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천·정읍천(고창·정읍·부안)

고부들판에 서린 녹두장군의 결기, 다시 보자 
고부천·정읍천(고창·정읍·부안)

고부는 오래 침식된 마을이다. 이제는 정읍의 작은 면이다. 그렇다고 정읍·고창을 말하면서 고부를 지나칠 수는 없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을 무릎 꿇린 황토현 전투에서 시작해 정읍은 동학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땅과 물의 불가분의 역사는 생존과 동의어다. 고부들판을 안고 흐르는 저 강에 내장산 단풍보다 더 진한 핏물이 흘렀었다는 사실(史實) 앞에 가슴이 저리다. 겨울이면 유난히 많이 내리는 정읍의 눈은 사라져간 민초의 황토 빛 울분을 달래주는 진혼의 흩날림인가. 호남평야의 끝자락으로 흐르는 두 개의 강, 고부천과 정읍천은 가뭄과 홍수를 오래도록 반복하는 중이다. 기우제를 비는 손이 아니면 홍수를 탄식할 수밖에 없는 농심은 강둑에서 여전히 서럽다

 

 

코스모스가 맞아주지만 고부천은 어디부터 시작하는지 쉽게 찾기 어렵다(고창 신림)

 

시월 호남의 황금들판을 두어 해 기다렸다. 동진강여행에 동행했던 친구와 한 약속은 고부천과 정읍천 강둑에서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학창시절 담벼락을 넘은 그들의 익살이 제법 먼 여정의 무료함을 잊게 하였다.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 구산마을, 어디를 둘러봐도 강물이 시작한다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슬그머니 지도에서도 사라진 물길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시발조차 희미한 고부천
작은 소택지 구산지에서 수로가 신림면을 감아 돈다. 자칫 신림저수지에서 시작하는 갈곡천과 헷갈릴 만도 하다. 수로를 따라난 농로는 북서쪽으로 길게 뻗다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눈치껏 들판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이맘때 그다지 반가울 게 없는 소나기 예보는 하필 적중이다. 멀찌감치 차를 타고 따라오던 친구들은 동림저수지 물가에 차를 세웠다. 친구는 돼지 앞다리로만 만든다는 족발을 빚기 시작했다. 비가 거세질수록 차 안에 둘러앉은 우정은 견고한 삼각이다. 끝나가는 ‘한국의 강둑길’에 가을비로 적시는 추억의 파티다.

동림저수지인가 흥덕저수지인가
비가 그치고 길을 나선다. 동림저수지 물가로 낸 나무 데크길은 출입금지다. ‘국가생태문화탐방로’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안내는 이해할 수 없는 금지다. 관청의 공적이라고 치하했을 산책로 개설은 ‘조류독감 예방을 위해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군데군데 붙어있는 플래카드와 충돌한다.  애초 사람도 드문 곳에 산책로를 억지로 만든 것부터가 제 돈이라면 할 수 없는 발상이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하는 처량한 입장이지만 생태탐방로는 거창한 구조물을 세우거나 길을 새로 내는 작업이어서는 안 된다. 그냥 논두렁길 하나라도 사람이, 적어도 자전거 정도만 다닐 수 있으면 안내 화살표 하나로 충분하다.
물어볼 사람조차 귀한 길을 들고 나면서 간신히 저수지 수문에 도착한다. 여러 지도에서도 ‘동림저수지’라고 적혀 있는 국가하천 고부천의 가장 큰 물 창고를 유독 농어촌공사만 이 고장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흥덕저수지’라 안내하고 있다. 둘 중 어느 것 하나로 만들어야 할 이름표다. 타관에 와서 이리저리 지적사항만 늘어놓으니 차라리 ‘감사반’이라 부르는 게 낫겠다.
쇄석이 깔린 길을 원 없이 헤쳐 나간다. 어쩌다 연약지반에서 만나는 쇄석이 아니라 수 km를 이어지는 쇄석 위에서 달린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장딴지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고부천이 소성천을 만나기까지 십리 길에는 강물을 볼 수가 없다. 갈대와 잡초가 완전히 하상을 뒤덮어 버려서다. 이렇게 맹렬한 차폐는 강둑길 여행 6년에 본 적이 없다. 지나간 먹구름 뒤꼭지를 붙들고 또 한 덩어리의 먹장이 들판을 건너온다. 세찬 소낙비다.
친구는 이 변덕스런 날씨를 ‘텃세’라고 투덜거리더니만 간만에 온 우리를 반기는 투정일지도 모르겠다고 눙쳤다.

오그라든 옛 마을, 고부
고부교에 이르자 비가 그쳤다. 눌제(訥堤)가 있던 옛터가 곁이다. 정읍과 줄포를 연결하는 747번 지방도가 가로지르는 들판에서 눌제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 길이 눌제 옛 방죽이다.
눌제는 삼한 시대인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저수지였다. 둑 길이가 천이백보(1.5km)였으니 예사 저수지가 아니었다.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와 함께 3호(三湖)라 했으니, 호남의 쌀농사문화의 본거지다. 조선중엽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삼제(삼호)에 저수해 놓으면 노령산맥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터이니 중국의 곡창 소주·항주에 비견할만하다. 나라 세금의 절반이 호남에서 나온다.”고 했다.
오늘날 호남과 호서의 갈림이 바로 이 삼호(三湖)를 기준 삼는다고 이 고장에서는 말 하나 비약이다. 호서지방이 대전직할시를 비롯해 충청남북도 전역, 이른바 충청도를 뜻한다 할 때, 제천 의림지 남쪽, 금강을 경계로 호남과 호서를 가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먹장구름은 오락가락 심술이다. 텃세처럼 차가운 가을비를 몰고 왔다(고창 성내)
애써 돈 들여 만든 산책 데크가 ‘출입금지’다. 국가생태탐방공원 조성 때문이라니 더 기가 막힌다(고창 성내)
눌제를 대신한 동림저수지는 고부천의 효자다. 이곳 사람들은 ‘흥덕저수지’라 부른다(고창 성내)
논 가운데 큰 건물은 역시 대형정미소다(정읍 고부)
하장갑문. 고부천과 지류인 하장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바닷물의 역습을 차단하는 장벽이다(부안 동진)
함께 지원조로 나선 친구들의 대화, 학창시절의 뻔한 얘기는 다시 들어도 그립다(정읍 이평)

 

정읍 영원, 부안 백산, 들판 가운데 마을
고부교를 지나면 확실히 감조하천의 느낌이 다가온다.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기운이다. 퇴적된 이토(泥土)의 빛깔이 갯벌 그대로다. 정읍시는 익산지방국토청에 고부천 유역의 홍수피해방지 사업을 위해 ‘게보갑문확장’ 공사를 하는 데다 신평지구 하천정비사업까지 요청하고 있다. 강둑은 낮아서 자연에 가까워 보이나 여름 한철 홍수에 시달릴 만하다. 강둑을 한 50cm 높이고 포장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여름 그 혹독한 가뭄에는 눌제에서 ‘고부문화권보존사업회’가 기우제를 올리며 “형식적인 재현 연출식의 기우제가 아니라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면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아 천신께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이제 보니 알겠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고부천과 정읍천이 국가하천이 된 이유는 홍수와 가뭄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는 치수의 필요가 이 들판에 여전히  있기 때문이 틀림없다.
옛말에도 있지 않는가. “비를 잘 비는 원님보다 똘(도랑)을 잘 내는 원님”이라고 기우제를 잘 지내 비를 내리게 하는 수령보다 수로를 잘 내는 사또가 낫다는 말이다.
풍월리, 앵성리 같은 낭만적인 이름이 붙은 마을을 지나면서 영원면으로 접어든다. 뛰어난 산세와 풍수에서 인물이 난다는 말도 다 맞는 말은 아니겠다. 영원면 소재지에 ‘백정기의사기념관’이 있다. 1896년에 태어난 그는 일왕 암살을 시도하러 밀항도 했고, 중국에서 아나키스트 활동도 했다. 만주사변 발발 후 무장투쟁을 하다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38세에 순국한 애국열사다. 합참의장까지 지낸 정승조 육군대장과, 해군제독을 지낸 정동조 형제 별이 영원면에서 나온 걸 보면 낮은 구릉과 들판에도 정기는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동림저수지 정자에서 본 고부들판. 가을이 깊다(고창 성내)
고부천 중류는 아예 갈대와 잡초가 점령해 버려 강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정읍 고부)

 


고부천 하구, 홍수와 해수와의 전쟁
원래 백산에서 고부천이 끝나는 하장에 이르기까지 강은 어지럽게 흘러갔었다. 하상을 정리하고 강둑을 다시 쌓는 작업이 끝나 말끔한 얼굴이다. ‘하천을 자연 그대로 간직하자’는 환경 우선 주장은 배부른 흥정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13련의 수문을 가진 하장갑문은 하장천과 고부천이 만나는 지점에 결승골 라인처럼 서 있다.  이 갑문은 물을 모으는 갑문이 아니라 바닷물의 역류를 막는 기능이 우선이다. 바닷물의 역류는 땅 한 뼘이 아까운 농사에는 치명적 공격이었다. 오랜 시간을 밀고 당긴 끝에 완공된 새만금방조제의 축조로 바닷물의 내습에 한시름은 덜었다. 새만금의 앞바다인 군산외항의 백중사리 때 바다 수위는 최고 7.7m로 높아진다. 김제 광활, 정읍 신태인·북면까지의 해발이 6.5m이니 무시무시한 바닷물의 공격력이 숨어 있었다.
2015년 공표한 국토부의 고부천 유역 정비예산은 2020년까지 1617억원 규모다. 고부천의 지천인 하장천의 지방하천구간을 14.3km로 늘리고, 동정~하장 간 흥덕배수로와 상류 소성천 병목구간을 확장하는 사업이 포함된 홍수대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낚시꾼들이 비에 젖어 있는 쓸쓸한 풍경 곁으로 동진강의 강둑길 확장공사 차량들도 분주하다. 나팔 주둥이처럼 확 펴진 고부천 하구는 그렇게 동진강에 안겼다.
부안 백산은 47m에 불과한 산이지만 옛 산성까지 있는 천혜의 지형이다. 산정에 올라서면 김제평야와 고부, 주산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찰의 요지다. 이제 동진강을 거슬러 올라, 정읍천으로 향한다. 고부 옛 땅을 한 바퀴 돌아가는 셈이다.

만석보, 조병갑의 탐욕과 녹두장군
만석보에서 동진강은 정읍 칠보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정읍천이 갈래를 친다. 만석보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현장이다. 1894년 만석보 축조와 물세를 더 거두려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이 폭발 직전의 농심에 불을 붙였다. 정읍천대교에서 강둑길을 벗어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들판을 가로 지른다. 황토현은 굳이 고개라고 해야 알아챌 정도로 낮아진 언덕이다. 그 황소의 잔등 같은 우직한 민초의 누른 삼베 빛깔이 ‘황토현’이라는 이름에도 배어있어 비장하다. 시 한편을 소개한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국/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사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메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아래 더위 속으로/ (중략)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김지하 시, 황토길)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2004년 10만평의 부지 위에 세워졌다. 전통 초가형 기념관 건물 속에는 허물어져가는 반상(班常)의 구조와 조선왕조의 몰락 과정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표현했다. 오늘날도 다를 것 없는 4대 열강 사이 힘의 각축,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1892년에서 1895년 사이 4년간 피의 기록이 거기 있다.
황토현에서 관군을 이긴 승전의 환호,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민초들이 ‘인간평등과 천지개벽’의 새 세상을 꿈꾸던 동학의 이름으로 삼남 곳곳에서 일어났다. 손하중, 김개남 같은 지도자의 전술은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했다. 집강소를 설치하고 관군과 함께 치안을 도모하던 화약(和約)도 소용없이 외세의 힘에 맞서 다시 봉기했다.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 대항하던 우금치 전투의 대패는 결국 핏물로 마감되었다.  
수레를 타고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의 형형한 눈빛, 미완의 혁명은 오래 잠들어 있었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 속에 녹두장군과 청포장수의 은유로만 눈뜨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어지러운 근세사의 전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동학의 그 이후가 일진회의 한 자락으로 흡수되어 갔다는 비판의 눈길도 더 눈여겨 볼 부분이기는 하나 기울어가는 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눈감아 줄 수는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이거나 유치원생들에게까지 동학혁명의 배경을 설명하고, 애써 느끼게 해주겠다는 코너에서 하얀 백노지 같은 동심에 새겨질 역사의 그늘이 걱정스럽다. 분노의 확대재생산 은 금물이다. 역사에 대한 준엄한 반성과 새로운 길의 모색은 이성이 바로 선 뒤에 해야 선순환의 궤도에 올라설 수 있다.
다시 정읍천 강둑으로 돌아온다. 강마을 마다 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죽창 든 분노를 지켜보았을 증인들이다. 다른 고장 같았으면 보호수로 지정되어 호사를 누릴 군번이나 정읍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강둑에서 세월을 지킨 거목. 이런 풍경화는 정읍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정읍 이평)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강둑길을 벗어나서라도 꼭 보아야할 근세사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는 현장이다(정읍 덕천)
이 자전거도 주인의 주름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다(정읍 정우)
가을비 끝에 무지개가 떴다. 변덕스럽지만 고맙다(부안 백산)

 


정읍사와 상춘곡의 문향(文鄕), 오래된 도시 정주, 정읍
옛 초강역 부근, 호남선 철길이 정읍천 옆으로 지나간다. 오래 퇴적된 모래에 강둑길도 사라진 건너편으로는 모래를 파먹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하상을 제대로 정비하는 준설로 보기도 어렵다. 강은 참고 견디는 데는 이골이 났다. 정읍하수종말처리장도 다른 고장이나 진배없이 강가에 자리 잡았다. 녹두다리를 지나기 전 망제동 ‘정읍제1공업단지’는 몇 개의 제지공장과 전자부품 회사를 안고 있는, 그나마 정읍에서 제일 오래된 공단이다. 이제 정읍시내다.
정주와 정읍은 같은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1914년 정읍면은 1931년에 정주읍이 된다. 정읍읍이 되는 이상한 모양새 때문이다. 1981년 정주시가 되었다가, 전주와 정주도 발음이 헷갈리는 데다, 평안북도 정주와 겹친다며 1995년 정주시와 정읍군이 통합되면서 원래의 이름 정읍시로 되돌아온 것이 개명의 역사다. 1859년(선조22년)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가기 전, 초대 정읍현감을 잠깐 지냈으니 초대 정읍시장인 셈이다.
역시 정읍의 대명사는 현존하는 유일의 백제가요이자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노래 <정읍사> 3연 6행이다. 행상나간 남편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내의 소박한 심정이 담겨 있다. 돌아오지 않은 남편과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된 아내의 설화 또한 내장산 높은 달과 어울린다. 단종애사의 혼돈 속에 태인으로 낙향한 선비 정극인의 <상춘곡> 또한 조선조 최초의 가사문학이라는 원조의 높은 가치가 정읍에 있다. 자연 속  봄 풍경에 안빈낙도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노래한 장부의 만족은 문학적 완성도에서도 정읍의 인문학적 배경을 풍성하게 한다.

그래도 정읍은 내장산 단풍이다
설악산 단풍이 시작이고 초겨울 두륜산의 마른 단풍이 끝이라면 내장산 단풍은 고운 빛 가을의 절정이다. 내장호에 드리워진 서래봉 물그림자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면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한 발걸음까지 포함해 온 국민이 내장산 만산홍엽, 그 가을 속으로 빨려 든다.
어느 젊었던 여름 날 기억이다. 내장사 백련암에 올라 주지스님이 권하는 배즙 캔을 들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중, 다시 한 모금 먹다 그만 혀 밑이 따끔했다. 단내를 맡고 날아든 벌에 쏘였다. 이내 혀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주지스님이 미안해 할까봐 내색도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일어섰다. 걱정이 되었다. 혀는 머리와 그저 한 뼘 거리 아닌가. 간신히 차를 몰아 정읍시내의 한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가라 앉혔다. 혼자 생각했다. “혀끝을 조심하라. 말 한마디에도 혼을 담아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부처님 뜻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겨울 정읍, 내장산도 한번 찾아보시라. 노령산맥을 넘지 못한 서해의 구름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으로 내려 드문 겨울을 선사할지 누가 알겠는가. 

 

정읍에서 제일 오래된 1공단, 제지공장이 주를 이룬다(정읍 농소)
자전거길로 이어지는 내장산까지의 강둑길. 정읍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정읍시내)
정읍에서 녹두장군 전봉준을 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내장산 서래봉이 배경이다(정읍시내)
내장사 담장에 기대어 마시는 한잔의 커피는 또 다른 맛이다(정읍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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