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탐사투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이윤기의 탐사투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북국의 대자연에서 만난 여름 환상경 

러시아 극동에 자리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깝고 또 쉽게 유럽 풍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인구 67만의 중급 도시로,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천혜의 대자연이 펼쳐진다. 시내 남쪽에 자리한 루스키 섬은 제주 올레를 닮은 해안길과 원시림 사이로 누비는 트레킹이 매혹적이다. 동쪽 해안을 따라서는 절경의 해변이 기다린다   

 

한반도 북한쪽 지형을 닮아 ‘북한섬’으로 불리는 토비지나곶으로 이어진 환상적인 오솔길. 블라디보스톡 남쪽 루스키 섬의 최남단에 있다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여행은 난생 처음이다. 단순히 이스타항공이 저렴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 몇몇이서 여름휴가 겸 답사차 4박5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늦은밤 출국해 새벽에 귀국하는 시간대여서 3일간 온전히 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제는 블라디보스톡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대한항공을 비롯해 저가 항공사인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제주항공과 러시아계 오로라항공, 시베리아항공이 운항하고 있으니 말이다. 국내 출발은 인천공항 외에 대구와 부산에서도 있으니 전국 어디서든 쉽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수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유럽풍 
블라디보스톡은 한국보다 1시간 빠르고, 국내 국적기로 중국 영공을 통과해 2시간30분, 러시아 항공기를 이용하면 북한 영공을 통과해 2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다.
극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유럽풍의 도시환경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블라디보스톡이 유일하다. 동양의 유럽, 단일 철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영향으로 유럽과 아시아 문화가 공존하는 이색 여행지다. 

짧은 시간과 적은 비용으로 유럽의 정취를 즐기고 싶다면 블라디보스톡이 답이다. 관광과 쇼핑, 맛집 그리고 대자연에서의 트레킹과 라이딩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러시아어로 ‘동방 정복’이란 뜻을 지닌 블라디보스톡은 이름부터가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반영한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이다. 러시아인들이 1856년에 진출한 이 도시는 애초부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위한 교역 항구를 겸한 군항으로 개항되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다. 

소련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자,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이기도 한 블라디보스톡은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다. 이후 청나라에 속해 있다가 러시아와 영토분쟁이 일어나자 중국은 1860년 불평등한 ‘베이징조약’을 맺고 이곳을 포함한 우수리(Ussuri) 강 유역의 넓은 땅을 러시아에 내주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면서 자그마한 어촌이던 곳을 일약 시로 승격시켰으며, 점차 연해주 지방의 행정 중심도시로 키워나갔다.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으로 그때부터 블라디보스톡은 국제도시로 급격히 부상했다.
블라디보스톡의 명소는 대부분 도보여행이 가능한 시내에 있으며, 트레킹 명소로 유명한 루스키 섬도 택시로 40~50분이면 갈 수 있어 3~4일 정도면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각교. 블라디보스톡의 명소는 전망대 아래 금각교 북단 근처에 모여 있다
잠수함박물관 옆에 있는 ‘영원의 불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한 장병들을 잊지 않겠다는 기념물이다

 

서늘한 북국의 여름
현지시간 새벽 2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하면서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입국심사대에 여권을 제출하자 심사원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여권을 넘겨준다. 묘한 싸늘함과 경멸감을 지울 수 없다. 국제관문인 공항이 이 정도니 일반 러시아인들은 어떨까 싶어 심히 우려가 된다. 

불쾌한 기분과 함께 우울한 날씨로 7월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차갑기만 하고 비까지 흩날리기 시작한다. 사전에 미니밴 택시 2대를 예약해둬서 1대에는 자전거박스 5대를 싣고, 나머지 1대는 5명 일행이 동승해 1시간을 달려 블라디보스톡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한다. 새벽 3시30분이다. 오후 체크인이라 호텔에 짐을 풀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전거 박스만 맡기고 택시 기사가 인근 레스토랑으로 안내해 준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알 수 없는 무거움이 감돈다. 

문 앞에 선 덩치 큰 문지기 청년에게서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진다. 뭐라 지껄이는데, 도저히 알 수 없는 러시아어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한참만에 어깨에 메고 있는 배낭을 보관함에 넣으라는 제스처임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영어가 거의 소통되지 않는다. 독특한 키릴문자라는 알파벳도 전혀 읽혀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 동안 미국과 냉전시대를 겪었고 지금도 반미감정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양인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남아 있는 듯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광활한 대륙 기질에서 유래한 괜한 자부심인 듯하다. 

날씨는 도와주지 않는데 
새벽부터 내린 비는 계속 주룩주룩 내린다. 아침시간은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듯 해서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자전거를 조립하고 라이딩 준비를 한다. 잠을 못 자서 모두들 피곤에 절어 있다. 내일도 비 예보에 일행의 기분은 우울하다. 여행은 날씨가 90%를 좌우하는데 도착한 날부터 2일간 흐린 하늘에 비 소식이다. ‘번짱’을 원망할 수도 없고 그저 순리에 따라야 한다. 

당초 예정했던 일정을 바꾸어 첫날은 가볍게 블라디보스톡 중심가를 자전거로 돌아보기로 한다. 블라디보스톡의 모든 명소는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중심가에 집중되어 있다. 혁명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아르바트 거리와 해양공원, 아르세니예프박물관, 요새박물관이 있고, 동편으로는 해군잠수함박물관, 개선문, 세르게이라조동상, 수하노프박물관, 독수리전망대가 있다. 먼 곳도 자전거로 15분이면 갈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올해 종편방송 tvN ‘짠내투어’에 방영되어 많은 한국인이 찾고 있는 중이다.     

 

길이 3.1km의 루스키대교를 건너 루스키 섬으로 넘어간다. 교각 ;대기는 구름에 가렸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길에는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고 노면은 질척했다
뒤쪽으로 뱌틀리나곶이 보이는 초원 언덕
뱌틀리나곶의 목 부분에 조성된 주차장에서. 뒤편으로 곶이 바다 깊숙이 뻗어 있다

 

 


절경과 원시림을 자랑하는 루스키 섬
루스키(Russky) 섬은 블라디보스톡 프룬젠스키 구(區) 소속으로, 블라디보스톡 맨 아래 아무르 만과 우수리 만 사이에 있다. 이 섬은 한때 폐쇄된 군사기지였고 예전에는 페리를 이용해서만 방문이 가능했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고, 야생동물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루스키 섬에서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APEC 개최지였던 극동연방대학교와 연해주 최대 규모의 아쿠아리움이며,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뱌틀리나곶(Mys Vyatlina)과 일명 북한섬으로 잘 알려진 토비지나곶(Mys Tobizina)이다. 

2012년 개통된 루스키대교를 건너 섬으로 들어 갈 수 있는데, 블라디보스톡 중심부의 독수리전망대에 진입로가 있다. 독수리전망대 기점으로 8.5km 가면 루스키대교 입구다. 이 구간은 차량이 매우 많고 진출로가 복잡하며, 특히 차량 매연으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금각교와 루스키대교 각 다리의 양 끝에는 검문소가 있어 잠시라도 멈추면 안 되며, 갓길로 차량들과 호흡을 맞춰 달려야 한다.
블라디보스톡 중심가에서 루스키 섬으로 가는 대중교통으로는 15, 74, 75, 77, 63번 버스가 있지만,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만원이어서 자전거를 소지한 라이더에겐 그림의 떡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택시나 여행사 투어버스로 루스키 섬으로 이동해 트레킹을 즐긴다. 택시는 자전거 때문에 보통은 거부를 당하거나 아니면 웃돈을 건네야 갈 수 있는 쉽지 않은 섬이다.
오늘도 역시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고 조금씩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독수리전망대에서 진입하는 금각교에서 비를 맞으며 출발해 매캐한 매연을 맡으며 가는 길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래도 루스키 섬까지는 안전하게 가야하기에 일행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드디어 웅장한 루스키대교가 보인다. 사장교인 이 다리는 전체 길이가 3.1km로 주탑은 얼마나 높은지 구름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블라디보스톡이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라면, 루스키대교는 금문교에 해당한다. 참고로 루스키 섬을 오가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한다.
루스키대교를 건너 어느 정도 달리면 왼쪽으로 극동연방대학교가 나온다. 201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렸다. 루스키대교는 이때 완공됐다. 가까워진 루스키 섬에는 걷기 좋은 길이 나있다. 길을 걷다 간간이 해변으로 빠질 수도 있다. 

한때 부대 경비초소만 있던 해변도 일반에게 개방됐다. 잘 단장된 느낌은 아니지만 여름바다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루스키 섬이 육지와 연결되면서 시내 곳곳에 있던 극동연방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새 캠퍼스는 먼저 2012 APEC 정상회담장으로 쓰였고 대학은 그 후에 옮겨왔다. 이후 극동연방대학교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캠퍼스 내에 해수욕장이 있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몰려온다. 누구든 제지받지 않고 해변에서 즐길 수 있다. 다리가 놓인 이후로는 바쁜 도시 생활에 지친 블라디보스톡 시민들이 자연속에서의 휴식과 등산, 캠핑을 즐기는 휴양지로 사랑받고 있다. 
 

토비지나곶에 있는 옛날의 포대 흔적
우수리만의 샤모라 해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사장이다

 

숲의 정령이 깃든 듯 몽환적인 길 
아쿠아리움은 자전거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 아쿠아리움 입구에 있는 임도로 내려가 바다를 낀 습지대에서 본격적인 트레킹 코스로 라이딩을 시작한다. 블라디보스톡 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손꼽히는 루스키 섬. 험하지 않은 하이킹 코스로 제주도 올레길과 비슷한 느낌이다. 

저지대의 습지는 작은 해변과 서핑 장소가 간간이 있고, 키 작은 수풀과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이뤄진 해변길은 아담한 언덕을 넘나드는 느낌이다.   
오늘 트레킹 코스의 최종 목적지는 루스키 섬 남쪽에 위치한 토비지나곶이다. 휴전선 북쪽의 북한 땅과 닮아 한국 사람들은 ‘북한섬’이라고 부르고 있다. 

369 포대진지로 가는 임도는 여러 갈래의 길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코스를 잘 숙지하고 움직여야 한다. 해안을 낀 능선길과 절벽길은 바다가 펼쳐진 탁 트인 코스로 가는 내내 절경이 이어진다.  

비포장 임도는 차 바퀴 흔적이 깊은 골을 만들어 물이 잔뜩 고여 있거나 진흙 뻘로 질척인다. 수없이 나타나는 물웅덩이와 고랑은 처음엔 조심스럽게 지나거나 우회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린다. 흐린 하늘에 비는 쏟아지지만 공기는 너무 깨끗해서 숨만 쉬어도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루스키 섬은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 트레킹을 제대로 즐기고 싶어 하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감동적인 풍경을 마주할 수 있고, 다이내믹한 언덕 숲길과 초원길도 매력적이다. 

자전거 라이더가 루스키 섬을 100%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이정표도 없는 비포장 길을 자유를 만끽하며 무작정 달릴 수도 있지만, 자연 그대로의 길을 한가로이 달리다 보면 해안 절벽 등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경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이다.
369 포대진지에서 뱌틀리나 곶과 토비지나곶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가히 환상적이다. 마치 제주의 오름을 보는 듯 목가적이다. 능선의 초지를 지나 뱌틀리나 곶으로 이어진 울창하고 아담한 숲터널은 짙은 운무에 휩싸여 숲의 정령이 깃든듯 몽환적 느낌이다.
 

우수리만 동북부 해안로와 숲길
블라디보스톡 동쪽 우수리만을 낀 유리해변과 샤모라해변을 구경하고 싶어 코스를 잡았다. 그런데 교통이 복잡한 시내 중심가에서 동부 해안으로 빠져 나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다. 복잡한 길과 차량 매연은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한다. 새로 닦인 길과 공사중인 도로가 많아 힘든 라이딩으로 암담하기까지 했다. 

겨우 복잡한 중심가를 벗어나 한적한 동부 해안길로 접어들었으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몇 개의 작은 해변을 지나 드디어 사람들로 가득한 유리 해변이 보인다. 중국인이 많이 찾는다니 해변에 있는 사람들도 분명 중국인 관광객일 것 같아 그냥 지나친다.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길다는 샤모라 해변이다. 그동안 봤던 해변과는 사뭇 다르게 제법 근사한 모습으로 휴양과 유흥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 사질이 그리 곱지 않지만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려는 인파가 제법 있다. 

샤모라 해변을 나와 내륙으로 들어서서 산악지대를 종단하면 블라디보스톡 중심가로 빠져 나가는 숲길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산악코스는 시원한 개울을 여러번 건너게 되어 더위에 지친 일행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주지만, 트레일은 제법 거친 편으로 힘든 구간이다.  

 

샤모라 해변에서 블라디보스톡 중심가로 돌아오는 산길은 개울을 건너는 구간이 많다

 

 

마치며
이번 여행은 4박5일 일정에서 3일간을 온전하게 라이딩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틀간의 비로 인해 블라디보스톡의 깊은 속살을 제대로 파헤쳐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9월 중순에 또 한번의 투어가 예정되어 있다. 그때는 루스키 섬만 제대로 달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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