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소양천( 전주 · 완주 )

한국의 강둑길65 - 전주천·소양천( 전주 · 완주 )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를 감싸고 흐른다

불타는 여름의 한 가운데 전주로 간다. 노령산맥이 남으로 분기하면서 전주의 동남을 간단치 않은 기세로 틀어막고 있다. 산경표의 얼개로 말하면, 주화산에서 바톤 터치한 금남정맥이 흘러내리다 진안·남원으로 가는 아랫녘을 막아 전주를 가두었다. 만경강으로 트인 북쪽 들판이 아니었더라면 전주는 대구보다 더한 분지가 되었으리라. 소양천과 전주천이 휘감는 고도 전주는 이 여름 더위 속에서도 세계인들로 뜨겁다. ‘전주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입니다’는 그 한마디를 찾아온 사람들이 오목대 위에 오른다. 코를 맞댄 한옥 지붕과 전동성당, 풍남문이 있는 전통의 도시 전주에 취해 잠시 더위도 잊는다

 

소양천은 만경강 발원지와 등을 맞대고 떠나 전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한가한 강이다

 


전주천·소양천- 5시간 소요(쉬엄쉬엄 7시간) 완주 소양-완주 상관(52.5km)

 

한 달째 펄펄 끓는 여름더위다. 전국 여기저기서 40도를 점찍는 경쟁에 숨이 막힌다. 기상관측 사상 기록이라는 이 더위 한 가운데에 전주를 이정표로 삼은 것은 거의 끝이 보이는 ‘한국의 강둑길’ 여정에서 달리 피할 방도가 없어서다.
여름날 동트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전주의 동쪽을 에워싸고 흐르는 소양천의 발원지가 곰티재이지만 대둔산의 기가 이어 내려와 진안과 완주를 가르는 운장산(1126m)의 높은 줄기에 한 치라도 가까이 가면 시원한 구석이 있을까 싶어 보룡고개 아래 용문사에서 출발한다. 가물어도 용문폭포는 물줄기를 놓지 않고 있다. 더위를 모르는 이 골짜기도 올 여름은 예외 없이 삶아대고 있다 했다. 스님의 새벽 예불도 열대야 속에 며칠 째인지 모른다 했다.

노령산맥에서 일어나는 소양천
용문천을 따라 내려오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을 만난다. 폐교부지나 될법한 제법 넓은 땅, 울타리에 ‘초경량비행장치 무인멀티콥터비행훈련장’이란 표찰이 붙어 있다. ‘무인항공교육원’이라 이름 붙인 것을 보아서 그야말로 시대의 대세라 할 수 있는 드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날 여기저기서 드론훈련장을 보게 된 것도 그만큼 비행수요가 있다는 얘기다. 새처럼 날고자 하는 욕망,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세상을 드론은 그대로 찍어서 우리에게 자랑한다. 헬리콥터나 열기구에 올라타지 않으면 잡아낼 수 없던 풍경이 시야의 옹색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원하다. 

드론의 쓰임은 택배에서 농약치기, 군사용도까지 이미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게임기의 조종간을 전후좌우로 떡주무르듯 해온 청춘들과 ‘뿅뿅 전자오락’을 벌레 보듯 해온 ‘낀세대’는 애당초 경쟁이 되질 않는다. 정부의 규제에 가로막혀 드론을 개발해 놓고도 신기술 테스트도 못하고 있다는 한탄에다, 세계 드론 시장의 70%를 이미 중국이 삼켜버렸다는 보도까지 겹치니 더욱 심란하다.

진안을 드나드는 길손, 화심두부의 기억
소양천 물줄기는 조금 굵어 졌으나 강둑길은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참 예쁜 이름 ‘화심’이다. 무엇보다 ‘화심두부’로 유명한 마을이다. 유명세를 타면 원조경쟁은 흔한 풍경이 된다.  이름을 슬쩍 비틀어 특허를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눈치껏 재빨리 하지 않으면 인심 좋던 마을에 ‘원수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화심두부 원조의 설명을 들어보자. 60년 전 26번 국도 길목 방앗간집으로 시집온 새색시 권영선이 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시작되었다. 전주~진안을 오가던 길손들이 들러 요기하다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두부마을이 되었고, 두부찌개가 대표 상품이 되었다. 어머니의 손맛, 할머니의 향수가 두부 속에 살아 있는 셈이다.

해월리에서 갈라지는 741번지방도는 위봉산성과 위봉폭포로 이어져 만경강의 발원지인 동상저수지까지 거슬러 오른다.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와 이름이 같은 ‘송광사’ 또한 근방에서는 자랑하는 사찰이다. 산속에 박혀 있지 않는 절이면서도 신라 고찰답게 품이 넉넉하다. 봄이면 소양천의 지류인 오도천을 따라 피는 벚꽃터널이 장관이다.

 

올여름 유별난 무더위의 한 가운데라 용문폭포가 있는 골짜기에서 소양천 주행을 시작한다(완주 소양)
제법 규모를 갖춘 드론 비행훈련장. 새의 날개, 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요즘 대세다(완주 소양)
‘화심두부’는 전주~진안 길손의 허기를 채워주던 인심에서 비롯된 명소다(완주 소양)
무더워도 할머니의 외출에 유모차는 동행한다(완주 소양)

 

 

만경강에 먼저 안기는 물길, 소양천
소양면 소재지를 지나 완주~순천고속도로 아래를 지난다. 강폭은 넓어지면서도 우거진 갈대숲에 가려 물이 보이지 않는다. 동전주의 확장은 완주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구억리와 구만리의 제법 너른 벌판을 빼면 산에 가로막힌다. 

용진읍 신지리, 만경강 봉동다리 가까이 자리 잡고 앉은 ‘하이트진로 전주공장’은 팩토리 관광지로 전주가 아낀다. ‘100% 천연 암반수’, 조선맥주의 ‘하이트’ 브랜드를 탄생시킨 곳이니 자랑할 만도 하다. 한때 공장매각설이 나돌 만치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주한옥마을 관광객들에게 핫스팟이 되고 있다. 일본 오카야마에서 본, 유명맥주 회사가 운영하는 포도 와이너리 같은 곳이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이자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처럼.

전주의 여백, 다시 태어난 전주천
소양천은 회포대교에서 만경강을 만나면서 수명을 다한다. 호성동과 전미동 일대의 전미·사리평야를 돌아 역시 만경강에 합류하는 전주천 하구에 이른다. 이제 전주천 발원지로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전주천 또한 다른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처럼 ‘오염과 정화’라는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보(洑)를 걷고, 생태하천을 만들기 위한 식생에도 노력한 결과를 지금 전주가 맑은 물로 누리고 있다. “개발과 보전은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문제”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전주는 전주천을 중심으로 완산구와 덕진구를 가르고, 삼천을 중심으로 전북도청이 있는 서부신시가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완주 구이면 모악산에서 발원하는 삼천 언저리 또한 서쪽 산줄기에 막혀 도시를 확장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만들기엔 무리였다. 해묵은 도시 전주는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오히려 쇠약의 길로 접어들었었다. 진안·무주·금산이 대전권으로, 고창·순창이 광주권으로 각기 흡인되고, 군산·익산도 따로 발전하여 1980년 전주 인구가 37만3000명에 불과했으니 광주와 대전의 절반 정도였다. 그마나 전주가 구도심을 벗어나 팔복동 일대 50만평에 ‘전주공단’을 만든 것은 1969년이다. 서북으로 열려있는 구릉과 평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소실점 끝이 만경강이다(완주 소양)
전주천을 거슬러 오르자 전주가 새롭게 다가왔다(전주 덕진)
전주천은 전주의 여백이다. 소양천, 삼천과 함께 전주를 넉넉하게 하는 3대 하천이다(전주 덕진)
무더위에 천렵하러 나온 노인들. 무더위엔 역시 강가가 최고다(전주 완산)

 


하나의 문 두 개의 현판, ‘풍남문’과 ‘호남제일성’
주천대교를 지나 서신지구에서 삼천과 갈린 전주천은 전주 도심을 깊숙이 파고든다. 전주기전대학을 지나 풍남문에 이르면 전주다운 배경으로 더욱 빠져든다.
전주성은 삼남지방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북쪽에 평양과 함흥성이 있고, 남쪽에 전주성과 대구성이 있었으나 대구성은 전주성(72만㎡)의 3분의2에 불과했다. 풍남문은 일제가 1907년 식민수탈의 상징인 ‘전군가도’(전주~군산 국도)를 만들면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헐어낸 동서남북 방향의 전주성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문이다. 수원 화성의 네 문 가운데 동문(창룡문)과 북문(장안문)이 6·25 전쟁의 참화로 누각이 날아갔던 것에 비추어 보면 참 허망하게도 없애버린 역사다. 바로 문 앞까지 점방들이 늘어서 있던 풍남문 옛 사진 속 정겨운 온기를 ‘전주남부시장’에서 조금 느껴 볼 수 있다. 

풍남문 현판은 성 밖으로 달려 있고, 성 안쪽으로는 ‘호남제일성’이란 현판이 덧붙어있다.    이 글씨는 27번 국도 전주 초입에서 만나는 ‘湖南第一門’을 쓴 서예가이자 존경받는 선비인 강암 송성용 선생의 붓끝에서 나왔다. 평생을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지낸 그의 글씨와 대나무 그림은 따를 자가 없으니 “고전의 그릇에 현대를 담았다”는 평가가 교동2가 196번지 ‘강암서예관’에 그대로 살아 있다. 

강암 선생의 셋째 아들이 바로 현재 전북도지사 송하진이다. 사실 그가 정치에 몸을 담으리라고 미리 짚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래 전 중앙부처에 근무할 때, 인사동 저녁자리에 나타나서 건네는 그의 환한 웃음은 현실정치의 흙탕에 꽤 오래 발을 디디고도 여전하다. 육자배기 두어 가락, 판소리 한 대목을 기꺼이 노래하던 친화가 그를 전주시장으로 만들고, 도지사를 꿈꾸게 했나 보다. 민선 7기, 재선 도지사로서 그의 취임사에 담긴 정신의 뼈대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아름다운 산하 웅비하는 생명의 삶터, 천년 전북의 시대’라는 표제는 짧지만 긴 서사다.

38도를 넘는 더위 속에 전주 곳곳에는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고 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얼음은 더위의 강도만큼 빨리 녹지 않았다. 손바닥을 대고 볼을 비벼보았다. 역사책에서나 배우던 한강변의 동·서빙고나 경주의 석빙고의 효용과 가치는 늘 의심스러워 보였다. 오늘 보니 얼음을 서늘한 땅 깊은 공간에 짚으로 덮어서 여름까지 보관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구나 싶다. 달궈진 광장에서 녹아 흐르는 얼음이야말로 관광 전주를 위한 관청의 배려이기도 하거니와 관선시대라면 발상자체를 할 수 없는 여민(與民) 정신의 징표다.
 

전주 풍남문은 스스로 헐어버린 전주성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호남제일문’이다(전주 완산)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장애인. 무더워서 밖으로 나왔다며 칡넝쿨 모자를 만들고 싶어 시도하다 포기하고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따뜻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완주 상관)

 

 

옛 고을의 멋과 맛, 전주 한옥마을
이제 전주는 ‘한옥마을’과 등식이 되었다. 연간 11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전주에 모여드는 베이스캠프인 셈이다. 2010년 ‘슬로시티’로도 지정되었다. 전주한옥마을을 통해서 ‘근대로의 여행’이 가능해 진다. 전주 한옥마을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의 한옥주택 824채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면서다. 1977년 전주시장 정병우 때의 일이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한다. 기차로 지나가다 한옥이 밀집한 동네를 보고 “이런 주택은 잘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이 시발이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갈아 덮던 시대에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사실 일제 때 일본 상권에 대항해서 1930년대에 지은 내력 있는 한옥집단 취락이니 서울 북촌 한옥과 동년배인 셈이다. 1986년 ‘제4종미관지구’로 지정되는 우여곡절 끝에 주민들의 반발 속에서도 버텨오던 ‘한옥고수’를 1997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군데군데 들어선 양옥건물들은 이때 이후 들어선 점박이인 셈이다. 다시 1999년 ‘전주생활문화특구’로 지정되어 ‘한옥마을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했던 전북대 교수는 주민들의 협박에 떨었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오늘날 한옥마을은 전주의 효자다. 무엇이 이 무더위에 지구촌 사람들을 전주로 몰려오게 하는가. 이 땅 다른 어느 고장에서도 만날 수 없는 ‘멋과 맛’에다 역사까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주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관향(貫鄕)이다. 이성계가 함경도 아바이가 된 것도 그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몽골, 의주, 함흥을 전전하다 정착한 ‘유랑의 연고’다. 국가시조 태조의 어진(국보317호)을 모신 경기전과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서를 보관하고 있는 전주사고(史庫)는 4대사고(춘추관·전주·충주·성주) 중 유일하게 전화(戰火)로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사적이다.
낮이면 더위에 주눅 들어 있던 관광객들이 어둠에 힘입어 태조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오목대에서 전동성당, 풍남문까지 인파는 ‘조선의 흥’으로 열대야를 이긴다.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어 전 세계로 전송하는 일은 버킷리스트처럼 자연스럽다. 반짝이가 유난히 튀는 여인의 치마저고리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어우동의 허리춤을 닮기도 했고, 바비 인형의 잔재 같기도 하고, 유리 구두를 잃어버린 신데렐라의 옷에서도 느낌을 빌려온 듯, 요상한 한복이 한옥마을 담장 아래 넘친다. 

‘먹방 TV’를 규제하니 마니 하곤 있지만 여행에서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전주의 음식은 전통을 먹는 일이다. 콩나물과 청포묵, 찹쌀고추장 등 30가지 재료를 넣고 지어 유기그릇에 내오는 전주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벼야하는 수고로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전주콩나물국밥’과 ‘전주한정식’ ‘오모가리탕’ ‘떡갈비’를 두루 맛보려면 잠시 체중계를 잊어야 한다. 전주의 밤에 ‘전주막걸리’를 테마로 한 푸짐한 상차림까지 가세하면 밤이 절로 깊어 간다.

 

지구촌 한류의 본고장에 ‘전주한옥마을’이 있다. 외국관광객이 넘치는 밤이다(전주 완산)
더위를 피해 야행으로 즐기는 한옥마을. 방학 때가 성수기라 여름, 겨울이 붐빈다(전주 완산)
반짝이 무대복이 되어버린 한복. 바비 인형과 신데렐라, 어우동이 뒤섞여 보인다(전주 완산)
한옥마을의 기와지붕과 조화를 이루는 전동성당. 소중한 문화유산이다(전주 완산)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의 향기
오래된 도시 전주의 문화적 향기는 ‘전주대사습놀이’로 거슬러 오른다.  대사습은 관청의 잔치여흥경연대회다. ‘전주부통인청대사습’은 한양보다도 더 명성이 높아, 장원하면 광대에게 통정, 감찰, 참봉, 선달 같은 명예벼슬이 부여되기도 했다. 지금도 국악인들의 등용문 같은 제도로 위상이 높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시각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영화표현의 해방구’다. 장·단편 241편이 출품되어 독립영화감독, 평론가들에 크게 사랑받는 영화제다. 영화제 취재 기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데는 맛있는 먹거리가 푸짐해서라는 뒷얘기도 있다.

한옥마을 거리에는 <놀부가 떴다>, <변사또 생일잔치> 같은 마당극류의 공연 광고 깃발이 펄럭인다. 그 외에도 무형유산원, 전주전통한지원, 전통술박물관, 전주소리문화관, 전주부채문화관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놀부와 변사또, 고전을 거꾸로 읽는 이시대의 눈에 딱 맞는 소재다(전주 완산)
한낮은 너무 더워 태조로가 텅 비었다. 차양막도 전주에선 예술이다(전주 완산)
무더위를 견뎌달라는 전주의 배려, 도시 곳곳에 놓인 얼음은 생각보다 더디 녹는다(전주 완산)

 

 

전주천을 따라 지나간 옛 전라선
전주천이 한벽당을 지나면 도심을 벗어난다. 작은 터널 하나가 강둑길로 이어져 있다. 철길의 흔적이다. 지금의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를 휘어져 도는 기린대로는 도심에 있던 전주역을 동쪽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다니던 전라선 옛 철길이다. 이 길이야 말로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따라 골짜기의 풍광을 감상하며 페달을 저을 수 있는 레일바이크의 적격지다. 

조금만 더 앞을 내다봤더라면 폐역된 아중역 근처에다 ‘한옥마을 레일바이크’라고 이름 짓고, 나무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 왕복 3.5km를 달려야 하는 억지스러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든다.

전주의 남쪽을 막아서는 호남정맥, 슬치재로
상류로 갈수록 물이 맑아서 사람들은 다리 밑에 아예 솥단지를 걸었다. 상관면과 삼천의 상류 구이면은 닥나무가 많아서 예로부터 전주한지의 재료 공급원이었다. 전주 합죽선이 예술적 가치와 기능을 하기에는 ‘천년 한지’의 공이 크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대한교과서가 보유하고 있던 세한제지가 삼성그룹의 전주제지를 거쳐 1992년 계열분리를 한 다음 한솔그룹의 모기업인 ‘한솔제지’가 되기까지 전주의 한지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저녁을 전주의 맛으로 즐기려 생각하니 갈 길이 바빠진다. 더위가 심술을 제대로 부리는 하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만만하지가 않다. 책 바위 벼랑아래 소(沼)를 만난다. 미역을 감기로 했다. 환갑을 넘긴 중늙은이들이 길 가다 옷을 벗고 계곡 물에 몸을 담그다니. 참 얼마만인가.
신리역도, 죽림온천역도 더 이상 완행열차조차 서지 않는 폐역이다. 전주천도 골짜기 속으로 사라졌다. 슬치재 너머가 바로 섬진강이 지나가는 임실 관촌이다.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7-7710, 수요일 휴무)
 ‌자전거협찬 : 알톤 스트롤 전기자전거
 ‌강둑길 동행 : 이홍희(자전거여행가)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전라북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얼쑤 전북, 2018. 7월호
3. 월간, 전주한옥마을, 2018. 6월호 
4.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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