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백사장에서 두바퀴와 파도가 술래잡기를 벌이면

굴혈포에서 바람아래까지, 태안 안면도 해변 20개 연속 종주?
광활한 백사장에서 두바퀴와 파도가 술래잡기를 벌이면

국내최고의 백사장 밀집지대는 단연 안면도 일대다. 북쪽의 굴혈포해변에서 최남단의 바람아래해변까지 직선거리 32km 내에 크고 작은 해변이 20개나 도열해 있다. 굴혈포에서 곰섬까지 6개 해변은 안면도 북쪽에 있지만 여기서는 안면도의 14개 해변과 묶었다.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라 태안읍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긴 반도로, 1638년 개통된 판목운하로 인해 섬이 되었고 이제 다리로 연결되었으니 반도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대의 백사장은 라이딩이 가능해 eMTB로 20개 해변 종주에 나섰다

 

전장 7km, 최대폭 600m의 광대한 몽산포해변. 자전거는 하나의 점으로 남았고, 멀리 높은 건물은 ‘토끼와 거북이’ 설화의 무대가 되었다는 청포대의 별주부정보화마을 전망대다

 

맨날 심산유곡을 달리고 산꼭대기만 헉헉대고 올랐더니 문득 바다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떠오른 곳은 몽산포(夢山浦).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이름부터 몽환적인 상상과 그리움을 조장하는 곳이다. 33년 전 처음 찾았을 때는 태안에서 버스가 하루 3대밖에 다니지 않는 오지였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도착했지만 여관은 고사하고 민박도 없어 이장 댁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문간방에서 하룻밤 묵은 기억이 있다.
몽산포는 그냥 해변이 아니다. 백사장은 장장 7km에 달하고 썰물 때는 폭이 600m나 되어 국내 최대의 해변에 속한다. 광활한 해변은 활처럼 휘어져 서해에서 겹겹이 밀려드는 파도의 기세를 서서히 죽여 종내는 잔물결로 진압해 버리는데, 나는 첫눈에 이 해변에 반해 광막한 공간감이 허기로 느껴질 때 찾곤 한다.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백사장이 워낙 단단해서 자동차도 바퀴가 빠지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모터스포츠 초창기에 1세대 동호인들은 서키트가 없는 설움을 이 모래판에서 해결하곤 했다.
그래도 eMTB인데 7km 해변 하나로 만족할 수는 없다. 욕심을 더 내어 몽산포 북쪽의 굴혈포해변에서 안면도 남단의 바람아래해변까지, 20개 해변을 모조리 섭렵해 보자는 구상을 했다. 아무리 백사장이 단단해도 노면저항 때문에 훨씬 힘이 들어 일반 자전거라면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eMTB라면 20개 백사장, 40km 종주는 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종주는 물 건너가고…
지난여름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에 갔을 때 드론 전문가이기도 한 최승호 그린휠 대표가 멋진 영상을 찍어줘서 이번에도 광활한 해변을 조감으로 담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안면도 일대는 군사보호지역이라 드론 촬영에 사전허가가 필요해 미리 날짜를 잡았다. 하필이면 그날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다가올 줄이야.
일기예보는 용케 맞아 들어가 답사 당일 태안 지역도 거센 비바람이 오락가락 했다. 잠시 비가 소강상태인 때를 틈 타 코스의 핵심인 몽산포부터 찾았다. 광대한 백사장은 몽산포로 통칭되지만 백사장이 너무 길어 달산포와 청포대 해수욕장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날은 오후 1시10분이 만조여서 일부러 일찍 도착했는데 백사장은 벌써 반쪽만 남았다. 피서객이 사라진 해변은 축제가 끝난 운동장처럼 스산하다. 무인지경의 광활한 해변을 이윤기 이사와 둘이 전세내어 달린다. 예전에도 MTB로 지난 적이 있지만 생각보다 페달링이 힘들어 진행이 느렸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 eMTB는 평지라는 것만으로도 힘이 펄펄 넘쳐난다.
겹겹이 밀려드는 파도를 희롱하며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쾌속으로 질주하니 바람도,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도 감각에서 잊혀지고 풍경의 총체로만 전신을 감쌀 뿐이다. 
 

몽산포해변에서 조개를 캐는 아낙네
;코스의 시작점인 굴혈포해변은 규모가 작고 한적하다
물이 반이상 들었는데도 몽산포 백사장 폭은 200m나 된다(사진 · 최승호)
파도와 함께 달리는 이 멋과 맛! 탈 때는 기분이 특별하지만 바닷물에 젖은 자전거와 옷의 뒤처리가 좀 번거롭다
안면도 북단의 백사장항과 태안쪽 반도 남단의 드르니항을 연결하는 ‘대하랑꽃게랑다리’. 인도교로 자전거 통행도 가능하며 독특한 나선형 진입로와 V자 교각의 사장교가 아름답다
꽃지해변의 할미·할아비바위(왼쪽이 할미바위). 물이 들면 잠기지만 썰물 때는 육지가 된다. 꽃지해변은 변산의 채석강, 강화의 석모도와 함께 ‘서해의 3대 낙조’로 꼽힌다

 


백사장 라이딩의 맛과 멋
백사장 라이딩이 가능한 곳은 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 일부뿐이다. 동해안과 남해안의 백사장은 대부분 모래가 말라 있고 푸석해서 바퀴가 빠지지만 서해안의 상당수 해변은 갯벌과 모래가 단단히 굳어 바퀴 자국만이 살짝 남는다. 아마도 백사장 라이딩이 가능한 곳은 세계적으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래저래 백사장 라이딩은 각별하다.
라이딩이 가능한 백사장이 드물어서 특별하고, 바닷물에 바퀴를 살짝 담그는 그 짜릿한 재미가 특별하고, 밀려드는 파도 라인을 따라 짓궂게 오가는 그 동심어린 재미가 특별하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넓은 해변에서 두바퀴와 더불어 하나의 점이 되어 땅과 바다, 하늘의 접점에 서서 우주의 중심이 된 듯한 엄청난 자아확대감이다. 정서적으로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극적인 무대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느낌도 준다.
최북단 백령도의 사곶해변부터 국내최고의 섬나라 신안의 수많은 해변까지, 백사장 라이딩이 가능한 곳이 이토록 많다는 것만으로도 이 땅은 결코 작지 않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결국 비바람 때문에 답사는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출발점으로 잡았던 굴혈포해변을 잠시 들렀다가 점프해서 안면도로 진입, 작은 섬이 딸린 꽃지해변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해변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겠다. 

사람 없는 백사장이란…
꽃지해변도 이미 빗속이지만 노을 전망대로 유명한 할미·할아비바위를 중심으로 해변을 누빈다. 할미·할아비바위는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생긴 수직 원통 형태의 암석인 시스택(sea stack)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비바람 속의 바위섬은 노을빛 어리는 서정과 슬픈 전설은 끼어들 틈이 없고 지질학의 분석대상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과도한 포장지 같은 감성의 겉치레를 걷어내고 앙상한 본질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열정과 감성의 파도는 거세고 강력하며 호소력이 있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허망하기 마련이다.
코스의 종점으로 잡은 바람아래해변까지 내려가 본다. 한층 거세진 비바람 속에 해변은 텅 비었다. 흔한 활 모양의 해변이 아니라 뾰족한 땅끝에서 불규칙적으로 생겨난 백사장은 형태를 가늠하기 어렵다. 해수욕장보다는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 우선인 듯, 온갖 금지 표지가 어지럽다.
오래전 여름,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한여름 성수기에도 몇 사람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다. 삽시도가 저기 어디쯤일텐데 시야가 흐리다.
2019년 12월 안면도 최남단의 영목항에서 원산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되면, 원산도의 4개 해변까지 더해 24개 해변 라이딩을 시도해봐야겠다. 원산도와 대천을 연결하는 다리도 2021년 12월 개통되니 백사장 라이딩 코스는 점점 더 늘어날 모양이다. 대천을 지나 무창포, 춘장대를 거쳐, 몽산포처럼 이름으로 매혹했던 비인(庇仁)까지 갈 수 있다면 서해안 백사장 대종주가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편안하게 잠든다고 해서 안면도(安眠島)인데 이루지 못한 일로 안면도를 계속 꿈꾸게 되었으니 복잡한 세사까지…  숙면은 여전히 멀었다. 

 

어느새 물이들어 섬이 된 할미·할아비바위를 배경으로(사진 · 최승호)
꽃지해변은 하얗게 부서진 조개껍질이 지천이다
인적도 편의시설도 없어 황량한 분위기의 바람아래해변

 

 

여 정
원래 계획은 북쪽의 굴혈포해변에서 출발해 몽산포~달산포~청포대~마검포~곰섬~백사장~삼봉~기지포~안면~두여~밧개~두에기~방포~꽃지~샛별~운여~장삼포~장돌~바람아래해변을 종주하는 것이었다. 백사장은 거의 이어져 있어서 물때만 맞으면 해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라이딩이 가능하다. 백사장해변 옆 백사장항과 꽃지해변에 식당이 다수 있으며 예쁜 펜션도 해변 곳곳에 있다. 백사장을 라이딩 한 후에는 반드시 세차를 해서 소금기와 모래를 제거하고 기름칠을 해줘야 자전거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세차는 해변 화장실에 갖춰진 수돗가를 활용하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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