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한강4(충주·원주·여주·양평)

잔설이 머뭇거리는 남한강의 옛 나루터

산협을 굽이굽이 돌아온 남한강도 탄금대에서 다시 장도에 오른다. 중원의 역사 사이로 더디게 흐르는 물이 여울을 이룰 쯤에야 목계를 지난다. 장시(場市)가 서던 마을의 영화도 가고 없다. 충청·강원·경기가 경계를 이루는 섬강과 청미천 언저리를 지나서도 사람의 발길은 뜸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강가에 부지런히 집을 짓는다. 살아온 날의 신산을 강물 위에 떠나보내려는 듯 반백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삽을 든다. 강의 역사 속 사라진 기억을 더듬는 일은 고달픈 현재에 주는 위로가 된다
글 조용연(여행작가)

 

 취재 지원 : 김용선
 기술·용품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1-7206)
 자전거협찬 : 알톤 전기자전거 STROLL

 


태백에서 골지천이란 이름으로 발원하는 한강을 달린 지도 햇수로 3년이 지났다. 조양강으로, 동강으로, 충주호로 이름을 바꾸어 내려오던 한강을 탄금대에 올라 바라보며 남겨두었었다. 새 봄을 맞으며 민족의 강, ‘한강’의 나머지를 다시 즐기며 가리라 했건만 춥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꺼낼 수도 없는 2월 중순이다.
  강에서 바라보는 온 세상이 회청색 몽환에 가까우나 목이 ‘싸아~’ 하다. 대륙 발 미세먼지의 내습이다. 봄날 물안개와는 다른 배경 속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중원의 역사, 그 심장 충주
탄금호는 조정지댐이 물을 가두어 생겨난 인공호수다. 우리들 손에 잡히는 역사는 역시 삼국시대 정도가 가시권이다. 중원의 쟁패는 고구려·신라·백제의 힘겨루기 결전이었다. 고졸한 탑 하나가 서있다. 그 옛날 북과 남에서 걸어온 승려가 만나 출발한 날짜를 따져보았더니 한 날 한 시에 같이 출발했단다. 이곳이 바로 ‘국토의 중앙’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중앙탑’으로 사실상 개명한 탑평리7층석탑(국보6호)은 아예 가금면이란 행정단위도 ‘중앙탑면’으로 고쳐버렸다.
지척에 귀하디귀한 충주고구려비(국보205호)가 있다. 1979년에 충주 향토문화단체인 ‘예성동호회’가 예사 비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만해도 마을에서는 그저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비는 영험한 돌이거니 했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귀한 존재인줄 꿈에도 몰랐다. 충주박물관이 바로 중앙탑 앞에 들어섰고, 국립박물관으로 승격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술박물관 ‘리큐리움’까지 들어 있어 중앙탑사적공원은 대충 둘러보아도 반나절은 가져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한 겨울만 아니면, 국제경기까지 열리는 조정경기장이 붙어 있어 훈련하는 모습만 지켜보아도 시간가는 줄 모른다.  

목계장터, 신경림을 키운 저자거리
중앙탑에서 조정지에 이르는 강변은 벚꽃이 피는 철이면 길 따라 굽이치는 벚꽃의 열병만으로도 제몫을 다한다. 하지만 남한강의 서정을 제대로 불러일으킨 유공은 누가 뭐래도 시인 신경림의 몫이다.
그는 1935년 충주시 노은면 보련산(764m) 자락에서 태어났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IC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제일 높은 산허리는 온통 광산이었다. 검은 석탄이 아니라 그야말로 황금을 캐는 금광마을이었다. 금광이란 허망하기도 하고, 한 큐 잡기도 하는 것이어서 덕대(광산하도급업자)와 연상(鉛商)들의 허세와 낙담이 질펀한 색주가의 젓가락 장단과 더불어 밤이 깊어가곤 했다. 그런 저자거리의 풍경 속에서 세상을 향한 눈이 떠지고, 소풍을 가던 목계솔밭과 장터의 풍경은 오롯이 시인의 가슴에 들어와 언어로 형상화 되었다.
강원도의 뗏목뿐만이 아니라 밀물 때 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배가 만드는 강장(江場), 갯벌장이 모래강변을 달구었다. 정해진 날도 없이 소금배가 오는 날이면 닷새고 이레고 장이 열렸고, 새우젓은 물론, 직물, 약을 비롯한 여러 물목들이 강원도로 경상도로 등짐장수들에 실려 오고 갔다. 그의 나이 44세에 낸 시집 <새재>에 실린 ‘목계장터’는 되돌릴 수 없는 서정을 문자로 박은 한 시대의 문신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전문>

 


6·25 난리 통에 장미산성 기슭에서 본 한강, 비행기의 기총소사로 뒤집히는 배와 허옇게 떠내려가던 무고한 목숨에 대한 목격은 그의 많은 시가 진혼의 노래로 이어지게 한 신내림이었을 것이다. 1990년 ‘강마을의 봄’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봄을 눈 틔우는 버들강아지를 볼 겨를도 없었다. 비행기 사격훈련의 표적이 된 가흥 앞 모래섬에 눈이 머문다.
장미산 쪽 가흥도, 강 건너 목계도 이제 한시절의 영화는 그림자도 찾기 어렵다. 그저 한국의 대표적 수석 산지였음을 증명하듯 온통 강바닥을 훑어 온 듯 수석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자연의 축소판을 완상하는 취미가 골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최근에는 고서화를 비롯한 옛것들을 취급하는 거래상들이 모여들어 가게 문을 열었다. 앙성 온천 몇 군데가 몰려있는 능암에는 아예 고서화를 비롯한 골동품 경매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여전히 신경림의 시가 길목을 지키고 있는 명품 비내강변길은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요구한다. 갈 길이 바쁜 국토종주자전거길은 벼슬바위 앞에서 앙성천을 따라 능암온천까지 올라가 조대고개를 넘어 우회해야 한다.

비내섬, 손대지 않은 자연 30만평
마을마다 유래가 없는 곳이 없지만 조대마을도 30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조정에서 고관을 지낸 김익창(경주 김씨)이 낙향하여 낚시로 세월을 보내자, 그를 아까워한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이 찾아와 다시 벼슬길에 나오라 권했다. ‘洞江七里灘 富靑山釣垈’(마을 앞 강 곳곳이 여울이고, 산수마저 넉넉하니 사방이 낚시터)란 시로 완곡히 거절하고 이 강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그 흔한 점방 하나, 음식점조차 없는 길을 30리가 넘게 달려오다가 만나는 조대슈퍼라는 삐뚤빼뚤한 글씨와 아이스 바 하나의 맛을 오래된 자전거 꾼들은 기억한다.
비내섬은 미군의 훈련용지로 쓰이는 나라 땅이지만 훈련이 없을 때는 빗장을 잠그지 않는다. 30만평의 땅이 원시상태로 있다 보니 수없는 역사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될 수밖에 없다. 카메라 웍을 조금만 신경 써도 완벽한 삼국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사극뿐이 아니다. 인적 없는 황량한 강의 풍경이 필요한 현대극에도 이만한 무대가 없다. <근초고왕> <수백향> <광개토대왕> <징비록> <정도전> <전우치> <육룡이 나르샤> <서부전선> 등이 모두 비내섬 갈대숲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조천리(釣川里)에 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훈련이 있는 날에는 머리 위로 날아서 뜨고 내리는 헬기의 굉음으로 강마을의 정밀(靜謐)이 철저히 부서진다. 우연하게 비내섬 입구에 자리를 잡고 4계절을 지나왔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은퇴자의 로망을 그리며 ‘글이나 써보자’는 허영으로 잠시 머문 거다. 이 강마을 사람들은 참 유순하다. ‘미군 헬기는 떠나가라‘고 악을 쓰는 그 흔한 핏빛 플래카드 하나라도 걸렸을 법하지만 눈 씻고 봐도 그런 건 없다. “우리 마을 떠나 어디 가서 그런 훈련을 하겠냐”는 분위기다. 쓸데없는 텃세 따윌 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툰 삽질로 텃밭에 두둑을 만드는 신출내기가 안쓰러웠는지 밭을 갈러 가던 트랙터를 끌고 들어와 한바탕 쓰윽 갈아엎어 주고 가는 인심이 살아 있다. 파뿌리의 질긴 생명력과 온갖 병충해의 종결판인 고추농사의 고약한 맛도 가르쳐 준 강마을이다.
  

 

 
3도가 마주치는 부론, 흥원창의 영화는 자취도 없어
자전거도 남한강변길을 자동차와 공유하면서 저어간다. 포장길로 제대로 단장한 지 이제 십 수 년이다. 늘어나는 차들에 밀려 자전거의 노폭은 위협받는다. 공유라고는 해도 아주 불리한 공존이다. 사람이 모진 강바람을 피해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영죽리 골짜기의 제법 너른 벌에 해묵은 마을이 졸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하지만 강을 향한 도회인의 집념은 단순한 휴양이나 낭만 이상이다. 서울의 한강, 그 비싼 조망의 연장선상에서 은퇴 이후의 삶도 계획된다. 인구밀도 제로의 강퍅한 강변에 터를 닦고, CCTV를 매다는 새집에게 겨울 칼바람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맥없이 떠는 문풍지가 아니다. 독일제 창호를 견고하게 할수록 단열 효과는 높아져 별장의 안팎이 철저하게 분리된 하나의 풍경으로 강변은 나직한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간다.
손에 잡힐 듯이 지루한 30리 길의 끄트머리에 부론이 있다. 경기도 여주 점동과 충청북도 충주 단암, 강원도 원주 부론의 3도가 함께 만나는 끝점이다. 도진(渡津) 취락의 흔적들이 강마을의 역사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도가 끊기는 지점에 도(渡)가 설치되어 큰 물화(物貨)가 이동하고, 강마을을 건너 장 보러, 학교 가던 사람들의 길목에 진(津)이 있어 사람과 어깨 짐이 건너다닌다. 남한강대교가 1986년 건설되면서 제법 컸던 ‘개치나루’도 사라졌다. 부론장은 흥원창의 번성하던 시절의 영화까지 이어받아 좀 더 커졌지만 그저 그런 강나루장터였다. 조선시대 전국 12조창에 들던 흥원창은 섬강을 흘러온 원주, 횡성의 물산이 환적되던 조창(漕倉)이었으나 이제 ‘창(倉)말’이라는 마을 이름에만 한 글자 간신히 남아있다.
영동고속도로가 섬강을 건너는 근처는 유난히 응달이 심해 잔설과 빙판이 그대로다. 자전거를 끌지 않을 수 없다. 섬강을 건너 닷둔이재와 창내미재를 올라가며 이 길이 과연 옛 영동고속도로의 흔적이라니 우리네 생활이 누가 뭐래도 살만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굴암리로 접어들어야 강변이다. 강천섬으로 일부러 들어간다. 이 섬은 순전히 걷는 이들과 자전거나그네를 위한 섬이어서 귀하다. 자동차를 거부하는, 오만한 다리(橋)가 이 섬의 가치를 세월 속에 더 빛낼 것이다. 같은 하중도(河中島)이지만 남이섬의 넘치는 상업성의 대척점에 있어 고맙다. 절제된 장치, 그 화장기 없는 얼굴만으로도 자전거국토종주의 길손들이 누릴 수 있는 여백이다.  깔딱고개를 올라 강천보를 건너서면 거대한 기와지붕이 뒤통수를 보인다. ‘대순진리회’다. 증산교계통의 민족종교 중 하나이자 태극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음양합덕이나, 해원상생과 같은 종교적 깊이에 나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가 공교롭게도 1990년대 ‘대순진리회’ 분쟁의 충돌 진원지인 서울 중곡도장과 여주도장 두 곳의 경찰서장(서울광진경찰서와 여주경찰서)을 지낸 것은 참 우연이었다. 기억 속의 대순진리회는 방면본부의 표찰을 단 수 백대의 버스가 끝없이 건너가던 여주대교, 밀궁을 연상케 하는 어쩐지 으스스한 대형 한옥건물의 검은 기와지붕과 종단 분규의 와중에 재판으로 묶여있던 수천억의 돈으로 남아있다.
 

 


용봉탕과 여주 신륵사
강천보를 지나면 은모래유원지로 이어진다. 너무 매끈하게 정비한 강변은 오히려 그 옛날 은모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성형으로 주름을 너무 잡아당긴 여인의 맨얼굴 같아 거북하다. 강 건너가 드물게 강가에 자리 잡은 사찰 신륵사다. 그 유명한 신륵사다층전탑(보물226호), 즉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 강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산사의 청정에 반기(叛起)라도 들 듯 사하촌은 대개 술기운과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신륵사도 한 시절 절집 앞에 성업하 던 용봉탕은 늘 힘이 제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잉어나 자라를 묵은 닭과 함께 고아낸 뿌연 국물은 비싸도 제값을 할 거라고 배를 두드리면서도 뿌듯했었다. 영월루에 올라야 여강(驪江)으로 불리는 여주의 강변풍경을 제대로 완상할 수 있지만 언젠가 나중의 몫이다.
 
남의 묘 자리에 들어선 세종대왕릉 
여주시내를 지나면 왕대리, 왕터를 지난다. 강쪽으로는 양섬이, 좌안으로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이 있다. 기억의 시계를 1996년으로 되돌린다. 당시 이수성 국무총리가 일요일에 여주를 찾았다. 이포에 있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제각을 낙성하는 자리에 지극히 사적인 종친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다.
과연 그분은 사람다루기의 달인이라는 걸 입증해 보였다. 군수와 서장을 쟁쟁한 광주이씨 종친들의 한 가운데 총리 당신과 마주앉도록 직접 자리를 배치했다. “우리 광주이씨 집안 행사에 군수님과 경찰서장님이 오셨으니 고을의 어르신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해 42살 젊은 나는 감읍해 어쩔 줄을 몰랐다. 현직인 이상옥 외무부장관까지도 비껴 앉았으니 말이다.
“사실 말인데, 세종대왕이 묻힌 자리는 천하명당 자리요. 원래 우리 광주이씨 선조(누군지는 정확이 기억이 나지 않음)가 이미 누워있는 묘소를 파내고, 이장해온 것이지. 어명인데 어쩌겠어.” 하기야 아무리 성군 세종이라고 한들 죽은 다음 후손들이 원래 풍수가 나빠 종묘사직이 흔들린다고 이장한 걸 어찌 하겠는가. 진위여부야 어떻든 참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 한 토막이다.
사실 여주는 4대강 사업의 최대 수혜지다. 상습홍수 피해의 늪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어디랴. 여주가 3개의 보(이포보, 여주보, 강천보)를 가진 것만으로도 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공군 비행기 사격장 근처의 양촌리와 당산리 일대는 거대한 저류지를 만들어 여분의 물주머니를 예비해 두었다. 여러 개의 작은 동산만한 4대강 준설의 모래는 아직 60%가 팔려나가지 못하고 있다. 골재로 평생을 산 지인 구덕회(65)는 “진흙이나 이물질을 세척하고 나면 30%나 양이 줄어드는 모래여. 건설경기가 없어 정부가 언제까지 남의 땅에 임대료를 내고 야적해야할지 모르겄어.”라고 푸념한다.
 

 


양평이 되어 팔자 편 개군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 년에 두어 번 날씨 좋은 날을 잡아 재직 시의 장관, 수석비서관들과 자전거를 타러 이포보 언저리까지 오는 제법 먼 길을 마다 않는다. 아마도 이 강둑길에서야 전직 대통령은 비로소 4대강사업의 일방적 비난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포대교 동쪽 천서리는 막국수라는 서민 음식을 통하여 거무죽죽한 면발과 동의어가 될 수 있었다. 추운 날 80km 주행을 넘어서니 장딴지가 무거워진다. 그래도 양평읍까지는 가야한다.
1962년 여주군에서 의붓자식 취급을 받던 개군면은 양평군에 편입되면서 팔자가 편다. 동네사람들은 “거지마을이었다가 제일 부자마을이 되었다”고 말한단다. 개군 한우가 유명해서 일까, 서울이 한 발짝이라도 가까워 땅값이 올라 그런 걸까. 상·하자포리를 지나 후미개고개는 체력을 시험하는 깔딱고개다. 산이 이리 깊으니 한 시절 한양 땅으로 가는 땔감나무들을 배에다 싣고 갈만하다. 양덕나루터다. 영월·정선 뗏꾼들까지 묵어갔으니 주막집 색시들 노랫가락에 나루터는 더 흥청거렸으리라. 겨울 한철이면 추위로 얼어붙는 물의 도시 양평읍에 들어서자, 양평대교의 황색 불빛이 겨울 강물 위에 따뜻하게 일렁인다. 

 


 참고자료
1. 민요기행2, 신경림, 한길사, 1989
2. 신경림의 문학앨범, 웅진출판사,1992
3. 충주의 구비문학, 김예식, 이노영 등, 충주시, 2002
4. 남한강 수운의 전통, 이정재 김준기 등, 한국학술정보, 2007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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