽던 적군이 오늘은 든든한 우군으로 바뀐 것이다. 말 그대로 순풍에 돛단 듯이 구름에 달 가듯이 쑥쑥 나아간다. 맞은편에서 역풍을 맞으며 힘겹게 페달을 젓고 있는 여행자에게 “화이또”를 던진다.
동네 어귀의 쉼터에 잠시 앉았다. 구름은 흐르고 바람은 귓가를 스치고… 행복한 이 순간을 사진에 담으려 10여분을 기다려도 지나가는 이가 없다. 고맙고 다행이다. 덕분에 이 특별한 순간을 내 가슴속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다.
오늘 위에 계신 분이 심심하신가 보다. 비가 뿌려 우의를 걸치면 멈추고 벗으면 뿌리고…. 입었다 벗었다 하는 호들갑이 재미있으신가? 몇 차례 반복하니 짜증 난 우의도 겨드랑이를 찢으며 자해를 한다.
카가와현이 끝나고 도쿠시마현을 알리는 안내판 뒤에 짙푸른 산들이 거인처럼 우뚝하다. 발밑으로 구멍을 만들어 터널로 지나고 해안 산그늘에 붙어 달린다. 그러다 거인의 등을 타고 오른다. 하지만 힘들지 않다. 바람은 엄마손이 되어 등을 힘껏 밀어주니까.
드디어 도쿠시마에 재입성이다. 나를 시코쿠에서 처음 맞이해준 도쿠시마는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시코쿠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라고.

어딘가 화투장 그림을 닮은 모습. 기모노 차림의 여인이 빗속에 리쓰린 공원을 걷고 있다
나를 따르는 갈매기 근위대의 경쾌한 열병식. 완주한 내 기분도 날아갈 듯
처음 시코쿠로 진입했던 도쿠시마로 다시 왔다. 드디어 시코쿠 완전 일주가 목전이다

 

19일차
도쿄행 페리에 올라

알람을 끄고 실컷 잤다.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을 나섰다. 도쿠시마 현청 옆으로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을 따라 자전거도 강의 끝자락을 찾아 나선다. 첫번째 페리부두에서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和歌山)로 가는 배가 나를 부르지만 못 본 채 달린다.
키타큐슈(北九州)의 신모지(新門司) 항에서 출항해 14시간의 긴 항해를 마친 도쿄행 페리 비장호가 반가운 듯 뒤뚱뒤뚱한다. 이번엔 자전거를 분해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면 별도 요금이 없단다. 자전거를 타고 폼 한번 잡는데 3000엔이라니 그래도 폼생폼사인데. 

11시30분 묵직한 뱃고동을 울리면서 시코쿠와 이별하고 있다. 이런 떠남은 환한 대낮보다 밤이 훨씬 어울리는데… 거기다 비까지 살짝 뿌려주면. 
오랜만에 반짝거리는 은빛파도를 보는 것 같다. 뭍은 멀어져가고 수평선만 아득한 걸 보니 어느새 태평양의 한 점이 되었나 보다.
자판기에서 곱창을 집었다. 갑자기 지글지글 소리 내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삽겹살에 이슬이 한잔이 생각난다. 전자렌지에 데운 곱창과 함께 달콤쌉살 조금 짜릿한 레몬사와로 기분을 달랜다. 사와도 알콜이라고 빈속에 털어 넣으니 알딸딸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런 낮술은 언제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탕속에서 다리를 뻗어 바닷물에 담가본다. 찰랑찰랑~ 노곤함에 깜박 잠이 들었다. 갑판에 올라 보니 배 꽁무니에서 석양이 뉘엿뉘엿 하다. 오늘 하루도 뜨겁게 보낸 태양은 시코쿠의 어느 산골에서 쉬려고 이부자리를 펴고 있다.

굼벵이 페리가 준 선물 
19일전 시코쿠 여행을 떠날 때 선택한 굼벵이 페리는 나에게 정말 잊지 못할 선물을 주었다. 지루해서 시간이나 죽여보려고 시작한 글은 일기가 되고 이제 중요한 일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렵다. 여행기를 쓴다는 것은 그날의 회상은 물론 내일 갈 길을 미리 가보는 작업이다. 또한 그때그때의 느낌을 더 간절히 저장하려는 버릇도 생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다. ‘꿰어야 할 끈’이 있기에 더 예쁜 구슬을 집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것 아닐까. 이왕이면 풍성하고 재미있는 여행기를 위해 더 많이 움직이고 보고 느끼려고 애를 써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뛰는 설렘의 감동을 다 못 옮겨서 안타까울 때가 더 많다.

딸 갱이는 “아빠 시마나미해도에서 히로시마로 안가길 잘했어” 한다. “왜?” “원폭 방사능이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걱정은 구순 할머니를 능가하고 너스레는 아빠보다 길게 늘어진다.
나름 자신의 인생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하고 그걸 남들에게 진솔하게 보여주려 노력은 하고 있네. 그래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먼 하고 빙그레 가볍게 넘어 가주길 바란다.
깜깜한 어둠에도 밤배는 쉬지 않고 나아간다.

자전거를 분해 포장하면 별도 요금을 받지 않는다고
잠시 마도로스로 깜짝 변신했다
큐슈에서 14시간을 행해해온 페리선. 도쿠시마 타카마쓰에서 도쿄까지는 17시간이 걸린다
페리 선내의 탕 속에서 바다를 보며 여유로운 휴식을 즐겼다

 

20일차
고맙다, 정말 고맙다!

부~웅! 우리 배는 정확히 새벽 5시반에 도쿄 오다이바항에 도착했다. 자는 사이에 또 비가 내렸는지 도로가 젖어 있다. 비온 뒤 화창한 새벽을 달리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개통 직전의 도요스 대교 넘어 레인보우 브리지가 햇볕에 반짝이고 있다.
토요일 새벽 한적한 하루미 대교를 지나 시내로 내달린다. 황궁 해자는 거울처럼 봄 풍경을 비친다. 수양버들은 연두색 새잎머리를 휘날린다. 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는 벌써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꽃소식을 미리 보려 애써 남쪽나라에 갔었는데 여기도 어느새 꽃잔치라니. 역시 파랑새는 바로 내 곁에 있었던 것을.

매사에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 
어머니께 무사 귀환신고를 드렸다. “잘 돌아와서 고맙다, 그리고 진아!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아들이 전화드리는 것이 당연한데도 늘 고맙다고 하신다. 자주 전화 못드리는 게 더 미안한데….
어릴 적엔 잘 생기고 멋진 주인공만 보였다. 그 주인공 혼자서 줄거리를 이끌고 영화를 다 만든다고까지 생각했다. 당연히 천만의 말씀. 주인공을 위해 한없이 망가져주는 엑스트라를 비롯해 막 뒤에서도 수백명이 땀 흘리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을 거머쥔 주연배우는 스탭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거다. 가마를 타려면 먼저 가마 드는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야 하듯이. 그래서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 나름 수시로 체크한다. 알고 보면 주변의 사람, 물건, 상황이 나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준다. 내가 아는 사이에 또 모르고 있는 사이에도. 고맙다! 정말 고맙다!

처음 가본 시코쿠! 20여일 동안 시코쿠 한바퀴 1230km를 달렸다. 타이어는 닳고 지갑은 홀쭉해졌다. 하지만 다시 젊어지는 느낌이고 마음속엔 설렘이 가득하다. 맑은 날, 추운 날 그리고 비오는 날도 있었듯이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네들의 문화, 역사도 배우고 봄을 맞이하는 대자연의 숨소리도 들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수천권의 책보다 여행이 낫다는 ‘산 경험’을 실감했다. 자전거 페달을 저으면서 생각 삼매경에 빠져 보기도 하고. 그 생각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자칫 바람과 함께 날아 가버리는 생각들을 잡아두는 글쓰기도 특별한 즐거움으로 자리매김했다.
벌써부터 혼슈 일주를 계획한 여름방학이 손꼽아진다. 이제 1년이면 일본유학이 끝난다. 더 많은 걸 보고 배우고 느끼고 싶다. 어린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도쿄 황궁 해자에는 어느새 벚꽃이 활짝 피었다
마침내 도쿄의 숙소에 도착했다. 무사 귀환 성공!

 

지도에 표기해본 시코쿠 일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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