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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1(목포-1)-눈물의 종점, 목포는 항구다눈물의 종점, 목포는 항구다

대중가요의 골목길 1 (목포-1)
눈물의 종점, 목포는 항구다


누가 뭐래도 목포는 항구다. 부산이, 여수가 항구가 아닐 리 없지만 항구와 아귀가 딱 맞는 한 문장을 만들기엔 목포만 못하다. 노래 한 곡의 강렬한 힘, 그 정의(定意) 때문이다. 남진이 “눈물 얘긴 그만하자”고 하지만, 눈물 없이 어떻게 ‘오래된 목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목포의 노래들이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이란 삼각대 위의 견고한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락선을 타고 사랑과 함께 사라져 남이 된 님이 거나 돈 벌러 화물선을 타고 떠나간 님이거나, 항구의 님은 쓰라린 이별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눈물이 말라붙은 비릿한 항구를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저인망이 비켜 갔기에 오래된 목포는 근대사의 거리로 남을 수 있는 적산(敵産)을 지킬 수 있었다

 

목포역에서 유달산에 오르다 만나는 이난영의 벽화. 낡은 집이 지금은 없어진 이난영의 양동 생가와 닮았다(목포 목원동)

 

‘대중가요의 골목길’로 들어가며
노래의 산맥은 높고, 노래의 골짜기는 깊습니다. 여러 갈래로 분화하는 노래 속에서도 저자거리 바닥이나 삶의 일터에서 불리던 노래, 이름 하여 ‘대중가요’에 오래 발이 머물게 되는 것은 거기에 너무나 닮은 우리 삶의 일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요전문채널이 24시간도 모자라게 흥겨운 리듬을 틀고, 100년도 넘어 선 ‘한국가요사’를 새롭게 정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배경에는 그 시절의 노래를 복기하라는 이 시대의 요구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저는 트로트가 주류인 옛 노래를 ‘대중가요’, ‘전통가요’, ‘아리랑가요’ 등 어찌 부른다 해도 그 시절 우리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가요의 높은 산 깊은 골짝을 다시 되밟아 가보고 싶은 오랜 소망을 익혀 왔습니다.
‘흘러간 노래’라고 말하는 그 시절의 노래에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골드스타 금성 라디오 곁에서 익숙해진 음률이 있습니다. 경운기 운전대에 제 몸보다 더 큰 건전지를 이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고무줄로 칭칭 매달고 유행가를 따라 부르고 외우던 우리가 있습니다.
노래의 지평은 끝 간 데 없고, 노래의 파도는 끝없이 출렁거려 어디까지를 대중가요의 범주로 자를 것인가 에도 이러저러한 시각이 있습니다. 대중가요 안의 장벽 또한 절망할 정도로 견고한 ‘세대차이’입니다. 아니 ‘세대외면’에 가깝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단순한 목포의 노래가 아니다. 유달산 노래비에서 비감에 젖어 서글픈 민족사를 되돌아보며 다짐을 하는 목포 나들이의 필수코스다

 

월요일 밤 공영방송의 ‘가요무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노래와 춤이 범벅이 된 아이돌의 노래는 어지러운 율동과 난해한 부호로 다가옵니다. BTS(방탄소년단)가 미국 대중음악의 정상에까지 바짝 다가서 있고, 세계적인 열풍으로 단 한곡의 노래로도 5억뷰를 넘어 10억뷰를 내다보고 있다는 기록에 경탄을 금치 못하지만 그 음악의 보폭과 질주를 따라가기에는 관절이 삐걱거리고 숨이 가쁩니다.
엇박자가 난 호흡 앞에서 가버린 세월을 다시 확인하며 맥을 놓을 뿐입니다. 더러는 그 장벽을 넘고, 장르를 이탈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대개는 공감의 모창 정도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 본다 해도 빠져나간 허벅지 근육을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겠지요.

노래에 관한 한,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추억의 굴레에 스스로 묶이고,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서양음악이나 우리 가곡의 고고한 장벽 저편에서 커튼 사이로 대중의 노래를 훔쳐보듯 사랑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이 계시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철학이나 국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님에서부터, 의사, 기자, 성직자 등 다양한 삶의 접점에서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의 노력이 오래도록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대중의 노래를 열린 무대 앞으로 끌어내고 있어 고맙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역작을 통해 박찬호, 이동순, 이영미, 임진모, 장유정, 최규성, 손유정(실례를 무릅쓰고 존칭 생략)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먼지 묻은 레코드판을 닦아내듯 우리 대중가요를 저 바닥까지 분석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계신 헌신이 존경스럽습니다.
제목이 그러하듯, 우리 대중가요가 걸어온 ‘골목길을 서성이는 여행’을 이제 시작해볼까 합니다. 무릇 명곡의 탄생에 작사, 작곡, 가수란 삼박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가요의 무대 뒤편, 그 배경, 그 공간으로 가 보려 합니다. 일생을 바쳐 대중가요를 사랑한 분들의 노작은 저의 여행에 동행하는 교과서가 되고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이 여행은 지난 6년 간 ‘한국의 강’을 달려온 강둑길 여정처럼 몸을 달구고, 두드려가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전거생활>의 뒤편에 실릴 우리가요에 얽힌 이런저런 편안한 이야기이기에 넉넉하게 가려 합니다. 때로는 특급열차나 고속버스도 타겠지만 완행열차도, 시내버스도 타고 그 배경으로 날아가는 축지를 즐길 예정입니다. 물론 자전거는 편하게 접을 수 있는 미니벨로가 저의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다.
혹여 자료의 부실이나 제 안목의 한계로 인한 거북함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순전히 커튼 뒤에서 훔쳐보듯 혼자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저의 허약 때문이겠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팬으로서 사랑하는 나의 대중가요 편력에 독자 여러분의 명견까지 더해진다면 이런 대중가요 사랑 여행도 뜻이 있지 않겠는가 위안해 봅니다.

 

남행열차의 종점,  목포역
이제 대중가요 110년의 역사를 찾아서 떠난다. 그 길은 수많은 갈래길을 낳겠지만 목포를 첫 여정의 행선으로 정한 것은 조금도 망설임 없는 선택이다. <목포의 눈물>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목포 사람들은 이 노래를 ‘목포의 애국가’라고 부른다지만 이 노래야말로 일제의 그 잔혹한 압제를 견디게 해준 노래이자 이천만 동포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제 호남선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가면서 고단하지만 촉촉한 서정에 한번쯤 젖어보기는 틀렸다. 심야열차는 아예 없다. 서울역에서 빠른 열차를 타면 2시간 남짓, 길어봐야 4시간이면 도착하는 목포다.
서울역에서 저녁 늦게 출발하는 호남선 KTX를 탄다.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부르는 손인호의<비 내리는 호남선>과는 달리 김수희의 <남행열차>는 경쾌한 노랫말과 리듬이 몸을 들썩이게 한다. 노래방 벽면에 소위 잘 팔리는 노래 100곡에 언제나 당당히 들어있는 노래가 <남행열차>다. 김수희의 비음이 오기처럼 솟구치는 탄성과 버무려진 노래로 그녀의 대표곡 반열에 들어 있다.

일제 때 원 가사와 현재 불리고 있는 가사를 대비해놓은 <목포의 눈물> 노래비 앞에 서면 숙연해 진다(목포 유달동)
일제 때 실존 인물인 물장수 옥단이가 누비던 길은 차범석의 희곡 ‘옥단어’를 따서 옥단이길이 되었다(목포 목원동)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남행열차> 정혜경 작사, 김진룡 작곡, 김수희 노래, 1991/희레코드


착착 감기는 말맛과 같은 마디 안에 단어를 촘촘하게 넣어 불러재껴야 하는 긴박감이야말로 야구장 담장을 넘는 제1의 응원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손색이 없다. 청춘들에게 더 이상 트로트는 비감어린 노래로만 눈물에 갇히지 않는다. 1절은 호남선이, 2절은 경부선이 주인공이다.
철도에서 마저도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호남 사람들에게 호남선이 1절에 나오는 이유는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남행열차의 종점으로는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보다는 남쪽 한반도의 끝 눈물로 얼룩진 목포항이 어쩐지 더 절절하게 와 닿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남행열차>의 원조는 이난영이다.


끝없이 흔들리는 남행열차에
홍침을 베고 누워 눈물집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를 가며 가엾다 내 청춘을 누구를 주나
세상이 다 모르는 내 가슴속에
눈물을 가득 싣고 떠나가건만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버린 내 사랑
야속한 추억만이 괴롭습니다
<남행열차>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이난영 노래, 1939/오케레코드



굳이 비교해 보자면, 북행열차의 노래는 우선 제목부터 선이 굵고 비장하다. 타관천리 안개벌판, 고량(수수) 수풀 파도치는 언덕, 동서남북 지평선이 나오는 가사의 스케일이 다르다. 고향에 못살 바엔 타향이 좋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떠나가는 <울리는 만주선>(조명암/손목인/황금심)은 평안남도 순천과 평안북도(자강도) 만포진을 연결하는 <만포선 천리길>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 봉천(션양) 땅에서, 멀리는 흑룡강성 국경도시 치치하얼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랑과 청춘과 추억을 눈물로 노래하는 이난영의 <남행열차>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일제 때 관청과 금융의 거리인 만호동 일대 목포 원도심.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의 집 정원이 보인다(목포 유달동)

 

여유로운 남행 열차, 2019
6년간 연재했던 <한국의 강둑길> 여행과는 비할 바 없이 느긋하다. 우선 콤팩트하게 접을 수 있는 브롬톤을 동행으로 정했다. 강의 발원지에서부터 종착지까지 완주해야한다는 혼자만의 비장함도, 부담감도 노래와 함께 하는 이 여행에는 없다. 우리의 대중가요가 생겨난 공간적 배경과 그 노래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가는 길이니까. 조금이라도 자전거 타기가 부담스러우면 시내버스를 탈 수도 있고, 시외버스에 몸을 실으면 된다. 어쩌면 대중가요를 찾아가는 느린 여행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한밤중 목포역에 내려 가까운 찜질방에서 샤워라도 하고 눈을 잠깐 붙이고 나서, 이른 시간에 문을 여는 해장국집에서 빈속을 달래다보면 날이 밝아 온다. 새벽 어시장이 열리는 선창을 찾아 금세 바다로 돌아가도 좋을 듯싶은 생선을 구경하는 일도 좋다.


유달산이 빠진 목포의 노래는 없다
유달산은 목포의 상징이자 중심이다. 228m에 불과한 산이지만 노령산맥이 끝맺음을 하는 산줄기의 종점이다. 산경표에 따른다면 호남정맥의 한 줄기인 영산기맥의 시발지이자 종착지다.
돌산의 뼈대가 그대로 맨살을 드러내는 형국이니 금강이나 설악의 바윗돌이 떠내려 오다 큰 덩어리는 영암 월출산이 되고, 작은 덩어리가 여기 목포 바다로 빠지기 직전에 간신히 붙잡은 거라고 전설을 만든다면 허풍이 될까.
원도심에 살던 일본 사람들이나 구도심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나 목포사람들은 유달산을 바라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목포가 곧 유달산이었다. 그러자니 숱한 목포의 노래는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의 견고한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익숙한 지명이 각 소절마다 자리를 잡는 순간 목포의 노래는 완성된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고 영혼이 거쳐 가는 바닷가의 산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가 주 법정이고, 삼등바위는 북서쪽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고, 이등바위에서 대기를 하다가 극락행이 결정되면 세 마리의 학을 타고 삼학도로 간다. 아니면 고하도 용머리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거나 거북섬으로 가서 거북등에 업혀 용왕님을 알현하게 된다는 전설이 숨 쉰다.
노적봉에서 몇 계단만 오르면 세 마리의 학을 기다린다는 대학루(待鶴樓)다. 여기만 올라도 목포시내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고하도, 해남, 영암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육지가 되어버린 삼학도는 물론이다. 바쁜 관광객들이 유달산에 올라 이난영의 노래비를 찾아 3절까지 가사를 음미하는 동안 애절한 노래 <목포의 눈물>이 해무처럼 에워싼다. 일본사람들도 즐겨 불렀다는 노래, 이 시대 평양사람들도 부른다는 대단한 노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5/오케레코드



<목포의 눈물>의 노랫말은 1935년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사가 함께한 ‘10대도시 향토노래현상모집’에 응모한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이 원작이다.  3절까지 있는 가사 가운데 2절의 스타트는 일제의 눈에 거슬릴 것이 뻔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바로 임진왜란을 뜻하지 않는가. 노적봉의 유래는 이 큰 바위봉우리가 볏짚 노적가리처럼 보여 “저렇게 많은 군량미가 있다면 전투를 해도 승산이 없다”고 왜적이 물러갔다는 전설까지 안고 있으니 말이다.   ‘삼백년 원한 품은’은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이란 알쏭달쏭한 신조어로 바꾸어 경찰의 검열을 통과했고, 흥행의 귀재인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사랑’을 ‘눈물’로 고쳐 탄생했다. 노래비에 이렇게 원래의 가사와 오늘날의 가사가 함께 새겨진 것은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4분의2박자, 라단조의 약간 빠르기를 지닌 이 노래가 프로야구 해태구단의 응원가가 된 것을 보면 눈물도 응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노래의 작곡가 손목인(본명 손득렬)은 1930년에 이미 음악에 뜻을 두고 동경음악학원을 졸업한 신예였다. 1934년에 고복수의 대표곡 <타향살이>를 히트한데 이어, <목포의 눈물>까지 레코드 5만장(당시의 경제나 인구를 감안하면 일본기준으로 30만매 이상)을 팔아재낀다. 민족의 노래를 만든 진주사람 손목인과 목포사람 문일석, 이난영이 와서 본다면 여전히 아물지 못한 영·호남 지역감정의 깊은 상처를 보고 뭐라 탄식하겠는가.
이난영에 대한 이야기는 이난영생가터와 이난영공원을 둘러보면서 더 이어가기로 하고, 또 하나 목포의 노래를 불러본다. 이미자의 <유달산아 말해다오>이다.


꽃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는 처녀야
달뜨는 영산강에 노래하던 총각아
그리움을 못 잊어서 천리길을 왔건만
님들은 어데 갔나 다 어데 갔나
유달산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
옛보던 노적봉도 변함없이 잘 있고
안개 낀 삼학도에 물새들도 자는데
그리워서 보고파서 불러보는 옛 노래
님이여 들으시나
못 들으시나
영산강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
<유달산아 말해다오>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 
이미자 노래, 1967/지구레코드



어쩌면 이렇게도 <목포의 눈물> 속의 지명이 판박이처럼 그대로 등장하는가. 민족의 혼과 일제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비장미가 빠진 반면 그 자리에 잃어버린 사랑과 애절한 추억을 꼭 같은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에다 노래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봤을 목포의 노래다.

이난영이 태어난 목포 양동 그 언덕
유달산 순환도로를 따라 이난영이 태어난 곳으로 향한다. 자전거통행을 금지한다고 붙어있으나 아무도 지키지 않는 금지표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하물며 사람도 다니는 길을 자전거만 오지 말하는 횡포는 40년간을 무단히 자전거를 박대한 서울 북악스카이웨이랑 너무 닮아 있다. 하기야 그 길도 10여 년 전 필자가 못가는 근거를 대라며 끈질기게 요구한 나머지 풀린 금지다. 왜색이라는 이유로, 비탄조라는 잣대로 묶였던 ‘방송금지곡’의 해금처럼.
이난영의 생가는 유달산 순환도로에서 내려와 북교초등학교를 건너 양동 언덕 위에 있다. 생가는 헐리고 그 자리에 이난영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세모꼴 슬레이트 지붕이 철거 전 마지막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가난에 이골이 난 집이었다. 1916년에 태어난 이난영은 이옥례가 본명이고 북교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이옥순으로 남아있다. 목포시 양동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원도심과는 달리 서양선교사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어서 소녀 옥례가 유성기 소리와 서양음악의 오르간 반주에 친숙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2살 위 오빠가 이봉룡이다. 국민학교만 마치고 솜 공장 직공으로 있다가 무능한 아버지를 못 견딘 어머니를 찾아 제주로 가서 일본인 극장 주인집에서 요즘말로 베이비시터를 하며 유성기 노랫소리에 흠뻑 빠진다. 오빠 봉룡도 극장의 영사기사 조수 일을 하다가 실수로 필름에 불이 붙어 극장을 홀랑 태워먹고 육지로 도주했다. 극장을 단장한 첫 공연이 삼천리 가극단이었고, 이옥례는 거기서 막간 가수로 박수를 받으면서 극단 유랑의 길에 나선다. 그 후의 이난영 시대는 삼학도에 새로 단장한 ‘이난영 공원’에서 마저 이어가기로 한다.
삼학도가 유달산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전설에서 출발한다. 유달산에서 수련하던 청년무사를 사랑한 한 마을 세 처녀가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배를 멈추게 하려고 쏜 화살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세 마리의 학이 되어 솟아오른 처녀의 혼은 그 자리에 떨어져 삼학도 세 개의 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죽어서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맺힌 것이어서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아래에 학을 기다린다는 정자 ‘대학루(待鶴樓)’는 뜻을 알고 나면 남다르게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내려다보고 있는 노적봉. 유달산 <이자카야>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목포 목원동)
목포시 양동에 위치한 이난영 생가터. 흉상이 옛집 자리에 서있다(목포시 목원동)

 

41년 만에 돌아온 고향 목포, 삼학도 ‘이난영 공원’
삼학도로 가는 길은 평탄하다. 매립지이기 때문이다. 삼학도를 에워싸고 있는 수로를 강변이라고 대부분 적고 있지만 매립하고 남은 바다의 마지막 흔적이다.
가장 큰 대삼학도 산허리에는 이난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목포의눈물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2006년 경기도 파주 용미리에서 옮겨온 이난영이 묻혀 있다. 41년만의 귀향이자 수목장이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목포의 눈물이 다 말라버릴 정도로 쉼 없이 노래가 나온다.  노래 한 곡의 애상을 잔잔히 되새겨볼 수 있는 여백 자체가 없는 소음 수준이다. 노래 한 곡을 듣고, 좀 쉬었다가 버턴식으로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낫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불사조>까지 몇 곡을 준비하면 되는 일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난영’의 길지 않은 가수인생을 마저 돌아다본다. 삼천리 극단을 따라나선 막간가수 이옥례를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에게 소개한 것은 작사가 강사랑이다. 이난영이란 예명도 태양극장장이 붙여줬다는 설과 이철 사장이 붙여줬다는 설이 있다. 손목인 곡으로 데뷔하려다 <불사조>(김능인/문호월)로 데뷔한다. 1935년 이난영을 스타로 만들어준 <목포의 눈물>을 만나고,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오케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김해송과 연습을 하다 사랑에 빠진다. 20세에 결혼을 하고 연년생으로 9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오빠 이봉룡도 처남에게 음악을 배워 명드러머가 되고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 백년설의 <고향설>,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 같은 명곡을 작곡까지 하게 된다.
다혈질에 반골기질까지 있던 김해송은 사업 수완이 좋아 8·15 광복 직전 스카라극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약초악극단을 조직해 오케악극단의 중진 노경희(영화배우), 김진규(김보애의 남편), 이예춘(이덕화의 아버지)까지 빼내오기도 했다. 다시 KPK악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중 6·25전쟁 통에 납북되었다.
이난영은 여장부였다. KPK악단을 재건해 주한미군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의 딸들을 ‘김시스터즈’(숙자·애자, 민자는 이봉룡의 딸)로 키워 K-pop의 원조 걸그룹으로 만들어냈다. 전쟁 직후 국산영화 면세 조치로 악극이 설자리를 잃자, 미군부대 위문 전문단체로 돌파구를 찾았다.    미국으로 떠나는 딸들에게 “성공해서 나라를 빛내고 돌아와라. 안 그러면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대한의 어머니다운 당부를 했다는 벽화가 노적봉으로 올라가는 ‘옥단이길’에 그려져 있다. 이때, 미망인이나 다름없는 이난영에게 남인수는 많은 걸 챙겨주는 고마운 존재여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1962년 7월, 무더위 속에 남인수가 폐병으로 죽자, 부인 김은하보다 더 슬피 울면서 “나를 비로소 여자로 눈뜨게 해주었고, 여자로 대접해 준 사람이 남인수였다.”고 넋두리를 했다고 전한다. 그 후 김시스터즈를 따라 미국에서 살다 귀국해 술에 의지했던 이난영이 아들의 집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 1965년 4월 11일, 향년 49세였다. 한 도시에 2개의 같은 노래비가 서 있는 스타, 그가 ‘목포의 딸 이난영’이다. 고인은 말이 없으나 오래도록 말한다. 더 이상 노래 부르지 못하나 영원히 노래한다.

2006년 경기도 파주에서 이장해온 이난영 묘소. 수목장으로 조촐하다. 41년만의 귀향이다(목포 만호동)
삼학도를 둘러싸고 있는 수로는 원래 바다였던 흔적이다(목포 동명동)
대삼학도에 있는 이난영공원에 서 있는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노래 가사판 곳곳에 역대 목포시장의 실명이 새겨진 비석은 차라리 흉물스럽다(목포 만호동)

 

비릿한 선창, 다시 부르는 목포의 노래
갯내음이 후욱 에워싸는 선창가로 나온다. 이제는 수협직판장이 되어버린 공간, 째보 선창도 사라졌다. 사랑이 떠나는 항구의 노래는 여전히 눈물을 닦으며 불려진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부두
유달산 잔디밭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흘러간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 오는 선창머리 돛대를 잡고
이별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목포는 항구다> 조명암 작사/이봉룡 작곡/이난영 노래, 1942



<목포의 눈물>과 같은 간판곡을 빼고도 목포의 노래는 한참 줄을 세워야 한다. 이미자가 부른 <목포의 달밤>(반야월/고봉산), 남진이 부른 <목포의 연가>(강사랑/고봉산)와 <내 고향 목포>(정두수/박춘석), 유춘산이 부른 <안개낀 목포항>(박금호/김종택), 김광자의 <날 버린 목포항>(최치수/김성근), 조미미의 <떠나온 목포항>(감우동/김부해), 김지애의 <목포 부르스>(박춘석 작사·곡)가 떠나는 노래다.
돌아오는 목포의 노래도 있다. 문영애가 부른 <목포로 간다>(반야월/고봉산)는 1960년대 목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간 가난한 사람들이 서울살이에 지쳐 다시 돌아올 때, 품을 벌려 안아주는 따뜻한 고향을 노래했다. 조용필이 1982년 <목포항>(김갑춘 작사·곡)을 노래한 것이 1975년 발표된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곡) 이후인 것으로 보면 지역적 좌우 대칭의 구색을 갖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남진이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만든 <님 오신 목포항>(이도화 작곡) 또한 호남의 정서를 반영한 노래다.
그 밖에도 제목에 ‘목포’가 들어가는 노래를 챙기다보면 기가 질릴 정도다. <목포항 부르스>(남수련), <추억의 목포항>(김연자), <목포아가씨>(김화자), <갈매기 우는 목포항>(차은희), <눈물의 목포항>(손인호), <님없는 목포항>(방운아), <돌아온 목포항>(왕미령), <목포연락선>(조미미), <목포의 비가>(차은희), <목포의 사랑>(장세정), <목포의 소야곡>(원희옥), <목포항 뱃사공>(권해성), <목포항선술집>(신향), <목포항 아가씨>(박건), <목포항 에레지>(유인수), <목포항 처녀>(윤정), <목포항 탱고>(하춘화), <목포항 연락선>(권금자), <분홍치마 목포항>(남백송), <비오는 목포항구>(갈매기자매), <석양지는 목포항>(유성진), <울고 갈 목포항구>(김명환), <이별 많은 목포항>(남미랑), <이별의 목포항구>(서주연), <이별의 목포항>(지화자), <임 없는 목포항>(성영주), <잊을 수 없는 목포항>(박재홍), <정든 목포항>(최갑석), <하룻밤 목포항>(남일해), <황혼의 목포항>(유인수), <삼학도 갈매기>(서주연), <울며헤진 목포항>(유성진) 등이다.
찾아낸 것만 이 정도니 아마 작사·작곡자들은 제목이 겹치지 않도록 하면서 가사를 쓰는데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목포 노래만으로도 KBS ‘가요무대’ 한 달 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이제 왜 한국대중가요의 골목길 순례를 목포에서 시작하려는지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목포 수협직판장 앞 부두. 째보 선창도 그리 멀지 않다(목포 유달동)
풍어를 기원하는 만선의 기원처럼 형형색색 깃발이 펄럭인다(목포 유달동)
생선을 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고기상자가 어항 목포를 말해준다(목포 유달동)

 

오래된 목포의 흔적, 근대사문화거리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항동시장을 지나 근대사문화거리로 들어선다.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원도심은 목포의 개항과 일제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도1호선과 2호선의 옛 도로원표가 있는 곳이니 관청거리다.
오래된 목포를 한눈에 보려면 노적봉 아래 옛 일본영사관의 붉은 벽돌 건물 안에 있는 목포근대역사관1관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에 꾸며져 있는 2관에서는 나카마치(中町)와 혼마치(本町)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과 실물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줄 자료는 없다. 원도심은 관청과 금융의 중심인데다 일본인 거주지여서 팔십 줄에 들어선 목포토박이들도 어릴 때 별로 와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조선내화의 주인이었던 이훈동의 정원 부근에 있었다는 카바레와 술집, 째보 선창이 가까운 곳에는 지나가는 남정네의 소맷자락을 붙잡는 밤 부두의 야화들이 나와 있던 힛바리골목이 있었다. 광복 후에는 삼학도 앞에도 ‘삼학도 옐로하우스’라 불렸던, 다닥다닥 붙은 홍등가가 있어서 마도로스나 청년들의 젊음을 붙잡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본 엔카의 전설 미조라 히바리의 ‘미나토마치 13번지’(港町十三番地)의 정서가 그려진다.
목포근대사문화거리에는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서울말과 경상도 말씨까지 시끌벅적하다. 근자에 벌어진 이 거리의 손혜원발 소동을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끼리끼리 적산을 사 모은 것은 문제가 있지만 퇴락해가는 목포 구도심을 이렇게 온 국민에게 알린 적이 있냐고 영 싫지만은 않은 목포 토박이의 표정도 사실이다. 눈물이 말라붙은 비릿한 항구를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저인망이 비켜갔기에 오래된 목포는 근대사의 거리에 주역으로 남을 수 있는 적산(敵産)을 지킬 수 있었다.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에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2관. 사진 속 오래된 목포가 역사 밖으로 걸어 나오듯 생생하다(목포 만호동)
목포를 찾은 외지인에게 감사하다는 벽보. 전라도 토박이말이라 정겹다(목포 만호동)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근대역사거리. 손혜원의 투기소동으로 유명해져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제법 북적거린다(목포 만호동)
도심 건물 사이로 보이는 유달산의 바위가 인상적이다(목포 목원동)

 

참고자료
*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민음in, 2006
* 가수 이난영을 이야기하다, 최성환, 오마이뉴스, 2006
* 야화, 가요 60년사, 황문평, 전곡사, 1983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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