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 펀치볼

한반도에서 가장 기묘한 분지,  설악과 금강을 한눈에 
양구 펀치볼
 

운석이 충돌해서 생기는 크레이터와 흡사한 양구 펀치볼은 위성사진으로 보면 지형이 더욱 확연하다. 지질조사 결과 차별침식으로 생겨났다지만 아무래도 크레이터 같아 보인다. 북쪽의 가칠봉(1242m) 능선은 휴전선을 바로 접하고 있으며 248km 휴전선을 통틀어 가장 고지대이다. 6·25 때 참혹한 고지전이 벌어졌던 격전의 현장으로 북한이 뚫은 제4땅굴도 가칠봉 아래를 관통한다. 가칠봉 동릉의 을지전망대(1049m)는 11개 휴전선 전망대 중 가장 높고, 금강산~설악산의 백두대간과 펀치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크레이터인가, 자연침식의 결과인가. 을지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펀치볼의 독특한 지형. 맞은편 대암산(1304m)을 비롯해 분지를 빙 둘러싼 능선 아래로 이름 그대로 옴폭한 그릇 형태를 하고 있다

 

“저기 무산 뒤편으로 가장 멀리 보이는 산이 금강산이고, 오른쪽 높은 산은 설악산입니다.”
금강과 설악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입지와 고도, 주변 산악지대의 웅자는 놀라웠다. 국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과 무인지경의 고요, 그리고 능선과 사면을 따라 일렁이는 철책선 사이에 감도는 침묵 속의 긴장감, 철책선 외에는 인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DMZ의 원시 생태계가 시야를 넘어 가슴과 뇌리까지 점령한다. 이곳은 양구 펀치볼 북쪽 능선에 자리한 을지전망대다.
 

금강산 비로봉과 설악산 대청봉이 한눈에
휴전선 248km를 따라 배치된 부대별로 11개의 안보전망대를 개방중인데 그중 을지전망대(12사단 관할)가 해발 1049m로 가장 높다. 전망대는 남방한계선에 서 있고, 바로 지척에서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군사분계선은 이제는 알아볼 수 없고 그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대치한 남방과 북방 한계선의 철책만이 만리장성처럼 지형을 따라 고동친다. 맞은편에는 구례산(1358m)과의 사이에 우복동 같은 평지도 보인다. 국내 어디서도 보지 못한 깊은 산세와 울창한 수림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금강과 설악이 함께 보이고, 펀치볼이라는 희귀한 지형도 한눈에 들어오니 여기보다 더 다채롭고 웅장한 전망대가 또 있을까 싶다. 전망대와 조망을 좋아해서 <한국의 전망대여행>이라는 책까지 썼지만 정작 을지전망대를 빼먹었으니 면목이 서지 않는다. 이 땅은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으며 다채롭다
   
안내원은 아득히 보이는 금강산 봉우리를 거북바위라고 했지만 이는 착각이다. 금강산을 가보지는 못했어도 책과 지도, 위성사진을 통해 나름대로 많이 접해 와서 시야에 들어온 첨봉은 아무래도 최고봉인 비로봉(1648m)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역시 영랑봉(1601m)~비로봉의 정상부가 맞았다. 거북바위는 훨씬 동쪽에 있는 채하능선의 거북선바위를 말한 것 같은데 채하능선은 무산(1320m)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설악산은 대청봉(1708m)~귀청(1578m)의 서북릉이 선명하다. 비로봉과 대청봉은 직선거리로 67.5km나 떨어졌지만 대기가 맑아 둘 다 분명하게 보였다. 두 산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간 즈음의 향로봉(1290m)을 경유해 백두대간으로 이어져 있다. 국토의 맥박이 느껴지는 엄청난 산줄기다. 남북 통틀어 1625km에 달하는 백두대간에서 고도는 개마고원 일대와 지리산이 더 높지만 경관과 스케일에서는 금강~설악 구간이 단연 압권일 것이다.   
비로봉은 틀렸지만 입심 좋은 안내원은 “특별한 분들이 오신다기에 하늘에 부탁해서 좋은 날씨를 만들어 놨다”면서 익살을 부린다. 

알프스 마터호른처럼 날카롭게 솟은 가칠봉(1242m)은 이 봉우리까지 더해야 금강산 1만2천봉이 완성된다는 뜻에서 더할 가(加) 자를 쓴다고 한다. 북쪽으로 마주한 무산은 동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금강산의 말단 줄기라고 봐줄만 해도 가칠봉까지는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그만큼 예전에는 금강산의 의미와 상징성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악산에 훨씬 가까운 향로봉 아래 고성 건봉사도 산문에 ‘금강산 건봉사’라고 당당히 쓰고 있으니 가칠봉도 애교일까. 지금이야 설악을 대단하게 치지만 해방 직후까지 설악산은 금강산에 묻혀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설악의 일대 절경인 울산바위조차 울산에서 출발해 금강산 가는 길에 멈춰 섰다는 전설이 전할 정도이니. 금강은 그 비경을 언제나 보여줄까.
 

펀치볼을 둘러싼 외륜봉 주능선을 넘는 돌산령(980m) 정상. 군 시설물이 보이는 맞은편 고봉이 용늪을 안고 있는 대암산이고 오른쪽 봉우리는 도솔산(1148m)이다
해발 1049m로 휴전선 11개 전망대 중 가장 높은 을지전망대. 남방한계선에 바로 접해 있으며 금강산과 설악산, 펀치볼을 같이 볼 수 있다
돌산령에서 양구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 용늪으로 올라가는 작전도로 삼거리까지 4km 정도는 웅장한 스케일의 다운힐이다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지형, 펀치볼
전망대 건물 외부로 나와 남쪽을 바라보면 또 하나의 장관이 기다린다. 거대한 원형분지는 너무나 독특해서 마치 SF영화의 배경 같다. 한반도를 위성사진으로 보면 단연 눈에 띄는 특이한 지형이 바로 여기다. 지독한 산간지대인 양구 최북단에 마치 운석이 충돌해서 생기는 크레이터(crater)를 꼭 닮은 타원형 분지가 움푹 패여 있다. 이런 지형은 경남 합천 초계분지도 비슷하지만 규모와 대칭성, 외륜봉의 고도에서 양구가 훨씬 크고 극적이다.
6·25 때 미국 종군기자(미군 정찰병이라는 설도 있음)가 화채(puch)를 담는 움푹한 그릇(bowl)과 닮았다고 해서 펀치볼이라고 불렀다는 유래가 전한다. 정식 명칭은 양구군 해안면(亥安面)에 자리해 ‘해안분지’라고 한다.  

펀치볼을 감싸고 있는 외륜봉은 고원 늪지인 용늪으로 유명한 대암산(1304m)을 위시해 가칠봉 등 까마득한 고봉이 하늘 높이 거대한 장벽을 이룬다. 분지에 얕게라도 물이 찬다면 백두산 천지보다 더 웅장할 것이다. 백두산 외륜봉 높이는 천지수면에서 300~500m 정도이고, 펀치볼 저지대는 해발 420m로 비고가 800m를 넘으며, 저지대 면적도 천지보다 3배는 더 넓다. 사실 동쪽으로 빠지는 유일한 수구(水口)는 협곡이어서 작은 둑만 막아도 펀치볼 전체를 호수로 쉽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산중턱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되어 먼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하며 그래서 예전에는 해안(海安)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분지를 에워싼 산줄기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외부와 단절시켜 고립감을 극대화하고, 능선을 따라 점점이 도열한 초소와 새하얀 실선으로 주능선을 오르내리는 작전도로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이다.     
하지만 이 장관의 이면에는 겨우 67년 전인 1951년에 벌어진 도솔산전투, 가칠봉전투, 펀치볼전투 등으로 아군 3천명, 적군 1만명에 이르는 전사자의 절규와 피가 스며있다. 폭음과 초연, 함성 속에 이 높고 외진 산줄기에서 스러져갔을 그 많은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되새겨야 할 것인가.

 
돌산령 꼭대기에 만난 해병전적비
대자연이 무심코 빚은 이 대칭의 기묘함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캠핑카에 자전거를 매달고 양구로 향한다. 펀치볼 남서쪽의 돌산령(980m)을 통해 외륜봉 주능선에 올랐다가 북쪽 능선의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을 볼 것이다(을지전망대와 제4땅굴은 자동차만 진입가능). 그리고 동해안으로 나가 바닷가에 캠핑카를 세우고 하룻밤을 보낸다. 해발 1000고지와 해수면 사이의 거대한 진폭을 오가며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하듯, 고저차의 격변으로 여정의 깊이와 감흥을 극대화하는 ‘여행 과장법’을 맛볼 것이다.

돌산령터널을 통과해 펀치볼(해안면에 자리해서 해안분지라고도 함) 안으로 들어서서 면소재지 직전에 있는 야생화공원을 기점으로 라이딩을 시작한다. 사실 이 코스는 라이딩 자체는 싱거울 수 있다. 길은 다 포장되어 있고 돌산령 정상을 지나 용늪 작전도로 삼거리까지 넘어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거리는 왕복해야 27km 남짓이다.
돌산령터널 방면으로 2.7km 가면 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돌산령 옛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6km 올라가면 작은 전망대가 있고 곧 돌산령 정상이다. 전망대는 위치가 애매해서 펀치볼 일부만 보인다. 돌산령 정상은 군부대와 공터만 남았다. 고갯마루 표지판에는 해발 1050m로 되어 있으나 실제 높이는 980m 정도다. 

고개 바로 너머 왼쪽 기슭에 도솔산지구 전투위령비가 서 있다. 1951년 6월 미 해병대도 포기한 도솔산(1148m)을 국군 해병대가 탈환해 ‘무적해병’의 신화를 쓴 현장이다. 바다와 해안을 무대로 상륙작전을 펼치는 해병대가 이런 깊은 산속까지 진출했다니 뜻밖이다. 이 험준한 지형에서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까. 적군 3265명을 사살했지만 아군도 123명이 생명을 바쳤으니 펀치볼은 말 그대로 피로 지킨 땅이다.     
돌산령을 넘으면 양구와 파로호 일원이 전개된다. 전쟁의 상흔을 담은 변경은 어딘지 생경스럽고 지형은 억척스럽다. 4km 정도 구불길을 다운힐 해서 용늪 입구 삼거리에서 돌아선다. 용늪으로 가려면 사전에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아니면 양구군청에 사전 신청해서 반대편 등산로를 통해 도보로 올라야 하는데, 이번 여정에서 우리의 목적은 용늪이 아니다. 그리 드물지도 않은 고원습지를 보는데 사전 허가를 얻어야 하고 출입인원까지 제한하는 유난도 마뜩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국토에서 무슨 출입금지가 그렇게 많은지. 환경 근본주의, 행정 편의주의가 득세하면서 자유공간은 속절없이 줄어들고 있다.
 

돌산령에 있는 해병대의 도솔산지구전투위령비. 바다의 사나이 해병대가 이 높고 깊은 산속까지 진출해 혈전을 벌였다니 그 노고에 고개가 숙여진다
일정을 마치고 동해로 나가 천진해변에서 캠핑카로 하룻밤을 보냈다
가칠봉 아래로 군사분계선을 뚫고 넘어온 제4땅굴. 내부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펀치볼에 뚫린 땅굴
해안면소재지 외곽에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관람을 신청하는 양구통일관과 양구전쟁기념관이 있다.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은 자동차만 출입이 가능하다.
일행은 을지전망대를 거쳐 제4땅굴로 향했다. 1990년 3월에 발견된 제4땅굴은 북쪽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1028m나 넘어와 총길이는 2052m에 달한다. 너비 1.7m, 높이 1.7m로 웬만한 성인남자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밀폐공간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과 공포감을 준다. 연중 13도로 서늘하게 유지되는 온도 역시 긴장감을 부채질 한다.  

6 · 25전쟁 당시 펀치볼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부분 아군이 승리한 것을 단숨에 만회하려는 듯 북한은 땅굴을 뚫어 기습을 노렸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평화무드가 한창이지만, 펀치볼은 화채그릇이 아니라 불과 67년 전 흘러 고인 피가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벼운 설렘을 안고 찾은 펀치볼이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남은 전쟁의 상흔과 철책선에 감도는 긴장감은 펀치볼을 한층 무겁고 깊은 마음으로 차분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주민들은 순박하고 태연하게 지내지만, 잠시 들러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양구전쟁기념관을 본 외지인은 괜한 압박감과 점증하는 부채의식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서둘러 동해로 향했다. 관동팔경 중 최북단인 청간정 옆 천진해변, 바다는 일망무제로 탁 트였고 파도는 밤새 울었다. 

여 정
양구는 고속도로나 철도가 없어 수도권에서 당일 일정은 무리가 따른다. 돌산령 라이딩과 을지전망대, 제4땅굴 견학을 모두 겸하려면 자동차를 가져가야 한다. 해안면사무소 주변에 펜션과 민박이 몇 곳 있고, 야생화공원에서 캠핑이 가능하다. 30분 거리의 양구읍내나 1시간 거리의 동해안으로 나가는 것도 좋겠다. 식당은 해안면보건지소 근처의 정주골(시래기 요리, 033-481-6777)과 해안성(중국요리, 033-482-2220)을 추천한다.

여행 정보
캠핑카를 타보니… 
여행이 더 자유롭고 재미있더라!
캠핑카 렌트 전문업체 고릴라캠핑의 ‘고군 스페셜’호를 빌려 1박2일간 강원도 일대를 누볐다. 스타렉스를 기반으로 만든 7인승 캠핑카로 실내공간은 생각보다 넉넉해서 운전석 위 루프에 성인 2명, 거실을 침실로 개조한 바닥에서는 성인 2~3명이 취침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넉넉한 수납공간, 간이 화장실과 온수가 나오는 샤워시설, 냉장고와 주방, 수납공간 등등 가정집에 갖춰야할 것은 크기만 작을 뿐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뒤쪽에는 자전거 2대를 실을 수 있는 거치대까지 달려 있다. 
전력소모가 많은 에어컨과 전자레인지를 켜지 않으면 외부 전기를 연결하지 않고 배터리만으로도 하룻밤 정도는 충분히 지낼 수 있다. 다만 스타렉스의 파워트레인은 그대로 두고 무게가 크게 늘어나 순발력과 등판능력, 연비가 다소 떨어져 경사가 급하고 긴 고갯길은 진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천진해변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차 외부의 어닝(awning)을 펴고 야외 테이블과 간이 그릴을 이용해 바비큐 파티를 즐긴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좀 더 자유로운 여행과 숙박을 누리고 싶다면, 가족·지인과 특별한 추억을 쌓고 싶다면 한번쯤은 이용해볼만하다.  
■ 고릴라캠핑 1566-4622      www.gorillacamp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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