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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3·1절, 상해임시정부를 향한 여정라이딩 내내 비 내리고 고장 연발, 하지만 100년 전 그때에 비할까

3·1절, 상해임시정부를 향한 여정
라이딩 내내 비 내리고 고장 연발, 하지만 100년 전 그때에 비할까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고려대 교우 자전거 모임인 ‘타이거 바이크(Tiger Bike Club)’ 회원 15명은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항주임시정부유적지~가흥 김구선생피난처~상해임시정부유적지~홍구공원 윤봉길의사 유적지까지 240km를 자전거로 답사하고 왔다. 비는 연일 내리고 고장이 빈발한 악전고투의 여정을 소개한다

 

 

2017년 8월 15일 광복절에 백두산천지 라이딩을 준비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산돌 장현덕 선배가 살고 있는 중국 상주에 2018년 9월 추석연휴에 여행을 다녀왔다. 상주에서 진강까지 80km 거리를 이틀동안 왕복라이딩을 했다. 진강임시정부 유적지를 둘러보며 임시정부가 8차례에 걸쳐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상들의 눈물겹고 험난한 독립투쟁사를 보고 듣다 보니 나태한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고자, 2019년 3·1절에 상해임시정부에서 항주임시정부까지 200여km의 라이딩을 생각하게 됐다. 중국에 10년째 근무하고 있는 산돌형님께 코스설계와 대장직을 부탁했고, 나는 한국에서의 인원 모집 등 잡다한 일들을 맡기로 했다.


항주임시정부 유적지 관람
2월 28일 항주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산돌형님이 준비해둔 전세버스를 이용하여 항주임시정부로 이동했다. 동영상 시청과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관람하며 3·1운동과 그 결과로 설립된 임시정부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고, 선조들의 험난한 생활을 보고 들으며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후 송성(우리나라의 민속촌 같은 곳)으로 이동하여 송성가무쇼를 관람했다. 이번의 모든 코스는 수도 없이 가본 곳이지만 송성가무쇼 만큼은 처음 보는 것이라며 세계 3대 쇼 중의 하나라는 산돌형님의 해설이 이어진다. 엄청난 관람객, 객석까지도 무대로 활용하는 그 스케일에 입이 딱 벌어졌다. 역시 중국은 중국이다.


라이딩 시작, 고난의 시작!
3월 1일 아침, 원래 예정은 각자 자전거를 조립하여 9시에 라이딩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제 밤의 늦은 술자리로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미 산돌대장은 다른 사람의 자전거 조립을 도와주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뿔싸, 한명의 자전거에 펑크가 났다. 이미 조립을 끝낸 교우들이 도와준다. 유동희 회장은 그 자전거의 튜브를 교체해주다가 손에서 피가 난다. 그렇게 전투 같은 자전거 조립이 끝났다.
대장의 출발신호에 따라 출발하는데, 비가 쏟아진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추운데다 비까지 오니 이런 날씨에 라이딩을 하는 게 맞느냐는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얼마나 고생해서 조립을 마쳤는데…. 그냥, 출발이다!
항주시내의 이륜차도로(전기오토바이도 자전거와 같은 차선을 이용한다)를 신나게 달린다.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항주시내에서 자전거를 탄다니 흥분된다. 비가 와도 재밌다.
항주시내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린다. 번잡한 시내보다는 한적한 시골길이 좋다. 라이딩의 참맛은 이런 시골길을 달리며 자동차로 갈 때는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비가 세차진다. 춥다. 산돌대장이 누누이 강조했던 중국남방의 습냉기후란 게 이런 건가보다. 벌벌 떨면서 추위와 나약함을 몰아내고자 큰 소리로 외친다.

“100년 전엔 더 그랬어. 더 춥고 더 배고팠어.”
누군가가 독립군가를 부른다. 모두가 따라 부른다. 목 터지게 외쳐 부른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나 보다. 힘을 내서 또 달린다. 이제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바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옆에는 동지들이 있다. 100년 전에도 그렇게 느꼈겠지. 믿을 것은 동지들뿐이리라!

고난의 절정, 라이딩 중단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산돌대장님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다. 페달과 연결된 크랭크 암이 아예 빠져버린 것이다. 비와 추위에 비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산돌대장님은 비와 땀이 뒤범벅 되어가며 수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만사 즐겁다고 천진난만하게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응급조치가 끝났나보다. 출발한다.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나도 출발하려는데, 아뿔싸 내 자전거도 문제가 생겼다. 공교롭게도 내 것도 대장님과 똑 같이 크랭크 암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좀 전에 웃으면서 사진 찍은 것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인가? 
대장님이 응급조치를 끝냈다. 그러나 완벽한 정비는 아니란다. 한발로만 페달링을 하란다. 점심식사 할 곳을 찾을 때까지만…. 항주시내가 아닌 시골길이라서 식당을 찾는 것도 힘든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드디어 식당 한곳을 찾아 들어갔다. 식당에 떼지어 들어가는 우리 모습은 꼭 흙탕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일회용 우비를 입었다지만, 온몸은 젖었고 신발에도 물이 꽉 차서 걸을 때마다 “질퍼덕 질퍼덕” 소리가 난다. 게다가 귀찮아서 우비를 벗어버린 많은 동지들의 등 뒤엔 흙탕물이 흥건히 배어있다.
허겁지겁 뜨거운 국물을 들이킨다. 면은 하나도 안 먹고 국물만 들이킨다. 그것도 부족해서 국물이 많은 다른 면 종류를 또 주문한다. 그 모습이 불쌍했던지 옆의 친구가 국물을 나눠준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점심식사 후 모두가 모여서 회의를 한다. 모든 동지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대장님이 결단을 내린다. 라이딩 중단선언! 몇명은 끝까지 라이딩을 계속하자고 주장했지만, 대장님의 결정을 따른다. 조금 전까지 “100년 전에는 더 그랬어”라고 떠들던 나도 조용히 대장님의 결정을 따른다. 멀리 있는 전세버스를 부른다.
버스가 오는 시간에 몇 명은 온풍기를 켜고 그 앞에서 매미처럼 붙어있다. 몇 명은 신발을 벗어서 그 안에 휴지를 쑤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더니 식당주인 아줌마는 옆에 걸려있던 파카를 바닥에 깔아주며 양말 벗은 맨발을 녹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비스로 중국 과자도 주신다. 한 동지가 인민폐를 꺼내드리며 감사표시를 한다. 그러나 젊은 아줌마는 한사코 사양한다.
100년 전에도 그랬으리라. 중국인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나라 잃은 불쌍한 지사들을 도와줬을 100년 전 중국인민들의 모습이 저 아줌마의 얼굴에 오버랩된다. 상해 홍구공원의 윤봉길의사 의적지를 맨 마지막 일정으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 1명이 해났다.”면서 장개석 총통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지 않은가.
호텔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수향마을을 관광한 후 내일의 라이딩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우리들은 상해임시정부까지 라이딩을 완주할 수 있을 것인가?

 

첫날 자전거 조립 중에 펑크가 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상해 홍구공원

 

처녀뱃사공 주애보
저한추(저보성의 큰 아들 저봉장의 다른 이름) 군은 나에게 이런 권고를 했다.
“김 선생의 피신 방법으로, 마침 김 선생은 홀아비시니 나의 친우 중 과부로 나이가 근 서른인 중학교 교원이 있으니 보시고 합의하시면 부인으로 얻는 것이 어떠시오?"
그러나 나는 “중학교 교원이라면 즉각 나의 비밀이 탄로 날 것이니 안된다”고 하고, “차라리 배 젓는 여자와 가까이 지내며 의탁하면, 주애보가 글자를 전혀 모르니 나의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후로는 아주 배 안 생활을 계속했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가에서 자고, 낮에는 그저 땅위를 걸어다닐 뿐이었다.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고향인 가흥으로 보냈다. 그 후에도 종종 후회가 되는 것은 송별 시에 여비 100원밖에 더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나를 위해 애썼고, 나를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사이에 부부 사이 비슷했다. 나에게 끼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나중에 기회가 있을 줄 알고 돈을 넉넉히 주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백범일지> 중



3월 2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어제보다 더 세차게 내린다. 라이딩하는 중간에 비가 내리는 우중라이딩은 색다른 즐거움이지만, 라이딩 시작 전에 비가 내리면 라이딩 자체가 귀찮아진다. 하지만 비싼 돈을 들이고 없는 시간을 짜내서 중국에 왔는데 누가 라이딩을 포기하고 싶을까?
아침식사 후 로비에 모여 다시 회의를 한다. 다른 사람 눈치만 볼 뿐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산돌대장이 결단을 내린다. 오늘은 라이딩을 하지 않고 버스로 이동한단다. 그러나 3월 3일엔 라이딩을 한다고 약속한다. 상해교우회장(이종명)의 서포트카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감행한단다.
가흥 김구선생의 피난처에서 주애보와의 애틋한 사연을 떠올리며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2층에는 언제라도 피할 수 있는 비상용 탈출구와 연결된 남호가 인상 깊다. 김구선생은 저 호수에서 배를 타고 숨어지내셨겠지. 임시정부 요원들과도 저 호수 위에서 선상회의를 했다고 하지 않던가.
중국 작가 하련생이 김구와 주애보의 이야기를 소설 <선월(船月)>(1999년)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그 소설에서는 김구가 암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주애보는 가흥의 남호를 찾아서 자살한 것으로 그렸지만, 1970년대까지 생존했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중국매체와 인터뷰를 했단다.
비 맞으며 라이딩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김구선생의 피난처를 제대로 관람할 수 있었을까? 주애보와의 애틋한 사연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 페니실린 
1923년 김구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는 김신을 해산하고 몸조리를 하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 뒤 폐렴까지 겹쳐 1년 너머 고생을 하다 돌아가셨다.
17세부터 아버지 김구를 따라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김인도 중경에서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김인의 아내 안미생(안중근의 조카)은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백범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도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데 아들이라고 특별히 손을 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김인은 1945년 3월 29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진다. 아내와 큰 아들을 페니실린 주사 한방 못쓰고 저 세상으로 보낸 김구의 심정은 어땠을까? 
집 떠나면 고생이다. 여기에 도착한 3일 동안 해를 본 적이 없다. 추적추적 내리는 부슬비에 기분도 우울하다. 오늘도 비가 온다면 우리도 폐렴에 걸릴 것 같은 심정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뜬다. 다행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 이제야 라이딩다운 라이딩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상해교우회장님이 서포트카를 가지고 호텔 앞에 와 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호텔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100m 앞의 호텔입구에 집결한다.
아뿔싸, 산돌대장님의 페달 크랭크암이 또 빠졌다. 천군만마의 구원병이 있으면 뭐하랴. 순식간에 우린 대장을 잃은 오합지졸이 된다. 게다가 첫날 펑크가 나서 후송됐던 유동희 회장은 다시 타이어의 바람이 빠졌다. 백상우 동지의 자전거도 펑크가 났다. 이건 튜브리스라 방법이 없다. 부상병이 속출한다.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해 임시정부요원들을 구출하러 떠나보지도 못하게 됐다. 3일 동안 빗속을 헤매며 여기까지 온 의미가 수포로 돌아간다. 

 

3일 내내 비가 내리고 펑크와 고장이 빈발해 ‘고난의 여정’이었다

 

일행을 살린 고귀한 희생정신   
이때 이강희 동지가 외친다.
“대장님, 제 말을 타고 동지들을 지휘해 주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제발, 상해까지 진격해주십시오.” “이강희 동지, 그대의 희생정신은 후손들이 길이 기억해 줄 것이오. 고맙소. 자~ 동지들, 상해를 향해 진격합시다.” 유동희, 백상우, 이강희 동지를 후송버스에 남겨두고 우리는 전진한다.
주인의 고귀한 희생정신에 감동한 것인가? 산돌대장이 탄 이강희의 애마는 속도를 높인다. 일본군에 포위된 상해 임정요인들의 애타는 심정에 동화된 것인가? 모든 동지들을 태운 애마들이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조랑말(미니벨로)을 탄 문정란, 조국환, 권환조, 강인철 동지들도 채찍을 휘두르며 바람을 가른다.
서포트카가 안내하는 길을 달린다.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여기 농촌도 우리나라와 똑 같다. 겨울을 이겨내고 생명을 움틔우는 봄을 맞을 준비를 한 논이 보인다. 좁은 길 좌우로 늘어서 있는 커다란 가로수들이 아름답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다.
한참을 달렸을까. 휘청, 왼발이 푹 꺼지는 느낌이다. 내 자전거도 크랭크 암이 빠져나갔다. 뒤에 따라오던 강인철 동지가 나를 피하며 임기응변을 발휘한다. 위험했다. 나는 서포트카에 탑승하며 동지들을 응원한다.
서포트카에서는 주대선 작가가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른다. 이종명 상해교우회장은 길 안내를 하고 있고 후배는 연신 백미러를 보며 라이딩 속도에 맞춰 운전을 한다.
점심식사 자리에 모두가 모였다. 후송버스에서 내린 동지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김성태 전 동기회장, 조국환 86타바회장은 백상우, 이강희 동지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양보한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다. 그렇게 70여km를 달려 우리는 상해 한국인거리의 호텔에 도착했다. 와이탄의 야경(황포탄 의거지)을 관람한 후에 상해교우회 임원진들과의 만찬을 즐겼다. 


김준엽 선생의 노력 
이튿날 상해에서 유명한 홍구공원을 찾아가 윤봉길 의사가 왜적에게 폭탄을 던졌던 장소도 알아냈다. 그 자리에 지어 놓은 선물가게 주인의 말이므로 좀 더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튼 하루바삐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야만 되겠고, 또한 항주와 가흥ㆍ진강ㆍ장사ㆍ유주ㆍ기강ㆍ중경 등지에 있던 임정 청사들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에 요청하여 잘 보전해야만 될 것으로 안다.
<장정 4>(김준엽저, 나남), 한국일보 1989.1.8.


자전거를 항공 포장하여 버스에 싣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향한다. 초라하고 좁다. 화려한 걸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초라하다. 이게 나라 잃은 슬픔이겠지…. 그래도 이런 유적지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곳곳에서 한국말이 들린다. 한국 방송국에서 촬영을 왔나보다. 관람객은 한국 사람들뿐인가 보다. 한쪽 면에 기부금 낸 사람들 이름이나 단체명이 붙어있다. 고대교우회의 어떤 단체명도 있다. 타이거바이크 이름으로 100불이라도 기부할까 했더니, 이 돈이 유적지 관리하는데 쓰이지도 않는단다. 준비모임에서 얘기했던 대로 국내에 있는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단체 등에 기부하는 게 좋겠단다. 방명록에 간단한 글을 남기는 걸로 만족하자.
우리의 마지막 여정인 홍구공원으로 향한다. 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 때문에 임시정부도 대외적으로, 특히 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인정받고 독립운동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리라. 상해교우회의 정양진 교우가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고 김준엽 총장님이 상해, 중경, 항주 등 임시정부 유적지의 복원과 홍구공원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현장 기념비 및 기념 정자 등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왔던 길을 복원해 놓으셨단다. 나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단지 1987년 헌법 개헌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넣는데 공헌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여행을 하는 것이리라. 직접 보고 느끼는 지식이 삶의 지혜로 승화되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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