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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일본행② 규슈 사가(佐賀)무령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상한 인연 가카라시마와 히젠 나고야성

지피지기 일본행② 규슈 사가(佐賀)
무령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상한 인연
가카라시마와 히젠 나고야성


부산~대마도~잇키섬~가라쓰(唐津)를 잇는 고대 이래의 한일 항로에 자리한 가카라시마(加唐島).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이 탄생한 작은 섬이다. 왕은 어쩌다, 왜 이 작은 섬에서 태어난 것일까. 가카라시마를 내려다보는 규슈 본토 언덕 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기지였던 나고야성(名護屋城)의 폐허가 남아서 1000년을 두고 벌어진 대조적인 한일 관계의 유산을 대변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전진기지였던 히젠 나고야성 정상 천수각(표지석에는 '천지대'로 되어 있다) 자리에서 바라본 한반도 방면. 도요토에 히데요시도 이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며 야심을 키웠을 것이다. 표지석 바로 오른쪽으로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가카라시마가 떠 있다. 거리는 겨우 6km 남짓으로 규슈에서 잇키섬~대마도~부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고대의 미스터리는 뜻밖의 일이 실마리가 되어 사슬처럼 얽힌 비밀들이 감자 줄기처럼 차례로 드러나기도 한다. 심증은 가지만 확증은 별로 없는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작은 유물이나 유적 하나도 양국 모두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1971년 공주에서 있었던 무령왕릉 발굴은 삼국시대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확정된 왕릉이면서 엄청난 부장품과 백제-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게 본 것은 무령왕의 본명이 ‘사마(斯麻)’라고 적힌 묘지석이다. 묘지석(墓誌石)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장례 풍습으로, 무덤 주인의 행적을 밝히고 땅의 신에게서 묘지를 산다는 매지권(買地券)이기도 하다. 국내에 전하는 고분은 도굴되거나 무덤의 누구인지 알려주는 표식이 없어 왕릉급도 추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고분 주위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무덤 주인이 ‘사마’라는 본명을 가진 무령왕임을 분명히 알려준 것이다.



섬에서 태어난 왕의 전설
규슈 사가현 히가시마쓰우라(東松浦) 반도 북단에는 가카라시마(加唐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이 섬에는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바닷가 동굴도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무령왕이 백제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이런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한낱 전설로만 치부되었는데 무령왕릉의 발굴로 이 전설은 일약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기에 이른다.
무령왕릉의 본명 ‘사마(斯麻)’가 가져온 역사적 발견이었다. 섬을 뜻하는 일본어는 ‘시마’이고, 斯는 일본어 음독으로 ‘시’로 읽는데,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나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무령왕이 이런 일본의 외딴 섬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도대체 당시 백제와 일본은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한일간 고대관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七支刀)에서 보듯이 4세기부터 백제와 왜는 형제국의 관계인 것이 분명하다. 칠지도에 남은 명문에 대해 한일 학자 간 해석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원문에 충실하며 자연스럽게 읽으면 누가 보아도 백제의 왕세자가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내린 하사품이다. <일본서기>는 헌상품으로 적고 있지만 6세기 이전의 일본서기는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고 백제의 역사기록을 왜의 입장으로 바꿔 적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칠지도를 하사한 때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대로 추정된다.
무령왕의 본명이 사마로 알려지면서 일본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에 전해오던 고대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에 새겨진 명문의 비밀도 풀렸다. 명문의 내용은 ‘사마가 동생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보낸다’는 것으로, 이로써 무령왕과 케이타이(繼体) 천황이 형제간으로 추정되어 백제와 왜 왕실이 혈연관계임을 보여주었다. 고대 부여계통의 나라에서 청동거울은 왕을 상징하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오사카 닌토쿠(仁德) 천황릉에서 나온 동경도 쌍둥이처럼 같기도 하다.    
중국에 전하는 양직공도(梁職貢圖)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세기초 양(梁)나라에 조공을 바친 외국 사신들의 모습과 그 나라의 내력을 간단히 적은 그림첩이다. 현재 전하는 것은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지만 6세기 한반도와 왜의 상황을 중국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들은 모두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말끔한 생김새인데 비해 왜 사신은 맨발에다 수염이 덥수룩해서 훨씬 미개해 보인다. 6세기 양나라 입장에서 왜를 비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사신들의 그림은 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신 그림 옆에는 그 나라의 사정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는 한때 요서(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부)를 지배했고 22개의 담로(擔魯)를 두고 왕의 자제(子弟)와 왕족(宗族)을 파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백제가 일종의 봉건제를 시행했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일본의 시코쿠 동부와 효고현 사이에 있는 큰 섬 이름이 한자는 다르지만 담로도(淡路島, 아와지시마)인데 이 섬도 백제의 담로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쉽게 정리하자면, 고대의 일본 열도는 사실상 원주민들만 살던 무인지경이었는데 가장 가까이 있던 가야를 시작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에서 사람들이 들어가 철기를 앞세운 앞선 문화로 원주민을 정복하고 곳곳에 일종의 식민지를 개척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를 시작으로 점점 혼슈 내륙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가야계가, 4세기 이후에는 백제계가 주도권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왕자가 왜에 간 것은, 현지에 정착한 자국민의 통제와 지배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부코항 북서쪽 하도미사키(波戶岬) 겐카이(玄海)해중전망대 뒤로 가카라시마가 가깝다
요부코항에서 가카라시마를 하루 4번 왕복하는 연락선 카카라마루 호. 20분이면 도착한다
가카라시마항 방파제에 한글 환영문이 있어 반갑다
나라(奈良) 현 텐리(天理) 시 이소노카미신사에 있는 칠지도. 명문을 해석하면 백제왕(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와카야마현 스다하치만신사에 전해오는 고대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둘레에 새겨진 명문은 ‘사마가 동생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보낸다’고 되어 있어 무령왕이 당시 왜왕이던 케이타이천황과 형제간이었음을 말해준다
6세기초 양나라를 찾은 주변 나라들의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 사진은 양나라의 원본을 모사한 것으로 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당염립본왕회도’ 중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사신(왼쪽부터)의 모습이다. 삼국에 비해 왜국 사신은 맨발에다 복장도 몸을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초라해 극히 비교된다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무령왕은 언제, 왜 왜로 간 것일까.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서기 5세기 중엽 개로왕(재위 455~475)이 다스리던 위례성(서울 풍납토성으로 비정)으로 가야 한다. 다음은 졸저 <산성 삼국기>의 관련 부분이다.
“개로왕은 장수왕의 끈질긴 남하전략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불안했다. 왕성은 고구려 접경에서 가까워 언제 어느때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뭔가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서기 461년(개로왕 7년), 개로왕은 최악의 경우에도 왕실을 보존하기 위해 동생(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곤지(昆支)를 왜로 보내기로 한다. 곤지의 위상을 높여 왜에서 쉽게 자리를 잡도록 개로왕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곤지를 좌현왕(左賢王)에 봉하는 칙서를 받아냈다. 나중에 왜로 간 곤지는 ‘곤지왕’ 또는 군군(軍君)으로 불리게 되며, 사실상 백제의 담로(橝魯, 지방 행정구역)였던 왜 땅을 다스리는 제후 혹은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은 떠나는 곤지에게 후궁 한 명을 주며, “저 아이는 임신을 해서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후처로 맞아 데려가거라. 다만 왜로 가는 도중에 출산하면 배를 태워 다시 돌려보내라”고 당부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제는 북방유목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는 풍속이다. 인구가 적은 초원지대에서 종족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신한 여자를 형제나 상관 등에게 주는 것은 앞으로 태어날 자식을 남자가 친자식처럼 여기고 보호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형사취수제의 변형이었다. 신라 화랑도에도 낭도의 아내가 임신하면 출산 전에 화랑과 동침하게 하는 마복자(摩腹子, 이름 그대로 ‘배를 문지른다’는 뜻) 제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를 화랑은 자식과 비슷하게 대우하며 보호했던 것이다. 
왜로 향하던 곤지 일행의 배가 규슈에도 닿기 전에 여인의 출산이 임박해지자 급한대로 근처의 작은 섬인 각라도(各羅嶋)에 정박해 해변의 동굴에서 아이를 낳는다. 각라도는 지금의 사가현(佐賀縣) 가카라시마(加唐島)로 당시의 동굴이 보존되어 있다. 공식적으로는 곤지의 아들이고, 실제로는 개로왕의 아들인 이 아기는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섬의 일본어인 ‘시마’에서 따온 斯摩(사마) 또는 斯麻(사마)로 불리게 되며, 나중에 웅진성 시대의 중흥을 이끄는 무령왕(武寧王)이 된다. 곤지는 개로왕의 명대로 여자와 아이를 다시 배에 태워 백제로 보내고 자신은 항해를 계속해 왜로 들어갔다. 그러나 개로왕이 죽은 후, 문주왕이 즉위하면서 입지가 불안해진 사마는 왜로 건너가 곤지의 보호 아래 성장하게 된다.      
곤지의 왜국행은 앞서 397년 아신왕의 태자 전지(腆支)가 처음으로 왜로 간 이후 백제 왕족으로는 두 번째다. 곤지가 왜로 간 것은 전지와 마찬가지로 백제계가 장악하고 있는 왜를 감독하고 다스리기 위한 목적 외에,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한 개로왕의 왕실 보존책이기도 했다.
나중에 곤지의 아들 동성왕(재위 479~501)이 시해당하자 곤지는 일본에 있던 사마를 백제 왕으로 다시 보낸다. 무령왕은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의 둘째아들로 나오고, <일본서기>에는 곤지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곤지가 왜국에 올 때 섬에서 갑자기 낳은 사마가 맞다면 무령왕의 친아버지는 개로왕이고, 호적상의 아버지는 곤지가 된다. 정황을 볼 때 이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포구에서 무령왕 탄생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백제무령왕 탄생전승지 기념비. 한일 양국민의 성금으로 2006년 건립되었으며 한국측은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시 시민들이 주로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념비는 공주의 무령왕릉 묘실을 형상화했다
기념비 옆에 조성된 작은 화단을 둘러싼 돌에는 한국인 이름도 많이 보인다
무령왕릉 탄생지인 오비야우라 동굴로 가는 길은 걷기 좋게 잘 단장되어 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보다 더 작은 진제이마치마쓰시마(鎭西町松島). 길고 특이한 지명은 오비야우라동굴 서쪽에서 바다를 진호해준다는 뜻일까

 

요부코항, 가카라시마     
지도를 보면 왜 무령왕이 가카라시마에 기착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려면 부산이나 거제도 방면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를 거쳐 그 다음에 보이는 잇키섬(壹岐島)을 차례로 경유해 지금의 가라쓰(唐津)로 상륙하는 것이 기본코스였다. 가카라시마는 잇키섬과 가라쓰 사이에 있어서 위급상황에 기착하게 됐을 것이다. 조금 있다 살펴보겠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기지가 된 나고야성(名護屋城)이 가카라시마가 보이는 히가시마쓰우라 반도 북단에 자리한 것도 대륙 항로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가카라시마는 길이 3.3km에 면적은 2.83㎢로 여의도와 비슷한 작은 섬이다. 규슈 본토에서는 4km 가량 떨어져 있는데 히가시마쓰우라 반도 최북단의 항구인 요부코항(呼子港)에서 연락선이 있다. 하루 4번 왕복하는데 가카라시마의 인구가 수백명인 것을 감안하면 자주 있는 편이다. 요부코항은 오징어회로 유명하고 식당도 많지만 값이 너무 비싸다.
8시50분 요부코항을 떠난 45톤 86인승의 작은 배(가카라마루 호)는 20분만에 가카라시마에 도착했다. 섬은 높이 120m 정도의 산줄기가 뻗어 있고 사방은 가파른 절벽이다. 평지는 해변이 아니라 산능선 위에 고원처럼 형성되어 있어서 주민들이 밭을 일군다. 포구가 개발되기 전에는 배를 접안할 데도 없었을텐데 곤지 일행은 용케도 도착했다 싶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 마을은 100가구 정도 될까.
방파제에는 ‘일한교류 40주년’이라는 글씨와 한글로 쓴 ‘가카라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구가 보인다. 부둣가의 안내문에도 백제 무령왕 탄생지 얘기가 가장 크다. 한국 관광객이 꽤 오는 것 같다. 무령왕릉 탄생지인 오비야우라까지는 선착장에서 700m로 15분 가량 걸어가야 한다. 초입에는 한일 양국민의 성금으로 2006년 건립된 ‘백제무령왕 탄생전승지 기념비’가 서 있다. 한국측은 공주 시민들이 주로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념비는 공주의 무령왕릉 묘실을 형상화했다.
오비야우라까지는 산허리를 따라 널찍한 길이 잘 나 있다. 동굴 바로 위쪽에는 ‘고야마키(高野槇)’ 팻말이 붙은 작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는 무령왕을 안치한 관의 목재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져 고대 일본에서 최고의 금송 산지였고 지금은 일본 진언종의 총본산으로 117개의 사찰이 모여 있는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의 금송을 기념으로 식재해 놓은 것이다. 주민들의 역사적인 센스에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사방이 절벽으로 에워싸인 가카라시마이지만 희한하게도 여기 오비야우라에만 작은 만 안쪽에 배를 접안할 만한 자갈해변이 숨어 있다. 해변은 50m 정도이고 안쪽에 폭 10m 깊이 6m 정도의 천연동굴이 기적처럼 형성되어 있다. 출산이 임박하다면 배에서 아이를 낳아도 될텐데 굳이 이 작은 섬에 상륙한 것은 풍랑이나 식수 부족 같은 위급상황 때문일 것이다. 동굴 바로 뒤편에는 산에서 흘러온 작은 계곡이 있어 식수를 구할 수 있다. 갓난 무령왕을 씻은 물도 여기서 조달했을 것이다.
서기 461년 바로 저 작은 동굴에서 무령왕이 첫 울음을 울 때 동굴 입구에는 장막을 치고 시종들은 해안 주변에 서서 주위를 경계했을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곤지는 이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고.
곤지는 개로왕의 당부에 따라 두 사람을 다시 백제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개로왕은 섬에서 태어난 기구한 운명의 왕자를 보고는 왕재를 직감하고 안전한 왜국으로 다시 보내 곤지 아래에 두었다. 이후 백제는 개로왕의 예감대로 엄청난 격변기를 맞는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위례성을 잃었고 개로왕 자신도 전사한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공주에 임시도읍을 정하지만 귀족들의 반란이 거듭되어 왕권은 추락하고 왕실의 안녕을 보장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고 만다. 결국 문주왕과 그의 아들 삼근왕은 반란 끝에 차례로 살해되고 정국이 극도로 어지러워지자 왜국에 있던 곤지가 왕실의 어른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아들을 보내 왕위를 잇게 한다. 이가 동성왕이다. 하지만 동성왕마저 살해당하자 다시 보낸 왕이 무령왕이다.
무령왕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웅진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무령왕이 다진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그의 아들 성왕(聖王)은 임시도읍이던 웅진시대를 청산하고 부여로 천도해 백제의 부흥기를 열게 된다.
배 시간이 남아 마을 뒷길을 잠시 산책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정갈했다. 주민들은 노인들뿐이고 빈집도 상당수다. 분교 규모지만 소학교겸 중학교가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마을 입구에 있는 유일한 가게에서는 노인들이 대낮인데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2002년부터 매년 6월 초에 열고 있는 ‘백제 무령왕 탄생제’는 이 섬의 유일한 축제이자 자부심이면서 생계의 방편이 되고 있으니 무령왕의 덕은 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는 셈이다. 

오비야우라 동굴. 독특한 원호 형태로 생겨난 해식동굴인데 바닥에는 조약돌이 깔려 있다. 폭 10m에 깊이는 6m 정도로 훤히 트여 있어서 출산 당시에는 장막으로 가렸을 것이다
동굴 안쪽에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탄생의 땅’이란 목제 팻말만이 초라하게 걸려 있다. 자연상태 보존을 위해 석비는 일부러 지양한 것 같다
동굴 바로 뒤편에는 갓 태어난 무령왕을 씻겼다는 개울이 흐른다. 식수도 여기서 구했을 것이다
동굴 뒤에 심겨진 고야산의 금송.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의 관재가 고야산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그 인연으로 묘목을 심어놓은 센스가 기발하다
가카라시마 안내도. 무령왕 탄생지 외에는 볼거리나 지명도가 거의 없는 작은 섬이다

 

임진왜란 침략기지, 히젠 나고야성 
가카라시마가 일본열도와 좋은 인연의 유적이라면, 바로 마주보이는 내륙의 언덕에는 악연이 된 유적이 있다. 바로 나고야성(名護屋城)이다. 아이치현의 나고야(名古屋)와 발음이 같아 구분하기 위해 이 지역의 옛이름인 히젠(肥前)을 붙여 ‘히젠 나고야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살육전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전히 살기등등한 전력을 갖춘 전국의 번(藩)과 전쟁이 없어져 일을 잃은 사무라이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무런 명분도 없는 조선침략을 단행한다.
가카라시마가 보이는 히젠 지방에 전진기지를 만든 것은 부산으로 가기에 가장 가깝고 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하면서 도요토미 가는 몰락하고 대가 끊어지는데 그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이 나고야성도 철저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허물어진 석축만이 곳곳에 남아 있다.
건물은 사라지고 성벽은 허물어졌지만 토대는 그대로 남아서 당시의 위용을 말해준다. 3단의 단층(마루, 丸) 외에 별도의 단층을 둔 매우 복잡한 구조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천수각은 오사카성과 같은 5층(내부는 7층) 규모였다. 석축을 제외한 건물 높이만 25~30m로 추정되며 금박 기와를 사용해 지극히 거대하고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자연구릉을 기단으로 이용하긴 했지만 천수각이 있던 혼마루(本丸)는 해발 100m 정도 되어서 해변인 것을 감안하면 성 외부에서는 상당히 높게 올려다 보여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했을 것이다. 조선을 거쳐 명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호언장담한 히데요시의 야망에 걸맞게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곽이었다. 외성의 둘레가 6km, 면적은 50만평에 달해 당시로는 일본제일의 오사카성 다음이었다.
축성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동원되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임진왜란 때 선봉장을 맡았고 성곽에 조예가 깊은 세 사람이 설계를 하고, 그밖에도 20여명의 다이묘들이 동원되어 공사를 시작한 지 불과 8개월만인 1592년 3월 완성했다. 같은 달 히데요시가 성에 도착했고, 4월에 제1진이 조선으로 출발했으니 공격 시기에 맞춰 급히 완성한 것이다. 
성 주변에는 출진을 위해 모여든 각 다이묘들의 기지가 배치되었고 전국에서 총 9군으로 편성된 15만8천의 대군이 모여들었다. 대군이 집결하자 이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활동도 번성해져 성 주위는 군사를 제외하고도 순식간에 인구 10만의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문무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성곽 옆에는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이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시내용이 알차고 흥미롭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한일교류사와 일본에 영향을 미친 한반도의 문화가 주된 전시물이다. 불행한 전쟁의 기억을 딛고 서로를 이해하자는 취지인데 한국인이 봐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전시물 중에 특히 관심이 간 것은 일본 국보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상과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비교한 것과 나고야성 전성기 때를 묘사한 대형 병풍, 정유재란 때 울산성 전투를 그린 조선군진도 세 가지다.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종교적, 예술적 완성도로 인해 세계적인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많이 나는 적송을 재료로 하고 신라의(백제설도 있음)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구도와 모습이 거의 같은 것으로 봐서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둘을 동시에 두고 보면 같은 장인은 아니더라도 같은 문화권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일본은 어딜 가나 한반도의 영향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비교전시를 해놓은 박물관 측이 각별해 보인다.
나고야성 전성기를 그린 병풍을 보면 성곽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다이묘와 군사들의 진지 표시가 없는 것으로 봐서 전쟁 중에 보급기지 역할을 할 때의 모습 같다. 삽시간에 전국에서 장사꾼이 몰려들어 10만 도시를 이뤘다는 전설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 한반도에서 벌어질 잔혹한 살육행위는 이 ‘전쟁귀신’들 중 아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두 인물을 대비하게 된다.
한반도 최고의 전국시대를 끝낸 이는 신라의 문무왕이었다. 일찍이 왕자 시절부터 당 황실에서 숙위(주변국 왕자가 당 황제를 보필하던 제도)하며 국제감각과 정세를 익힌 그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까지 넘보던 당나라를 몰아내고 마침내 한반도 일원에 통일과업을 완수한다. 고구려 옛땅인 만주를 보듬지는 못했지만 이는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가 차지했으니 당나라에 넘겨준 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 문무왕은 대단히 관대한 정책을 펴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포용했고 병장기를 녹여 없애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경주 외곽에 있는 무장사(武藏寺)는 이름 그대로 당시 무기를 묻은 곳에 세워진 사찰이다. 야심과 욕심이 과한 군주라면 전투를 통해 잘 조련된 대군을 어떻게든 유지해서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야 반란이 일어나거나 외침이 있을 때 자신의 안전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문무왕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반대의 길을 택했다. 내가 문무왕을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하나, 수중릉에서 보듯 그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은 지금 봐도 강고한 주체의식과 달관의 경지가 놀랍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 흙으로 되어 나무꾼과 소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곁에 굴을 팔 것이니 쓸데없이 재물을 허비해봐야 역사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할뿐 죽은 혼은 구원할 수 없다… 조용히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아플 뿐이요, 이 같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은 후  열흘 후에 문밖 뜰에서 화장하고 장례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하지만 그 900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후 문무왕과는 정확히 반대의 길을 갔다. 전투로 단련된 부대를 그대로 유지해서 만약의 경우 반란군을 제압하고, 무사들의 불만을 딴 데로 유도하고 새로운 생계 방편으로 아무런 적의도 없는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오다 노부다가 역시 전국시대를 평정한 후에는 조선과 명나라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100년을 이어온 전쟁의 관성을 한 인간이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문무왕은 어쨌든 이를 해냈다.
혼노지(本能寺)의 변(變, 1582)을 일으켜 주군이던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것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였으나 그 틈을 잽싸게 파고들어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푼 오다 노부나가의 자식과 후처까지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진정한 배신자이자 냉혈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빈한한 평민 출신에다 6개 손가락을 가진 장애로 열등감의 화신이자 변신과 처세의 달인이던 히데요시에게 관용과 포용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선과 명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그의 과욕은 결국 가문의 멸망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집권한 후 히데요시의 흔적을 철저히 말살하면서 나고야성도 파괴되었다. 성돌은 다른 성을 축조하는데 가져다 썼다고 한다
천수각 터 한켠에는 아오키 겟토(靑木月斗)가 읊은 싯귀가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히데요시를 찬양하는 건지 탓하는 건지 애매한 그 내용은, ‘타이코(太合, 히데요시)가 노려보는 바다의 아득함’
천수각 터 아래로 단층을 이룬 나고야성. 축성의 귀재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전국의 20여 다이묘들이 동원되어 불과 8개월만에 완성했다. 성 아래에 군대가 집결하자 장사꾼들도 몰려 순식간에 10만 도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나고야성박물관에 전시된 복원모형. 조선 침략을 위해 둘레 6km 면적 50만평의 거성을 단기간에 완성했다. 히데요시의 과욕은 좌절되었고 그의 사후, 아들 히데요리는 자결로 생을 마감해 가문은 단기간에 멸망하고 만다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상(뒤 사진)과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비교 전시해 놓았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든 것이 빼닮았다
나고야성과 해안 일원에는 규슈 올레길이 개설되어 있다. 일본땅에서 만나는 돌하르방과 올레길 표지판이 이채롭다
나고야성 천수각 자리에 있는 안내판. 임진왜란 출진 당시 각 다이묘들의 진지가 표시되어 있다. 멀리 가카라시마가 보인다

 

   
현해탄을 바라보는 시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히데요시의 흔적은 철저히 말살되는데 나고야성도 그때 파괴되었다. 성돌은 다른 성을 축조하는데 사용되었고 지금은 무너진 성벽과 돌더미만 무성하다.
가장 높은 천수각 터에 오르면 성곽 주변에 주둔했던 다이묘들의 진지가 표시되어 있다. 삽시간에 건설된 성곽과 10만 도시에 15만 대군이 집결한 위세는 실로 굉장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도 성곽을 보고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이 엄청난 침략 준비를 까맣게 모르던 조선 조정과 백성들은 태평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가카라시마 저편의 현해탄을 바라본다. 거대한 오사카성 천수각에 올랐을 때 히데요시의 야욕이 망상이 아니라 야망으로 느껴졌다면, 여기 현해탄을 내려다보는 나고야성 천수각에서는 생각이 다르다. 한반도까지 얼마 안 되는 바닷길이라지만 육안으로는 망망대해인 저 바다를 보면서 히데요시와 다이묘들은 어떤 벽을 절감하지 않았을까.
1933년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가 읊은 일본 특유의 짧은 시형식인 하이쿠 구절이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천수각을 대신하고 있는데, 내 느낌처럼 이 짧은 구절에서는 뻗어나는 기세가 아니라 좌절과 굴욕의 암운이 어른거린다.
“타이코(太合, 히데요시)가 노려보는 바다의 아득함”.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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