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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가면 꼭 기억해야 할 선조들의 아픈 이야기-미니벨로 타고 일본여행미니벨로 & 전철 타고 일본행

미니벨로 & 전철 타고 일본행(마지막회)
교토에 가면 꼭 기억해야 할 선조들의 아픈 이야기…
귀무덤(耳塚)을 찾아 선조들의 원혼을 달래다


교토는 1100년간 일본의 수도였고 지금도 3천개의 사찰과 2천개의 신사가 있다는 일본 정신의 총화이자 고향이다. 가장 일본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한반도와의 연결고리도 많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처였던 니조성,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의 절명지 본능사(혼노지), 임진왜란 때 조선 군과 백성의 원혼이 맺힌 이총(귀무덤), 우리에겐 전범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 마지막 여정인 오사카성에서도 결국 마주친 인물은 히데요였시다 

 

규모에서 일본 최고의 성으로 꼽히는 오사카성. 넓은 해자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설계와 거대한 규모는 일본 성의 압권이다

 

오늘은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며칠 째 내리던 비도 말끔하게 개어서 맑은 날씨가 될 것 같다. 오늘은 교토의 명소 몇 곳을 둘러본 다음 오사카로 넘어갈 예정이다. 오늘 교토에서 둘러볼 곳은 니조성(二条城, 니조조), 본능사(本能寺, 혼노지), 이총(耳塚, 미미즈카),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豊國神社 도요쿠니 신사)와 히데요시 무덤(豊國廟) 등으로 일정이 좀 빠듯한 편이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다 그렇지만 이른 아침이 아니면 관광객이 몰려서 오랫동안 줄을 서야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제일 먼저 가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城)인 ‘니조성’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더욱 밀릴 것으로 예상되어 일찍 호텔을 나선다. 이동거리라고 해야 2km가 조금 넘는 정도다. 도중에 자전거로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얼굴에서 하루를 여는 싱그러움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참 좋다. 


1~10조로 구분된 교토 거리
개장 시간 30분 전에 니조성에 도착했는데도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벌써부터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교토에는 천황이 거주했던 ‘교토 고쇼(京都御所)’와 도쿠가와 시기에 세워진 니조성(니노마루궁전)이 남아있지만 다른 일본의 유명 성(城)들처럼 천수각이 남아 있는 성은 없다(니조성에는 천수각이 있었던 흔적만 남아있다).

교토는 나라(奈良)에서 수도(首都)를 옮겨오면서 중국의 장안성처럼 계획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다. 그래서 시(市) 전체를 1조(条)로부터 10조까지 구분하여 나누고, 신분별로 구역을 정해 거기에 맞게 건물도 짓고 살게 하였다고 한다. 1조는 당연히 천황(고쇼)이, 2조는 무사계급, 3조는 스님들, 4조는 상인, 5조부터 10조까지는 평민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2조 지역에 도쿠가와의 성(城)인 ‘니조성’이 있는 것이다.


도카가와 이에야스가 머물던 니조성(二条城)
니조성은 토쿠가와 막부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으로 1603년에 완성되었다. 1600년에 있었던 ‘세키가하라전투’(일본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을 통일하게 되고, 이에야스는 천황의 명에 의해 쇼군이 되었다. 

에도(現 도쿄)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이에야스는 주기적으로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이곳 교토에 오게 되는데, 교토에 올 때 머물 거처와 집무를 위한 공간으로 축성한 것이 ‘니조성’이다. 전국시대 때 만들어진 다른 성들(오사카성, 히메지성 등)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으나 내부가 매우 화려하고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 역사상 갖는 의미는 다른 성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매우 중요한 성이다
 

일본 근대화로의 결심인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진 현장 니조성.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쇼군이 교토에 행차할 때 머물던 곳이다
니조성의 니노마루 궁전에서 혼마루 궁전으로 통하는 길에서 만나는 방호문의 모습이 놀랍다. 저 문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열강 진입을 위한 결단을 내린 곳
1853년 미국이 군함(흑선)을 몰고 와서 개항과 국교를 요구하자, 막부(幕府)는 다이묘들에게 대책을 구하는 한편, 천황에게도 이 상황을 보고하게 된다. 막부가 취한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260년 동안 다이묘들과 천황을 배제해왔던 막부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막부의 권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급기야는 하급무사들이 ‘에도 막부’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가 하면,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에게 정권을 넘길 것을 도모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이 확대되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0월 니조성에서 예하 다이묘들을 불러놓고 천황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에 대한 의견을 구하게 된다. 이어 10월 15일에는 니조성의 니노마루 궁전(대형실)에서 다이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끝났음을 선언’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있었다. 이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황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받은 지 264년 만의 일이고, 800년 가까운 무사정권의 종말이자 쇼군 역사의 폐막을 알린 사건이기도 하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교토의 황궁에서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5개조 어서문(五箇條御誓文)’을 발표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이 단행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봉건제에서 벗어나고 근대 민주국가로 급속한 변화를 이루게 되는데, 올해가 메이지유신을 선포한지 꼭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던 조선과 일본의 운명
음성안내기를 통해서 설명을 들으며 니조성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메이지유신을 결행한지 150년이 되는 그들의 행적을 생각하면서 니조성을 나서니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때 빗장을 더욱 굳게 걸어 잠그고 쇄국의 길로 갔던 조선(朝鮮)과 달리, 일본은 응전과 적응을 거치면서 변혁을 추진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변혁은 부국강병을 달성하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힘을 주변국으로 뻗는 제국주의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 힘은 우리에게는 일제식민지로 귀결되어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고, 그 흔적들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고 그 앙금은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본다면 일본이 앞으로 주변국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고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니조성을 뒤로 하고 일본 전국시대 통일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본능사(本能寺, 혼노지)로 향한다. 니조성에서 교토의 동쪽에 있는 가모 강 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어 금방이면 도착할 거리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의 흐름을 바꾼 ‘혼노지의 변’이 발생한 역사의 무대 ‘혼노지(本能寺)’의 정문. 원래의 혼노지는 서쪽으로 1.5km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주택가의 작은 비석만 전한다(작은 사진)
오다 노부나가 문장이 새겨진 투구(가부토. 兜, 冑). 필자가 군 재직 중일 때 ‘주한 일본무관’이 선물로 준 것이다

 

 

동북아의 역사를 바꾼 현장, 본능사(本能寺, 혼노지)
교토에는 일본이 자랑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많은 유적과 문화재가 남아있지만 그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곳 중의 하나가 본능사(本能寺)로 오다 노부나가의 묘가 있는 절이다. 일본 전국시대 통일을 주도해오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에, 그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꼭 가보고 싶었다.

불교 사원이지만 여행책자에도 잘 나오지 않아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볼거리도 많지 않은 편이라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토시청 앞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다. 결국 관광안내소에 들러 안내를 받고서야 찾을 수 있었던 보능사의 첫 인상은 너무나 왜소하고 썰렁했다. 

현재의 본능사는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은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死後)에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잿더미가 되어버린 원래의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원래의 위치는 현 혼노지에서 서쪽으로 1.5km, 니조성에서 남쪽으로 1km 지점에 표지석 하나만 외롭게 세워져 있다 ; 정확한 위치는 구글 지도에서 ‘本能寺跡’을 검색하면 된다). 

본능사 경내에는 건물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규모도 생각보다 작다. 노부나가의 무덤인 ‘신장공묘’(信長公廟, 혼노지의 변 때 노부나가의 시신을 식별하지 못해 다른 사망자들의 시신과 함께 모두 합장했다고 하니 노부나가의 시신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당, 박물관인 대보전, 몇 개의 작은 절이 함께 있을 뿐이다. 몇몇 관광객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노부나가 공묘에서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며 명복을 빌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방심으로 날아간 일본 전국 통일의 꿈
노부나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혼노지의 변(1582년)’이란,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가 주코쿠 지역(히로시마 등의 5개 현으로 이뤄진 혼슈의 남서단 지방)에서 ‘모리가문’과 전투 중이던 히데요시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자, 예하 장수 ‘미쓰히데’에게 출병 및 지원을 지시한다. 그리고 노부나가 자신도 주코쿠로 친정(親征)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혼노지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게 된다(혼노지는 1580년 노부나가의 명에 의해 세워진 절인 동시에 하나의 성채로 기능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건설했다).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둔 노부나가의 입장에는 일본의 1인자로서 더 이상 일신의 위협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에 혼노지에는 100여명의 근위병만 배치한 상태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주코쿠로 출병 중이던 미쓰히데가 회군하여 혼노지에서 숙영하고 있던 노부나가 일행을 습격한 것이다. 노부나가와 미쓰히데 간에 격전이 벌어졌고, 방어 상태가 충분하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20배나 되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을 택한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확신한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와 함께 출병 중 니조성으로 피신해서 대항하던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까지 멸하게 된다. 그러나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달려온 히데요시와 대적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망가던 중 농민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왜 배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측되고 얘기되지만 노부나가로부터 받은 심한 모멸감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부나가의 묘를 둘러보고 부속 박물관인 ‘대보전’에서 노부나가 관련 유물들을 살펴본다. 전시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전시, 보관 중인 유물은 박물관의 규모로 볼 때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전시물 중에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직접 쓴 글씨다. 막힘이 없고 강한 기상과 힘이 느껴진다. 그 외에 칼과 갑옷 등 유물 몇 점만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 최대의 담수호인 비와호(琵琶湖) 주변 아즈치성터(安土城蹟)에 노부나가와 관련된 또 다른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교토 혼노지에 있는 박물관을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한때 일본 전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큰 인물의 기념관으로서는 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빈약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전국시대 인물 중 1위에 뽑힐 정도이며, 그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만화 등도 꽤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기요미즈데라에서 내려다 보는 교토 시가지
외국인이 이총을 알 수 없게 영문 설명을 뺀 묘수(?)를 쓰고 있는 교토(京都) 시 당국

 

 

노부나가의 선택과 집중, 전국의 판도를 바꾸다
오다 노부나가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총포(조총, 鳥銃)와 관련된 일화이다. 노부나가는 1540년대 말 포르투갈의 상인을 통해 일본에 상륙한 총포가 앞으로의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다른 다이묘들보다 먼저 철포(조총)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전투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술 개발에 주력했다. 

당시 전국시대의 분위기는, 전투에서 무사가 칼을 놓고 총을 잡는다는 것은 무사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에 젖어 있었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된 배경에는 조총을 한 발 사격한 다음 재장전하여 사격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백병전에 능한, 강력한 기마대를 보유한 군벌이 많았던 당시의 전국시대 전투에서 재장전하는 사이에 기마대가 덮칠 수 있어 자칫 기마대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전투에서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전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3단 철포 사격법’을 개발하였다(3단 사격법이란, 1조가 사격하는 동안 2, 3조가 화약 장전을 비롯한 사격준비를 실시함으로써 사격 간격을 줄이고 그만큼 사격의 양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 노부나가의 ‘선택과 집중’ 덕분으로 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에서 당시 최대 라이벌 가문이면서 전국시대 최강의 기마대를 보유한 ‘다케다 가문’을 무너뜨리고 전국시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노부나가가 엄청난 규모의 철포부대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의 양상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혜안을 가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고가의 조총과 화약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경제력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조총의 출현으로 인해 전국시대의 전투 양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마병 중심의 전투가 줄어들고 보병 중심의 전법으로 빠르게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성의 구조도 총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축성하는가 하면, 성곽에도 조총을 쏠 수 있는 구조물(사마, 狭間)을 별도로 만들었다. 총이 활을 대신하여 군의 주력 무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는 궁수(弓手)를 양성하는데 엄청난 숙달 기간이 필요했던 활에 비해 총은 불과 며칠만 배워도 쏠 수 있어 대규모 상비군을 운용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부나가의 그늘이 부담되었을 히데요시
혼노지를 둘러보면서, 실제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왜 이곳으로 옮겨졌을까를 생각해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가 뭐라 해도 노부나가의 최고 가신이었으며, 노부나가가 이룩해왔던 기초를 바탕으로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면 노부나가가 명을 달리한 역사적인 그 자리를 더욱 의미 있게 복원하는 것이 주군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혼노지’를 이곳으로 옮겨서 짓게 했고 노부나가의 위상에 맞지 않을 정도로 규모도 축소한 것 같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히데요시는 어쩌면 더 이상 노부나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거쳐간 ‘기후성(岐阜城)’과 ‘아즈치성(安土城)’을 폐성하고, ‘혼노지’를 이곳으로 축소(?)해서 옮겨지은 것은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는 노부나가의 흔적을 지우려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 일본 전국시대를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교토 도심을 적시는 가모가와(鴨川)를 따라
일본 역사의 무대 중 하나였던 혼노지를 나서서 이총(耳塚)으로 향한다. 가는 길목에 있는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거쳐 가더라도 4km 정도로 가깝다. 교토의 동쪽을 흐르고 있는 가모가와(鴨川)는 교토의 중심에서 멀지 않고 강을 따라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가모가와 강변의 자전거길은 우리나라 한강 자전거길처럼 강에 바짝 붙어서 나있다. 강폭은 그렇게 넓지 않으나 경사가 있어서인지 물살이 꽤나 빠르다. 올려다보는 강변 동쪽으로 나있는 도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분위기 좋은 음식점이며 카페가 줄을 잇는다.
강을 따라 나있는 자전거길은 정말 한산하고 운치가 있다. 이렇게 해서 교토에 있는 동쪽의 가모가와 강과 서쪽의 가쓰라가와 강 두 곳을 다 달려보았다.

 

교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는 관광객들로 만원이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 아가씨들도 많다

 

 

잠들지 못한 채 이국땅을 떠도는 선조들의 원혼
교토를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면 잊지 말고 찾아가서 참배하며 영혼을 위로해줘야 할 곳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이 전리품으로 베어간 조선 군사와 백성의 코와 귀를 묻은 곳, 우리 선조들의 한이 서려 있는 이총(耳塚, 미미즈카)이라는 곳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별다른 성과 없이 답보상태가 계속되자 부하 장수들에게 전공의 표시로 조선인의 수급(首級)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수급의 부피가 너무 커서 일본으로의 운반이 어렵자, 나중에는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도 전과를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표식으로 조선 군민(軍民)들의 귀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가져오게 했다. 

조선에 진출한 왜군들은 더 많은 전공(戰功)을 올리기 위해 심지어는 산 사람의 귀와 코까지 베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 도착한 전리품(?)은 일본 열도 여기저기를 순회한 다음 이곳 이총에 매장되었는데, 12만6천명분의 귀와 코가 묻혀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코 무덤(鼻塚)으로 불렀으나, 에도시대 초기부터 그 명칭이 너무 야만적이라고 해서 ‘귀 무덤’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똑 같은데 이름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졌는가. 3대에 걸쳐서 자비(自費)로 이총을 말없이 관리해주고 있는 일본 관리인이 있다고 하니 선조들의 영혼이 그나마 위로를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마울 따름이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전하는 이총(耳塚)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는 선조들의 영혼을 만난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전하는 이총(耳塚)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는 선조들의 영혼을 만난다

 

이총에 영어 안내문이 없는 이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한 것에 대해서는 자랑하려 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은 감추려하는 습성이 있지만, 이총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보노라니 일본인들의 속(本音, 혼네)을 알 수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계 어느 관광지를 가더라도 안내판에는 자국어(自國語)와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되는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만 설명하고 있을 뿐 영어 설명은 찾아볼 수가 없다. 외국 관광객이 이곳을 들른다 해도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런 만행이 외국인들에게 알려질 리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경남 사천에 가면 또 다른 ‘이총’이 있다. 1992년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란 분이 합심, 노력해서 조성한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떠돌고 있는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이총의 봉분에 있는 흙 일부를 고국으로 가져와서 안치해 놓은 곳이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일본에서 천대받고 있는 이총을 고국으로 모셔오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물론 무슨 의도로 그렇게 주장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고국에 돌아와서 해야 할 역할이 있고 그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일본에 남아 있으면서 해야 할 역할 또한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에 그대로 남아있으면, 그곳을 찾거나 지나는 사람들 중 일부라도 선조들의 만행을 부끄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게 일본과 일본인들을 압박(?)하는 역할을 계속할 수도 있지 않을까.


‘히데요시 묘’를 찾아 혼(?)을 내다
이총을 조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히데요시 자신도 ‘후시미성’(신사에서 남쪽 약 7km지점)에서 62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다. 이총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이총을 설치하도록 지시한 임진왜란의 원흉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고, 거기서 멀지 않은 아미타카미네 산(阿弥陀ヶ峰)이란 곳에는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조성된 그의 무덤이 있다. 

도요쿠니 신사를 찾은 일본 사람들에게 히데요시의 무덤에 관해 물어봤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침 무덤의 위치를 아는 노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위치는 알고 있으나 워낙 높은 곳에 있어서(498계단, 193m) 무덤까지는 가지 않고 ‘도요쿠니 신사’를 찾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한다고 한다. 그러나 교토를 방문하는 한국인은 ‘이총’에 대한 참배를 반드시 하고, 히데요시의 무덤까지 찾아가서 따끔하게 한 마디씩 해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래야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12만의 영혼이 위로를 받고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히데요시 무덤에 가기 위해 입장권을 사고 498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급경사를 오르려니 숨이 찬다. 결코 만만한 높이, 만만한 경사가 아니다. 그래도 그를 만나서 한 마디 해주기 위해 힘을 모아 올라간다. 드디어 무덤에 도착하여, “네가 생전에 조선이란 나라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아느냐?”고 따지며 혼(?)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애국가와 함께 해병대 군가까지 힘차게 부르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무덤 앞에 헌금함이 있길래 들여다보았더니 지폐는 한 장도 없고 동전들만 몇 개 보인다.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1, 2위의 위인이라고 하는데, 동전 정도로밖에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인가. 계단 아래에서는 입장료로 100엔을 받았는데…. 

일본의 역사가 총망라되어 있는 교토에서의 여정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 오사카로 향한다. 교토에서 오사카(덴노지 역)까지는 약 50km이며 기차로 40여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여서 교토를 출발한 열차는 금방 오사카(덴노지 역)에 도착한다.

 

우리 민족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 498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오사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오사카는 일본 제2의 도시로, 혼슈지역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긴키 지방에서 제일 넓은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일본 문화의 여명기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 6세기 말∼7세기 중엽)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오사카 주변지역은 물론이고 국내 여타 도시들과도 철도·도로망·항로·해로를 통해서 잘 연결되어 있고, 외국과도 해로와 항로를 통해 사통팔달 연결되고 있으니 수·륙·항공의 교통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중심도시로서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은 1583년 히데요시가 일본 통치의 거점으로 오사카성(城)을 구축하면서부터다. 

오늘 밤은 일본 여행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나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혼자만의 자축시간을 갖기로 한다. 그래서 일본에 와서 좀 비싸기는 해도 참치 회와 사케(정종), 튀김을 시키고 여유를 가져본다. 술이란 것은 역시 기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울할 때는 극복할 수 있게 해주고, 기분 좋을 때는 더욱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술 아니던가? 기분이 동(同)하는 사람과 하께 마시는 술도 좋지만, 혼자서 분위기 잡으면서(?) 마시는 술도 그것대로 멋이 있다. 적당히 마셨더니 기분이 참 좋다. 

5일 간 혼자만의 여행, 즐거움의 연속이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낭을 잃어버렸던 것과 안경다리가 부러져 ‘눈 뜬 장님 신세’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접이식 자전거를 휴대해 잘 발달된 철도망을 마음껏 이용하며 여행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일본 최고의 성, 오사카성을 만나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밤까지 오락가락하던 비가 말끔하게 개이고 오늘은 일본에서 맞는 최고의 날씨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완전히 꾸려서 마지막 방문지 오사카성으로 향한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길을 달려 일본 최고의 성, 오사카성에 금방 도착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오사카성, 정말 엄청 크고 화려해 보인다. 

오사카성은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을 모델로 삼아 1583년에 축성한 성이다. 히메지성과 마찬가지로 평지라는 방어 상의 약점을 여러 겹의 해자와 거대한 화강암을 이용한 성벽을 통해 보완되도록 만든 성이다. 

오사카성은 규모로만 보면 일본 제일이다. 히데요시가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 3년이라는 세월 동안 10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건설했다. 처음 축성할 당시의 오사카성은 현재 성의 4배 정도였다고 하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는다. 오사카성은 일본을 통일하고 명나라 정벌을 꿈꾸던 히데요시의 본거지였으니 우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곳이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 간의 전쟁이었던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되고, 성의 많은 부분도 소실되었다. 1620년에 들어 도쿠가와 가문은 이전의 도요토미 시대의 성을 4분의 1 규모로 축소하는 등 도요토미 가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천수각 만큼은 더욱 화려하고 크게 재건축하였으나 이 천수각은 1665년 낙뢰에 의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세 번째 천수각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도요토미 시대 때의 성을 본떠 재건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 소실되었다가 1958년에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사카성 천수각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오사카 시내. 해자가 오사카 성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다

 

 

명성과 아름다움이 성(城)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오사카성을 둘러보노라니, 히메지성(히메지 소재)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충격과는 달리 무엇인가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든다. 이미 히메지성에서 큰 충격을 받았기에 명성만큼이나 더 큰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일까.
1580년에 히메지성을 축성했던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축성했으니 히메지성 못지않게 충분히 전투 상황을 고려해서 축성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히메지성을 축성했을 때처럼 세부적인 전투 상황을 고려한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서 많이 아쉬웠다. 어쩌면, 오사카성이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함락된 이후 있었던 ‘도요토미 가문 흔적 지우기’ 과정과, 수차례의 복원 과정에서 일부 빠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사카성 대부분의 공간을 도요토미 가문의 박물관 겸 기념관 성격으로 재구성하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목조 건물이었던 천수각을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한 것도 큰 아쉬움을 남긴다.


성을 보호하고 있는 2중 해자는 다른 어느 성의 해자보다 폭이 넓고, 성벽과 함께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어서 오사카성은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의 섬(島)과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임에 틀림없다(해자는 폭이 100m가 넘는 곳이 있을 정도니 강이나 다름없고, 성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강과 물길까지 감안한다면 마치 3중, 4중의 해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성벽의 높이와 두께는 보는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한다. 성을 축성하면서 예하 영주(34개 다이묘)들을 독려해서 축성에 필요한 돌을 제공받았는데, 그 크기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예하 영주들 스스로가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 경쟁을 하며 큰 돌을 제공하기도 했겠지만, 돌의 크기를 기준으로 다이묘들의 충성심을 평가하다 보니 그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하 영주들의 가문석(家門石)을 전시해놓은 각인석광장(刻印石廣場)에 그 증거가 남아있다. 성의 정문(오테몬)을 지나면서 마주치는 성벽에 있는 대형 돌(14.5평, 130톤)을 보면 그 규모가 놀랍기만 하다.

 

오사카성 전투에서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가 자결한 곳을 기리는 비석이 외롭다
오사카성 마지막 전투인 ‘여름 전투’의 모습을 그린 병풍도. 직접 전투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정도로 사실적이라 놀랍다
성을 축성할 때 영주들이 보내온 돌을 전시하고 있는 각인석광장(刻印石廣場). 전시되어 있는 돌에는 각 영주들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달콤한 평화협정만으로는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법
이런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성을 밀어붙이듯 공격하는 방법이겠지만, 이때는 성공하더라도 매우 많은 손실(피해)이 수반될 것이다. 성공 가능성을 점치기 어려울 것이므로 심리전은 물론이고 손쉽고 다양한 방법을 복합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1614~5년에 있었던 도요토미 가문 대 도쿠가와 가문 간에 난공불락의 철옹성인 오사카성을 놓고 전투가 벌어진다. 쌍방 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도쿠가와 측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 측의 포격으로 인해 천수각을 비롯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전투를 중지하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이에야스의 제안을 히데요리가 받아들여, 양측은 오사카성 주변에 있는 해자를 메우고 도쿠가와 측은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합의에 이르게 된다. 

합의에 따라 도쿠가와 측이 해자를 메우게 되는데, 이때 처음 약속대로 바깥쪽 해자만 메운 것이 아니라 안쪽 해자까지 다 메우게 되어 양측은 다시 갈등을 빚게 된다. 이듬해, 메워진 해자를 도요토미 측이 다시 판다는 보고를 받은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오사카성에 대해 총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것이 ‘오사카성 여름 전투’이다. 히데요리는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으나, 이에야스 측과 내통하던 첩자가 성 내부에 불을 질러 오사카 성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게 되고, 이어진 이에야스의 총공세로 오사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 성(城), 너무 궁금한 것이 많다
이번 자전거여행의 첫 방문지인 ‘히메지성’을 통해서 일본의 성이 갖는 특성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고, 일반적인 성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니조성’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방문한 ‘오사카성’에 대해서는 나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나의 기대에는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히메지 성의 천수각에서는 한층 씩 올라가면서 성의 각층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요소요소에 있는 구조물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고서 경탄했다. 그런데 오사카성은 8층 50m 높이의 천수각을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축했을 뿐만 아니라 1~7층까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자료관으로 구성함으로써 성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아 일본의 성을 이해하는데 아쉬움이 있었다. 

오사카성이 오사카의 명물임에는 틀림없겠지만, 히메지성이 주는 것과 같은 성(城) 고유의 맛은 전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일본 성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다른 유명한 성, 나고야성(名古屋城)과 구마모토성(熊本城)도 꼭 가봐야 할 것 같다.
 

오사카성에서 가장 큰 돌 ‘타코이시(蛸石. 15평 정도, 130톤). 오사카성을 축성할 때 히데요시는 예하 영주들이 바친 돌의 크기로 그들의 충성도를 평가하였으며, 가장 큰 돌은 정문 일대에 배치해 충성심을 격려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콘크리트로 재건해 원래의 모습과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관광버스의 외부 디자인에 일본 성(城)을 공격하는 해법이 나와 있다(오카야마현 키비추오초 초대 자전거길 개발 투어행사를 공동 개최한 JTB 여행사의 버스)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8일간의 일본여행을 끝내고 간사히공항(關西空港)을 통해서 귀국했다.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동안 한민족과 일본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너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왜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야하는지, 알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공존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손자(孫子)는 <손자병법> 모공 편에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지지 않으려면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상대, 중국과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을 바로 볼 수 있는 눈(眼目)을 키우자
우리 선조들이 우수한 문화를 전해주었던 과거의 일본과 오늘의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라다. 우스개로 ‘지구상에서 일본인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라는 얘기가 있다. 엄연히 그들은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자 정예 전력을 갖춘 세계 군사 강국 중 한 나라이다. 과거에만 맞춰진 시각으로는 오늘의 국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은 물론, 미래도 내다볼 수 없다. 그들은 15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쇄국으로 치달을 때에 메이지유신을 통해 세계 강대국을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세계 최강 미국과 전쟁까지 했던 나라이다.

수천 년 동안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은원(恩怨)으로 맺어진 역사가 있다. 멀리 하기에 너무 가까운 이웃이 일본이다. 누가 뭐래도 일본은 우리나라에 매우 중요한 나라 중의 하나이고, 우리 또한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나가가 되었다. 이제 마인드를 바꿀 때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 일본을 보고, ‘이해득실을 따져’ 일본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지금보다는 더 필요하다. 일본을 세계 240여 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외국’으로 담담하게, 냉정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에서 교토에 있는 천황의 궁인 교토고쇼(京都御所)와 후시미성(伏見城)을 방문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한다. 여행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에 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교토 여행만큼은 핑계로 하지 말고 꼭 다시 오고 싶다. 이번에 가보지 못한 곳을 더 둘러보게 되면 지금 갖고 있는 궁금증이 풀릴 수 있고, 이어지지 않는 스토리가 연결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성(城)은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통하여 성을 공격·방어하는 수단과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상호 경쟁하듯 발전해왔다. 특히 화약이 발명됨에 따라서 그 위력은 놀랄 정도로 증가되었다. 공성전의 특성 중 하나가 공격 가능한 장소와 방법 등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일반적인 전장에서 쓸 수 있는 전술을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좁은 전투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발한 방법 보다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무식한 방법들을 상황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재적소에 채택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전투이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외부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린 상황에서 그냥 장시간 동안 항복을 기다리는 방법, 성에 불을 내는 방법, 성벽 보다 높게 토산(土山)을 쌓거나 고가 사다리나 고가 탑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방법, 주변의 하천과 호수의 물을 이용하는 방법(홍수 등 ;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 공격 시 사용), 성벽에 구멍을 파서 침투하는 방법(특공대 투입), 가장 초보적인 성벽을 타고 공격하는 방법 등 무궁무진하다. 그 외에 심리적인 방법으로는 첩자를 이용하는 방법(성의 취약부분 파악, 성문개방, 방화, 식수원 오염시키기 등의 테러 활동), 전염병 퍼뜨리기, 항복 요구하기 등이 있을 수 있다.


참고 자료
1. 남경태,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 편 1~4)
3. 이원복, 먼 나라 이웃 나라(7~8권, 일본 편) 

4. 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5. 차백성, 재팬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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