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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일본행③ 가고시마-일본 근대화 주역들의 고향구지봉 설화와 닮은 천손강림의 땅

일본 근대화 주역들의 고향 
구지봉 설화와 닮은 천손강림의 땅


오키나와를 포함한 난세이열도(南西列島)를 제외하고 4개의 큰 섬에서 최남단에 자리한 가고시마는 일본에서도 이국풍이 느껴질 정도로 멀고 외진 곳이다. 막부시대에도 이런 지리적 이점으로 막부의 통제에서 자유로워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관문이 되었다. 19세기말에는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강력한 웅번(雄藩)으로 성장해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다. 항상 연기가 피어올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사쿠라지마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침착하고 차분하기만 하다. 그런 저력으로 일본을 바꾼 것일까  

가야 건국신화와 흡사한 일본의 ‘천손강림’ 건국신화의 무대인 기리시마(霧島) 산군의 다카치호미네(高千穗峰, 1574m). 아마노사카호코(天之逆鉾)라고 하는 일본의 3대 신기(日本三奇) 중 하나인 청동창이 꽂혀 있다. 오른쪽 뒤로 기리시마 최고봉인 가라구니다케(韓國岳, 1700m)가 구름에 머리를 가리고 있고, 그 바로 전방 왼쪽의 둔중한 잿빛 봉우리는 2018년 3월 분화한 신모에다케(사진은 분화 전인 2017년 11월 촬영)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아득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지명이 있기 마련이다. 엘도라도, 샹그릴라, 무릉도원 등은 현실에 있을 것만 같은 이상향이다. 현실에 있는 실제 지명도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내게 그런 곳은 몽산포, 비인, 가파도 같은 곳들이다. 가고시마(鹿兒島)는 많은 일본인에게 그런 동경의 대상이 되는 현실의 지명이자, 내게도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이다.
‘가고시마’라는 지명의 발음부터 그렇다. 의미는 완전히 다르지만 발성하거나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가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친다.

내게도 가고시마는 특별히 매력적인 곳이다. 무엇보다 겨울에 온화한 남국의 이미지가 강하고 오늘의 ‘대국 일본’을 만든 메이지유신의 걸출한 영웅들의 고향이라는 점은 가고시마를 실로 괄목상대하게 만든다.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이는 고대 일본의 건국신화 무대가 된 곳도 여기다. 
중심도시인 가고시마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 지척에서 연기를 뿜어대는데도 위협적이거나 살벌함은 찾아볼 수 없고 차분하면서도 안온한 느낌을 준다. 활화산을 낀 휴양도시라는 개념이 성립 가능한 것일까. 진도 4~5의 지진만 나도 발길이 끊기는 호들갑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가고시마의 매력 그리고 일본 전토를 진정한 근대로 이끈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입대 앞둔 아들과의 동행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이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길래 같이 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여행 방식이 너무나 달라 현지에 도착해서는 각자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아들은 노인(?)처럼 온천이나 하며 한 곳에서 조용히 쉬고 싶어 하고, 나는 여기저기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 하니 각자도생도 방법이다. 호텔은 아들이 예약하고 항공료는 내가 댔다. 아들은 워낙 독립심이 강해 대학 진학 이후에는 아르바이트로 용돈과 여행 경비를 벌어 썼고 등록금 외에는 부모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 현지 경비도 내가 두 끼를 사면 아들이 한 끼를 사는 식이었다. 한편 기특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비의 무능을 아들이 너무 일찍 간파한 것 같기도 해서 머쓱한 마음도 없지 않다.
항공편이 여의치 않아 후쿠오카로 가서 신칸센을 타고 가고시마로 넘어간다. 후쿠오카(하카타역)~가고시마 간 신칸센 요금이 근 1만엔이나 되어 17만원 정도 하는 5일짜리 전큐슈레일패스를 끊었다. 왕복만 해도 비용이 절약되고, 다른 열차편도 이용할 수 있어 훨씬 유리하다.
하카타역을 출발한 사쿠라 호는 시속 250km 전후의 고속으로 남하해 1시간20분만에 규슈를 종단, 가고시마중앙역에 도착했다. 11월초의 늦가을인데도 바깥 공기는 온화하다. 도로 한가운데를 딸랑딸랑 대며 느릿느릿 달리는 노면전차는 인구 60만 도시를 차분한 소도시로 중화시켜 준다. 평일인데도 일본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역과 시내 중심가는 매우 붐빈다. 가고시마는 언제나 봄일 것 같다.

가고시마 시내 남쪽에 솟은 시로야마(城山, 107m) 정상에서 바라본 가고시마 시가지와 연기를 내뿜는 사쿠라지마(1117m). 상시 분화하는 활화산을 지척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놀랍다

 

최후의 사무라이 
가고시마가 내세우는 대표적 아이콘 두 가지를 들라면, 자연물은 단연 연기를 풀풀 내뿜으며 지구가 살아 있음을 맹렬히 알리는 사쿠라지마(櫻島, 1117m) 화산이고, 인물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이다. 사쿠라지마는 가고시마 시내에서 해협 건너편으로 10km 정도 거리여서 어디서든 잘 보인다. 그에 못지않게 사이고 다카모리도 시내 곳곳에서 동상과 유적, 상징물, 캐리커처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인물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은 세계사적으로 대격동의 시기였다. 서구는 산업혁명으로 일궈낸 부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나머지 세계를 정복하는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미개한 다른 지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때는 서구와 쌍벽을 이루며 세계사를 이끌어온 동아시아도 폐습과 쇄국의 무게에 짓눌려 수백년 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미망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동양문화의 구심점이던 중국조차 서구 열강의 제물이 되어갔으니 나머지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청)이 진짜로 세계의 중심으로 믿고 의지해온 조선은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 제정신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19세기 조선의 면면은 너무나 한심하고 치욕스러워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렵다.  
그런데 유일하게 일본만은 중국마저 열강의 먹이가 되는 걸 보고 절치부심, 국력을 길러 식민지 후보에서 오히려 식민지를 개척하는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낸다. 칭기즈칸의 유럽 침공 후 서구인들이 700년 만에 다시 경악한 이 황인종의 세계사적 발흥을 이끈 주역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군부가 통치하던 막부시대를 종결짓고 천황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어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을 이끈 3명의 ‘유신 3걸’이 있는데 사이고는 그 중 한 사람이면서 실질적으로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나머지 둘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키도 다카요시(木戶孝允)로, 오쿠보도 같은 가고시마 출신이면서 사이고와는 어릴 때부터 절친이었다.
역사적 격동기는 온갖 야망과 욕망, 이권이 충돌하고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그 속에 말려든 ‘문제적’ 인물은 목숨을 걸지 않으며 안 된다.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격동기에 풍운아로 일세를 풍미했던 사이고는 일본 특유의 무사정신을 마지막까지 구현했고 그 역사적 무게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마침내는 생명까지 바쳤다. 사이고의 일생은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근대 일본이 태동하는 대전환기를 그대로 말해준다. 2003년 개봉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도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런 사이고가 태어나 성장하고 최후를 마친 곳이 바로 가고시마다. 
 

일본적 영웅의 일대기 
가고시마 시내 뒤편에는 시로야마(城山)가 나지막이 솟아 있다. 이름 그대로 성채가 남아 있는 산으로 해발 107m의 정상에는 시내와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나는 여장을 풀자마자 먼저 시로야마 전망대로 향했다. 어서 빨리 연기를 뿜는 사쿠라지마를 대면하고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저 산에서 최후를 마친 사이고 다카모리의 흔적도 궁금했다.
막부 시대에 가고시마는 ‘사쓰마(薩摩)’로 불렸다. 전국적으로 규모와 세력이 큰 웅번(雄藩,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을 번이라 했음) 중의 하나이며 막부의 중심지 에도(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최남단의 지리적 이점으로 서구 문물의 도입에도 유리해 힘을 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를 따르는 영주들과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결전이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여기서 사쓰마 번은 도요토미 측인 서군에 가담하는데 전투에서 패하면서 도쿠가와 시대 내내 박해와 견제를 받게 된다. 당연히 사쓰마 번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반감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사쓰마와 함께 앞장 선 죠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 현)도 같은 입장이었다. 세키가하라의 여파는 그렇게 오래 갔던 것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근대적 함선을 이끌고 도쿄만에 나타난 이후 일본은 열강의 힘과 위협을 실감하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1840년 아시아를 호령하는 강국이라고 믿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겨우 4천명의 영국군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악과 공포의 시선으로 지켜보았던 터다. 이제는 일본 차례라는 것을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전율로 실감하게 된다.
이후 일본 전역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국가를 쇄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막부체제로는 희망이 없다는 데 많은 지사들이 뜻을 같이 한다. 명예직으로 물러나 있던 천황을 실질적인 나라의 중심으로 세우고(왕정복고) 서구처럼 근대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갖춰야 제국주의 패권전쟁에서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막부시대는 전국적으로 200여개나 되는 번(蕃)이 거의 독립국가처럼 각자도생하는 분열상태였다. 당시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이라는 통일국가의 일원이 아니라 번의 국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외교적으로만 유의미한 추상개념일 뿐이었다.  
이 격동기에 수많은 지사와 풍운아가 활약하는데, 세력이 강한 웅번이 연합해서 막부를 타도하자는 흐름이 형성된다. 이때 웅번이던 사쓰마 출신으로 교토와 도쿄에서 활약한 것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사이고는 당시 일본인으로는 매우 큰 체격인 신장 178cm에 110kg 정도의 거구에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 송충이가 꿈틀대듯 짙은 눈썹의 독특한 풍모로 주위를 압도했다.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지략과 모략, 권모술수의 대가였던 그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중재로 대표적인 웅번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던 죠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와 삿초(薩長)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의 주역이 된다. 막부 정벌군의 참모로 도쿄로 출정한 그는 협상을 통해 무혈입성에 성공한다. 마지막 쇼군이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평화로운 정권이양를 결단한 덕분에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 역시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받아 천수를 누렸다.
기실 요시노부는 원래 의지박약에다 야심이 없었는데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세불리를 절감하고 명예퇴진을 결심한 것이었다. 협상 과정에서는 요시노부 앞대의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이었던 아츠히메(篤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사이고가 속한 사쓰마번 영주인 시마즈(島津) 가문 출신이어서 사이고는 막부가 끝난 뒤에도 최대한 도쿠가와 가문의 보존에 협력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무혈입성으로 사이고는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가고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근대 일본을 만든 주역으로 일본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역사 인물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뒤편 언덕이 그가 최후를 마친 시로야마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이 세운 메이지정부에 반대하며 일으킨 세이난전쟁에서 끝내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처음부터 승리할 희망이 없다고 믿었을 그는 관군에 패하자 시로야마 기슭의 이 동굴에서 최후를 맞는다
가고시마 역전에 있는 ‘젊은 사쓰마(와카키 사쓰마)의 군상.’ 1863년 유럽으로 파견되어 특히 영국에서 2년간 선진문물을 배워와 사쓰마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17명 젊은이의 동상이다. 당시 막부의 해외여행 금지조치를 어기고 독자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만큼 사쓰마는 독립심과 반막부 의식, 경제력이 막강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던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유신 이후 신정부를 장악해 개혁을 이끌었지만 사이고와 반목하는 적대관계가 된다. 세이난전쟁으로 사이고가 죽자, 그 자신도 이듬해 암살되고 만다.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지만 지금은 사이고의 인기와 평판이 더 높다
사이고 다카모리 생가 터 근처에 있는 유신의 고향관(유신후루사토관)에 있는 실물 크기의 사이고 상. 관광객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조선침략(정한론)을 주장  
사이고는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후 메이지유신을 거쳐 유럽의 입헌군주제를 본 따 성립한 근대적인 유신정권에도 참여했다. 1871년에는 당시 정권의 수반이자 같은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순방에 나서자 정부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징병제, 학교제도 등의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후에는 참의(장관급) 겸 육군원수가 되어 군권을 장악했다. 근대적 일본으로 거듭나는 급진개혁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무라이 정신을 대변해온 그에게 메이지유신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갑작스런 개혁으로 위상이 격하되고 일자리도 잃은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그에게로 쏟아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무라이였던 그 역시 실의와 분노에 찬 기존 사무라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1873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 진척되지 않자 그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게 된다. 국제전이 터지면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릴 수 있고 사무라이를 위한 새로운 역할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모략과 협상의 대가였던 그는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조선과도 협상으로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조선으로의 대사 파견을 자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격론 끝에 정한론이 무산되자 메이지정부 인사들과 불화 끝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한다. 


영웅에서 반란의 수괴로  
가고시마에서 학교를 열고 사무라이를 양성하던 그는 자의반타의반으로 메이지정부에 반대하는 사무라이의 구심점이 되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급진개혁이란 역사적 변곡점에 올라탄 한 인간으로서 사이고는 그 엄청난 급류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이미 전통 사무라이들의 상징이 된 그는 은둔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일본 최후의 내전이라는 세이난전쟁(西南戰爭, 1877)으로 신정부의 개혁정책에 반감을 가진 지방 사무라이들이 사이고를 옹립하고 일으킨, 전통 사무라이 최후의 절규였다. 폐도령(廢刀令)으로 목숨과 같은 칼을 풀어야 했고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던 녹봉도 폐지되어 생계마저 막막해지자 사무라이 사이에는 신정부에 대한 반감이 끓어올랐다. 마침 이때 사비로 학교를 열어 사무라이를 교육하던 사이고는 자연스럽게 몰려든 사무라이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이고의 학교 재학생은 최대 2만명에 달해 정부도 불안하게 지켜보던 참이었다.  
사이고가 자신이 몸담았던 정권에 대항해 진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사무라이들의 거센 불만에 얹혀 어쩔 수 없이 앞장을 서게 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오쿠보 도시미치의 지시로 가고시마현 무기고의 탄약을 오사카로 대량 반출한 사건이다. 이때 사이고의 암살계획도 알려졌는데 사실이든 아니든 격분한 사무라이들이 무장반란으로 치달은 기세는 사이고도 막을 수 없었다. 명예와 생계까지 잃은 사무라이들로서는 그냥 앉아서 개혁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치로 느껴졌을 것이다.    
사이고의 반군은 1만5천의 군세로 구마모토 일원을 석권하며 초기에는 기세를 올렸지만 큐슈 북부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10만이 동원된 토벌군에 밀려 마지막에는 가고시마의 시로야마에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군세와 화력에서 열세였던 반군은 결국 대패하고 사이고는 생포되어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한다. 메이지정부의 주역에서 반란의 수괴로 천양지차의 변신을 오간, 실로 파란만장한 50년 생애였다. 


최남단에서 만나는 메이지유신 
황혼이 지는 시로야마 전망대는 한산했다. 낮은 산이지만 바다쪽으로는 절벽을 이뤄 조망이 탁 트여 잿빛 분연이 솟는 사쿠라지마의 원추형 산체가 선명하다. 발밑으로는 가고시마 시가지가 인구 60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다. 산에는 푸른 상록수림이 울창해 아열대 분위기가 물씬하고, 언제나 연기가 피어올라 지구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쿠라지마는 이 남국의 도시에 특별한 기운을 더해준다.
정상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800여m 내려가면 사이고가 최후를 마친 동굴이 있다. 이곳에 최후 사령부를 둔 사이고는 마지막까지 남은 300여 사무라이와 항전하다 유탄에 허리를 맞고 쓰러진다. 치명상을 입은 그는 총상으로 절명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겨 측근의 카이샤쿠(介錯, 할복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는 역할)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7개월간의 내전도 막을 내리고 마침내 일본은 하나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사이고는 세이난전쟁 직후에는 반역자로 치부되었지만 곧 명예를 회복했고, 사무라이 정신을 최후까지 지킨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정한론을 주장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탐탁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먼저 평화적 교섭을 위해 조선에 대사로 파견되기를 자청한 점에서, 정말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전쟁을 피하려고 천부적인 협상 능력을 발휘하려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로야마 아래에는 높이 8m의 사이고 동상이 태평양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다. 한때는 뜻을 같이 하는 동향의 동지로 메이지유신을 일궈낸 오쿠보 도시미치도 가고시마의 자랑이기도 한데, 세이난전쟁 때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된다. 오쿠보의 동상은 시로야마에서 좀 떨어진 가고시마추오역 고쓰키 강변에 비슷한 규모로 서 있다. 세이난전쟁을 평정하면서 압도적인 권력을 다진 오쿠보였지만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 편에 참전했던 사무라이 일당에게 전쟁 1년 뒤 암살당하고 만다.
사이고가 영웅시되면서 반대로 오쿠보는 격하된 측면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유신정부를 이끌면서 개혁을 시행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를 ‘근대 일본의 설계자’로 추앙하는 시각도 있다. 이 격동기에 가고시마 출신의 두 영웅적 인물은 결국 생명을 바쳐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갔지만 그들의 족적은 근대 일본을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 

 

일본 최남단 철도역 니시오야마(西大山) 역은 가고시마 시내에서 열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바로 뒤에 ‘가고시마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가이몬(開聞) 산(924m)이 완벽한 원추형으로 하늘을 찌른다. 최남단 역이라는데 끌려 일부러 가보았다
일본 건국신화의 전설이 어린 기리시마 신궁. 천황가의 선조가 되는 니니기노 미코토가 하늘에서 기리시마의 다카치호미네로 내려왔다고 한다. 김수로왕 신화와 매우 흡사해서 가야계 도래인의 건국설로 추정된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幕末) 대격동기에 활약하며 사쓰마와 죠슈 두 웅번의 ‘삿쵸동맹’을 중재하며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을 닦은 또 한 사람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그는 일본 최초로 가고시마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기리시마 신궁 앞에 료마와 그의 아내 오료(お龍)의 신혼여행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2000년 전 기리시마에 왔던 도래인 
다음날은 일본 건국신화의 무대가 된 기리시마(霧島)와 사쿠라지마로 향한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렌트카를 빌렸다. 기리시마는 교통이 불편해 하루에 두 곳을 다 볼 수 있는 방법은 렌트카뿐이다. 아들은 따로 시간을 보내다 오후에 사쿠라지마 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고시마에서 사쿠라지마 사이에는 카페리가 수시로 다닌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규슈자동차도로(고속도로)를 타고 동진한다. 일본에서 여러번 운전을 해봤지만 통행방향이 달라 긴장을 멈출 수 없다. 머릿속으로 ‘왼쪽 통행, 우회전 조심’을 되뇌면서 계속 자기암시를 거는 것이 가장 빠른 적응 방법이다. 소형 승용차를 빌렸는데도 운전석이 오른쪽이니 차폭 감각도 다르고 후진도 쉽지 않지만 1시간 정도 이렇게 자기암시를 걸어가며 집중하다보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다행히 일본인 운전자들은 법규를 철저히 지켜서 나도 법규대로만 하면 편안하고 안전하다.
가고시마 시내에서 동쪽으로 60km 가량 떨어진 기리시마에 굳이 가는 이유는 일본 건국신화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나 가야의 김수로왕 신화와 유사한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는 712년 간행된 일본 최초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 전하는데, 복잡한 이름의 신들이 여러명 등장한다. 일본 천황은 이들 신의 자손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신격화되고 있다. 


이해를 위해 복잡한 신화 내용을 간추려 본다.
아득한 옛날 하늘에서 혼돈의 바다를 내려다보던 세 신령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남신 ‘이자나기’와 여신 ‘이자나미’를 만들었다. 이자나기가 신령에게서 받은 마법의 창을 혼돈의 바다에 넣었다 꺼낸 창끝에 묻은 물방울이 떨어져 일본열도가 만들어졌다. 이자나기는 이자나미와 결혼해 혼슈와 시코쿠, 규슈 등의 다른 섬을 낳았고, 이자나미는 불의 신을 낳다가 불에 타 죽는다. 이자나기는 이자나미를 그리워하며 황천까지 쫓아가 이자나미를 만나 데리고 나오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황천국 신의 지시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자, 이자나미는 천둥의 신으로 변했다가 죽음의 신이 되고, 이자나기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신이 된다.  
이자나기는 죽음의 나라에서 돌아온 부정한 몸을 씻기 위해 목욕을 했다. 왼쪽 눈을 씻을 때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오른쪽 눈을 씻을 때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신이, 코를 씻을 때는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라는 바다의 남신이 생겨났다(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숭배받는데 일본 최고의 신사인 이세신궁에 모셔진 주신이기도 하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손자인 니니기노 미코토(瓊瓊杵尊)가 황실의 3대 보물이라는 옥과 거울, 검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여러 신을 낳았고, 그의 증손자가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
초대 진무천황의 증조가 되는 니니기노 미코토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바로 기리시마의 다카치호미네(高千穗峰, 1574m)라고 전해온다. 그런데 이 다카치호미네는 ‘구시후루봉’으로 기록되어 있어 가야 김수로왕이 탄강했다는 김해 구지봉과 유사해 주목된다. 니니기노 미코토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9명의 신하가 맞았다는 것도 김수로왕 신화와 비슷하다. 기리시마의 최고봉은 기이하게도 ‘가라쿠니다케’라고 읽는 한국악(韓國岳, 1700m)이다. 이런 정황만 보아도 일본의 건국신화와 가야 혹은 한반도 고대사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카치호미네 정상에는 청동창이 거꾸로 박혀 있는데 이것을 뽑아내는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 전한다. 영국 아더왕의 전설에 얽힌 엑스칼리버와 비슷하다. 메이지유신 3걸에는 들지 못하지만 삿초동맹을 이끌어낸 시대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을 가고시마로 와서 다카치호미네를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청동검이 언제부터 꽂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근세에 누가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에도 여러번 올라봤듯이 나는 이 다카치호미네에 올라 청동검을 보고 싶었다. 

 

다카치호미네로 진입하는 해발
정상 옆에 마련된 작은 대피소에 전시된 신문기사. 사카모토 료마가 신혼여행을 왔다가 다카치호미네를 올랐다는 내용이다. ‘료마도 반한 아름다운 산용’이라는 제목 아래 료마가 다카치호미네와 청동창을 묘사한 그림 등을 누나 오토메(乙女)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가고시마~사쿠라지마 간 페리에서 바라본 기리시마 연봉. 왼쪽이 최고봉인 가라구니다케, 맨오른쪽이 다카치호미네
사쿠라지마 서쪽 중턱 해발 373m의 유노히라 전망대에서 바라본 활화산 사쿠라지마의 위용. 울릉도처럼 전형적인 종상화산 형태다. 왼쪽이 정상인 온다케(기타다케), 오른쪽 분연을 내뿜는 봉은 미나미다케(미나미다케). 해발 500m 이상은 짙은 화산재로 뒤덮인 불모지대다
사쿠라지마에서 가고시마로 돌아오는 밤배. 배는 20분 정도 간격으로 수시로 있다. 15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선상에서 사쿠라지마와 가고시마 시내, 기리시마 산군을 모두 볼 수 있다

 

살아있는 활화산   
기리사마는 거대한 산군으로 1934년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대부분이 화산인 20여개의 봉우리가 밀집해 있다. 그중 활화산인 신모에다케(新燃岳, 1421m)는 2011년 1월 300년만에 폭발한데 이어 2018년 3월에도 분화해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다카치호미네는 신모에다케 바로 옆에 있어서 활화산을 지척에서 보는 스릴도 만끽할 수 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우리로 치면 단군이나 김수로왕에 해당하는 니니기노 미코토를 모시는 기리시마신궁을 찾았다. 다카치호미네 남서쪽 해발 460m 지점의 울창한 삼나무 숲속에 있는 신궁(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신 신사는 神宮으로 불린다)은 수령 700년이 넘는 거대한 삼나무 고목이 신령스러움을 더해준다. 원래는 다카치호미네 정상 바로 아래 해발 1410m 지점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평일인데도 참배객들이 적지 않다. 6세기에 처음 창건되었고 소실과 재건을 거듭했다는데 니니기노 미코토의 실체는 과연 누구였을까. 유적과 기록, 전설을 종합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가야계 도래인 정복자일 가능성이 높다. 규슈에 초기 국가를 형성했다가 혼슈 깊숙이 들어간 오사카와 나라 일대의 키나이(畿內) 지역에서 성립한 야마토 정권으로 계통을 같이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에 도래인이 주축이 된 권력집단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리시마의 전설로 보면 가야계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 신성한 산에도 정상 턱밑의 해발 960m까지 도로를 내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놓았다. 이렇게 케이블카나 산악도로를 만들어 쉽고 편하게 산을 찾을 수 있는 일본의 산들은 올 때마다 부럽다. 기리시마 신궁에서 다카치호미네 등산로 입구인 다카치호미네 카와하라까지 산악도로는 늦가을 평일이어서인지 낙엽이 길을 뒤덮었고 오가는 이 없이 텅 비었다.
활화산지대인 만큼 만약을 대비해 비지터센터에 입산시간과 이름, 연락처를 남기고 등산스틱을 100엔에 빌렸다. 아무리 평일이라도 우리에게는 백두산과 비슷한 이 일본인의 성산(聖山)이 무인지경일 줄이야. 폭발 위험이 높고 등반이 힘들어 일반 관광객은 기리시마 신궁만 보고 돌아서는 것 같다. 
해발 1150m 지점에서 숲이 끝나고 급경사의 화산지대가 나타난다. 자갈보다 작은 화산쇄석으로 뒤덮여 발이 푹푹 빠지니 걷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대신 나무 하나 없고 골짜기도 없이 반듯한 산록에 하나의 점으로 섰으니 조망이 탁 트이고 고공에 떠 있는 듯 고도감이 대단하다.
맞은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신모에다케가 보인다. 그 뒤로 주봉인 가라쿠니다케가 구름속에 머리를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가까이서 본 신모에다케는 사쿠라지마처럼 기약 없이 그냥 연기만 내뿜는 것이 아니라 산체가 부풀어있어 언제라도 폭발할 기세다. 때문에 신모에다케 인근의 등산로는 모두 폐쇄되었다. 내가 방문한 것이 2017년 11월초였고 이듬해 3월에 폭발했으니 겨우 4개월 차이다. 아소산도 내가 등정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했는데 무슨 화산폭발 유발자라도 된 것 같다.          
한라산처럼 해변에서 천천히 솟아올라 마지막에 가파른 종상화산을 이룬 산체는 위용이 대단하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찌르며 날카롭게 솟은 봉우리에서 연기가 오르는 모습에 분명 경외감을 가지고 숭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산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가라쿠니다케지만 육안으로 보기에 뾰족한 첨봉을 이룬 다카치호미네가 신화의 무대로 더 걸맞아 보였을 것이다.
동그란 주발처럼 생긴 미하치(御鉢) 분화구 외륜봉을 돌아 다카치호미네 주봉으로 올라붙는다. 그릇을 높여 부르는 미하치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분화구가 니니기노 미코토가 사용한 그릇 혹은 그를 제사지낼 때 받드는 그릇으로 간주한 모양이다.
미하치와 다카치호미네 안부 즈음에 옛날 처음 세워졌던 기리시마 신궁 흔적이 작은 비석과 돌 도리이로 남아 있다. 이제부터 정상까지는 화산재로 뒤덮여 발이 더 빠지고 경사도 급해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드디어 해발 1574m, 다카치호미네 정상이다. 과연, 꼭대기에는 돌무덤 가운데 세 갈래 청동창이 박혀 있다. 먼저 온 등산객 한명이 서성이고 있을 뿐 정상에는 거센 바람밖에 없다.
청동창은 얼른 봐도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거꾸로 꽂힌 창이라고 해서 아마노사카호코(天之逆鉾)라고 하는데 일본의 3대 신기(日本三奇)의 하나다. 나머지 둘은 효고현 타카스나시에 있는 오시코(生石) 신사에서 모시는 거대한 석조물과 미야기현 시오가마(鹽竈) 신사의 솥(나라의 큰일을 미리 알려준다고 함)이다.
청동창은 공식적으로는 타카치호미네 동쪽에 자리한 기리시마히가시(霧島東) 신사가 모시는 신주다.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떠도는 설은 있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천손강림의 성산인 이곳에 창을 세웠지만 화산폭발로 부러져 버리자 공포를 느낀 주민들이 땅에 묻힌 손잡이는 그대로 두고 칼날 부분을 지역 영주인 시마즈(島津) 가에 헌상하고 복제품을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꽂아두었다고 한다. 칼날 부분은 그 후 행방불명되었다지만 진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천황가의 신사인 이세신궁에 있다고도 한다. 이 설이 맞다고 해도 겨우 수백년 정도 되었다는 얘기다.
세 개의 칼날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드러난 부분은 1m 정도일까. 칼날 아래 손잡이 부분에는 코가 매우 뾰족한 귀면(鬼面)이 양면으로 양각되어 있다. 실전을 위한 창이 아니라 칠지도처럼 의례용으로 만든 상징물이 분명하다.           
남쪽으로는 가고시마만(정확히는 긴코만)이 거대한 만곡을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쿠라지마가 아득하다. 가고시마만의 북단인 긴코만은 사쿠라지마에 거의 갇혀 있는데 오랜 옛날에는 바다와 분리되어 사쿠라지마와 기리시마 사이에 패인 일종의 칼데라(화구호)였다고 한다. 
한참을 머물다 하산하는 길에 60대 중반의 일본인과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은퇴해서 기리시마 근처에 산다는 그는 한국인으로 혼자 올라온 내가 뜻밖이라는 눈치다. 기리시마에 얽힌 깊은 얘기는 잘 모르는 듯했다. 

 

직전에서 바라본 구름 낀 다카치호미네. 날카로운 첨봉으로 솟았고 산록은 화산폭발의 잔해로 온통 헐벗었다. 오른쪽 안부 위쪽에 보이는 도리이는 540년 킨메이(欽明) 천황 때 최초로 세워진 원래의 기리시마 신궁이 있던 자리다
다카치호미네 정상에서 바라본 기리시마 주능선. 분연을 뿜어내는 신모에다케 뒤로 한국악, 즉 가라구니다케가 구름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김수로왕 설화와 흡사한 천손강림 신화 내용과 한국(韓國)이라는 산 이름에서부터 뭔가 한반도와의 밀접한 연결고리가 강하게 느껴진다

 

활화산 밑에서도 태연한 사람들 
일본은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땅이 넓고 지형이 복잡하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거리를 파악하고 이동시간을 예측하면 대개는 예상보다 더 걸린다.            
기리시마를 벗어나 가고시마만을 돌아서 다시 거의 섬처럼 잘록한 목으로 연륙된 사쿠라지마를 일주한다. 사쿠라지마 항에 도착하니 페리를 타고 먼저 와있던 아들은 1시간 넘게 기다렸다며 툴툴댄다.
사쿠라지마의 서쪽 기슭, 해발 373m의 유노히라전망대에 오르면 정상인 온다케(1117m)가 한층 가까이 보인다. 바다 건너 가고시마 시내도 훤해서 야경의 명소이기도 하다. 대략 해발 500m 등고선이 수목한계선으로 그 이상은 화산재와 황토가 생채기처럼 드러난 불모지대다. 연기는 온다케 뒤편의 나카다케(1060m) 쪽 분화구에서 피어오르고 종상화산으로 급경사를 이룬 정상부는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위태롭다. 사실 화산이 지천인 일본에서 사쿠라지마는 활화산이란 점에서 특이하지만 그것도 드문 것은 아니다. 내게 놀라운 것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폭발만을 기다리는 거대 용암덩이를 머리맡에 두고도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쿠라지마를 일주하면서 보이는 풍경은 화산재에 뒤덮인 풍경과 잿빛 마을, 용암 해변뿐이다. 휴화산을 안고 있는 제주도는 한라산부터 지극히 완만하고 정상 직전까지 수림이 짙어서 생동감과 함께 평화롭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면, 사쿠라지마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산체가 간신히 요동을 견디고 있는 것만 같다. 화산재가 날려도 개의치 않고 웬만한 폭발이 일어나도 무신경 하게 지내는 주민들의 일상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화산재는 건강에 해롭지 않고 대폭발이 일어날 때는 사전에 징후가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 불덩이 위에서 편한 잠을 잘 수는 없을 것 같다. 가고시마 시내도 지척이니 2천년 전 대폭발을 빚은 이탈리아 베수비오산(1281m)과 폼페이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      
한순간에 생명과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살아가는 가고시마 사람들은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작은 화산 폭발을 매일 보고 사는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대자연의 분노 앞에 겸손하고 숙연하면서도 때로는 대폭발처럼 좌고우면 않고 떨쳐 일어나는 기개랄까.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옛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이 그런 기질을 극단의 형태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돌무지 위에 청동창이 꽂혀 있는 다카치호미네 정상. 청동창은 공식적으로는 타카치호미네 동쪽에 자리한 기리시마히가시(霧島東) 신사가 모시는 신주다. 안내판이 방금 올라온 다카치호가와하라 방면과 기리시마히기사 신사 방면을 가르키고 있다. 일본인들로서는 가장 신성시하는 장소일텐데 생각보다 주변이 정리되지 않았고 각종 안내문과 시설로 어수선하다. 강풍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발 1574m의 높은 산꼭대기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사쿠라지마 남쪽 아리무라 용암전망대에서 본 미나미다케의 분연. 눈으로는 연기처럼 솟구치는 분연이, 손끝과 코끝에는 대기 속의 매캐한 화산재가 느껴질 정도여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을 실감한다. 저런 산 아래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가고시마 사람들은 사생관과 기질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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