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TRAVEL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4편서양의 세계 제패, 그 서막을 연 대항해시대의 영웅들

포르투갈 공화국(Republica Portuguesa) 제4편
서양의 세계 제패, 그 서막을 연 대항해시대의 영웅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진입한다. 오랫동안 화두처럼 내 호기심을 자극한 의문, 서양은 왜 언제 동양을 추월하고 세계를 석권하게 되었는가 하는 해답을 여기서 찾는다. 엔히크, 바스쿠 다 가마, 마젤란,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등. 향신료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 미지의 바다를 건너간 모험가들 덕분에 포르투갈은 국부를 일궜고 덩달아 서구세계는 지구를 안방처럼 누비며 문명사의 구심점이 된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박해당한 노예와 식민지 사람들의 고통에는 무감각했으니…

역사지구(歷史地區)는 자전거로 돌아볼 것을 강추한다
상 조루지(Sao Jorge) 성터에서 내려 본 리스본 시가지. 테주 강은 흘러 곧 망망한 대서양에 안긴다

 

리스본은 이번 여행의 종착지이다. 이베리아 반도 기행을 위해 서울을 떠난 지 근 두 달이 되어간다.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스페인 중부, 남부, 지중해 연안을 무엇에 홀린 듯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스케줄 상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덕분에 800년 무어인의 지배 흔적을 충분히 체감했다.
나는 평소 일본에게 ‘35년 종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죽음처럼 떠올리기 싫을 때도 있지만, 스페니쉬나 포르투기들은 ‘무어인 강점’에 대해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랜 세월이어서 일종의 동화(同化) 현상일까. 오히려 그들의 잔재로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인상을 받았다.

내 여행 체력의 분기점은 한 달 보름 정도다. 이 기간을 넘으면 몸은 물론 ‘애마’ 도 볼멘소리를 낸다. 아프리카와 가까운 안달루시아 지방의 뜨거운 태양 아래 하루 100km씩 전진했던 것이 무리였나 보다. 그래도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뺄 수 없어, 북부로 올라가 빌바오를 시작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자의 심정으로 페달을 밟았다. 여기서 여행을 끝내야 시간적 통례인데….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포르투갈 국경이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경계를 넘으니 유럽에 숨겨진 보석 같은 도시 포르투(Porto)였다. 여기서 시작한 포르투갈 여정의 목표는 리스본―내겐 오래전부터 꿈꾸어왔던 풍화(風化)된 신화 같은 도시였다. 부근 유럽의 ‘땅끝 마을’이라 불리는 카보다 호카(Cabo Da Roca), 서양의 최서단(最西端)이다. 그곳에서 여행의 단락을 짓고 싶다.

리스본이란 도시
포르투갈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도시 리스본(Lisbon)은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Lisboa)’라 불린다. ‘매혹적인 항구’라는 뜻이다. 리스본은 행정 구역상,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바이샤(Baixa) 지구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리베르다드(Liverdade) 지구, 동쪽으로는 알파마(Alafama) 지구, 서쪽 외곽에 위치한 벨렝(Belem) 지구로 나뉜다.
과거 흔적들이 몰려있는 리스본의 구시가지는 크고 작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걸어 다니기는 무리가 있다. 허나 리스본의 상징인 전차 즉, 트램을 잘 이용하면 즐겁게 이동할 수 있다.
1873년 도입된 전통적인 교통수단인 트램은 과거엔 27개 노선이었으나, 차량과 노선버스에 밀려 현재는 5개 노선뿐이다. 그 중에서 28번 트램이 가장 인기가 있다. 알려진 관광명소를 두루 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타려면 평일에도 최소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내가 보기에 리스본의 트램 운영은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 같았다.
구시가지는 노면 요철이 심하고 트램 레일이 있어 자전거는 최소 1.95인치 타이어가 필요하고, 다운힐을 할 때는 수시로 올라오는 트램이 있어 극도의 주의를 요한다.

리스본의 명물 트램.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28번 노선 정거장에 앉아있는 할머니
리스본 외곽에 있는 로마식 수도교.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건재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과거의 리스본, 오늘의 리스본
도시의 기원은 과거 페니키아인이 테주 강(Rio Tejo) 하구에 세운 항구에서 유래되었다. 강의 옛 이름이 리소(Lisso)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지배를 거쳐 이슬람 지배중인 1249년 아폰소 3세가 알가르베 지역을 함락하면서 포르투갈은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를 이루었다. 이는 스페인보다 근 250년이나 앞섰으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한 민족의 단일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남부 항구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13세기 중엽부터 코임브라(Coimbra)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대항해시대의 진원지가 되었다. 엔히크 왕의 후원으로 많은 탐험가, 항해사, 과학자가 나타났지만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바스쿠 다 가마였다. 그가 1498년 개척한 인도 항로는 리스본을 번성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적지 요소요소 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시내를 주유하며 나는 리스본을 ‘바스쿠 다 가마의 도시(City of Da Gama)’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도전 정신과 모험심으로 신항로를 이용한 향신료 무역으로 한때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 ‘노예무역’도 그 부(富)에 한 몫 했다.
테주 강 부두는 당시 연간 2000여척의 무역선이 드나들어 항구는 매일 불야성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업보다는 소비에 치중했다. 18세기 중반에는 최악의 지진으로 도시의 2/3가 파괴되는 재앙을 겪었고, 근래에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 아일랜드, 그리스와 더불어 서유럽에서 가장 궁핍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제 낡고 빛바랜 비단옷 같은 도시, 리스본을 알기 위해 구석구석, 힘찬 페달을 돌린다.


“죽은 자는 묻고, 산자는 보살펴라!”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었다. 축복이라도 내리듯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겨울의 문턱에 통상 리스본 하늘은 잿빛, 바람 불고 부슬부슬 비라도 내려야 정상이었다.
9시반경이니 시민들의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쿠르릉~~쿵쿵” 하는 소리가 땅속에서 들려왔다. 리스본 전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낙관적인 사람은 “이러다 말겠지….” 생각했다. 그 순간 파도에 작은 배가 흔들리듯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리스본이라는 ‘거함’이 일엽편주처럼 춤을 추었다. 강력한 지진은 세 번에 걸쳐 9분 동안 시 전체를 마구 흔들어 놓았다. 3, 4층짜리 집들이 대부분인 시가지는 여기저기서 광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다. 축일에 켜놓은 촛불이 원인이었다.
‘왜 하필 성스러운 날에, 신의 분노인가….’
신앙심이 두터운 포르투갈 인들에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허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시간 가량 지나 더 큰 불행이 밀어 닥쳤다. 쓰나미가 발생해 테주 강이 넘쳐 지대가 높은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쓸려나가고 말았다. 보통 불보다 물이 더 무섭다고 한다. 물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명은 말할 것도 없고, 고색창연한 왕궁,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등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보물들이 한순간에 쓸려가 버리고 말았다. 도시 인구의 30% 이상이 지진, 화재, 쓰나미 등으로 목숨을 잃었고 건물 등 구조물의 80%가 파괴되었다. 진원은 포르투갈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대서양 해저로, 현대의 지진학자들은 리히터 지진계로 8.5~9.5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의 왕, 동 주앙(Dom Joao) 1세는 천운으로 리스본을 떠나있어 화를 면했다. 망연자실한 왕은 수상격인 폼발 후작(Marques de Pombal)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자는 묻고, 산자는 보살필 겁니다.”


리스본 재건의 아버지
재건이 ‘새로운 건설’보다 훨씬 더 힘들다. 폼발 후작은 건축, 토목 기술자, 과학자 등을 총 동원해 도시를 새로 만드는 데 매진했다. 석조보다는 지진에 강한 목재로 구조물을 만들고 최초로 ‘가이올라 구조(포르투갈어로 ‘새장’이란 뜻)‘란 내진공법을 적용했다.
폼발의 위대성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나락으로 가라앉은 민심을 어떻게 바로 세우느냐에 주력했다. 그는 우선 피해상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어떤 건물이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지진의 전조는 무엇이었는지, 동물들의 특이한 행동은 없었는지, 우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등 다각도로 조사했다.
당시의 시민들은 지옥으로 변한 도시를 신의 저주로 여겼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처참하게 죽은 가족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신에게 용서를 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항해 시대 이후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선두주자였다.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노예들을 잔인하게 잡아다가 사정없이 부려먹고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엄청난 부를 이룬 해양제국의 이면에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이에 대한 회한과 자책감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폼발은 재앙을 ‘신의 형벌이 아닌 자연현상’ 즉, 과학적 시각으로 설명했다. 취약한 집들이 많이 부서졌고, 견고하게 지은 집은 건재했다. 몇 년 전 견고하게 세운 로마식 수도교(水道橋)는 큰 위안이었다.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많고 전염병이 돌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 자는 살아나가기 마련. 무너지지 않은 수도원과 교회에 기거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새 터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폼발은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고 가옥의 배열도 이른바 폼발린(Pombaline, 폼발 양식)으로 통일하여 근대도시로 변모시켰다. 군주를 제외한다면, 바스쿠 다 가마와 더불어 폼발 후작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리스본은 심한 부상을 입은 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과 같다. 그리고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고 새살이 돋아 희미해진 흉터는 과거의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의 두 곳,  벨렝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리스본의 랜드마크 격인 역사적 건물인데 건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참화에 온전히 살아남았다니! 반가운 마음에 우선 ‘벨렝 역사지구’를 향해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적지들이 몰려있는 벨렝은 시 외곽은 아니지만 시내 중심에서는 상당히 떨어져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로 달려가기는 안성맞춤이었다.


히메지 성(城)과 시옹 성(城)이 떠올라
먼저 도착한 곳이 벨렝 탑(Torre de Belém)이었다. 1515년, 아후다(Francisco de Arruda)의 설계로 마누엘 1세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을 기념해 세웠다. 리스본 방어를 위한 요새 겸 망루 역할도 했다. 현재는 내부 관람이 가능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은 정치범 감옥, 2층은 포대, 3층은 선박의 입출항을 통제하는 세관이었다. 그 외에도 대항해시대, 원양 출항에 앞서 왕을 알현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강의 흐름 때문에 탑이 거의 바닥부터 강물 위로 노출되어 있다. 감옥은 만조 때 물이 들어오면 수감자의 목까지 차올라 까치발로 물이 빠져나갈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위가 더 높아진다면 서서히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얼마나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을까. 사형이라는 형벌은 인류가 생긴 이래 존재해왔다. 형을 집행할 때, 당하는 사람에게 고통의 시간 즉, 죽음의 공포를 줄여준다면 그나마 너그럽다. 
탑 안에서 창밖으로 펼쳐진 태주 강은 바다처럼 넓었다. 그때도 ‘같은 이 바다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수감자의 고통이 전해지는 듯 했다. 
나의 첫눈에도 보통 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탑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웅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탑의 별칭이 ‘태주 강의 귀부인’이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감이 없지 않지만, 과거 일본 히메지(姬路)를 여행할 때 본 히메지 성의 별칭이 시라사키조(白鷺城, 백로성)였다. 성 관리인에 의하면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다”며, “흰색 건물이 백로가 비상하려 날개를 펼치는 형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밖에 나와 다시 보니 그럴듯했다(이것도 학습효과인가). 백로를 남자에 비유하지 않듯, 아름다움은 여인에 비유해야 제격인 모양이다. 알고 보니 태평양전쟁 시기 미군의 공습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축조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이었다. 이점에서 벨렝 탑과는 상통했다.
또한 물위에 떠있다는 점에서는 제네바 몽뜨뢰 인근 레만 호반의 멋진 시옹성(Chateau de Chillon)을 연상케 했다. 그곳도 과거 정치범을 투옥시킨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폼발 후작의 청동상. ‘리스본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리베르다드 거리에 있다
벨렝 탑 앞에서 의기투합한 독일에서 온 여행자와 함께
벨렝 탑은 탑이라기보다는 큰 성채의 대문 같다
스위스 레만 호수 위의 시옹 성. 영국 시인 바이런이 쓴 <시옹성의 죄수>의 무대이다
일본 히메지 성. 학이 비상하려는 형상이라고 한다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곳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은 역사지구 내 벨렝 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제로니무스는 4세기에 살았던 가톨릭 성인이다. 원래 라틴어식 이름은 에우제비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인데 영어는 제롬(Jerom), 스페인어는 예로니모(Geronimo)이다. 과거 미국을 서부에서 동부로 횡단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여행 컨셉이 ‘바람으로 사라진 인디언의 흔적을 찾아서’였다. 그중의 한명이 아파치 족의 전설적인 추장 예로니모(미국인들은 제로니모라 불렀다)였다.
이 수도원을 수식하는 표현들이 많다. ‘대항해시대의 상징’, ‘탐험가들의 안식처’, ‘마뉴엘 양식의 최대 걸작품’ 등이다. 수식어가 많음은 그만큼 인구에 회자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인들에게는 물론 유럽인들에게도 자부심의 결정판이다.
‘노다지 무역 길’이 열리고 거대한 땅 브라질을 차지하자 포르투갈에는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 왔다. 마누엘 1세는 부를 자랑이라도 하듯 선대 엔히크 왕이 지은 산타 마리아 성당 옆에 대규모 증축공사를 벌였다. 길이가 300여m가 넘는 수도원 공사였다. 나는 유럽의 웬만한 수도원은 다 다녀 보았지만 이만큼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도원은 처음이었다. 자전거로 주위를 도는데 한참(?)이 걸렸으니!
수도원은 보이타카(Diogo de Boitaca)의 설계로 1502년 착공했다. 공사비는 인도에서 들여오는 향신료 수익금의 5%였다. 그 옛날에 이런 규모 건물의 공사비가 그 정도 예산이라면 당시 향신료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대지진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야자수처럼 생긴 기둥과 천장은 마누엘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도원 내 산타 마리아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두 개의 석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와, 선박, 혼천의가 부조된  바스쿠 다 가마의 석묘와 월계관, 악기, 펜이 새겨진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석묘였다. 
다 가마의 석묘에 밧줄을 쥔 손을 조각해 놓은 기둥이 있는데 이것을 만지면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행운을 기원하는 손길로 빤질빤질 빛이 나고 있다. 수도원 내 회랑(回廊) 역시 마누엘 양식의 절정을 보여 준다. 조각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사각형 회랑 내에 자리하고 있는 정원은 잠시 쉬어 가기 딱 좋았다. 벨렝 탑과 함께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나가자, 더 넓은 세상이 우리를 부른다!”
발견 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는 1960년, 해상왕 엔히크 서거 500주기를 맞아 테주 강가에 세운 대형 석조 기념비이다. 우리의 세종대왕에 비길까. 그에 대한 포르투갈 인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높이 52m의 범선 형상이다. 뱃머리에 엔히크 왕이 자신이 고안한 캐러벨 선(船)을 들고 먼 바다를 응시하며 “보라, 저 바다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이들은 대항해시대를 꽃피우고 국부에 기여한 왕이나 왕족,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 시인, 화가 등 29명이다.
이 기념비에 등장하는 인물만 잘 뜯어봐도 포르투갈이 어떤 나라인지는 절반이상 파악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은 선두의 엔히크를 비롯 바스쿠 다 가마, 페르디난드 마젤란, 바르톨로뮤 디아스, 페드루 카브랄, 루이스 카몽이스 정도였다. 이들의 면면을 보자.

 

 

현장에 답이 있다
리스본의 역사지구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포르투갈을 필두로 유럽 국가들이 장거리 탐험에 나서게 되었을까. 사실 이것은 나의 오랜 의문 중 하나였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실 유년시절에 나의 마음을 끈 것은 단순한 동기였다. 미지를 알고 싶은 탐험가들의 도전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시엔 선원이 되려고 해양대학 진학을 꿈꾼 적이 있었다. 청소년기에 읽은 쥘 베른의 소설 <15소년 표류기, 원제는 Two Years' Vacation>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 이베리아 반도 기행을 계기로 오래된 숙제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매사가 그렇듯이 답은 역시 현장에 있었다. 책을 여러 가지 암만 많이,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이해 안 되는 것들이 이번 기행을 통해 하나둘 서로 아귀가 맞아 떨어져갔다. 그러면서 뚜렷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현지에서 유적지의 크기나 중요도(시설물), 입장료의 다과, 안내문, 홍보책자, 사적지 홍보 담당자와의 인터뷰, 현지인과의 대화 혹은 유적지에 여행 온 외국인과의 대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현지에서 얻은 모든 것들이 가장 정확했고, 숙제를 푸는 단초를 제공했다.


흑사병과 콘스탄티노플 함락
14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흑사병(Black Death)이 유럽 전역을 휩쓸어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줄었다. 세균이나 검역의 개념이 없던 당시 교역 중심지들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 농노들이 병을 피해 도망가면서 중세의 장원경제체제가 붕괴될 정도였다.
15세기를 지나면서 인구 회복세가 뚜렷해졌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바닷길을 통한 대외적 확장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졸저 <유럽로드> 터키 편 참조). 기독교 성지가 이교도 손에 넘어간 것은 유럽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향신료와 직물 등 수입품의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동방무역으로 큰 재미를 보던 베네치아, 제노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 상인들은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암암리에 무역을 계속했다. 여기에는 정복자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멧 2세의 관대한 정책도 작용했다. 그는 이슬람교 ‘관용의 정신’을 성실히 견지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도 허물지 않고 내부 장식만 약간 개조해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수도원의 한 변이 300m나 된다
수도원 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 항해 전에 여기서 무사귀환 기도를 드렸다
성당 안에 안치된 바스쿠 다 가마의 석묘. 부조 장식 중 왼쪽의 십자가는 기사단의 상징이고, 가운데는 엔히크가 개발한 캐러벨 선, 오른쪽은 항해기구인 혼천의(渾天儀)이다
리스본의 인기 간식 에그타르트 가게. 최소 3개(한개 1유로)는 먹어야한다. 19세기부터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제조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포교와 교역이라는 쌍두마차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 개막은 유럽의 초기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의 효시였다. 1510년, 1만여 명의 인도인을 학살하고 고아를 함락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이 오기 250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인도 속의 작은 포르투갈’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고아를 본 사람은 리스본을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교역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수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아에는 동양 최대의 성당 ‘봄 지저스(Basillica of Bom Jesus)’가 아직도 건재하다. 새로 발견(강점)한 지역마다 성당부터 지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곳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선교 거점이었다. 하비에르 신부(St. Francis Xavier)가 여기서 포교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기독교를 전파하고 중국 광동에서 죽었다.
17세기 초, 쇼군(將軍)의 칭호를 얻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수립했다. 막부초기에는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큰 호기심을 보여 포르투갈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교세가 급팽창하자 위기를 느낀 막부는 ‘포교는 No!’를 선언하고는 기리시탄(기독교인)을 탄압했다. 급기야 포르투갈의 무역권을 박탈하고 추방시켜 버렸다. 호기심 많은 일본인들, 서구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 “교역만 하겠다”는 네덜란드에게는 문호를 개방했다. 나가사키 앞바다 조그만 섬 데지마(出島)에 한정하여 교역을 허용, 18세기 한때 란가쿠(蘭學)를 꽃피웠다.

 

인도 고아에 있는 동양 최대의 ‘봄 지저스’ 성당
일본 기독교의 아버지, 하비에르 신부의 초상

 


역사를 바꾼 검은 황금, ‘후추’
‘역사는 역설적이다’는 말이 있다. 좋고 귀한 것을 가지고도 피해를 본 경우가 역사에 종종 등장한다. 16세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풍요를 누린 인도가 그랬다. 음식의 맛을 좋게 하고 육류를 보관하는 당대의 귀중품, 향신료(주로 후추) 때문에 피지배자로 전락, 서구 열강들에게 수백 년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후추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추는 크기가 작아도 그 가치는 크다”는 플라톤의 말이다.
1498년 5월 어느 날, 인도 서남해안 어촌에 낯선 배가 도착, 사람들이 내렸다. 키가 크고 곱슬머리에 하얀 얼굴의 사람들이었다. 그중 대장(바스쿠 다 가마)은 말했다.
“우리는 머나먼 포르투갈에서 후추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계사의 수레바퀴가 서양을 향해 돌려는 순간이었다. 대장은 지역을 다스리던 왕, 자모린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우리 폐하가 전하는 선물입니다”하며 붉은 포르투갈 식 모자와 구리로 만든 그릇 류 몇 점을 내놓았다. 황금으로 잔뜩 치장한 왕은 기가 막힌 듯 냉소하며 “이런 것은 우리 가난뱅이에게 주어도 욕먹습니다.” 라고 쏘아붙였다. 당시 캘리컷은 후추를 포함한 모든 향신료의 집산지이자 수출의 항으로 부유했다. 주로 아랍상인과 페르시아 무역상들이 이를 취급했다.
후추는 유럽 풍토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는 작물이었다. 반면 인도의 비 많은 몬순기후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페퍼(pepper)는 산스크리스트어 ‘피파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가 오랜 작물이다.
당시 유럽에서 후추 한 알은 진주 한 개와 같은 값이었다. 몇 안 되는 병원 겸 약국에서만 팔았고 손님이 사러오면 바람에 날릴세라 여름에도 창문을 닫았다고 한다. 산지가의 60~100배 정도였으니 무역업자는 목숨을 걸만했다.
포르투갈은 국운을 걸고 본격 향신료 획득을 추진했다. 대규모 군함을 동원, 아랍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양을 장악했다. 무력으로 인도 서남부 고아를 거점으로 디우, 다만(지금의 뭄바이 일대)을 강점했다.
해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도양, 페르시아 만, 벵골 만을 항해하는 선박으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했다. 일명 카르타즈(Cartaz, 통행증)라 불리던 이 제도는 배에 실린 화물가의 20%를 갈취하는 ‘준 해적’ 행위였다. 동쪽으로는 인도네시아,  마카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만(灣) 일대까지 자국 세력권으로 완전 장악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명에 강한 동양, 활용에 강한 서양
“바스쿠 다 가마의 첫 캘리컷(Calicut) 방문으로 동양과 서양의 격차는 여실히 증명되었다.”
다 가마와 자모린의 만남에 대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조셉 나담은 이렇게 평했다.
동·서양 문명의 격차는 언제쯤부터 벌어졌을까. 내가 평소에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번 이베리아 반도 기행에서는 그런 의문이 더 증폭되었다. 나의 추론으로는 한 500여년 전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을 능가했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인구가 많아 군사력이 강했고 경제력도 앞섰다.
한 예로 17세기 초 유럽전역이 30년 전쟁에 휘말려있을 때 2만 정도의 병력을 가진 용병대장이라면 어느 군주나 고용하려고 애썼다. 그보다 무려 1000여년 전 중국의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113만의 대병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지리상의 발견, 종교개혁 같은 대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포르투갈이 주도한 동양을 향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런 굵직한 변혁(개혁)으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당시 동양은 문화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앞서있었다. 인류 4대 발명품이라는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 등이 동양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발명했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이미 배워 알고 있다. 나침반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때에 쓰임새가 있는데 명나라의 정화제독 이후에는 먼 바다를 항해할 일이 없었다. 화약은 10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되어 주로 폭죽놀이에만 사용되었고, 제조방법은 국가차원에서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서양은 동양보다 늦었지만 이런 발명품들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연구를 거듭해 활용도를 한층 더 제고했다. 특히 화약의 중요성을 알아채고 일찌감치 총과 대포 등의 무기 개발에 눈을 돌렸다. 이른바 포함외교(砲艦外交), 함선에 포를 장착해 웬만한 나라는 이것으로 제압해 버렸다. 이것이 서양에 역전당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무력을 앞세워 동양세계에 밀어닥친 시기를 서양사에서는 제국주의의 확장, 동양사에서는 서세동점(西世東漸)이라고 한다.
테주 강 저 멀리 대서양에 석양이 내리기 시작했다. 황홀경을 뒤로하고 이제 ‘역사지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월광에 물든 포르투갈의 영화(榮華)를 찾아 두 바퀴 나그네는 내일도 쉼 없이 달릴 것이다! 

 

왼쪽으로부터 선두가 항해왕 엔리케, 세 번째가 다 가마, 네 번째가 카브랄, 다섯 번째가 마젤란, 마지막이 디아스
‘미술과 건축의 테크놀로지 미술관.’ UFO 같은 독특한 외관으로 테주 강변에서 인기가 높다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포르투갈 여인.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랍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날 오랜 세월 보낸 아랍권에서 체득한 육감이다

 

 


차백성 편집위원  cbs6127@naver.com

<저작권자 © 자전거생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차백성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