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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북부 방랑기② 쓰가루해협 저편으로 자전거는 페리를 타고쓰가루해협 저편으로 자전거는 페리를 타고

일본 북부 방랑기② 
쓰가루해협 저편으로 자전거는 페리를 타고


이와테현 해안을 따라가는 길,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곳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 복구공사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새로 지은 마을은 산 위로 멀찍이 물러앉았다. 이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로 진입하면 페리를 타고 홋카이도로 넘어가 작년에 미처 일주하지 못했던 남서부 해안을 달려 하코다테의 그 유명한 야경을 볼 참이다

 

8일차 7월 22일
용광로는 뜨거워도 녹지 않는다!
옆 텐트 무라세 상의 짐 정리 소리에 잠을 깼다. 이와테현(岩手縣) 고이시(戀し) 캠프장의 지난밤은 낭떠러지 계곡의 빽빽한 삼나무숲이 파도소리를 거르고 걸러 은은한 자장가로 만들어 주었다. 키 높은 소나무 천장에는 노란 반달 조명이 일렁였다.
주말이라 오토캠핑장에는 바베큐 연기가 자욱하지만 두바퀴 캠핑장은 한가하다 못해 쓸쓸하다. 나흘 전에 나고야를 출발해서 도야마, 니가타, 아오모리를 오토바이로 거쳐왔다는 무라세 상과 단 둘뿐이다.
그는 가와사키 오프로드용 바이크를 타고 캠핑을 즐기는 아웃도어맨이지만 아내는 우아하고 깔끔한 스타일이라 혼자서 즐긴단다. 그래도 세 자녀를 잘 챙겨줘서 마음 놓고 다닌단다. 여기서도 간 큰 동족을 만난다. 내년에 나고야에 오면 자기 집에서 머무르란다. 자기 마누라한테 물어 보지도 않고.
내가 부지런을 떠니까 햇님도 일찌감치 군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서고동저라 하지만 서쪽의 산맥이 태평양 앞에서 딱 멈춘 모양이어서 절벽이 많고 계곡이 깊다. 파도가 이곳의 모래를 저 건너 미국 LA의 롱비치 해안으로 옮겨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래는 보이지 않고 그냥 절벽일색이다. 고개 들면 먼 산만 보이고 길은 그 숲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내리찍는 햇볕이 싫어 비행기 공습을 피하듯 최대한 길옆으로 붙어 산 그늘에 몸을 기댄다. 더위에도 지치지 않는 칡넝쿨이 구르미의 손을 감는다.
이 커브를 돌면 내리막인가? 다시 저 커브를 지나면 터널이 나오려나?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계속 오르막의 연속이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정상이 가까워졌을 때 나오는 터널은 반갑기보다는 야속하다. 사랑도 기다림에 지치면 원망이 된다나!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오후 2시가 지나고 있는 지금 주행거리는 50km에서 땀만 쏟아내고 있다. 고비사막에만 고비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철 박물관을 스쳐 지나간다. 예전 이곳 가마이시(釜石)에는 탄광과 함께 큰 제철소도 있었단다. 그렇다! 뜨겁다고 힘들다고 용광로가 녹아 버리면 이미 그건 용광로가 아니지…. 덥다고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면 뽈락이 아니지. 곤조(근성)의 태진이가 아니지!
저 멀리 높은 언덕에서 큰 관음보살님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이곳이 일본은 물론 세계 3대 어장이라 그런지 보살이 물고기를 안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2009년 봄이었다. 자전거여행으로 갔던 고성 통일전망대의 우람한 부처님도 불쌍한 북녘 주민들을 보살피느라 저렇게 돌아서 계셨지….
부처님께 “언덕 좀 깎아주세요” 하니 내 마음부터 깎으란다.

 

이와테현 고이시 두바퀴 캠핑장은 오토바이로 여행중인 무라세 상과 나뿐이어서 한산하다
여름 햇살이 뜨거워 그늘이 지는 갓길로 최대한 붙어 달렸다
물고기를 든 관음보살상
경치와 분위기 좋은 곳에는 하트를 형상화한 포토 포인트 ‘연인의 성지’가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코키리도 더위에 해수욕중인가! 고이시의 혈통기 기암

 


9일차 7월 23일
쓰나미는 아직도 아프다
하늘에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해안선에도 운무가 자욱하다. 출발한지 10분도 안 되어 빗방울이 듣더니 이내 굵게 떨어진다. 아예 더위는 포기하고 일기예보도 체크 안했는데 어제 큰 부처님이 이 중생을 어여삐 여기셨나보다.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어도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한참을 그대로 질주한다. 그러다 정신 차려 휴대폰과 지갑 등을 챙기고 겨울 부채처럼 쓸모없이 구석에 쳐박혀 있던 우의를 걸친다.
야마다초(山田町), 미야코시(宮古市)로 이어지는 이 길은 일출의 명소라는 뜻에서 ‘선 라이즈 루트’란다.
햇님 몰래 단비의 손을 잡고 기암괴석의 바다로 뛰어든다. 터널 뒤의 내리막은 추워서 위아래 이빨이 박수를 친다. 덥다고 난리더니 이제는 춥다고 호들갑이다. 팥죽이 변덕을 펄펄 끓이고 있구만.
미야코와 다로(田老) 해안은 절경으로 유명하지만 아픔의 그늘이 깃들어 있다. 여기서 자주 눈에 띄는 단어는 ‘방재(防災)’와 ‘부흥(復興)’ 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우리들 머리 속에서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작업으로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분주하다.
도로나 건물에는 그 당시 쓰나미 침투선을 표시해 놓았고 피해 건물을 둘러보고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는 관광상품도 있다.
곳곳에 재난방재센터가 있어 수시로 재난 발생시 대피훈련을 한단다. 강물과 맞닿는 낮은 포구지역은 성벽처럼 방파제를 높고 길게 쌓아 놓았다. 마치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오는 무서운 바이킹에 대비하는 것 같다.
오늘 묵으려고 찾아간 오모토(小本) 마을도 쓰나미에 싹 쓸려 산쪽으로 새 마을이 생겼단다. 온천 간판은 남아 있는데 흉흉한 모습에 발길을 돌린다.
쓰나미 덕분에(?) 오늘은 자전거 보관대의 자전거들과 합숙한다. 자전거에 둘러싸여 자보기는 아마 처음인 듯. 이게 진정한 자전거 오타쿠 아닌가.

 

기나긴 해변에 백사장은 없고 온통 절벽과 바위 천지다
‘방재를 배우자’는 홍보 책자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를 딛고 일어서자는 취지의 ‘이와테현 부흥포스터 전’
휑하니 방치된 온천 건물
오늘은 자전거 보관대에 잠자리를 정했다
자개의 명인을 만나 나전칠기 이야기도 하며 담소를 나눴다
정밀하고 독특한 자개공예품

 

10일차 7월 24일
나쁜 짓은 다 해보네
헐! 국도 안내판이 구불구불하다. 얼마나 오르막이 힘들면 지그재그로 그려놨을까? 바로 옆의 자동차 전용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슬쩍 화가 나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한다.
가보지 않은, 특히 금단의 길이라 막으니 더 가보고 싶은 오기가 생긴다. 무료 도로여서 톨게이트도 없고 이른 새벽이란 점이 나를 이끈다. 가기 싫어하는 구르미를 억지로 데리고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섰다.
도로는 쫙 나있고 바로 터널이다. 마주 오는 차는 번쩍거리고 뒤에선 크르릉거린다. 송아지 한마리가 고속도로에 뛰어든 꼴이다. 자기도 정신없고 차도 어쩔 줄 모르는…. 트럭 한대는 일부러 옆을 쌩 지나간다. 무섭고 창피한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페달링을 열심히 하지만 오르막 터널을 벗어나질 못한다. 꿈속에서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양. 다음 갈림길에서 얼른 빠져나왔다. 7km 정도의 짧은 구간이 이렇게 길고 창피할 수 없었다.
꼬불꼬불 가파른 길이지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정겹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번 고개는 예사롭지 않다. 헉헉거릴 땐 가랑비가 살짝 어깨를 두드려준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여기가 45번국도 최고지점이란다. 우리의 고개를 일본어로는 ‘토오게(峙)’라고 하는데 어딘가 비슷하다.
힘들게 오른 덕분에 길고 느긋한 내리막을 즐긴다. 마침 슈퍼가 손짓한다. 계산대 옆의 판촉상자에서 얼음에 파묻혀 죽을 것 같다며 살려 달랜다. 맥주가~ 가격도 착한 99엔이다. 근데 이 측은지심이 문제다. 마실 땐 좋았는데 햇님이 고개를 내민 언덕에서 이놈이 뱃속에서 열불을 토해낸다.
구지시(久慈市)의 토다마을에서 이 놈을 진정시키느라 2시간이나 걸렸다. 오늘 125km를 가야하는데  이제 겨우 50km 왔으니 이걸 어쩐다. 오늘은 아오모리현(靑森縣) 하치노헤시(八戶市)에서 페리를 타고 홋카이도로 갈 계획이다. 밤 10시 배여서 늦진 않을 것 같은데…. 다행히 구지시에서 시작된 긴 오르막 이후엔 계속 평탄한 길이다.
어제 비가 내린 뒤라 바람에도 서늘함이 묻어 있어 쾌속·상쾌 질주다. 가끔 오르막이 나오긴 하지만 내리막 탄력으로 팔을 구부리고 몸을 낮추면서 조금 세게 페달을 저으면 올라가는 길이다. 제주도의 중산간 오름길을 달리는 쾌적한 느낌이다.
하치노헤에 들어서니 어둠이 먼저 와있다. 도시라지만 가로등은 희미하고 인적은 드문데다 간판도 좀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부두로 가는 길은 어둡고 도로는 패인 곳이 많다.
덜컹! 헉! 신발 클릿이 빠져버렸다. 다행히 나사는 그대로 얌전히 있다. 저 멀리 페리부두의 밝은 불빛에 페리가 빛나고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 불법 운행! 음주운전! 야간비행! 오늘은 나쁜 짓하느라 그동안 함께한 45번 국도와 이별의 포옹도 못 하고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옛 코렉스 직원들이 본다면 “싸장님! 나빠요!” 할 것 같다.

 

이런 국도 도로표지판은 처음이다. 얼마나 길이 구불거리길래 아예 지그재그로 표현해놓았다
해발 380m로 45번 국도 최고지점을 알리는 안내판
잠시 만용을 부려 자동차전용도로에 들어섰다가 혼쭐이 났다
하치노헤를 지나면서 노면충격에 클릿이 신발에서 빠져버렸다
어두워진 아오모리현 하치노헤항에 도착하니 홋카이도행 페리가 불을 밝히고 있다
괴상한 모양의 사제 우체통
북위 40도선 동단의 마을을 지나 계속 북상한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표지판

 

11일차 7월 25일
다시 찾은 홋카이도!
하치노헤에서 밤 10시에 출발한 실버호는 8시간 후인 다음날 아침 6시 정각에 홋카이도 도마코마이시(苫小牧市)에 도착했다.
학생할인요금 6250엔에 구르미의 승선비가 2500엔이라 우리 한국에서는 자전거하면 대충 공짜라는 생각에 손해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자전거에 요금을 부과하는 대신 철저히 대우해준다. 승선 시에 다른 차량보다 먼저 일착으로 들어가면 승무원이 직접 안내해서 수건 등으로 싸서 세심하게 묶어준다. 앞뒤로 바퀴를 잡아주는 휠 레스트까지 채워준다. 하선할 때도 자전거가 우선이다.
실버호는 1, 2, 3층은 화물칸이고 4, 5층은 객실과 편의시설이 있다. 2등 침실은 일치감치 매진되어 그냥 2등실을 택했는데 다행히 개인 매트리스와 사물함도 있다. 가운데에 복도만 있으면 영락없는 군대 침상이다. 침상 삼선에 정렬! 충성!
부두 바로 앞의 삼거리에서 오른쪽은 삿포로, 왼쪽은 무로란 즉 하코다테로 가는 36번 국도다. 꼭 작년 이맘때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 삿포로를 거쳐 북쪽의 왓카나이, 네무로 등을 한바퀴 돌아 도마코마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신치토세 공항으로 다시 갔었다. 이제 그 도마코마이에서 선을 이어 왼쪽, 즉 남쪽으로 달려 홋카이도를 완주하며 하코다테의 야경을 보기로 한 것이다.
역시 홋카이도는 넓고 광활하다. 차로와 보도도 넓고 평평한 길이 쭉 이어져 있다. 장손 큰며느리의 마음 씀씀이 같이 시원시원한 모습이다.
무로란시(室蘭市)로 가는 50여km는 밟는 대로 나가고 보는 대로 느껴지는 환상의 코스다. 가슴이 짓눌린 사람,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분들에게 이 길을 처방해 주고 싶다. 그냥 달리다보면 저 멀리서 가수 백지영이 쏜 총에 가슴에는 어느새 구멍이 뚫려있다. 뻥~
시원하게 달리던 36번 국도는 무로란에서 37번 국도에게 바톤을 넘기고 사라진다. 홋카이도답지 않게 도로는 좁아지면서 슬며시 산으로 올라간다. 정상 근처에 하품하며 기다리고 있는 터널이 야속하다. 산 밑에까지 마중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래도 이 자리에라도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오랜만에 만난 풍경들이 봐 달래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오르막이 뒤를 잡고 늘어져도 벌써 120km를 달렸다. 해도 뉘엿뉘엿 바다 속으로 몸을 담그고 있다.
37번 국도를 벗어나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어느새 도요우라(豊浦) 마을의 그 유명한 도야호(洞爺湖)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맙다! 작년 2시간 동안 헉헉 대며 올라간 마슈호(摩周湖)는 끝까지 안개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는데….
라면집에서 추천 받은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할머니에게 6500엔은 비싸다고 했더니 500엔을 내준다. 아이스크림도 내놓고 둘이서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마침 열린 불꽃놀이는 귀로만 들었다. 숑~ 폭폭!

 

하치노헤에서 밤 10시에 출항한 실버호는 8시간 후인 아침 6시에 홋카이도 도마코마이시에 도착했다. 마치 자전거로 배를 끌어온 것만 같다
자전거는 따로 비용을 받는 대신 극진히 보살펴 준다
군대 내무반을 닮은 실버호의 침상
도마코마이에 내리면 길은 두 갈래다. 왼쪽은 무로란을 거쳐 하코다테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홋카이도 중심지인 삿포로 방향이다
도마코마이에서 무로란 가는 50여km는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길이다. 길가로 보이는 목장
무로란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바닷길
절경의 도야호
일본을 일주중인 대만인과 함께

 

12일차 7월 26일
지옥의 오르막길, 두 번 오르다
도야호는 아직도 안개 속에서 섬들을 품에 안은 채 꿀잠이다. 구르미와 함께 조용조용 기념촬영을 하고 빠져 나온다.
호수길을 지나 다시 만난 37번 국도는 오르막으로 시작한다. 자욱한 안개는 거미줄처럼 우리를 감싸 페달링을 끈적거리게 한다. 왼쪽으로 가야 바다쪽인데 이 놈은 한사코 오른쪽 산허리를 감고 오르고 있다. 나도 산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아니올씨다 해도 들은 체도 않는다.
건너편에 있어 그냥 지나쳐온 마트가 그립다. 오르막은 아무것도 없는 그냥 산길이다. 그래서 뱃속도 텅 빈 공복이다.
150여km의 하코다테(函館)를 좀 무리해서 오늘 저녁에 입성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 욕심난 드라이버로 OB 나느니 아이언으로 잘라가는 게 현명하듯이.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한결 편해진다.
그래도 계속 오르막에 터널이다. 길게 구부러진 터널 ~ 오래 되어 비가 새는 터널 ~ 그냥 휙 지나가는 미니터널 ~ 자연광이 비치는 반폐쇄형 터널 ~ 쌍둥이 신형 터널 등 터널 엑스포에 온 기분이다. 저 멀리 하늘이 보이니 정상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잠시 한숨 돌리고 여유의 볼일도 보고 뒤를 본 순간, 앗! 눈을 의심한다. 이럴 수가? 구르미 뒤 캐리어에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느슨한 고무줄이 미안한지 몸을 웅크린다. 허어억! 도쿄 출발 시부터 가방은 그 곳에 잘 있었는데 그리고 오늘도 숙소에서 잘 챙겼다. 호수의 첫 터널에서 높게 된 보도 바닥이 수로 뚜껑으로 되어 계속 덜컹거린 게 떠오른다. 그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란 말인가!
택시를 부를 수도 없고… 구르미를 쳐다본다. 구르미는 “출발 후 열흘이 넘었지만 제대로 쉬게 해주지도 않고 거기에 휴일작업, 야간근무까지 시키더니 이젠 재작업까지…” 하면서도 “가자! 가~ 보자!!”하며 등을 내민다. 출발해서 3시간만에 30여km를 왔는데 다시 갔다 온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지만 방법이 없다.
방금 전에 힘들게 올라온 길은 이제 시원한 내리막이지만 잠시 뒤엔 다시 오르막으로 변할 거라 생각하니 전혀 즐거운 내리막이 아니다. 그래도 핸드폰은 있으니 9910 도로정보에 전화를 해볼까? 경찰 신고 전화는? 아니면 도쿄 기숙사 이사장한테 SOS를 칠까? 구르미는 열심히 달리고 눈은 오른쪽 길에 가있고 머리속에선 온갖 잡념이 굴러다닌다. 혹 없다면? 여행은 끝장이고 돌아갈 길도 막막하고 모두에게 창피당하는 것은 당근이고….
일어나서 아무것도 구경 못한 뱃속에선 아우성이지만 긍정의 힘으로 달리고 또 달리는 수밖엔 없지 않은가.
드디어 첫번째 터널에 들어선다. 한참을 달려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저쪽 보도에 파란 가방이 보인다. 웅크리고 있는 가방을 꼭 안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별일 없겠지 하는 안이함이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구르미를 힘들게 한다. 그동안 살면서 잘 챙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나이 먹으면서 의도적으로 차분해지려고 하고 있는데 아직도 멀었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보면서 꼬질꼬질 따지는 유비보다 호탕한 관우나 장비가 부러웠다. 그래서 ‘빨리’ 하기 위해 대충하고 요령이란 미명 아래 편법을 쓰는 게 자랑이라고 떠벌려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느리고 때론 답답해도 완벽하게 하고 하잘것 없는 것도 소중하게 다루고 자세히 봐야 되겠다고 나름 도(?)를 닦아 왔는데 자칫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될 뻔 했다.
되돌아가는 길을 처음 가는 길이라 여기고 올라가는데 터널이 눈치 없이 아는 체를 한다. 아까 쉬었던 길옆을 지나 산마루를 연결한 다리를 거쳐 정상에 올라섰다. 긴 내리막을 내려와 평지에 위치한 오샤만베(長万部) 마을에 도착한다. 오늘 주행거리는 107km이지만 실제로는 49km만 이동한 셈이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채찍을 얻은 것이다.
야물게 살거라, 단디 하거라! 철썩!

 

운무가 낀 도야호에서 기분 좋게 자고 다시 출발한다
다양한 형태의 터널이 수없이 이어져 마치 터널 엑스포에 온 것만 같다
인적이 드물고 광활해서 황량한 느낌마저 주는 해변길
가방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30km를 갔다가 되돌아오니 터널에 그대로 있다.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다
쌓인 눈이 길로 쏟아지는 것을 막는 방설벽. 여름에는 그늘막이 되어준다

 

13일차 7월 27일
하코다테의 야경에 홀리다
운명인가? 어제 가방 실종사건이 아니었으면 보잘것 없는 이 오샤만베 마을은 스쳐지나가 기억도 못했을 것이다. 지옥의 고갯길을 두번 올라 기진맥진 주저앉기 일보 직전에 들어간 민박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그게 황금인 격이다. 허름하고 삐걱거리는 일본 전통 2층 가옥이지만 그져 내집에 온듯 편안한 기분이 든다.
아침밥 포함해서 3700엔의 착한 가격에 주인장 야마우치 상도 웃는 상이다. 그 동안의 경험상 착한 가격의 민박집 주인들은 한결같이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착한 사람이라 가격이 착한건지 착한 가격을 받아 착해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목욕탕, 세탁기 사용 등도 무료다. 아마 이 양반은 천국행 티켓도 무료로 받으리라.
무엇보다 도쿄의 우리 기숙사처럼 다 같이 모여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곳이 이런 민박집이라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4살 위인 주인장과 몇마디 하면서 바로 ‘필’이 통한다. 가까운 바다에서의 낚시 이야기, 특히 작년부터 스노보드에 푹 빠져 있단다. 하루 더 묵고 싶지만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아쉬움의 악수를 나눈다.
37번 국도는 “단디 살거라” 하고는 사라지고 산골마을 소식을 가득 안은 5번 국도가 손을 잡는다.
5번 국도는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가면서 이 동네 저 마을를 들러 소식을 전해 주기에 바쁘다. 오른쪽은 산그늘, 왼쪽은 출렁이는 바다 그 사이를 길은 평화롭게 쭉 뻗어 있다. 그야말로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 좌측에는 청바지 입고 우측에는 백구두 신고가 절대 아님의 기분 좋은 조합이다. 그 사이에 철길까지 우정 출연해주니 금상첨화다. 정말 꿈에 그리던 풍경에서 구르미와 함께 달리고 있는 것이다. 두 손을 들고 승리의 포즈로 “이야~!” 하고 소리도 질러본다.
하코다테 입구에 있는 나나에(七飯)를 지나고 있다. 10여km의 일직선 옛도로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쭉 늘어서 있다. 우리는 개선장군처럼 우쭐해졌다. 정말 운치 있어 잊을 수 없는 소나무길이다. 이곳은 화장실에서도 소나무 향기가 날 것 같다. 소올~솔.
하코다테의 야경 전망대 하코다테산을 향해 달린다. 멋지고 웅장한 건물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도시의 야경이 그렇게 멋있다니 믿어지질 않는다.
부두가의 아카렌가(赤煉瓦, 붉은 벽돌) 거리에 들린다. 예전 부두의 낡은 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문화의 거리로 재탄생했단다. 여러 동의 붉은 벽돌 창고 내부에는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진 상가, 식당이 즐비하다.
하코다테산 정상을 가기 위해 중턱까지 올라간다. 케이블카(일본에선 로프웨이) 승강장은  길게 늘어선 관광객으로 시장통이 따로 없다. 그러나 한번에 125명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케이블카는 5분 간격으로 하코다테산 위로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산이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살짝 걱정된다.
어둠이 내리면서 도시는 불을 밝히며 환상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달력에서 봤던 풍경을 떠올리며 다시 쳐다보고 찰칵하고…. 마침 보름달도 어느새 휘영청 떠올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
절정의 모습에 수많은 인파속에선 “아” 하는 탄성과 “찰칵찰칵”하는 셔터음만 무성하다.
금숙에게 미안해서 바로 사진을 날렸다. 문득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게 해준 하코다테산이 고맙고 진짜 보물이란 생각을 해본다.
가오리 모양의 홋카이도에서 지느러미처럼 생긴 하코다테의 끝자락에 점을 찍듯 우뚝 솟은 이 산 덕분에 하코다테 야경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으리라. 막 뒤에서 묵묵히 챙겨주는 우리 금숙이와 이곳 하코다테산이 닮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사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진다.

 

어제 가방 분실 사건으로 예정에 없이 작은 오샤만베마을의 민박에서 묵었다. 4살 위 주인장과 잘 통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도로 옆 화살표는 폭설에 길이 묻혔을 때 차선의 위치를 알려준다. 눈의 나라 홋카이도 답다
하코다테 입구의 나나에(七飯) 지역에는 10여km에 달하는 직선 소나무 가로수길이 멋지다
하코다테 부두가의 아카렌가(붉은 벽돌) 거리는 옛 창고를 리모델링 해서 문화의 거리로 살려낸 곳이다
일본의 3대 야경이라는 하코다테의 야경. 홀쪽한 반도를 끼고 있어 한층 극적으로 보인다

 

14일차 7월 28일
다시 혼슈로
코카콜라병의 곡선보다 더 매혹적인 하코다테의 잘록하게 빛나는 모습을 간직한 채  새벽 2시에 아오모리행 페리에 몸을 싣는다.
며칠전 탔던 실버호가 우등고속이라면 지금의 아사카제호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시골버스 수준이다. 우선 배 크기도 작아 1층 화물칸엔 차량 5~6대를 실을 수 있는 정도이고 2층 객실에는 10명 정도의 단체실이 3개 밖에 없다.
출입구나 벽 등은 두꺼운 철판 그대로이고 계단은 좁고 가파르며 페인트는 싸구려 매니큐어처럼 덕지덕지하다. 선내에는 시큼한 내음이 곳곳에 찌들어있다. 잠을 청하려는데 등쪽으로 엔진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 온다.
홋카이도와 혼슈(本州) 사이에서 태평양과 동해의 바닷물을 섞어주는 쓰가루해협(津輕海峽)이 오늘은 잔잔한데 우리 배는 마치 뛰어가는 듯하다. 그렇다고 빨리도 아닌데. 그래도 피곤한 잠은 쉬지 않는다. 
페리는 이름 아사카제(朝風, 아침바람)처럼 새벽 6시에 아오모리항에 우리를 내려준다. 멀리 아오모리 베이 대교가 손짓한다. 잠이 덜 깬 구르미와 함께 해변 산책로를 따라 워밍업을 한다. 토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도시는 조용하다. 도심에는 도로 가운데 길게 녹지를 조성해서 곡선의 산책로가 나 있다.
이 북쪽지방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이라니…. 시청옆 공원의 히말라야시다 숲에서 대구의 시다 가로수길이 떠오른다.
2차 대전 시절 같은 낡은 배의 설친 잠을 털어내고 다시 정신을 차린다. 아오모리가 혼슈의 끝자락이니까 말하자면 반환점인 셈이다.
오늘이 여행 14일째이니 예정 3주의 3분의 2가 지나고 있는데 이제 반환점이라? 좀 서둘러야겠다.
구르미와 함께 지도를 펴놓고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다가 결정한다. 일본해, 아니 동해로 가는 지름길인 7번 국도를 택하기로 한다. 오케이. 그럼 출발!
아오모리 시내를 벗어나 다시 페리부두 앞을 지나 본격적으로 7번 국도를 달린다. 지름길이지만 산세가 험한 동쪽으로 가는 내륙이라 구르미가 걱정을 하는 눈치다. 하지만 케세라세라다. 그리고 카르페디엠!
지금 25도 정도의 최적의 기온에 평지를 달리고 있는 이 순간만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도쿄에는 태풍이 온다 하고 서울은 열대야로 잠을 잘 수가 없다는데 우린 축복의 땅에서 이런 호강을 누리고 있다고 하니 그제야 구르미도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아오모리 평야에서 뜨거운 햇볕을 즐기고 있는 벼는 바람의 리듬에 춤을 추고 아직은 나뭇잎과 비슷한 크기의 파란 사과는 애기주먹만 하다.
멀리 원추형으로 홀로 우뚝한 이와키산(岩木山, 1625m)이 쉬지 않고 따라온다.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 위로 아래로 솟구쳤다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 듯 이와키산에서 떠나질 않는다.
남녘 태풍을 피해 온 파란 하늘이 높게 떠 있다. 점심 먹고 다시 나서는 길이 행여 뜨거울까 한바탕 소낙비가 지나간다. 어깨를 치켜 올리는 산맥과 함께 요동칠 줄 알았던 7번 국도도 현재까지는 얌전하다.
덕분에 3시간의 부족한 잠에도 100km를 완주해 오다테시(大館市)의 조그만 호텔 침대에 몸을 파묻는다. 쏘오옥~.

 

새벽녘 아오모리항의 고즈넉한 풍경
아오모리의 일본 100대 명산인 이와키산(1625m)이 내내 웅장한 자태를 보여준다
녹음이 짙고 쭉쭉 뻗은 삼나무가 이국적인 아오모리의 노변 풍경
여름에 찬바람이 나는 풍혈이 여기에도 있네
시간이 비껴간 듯, 빛바랜 옛날 분위기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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