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넘치는 애수의 남쪽 항구

대중가요의 골목길 2 (목포-2)
예향 넘치는 애수의 남쪽 항구

이 봄, 목포에 서성인다. 목포의 봄꽃이 여느 남쪽 항구보다 각별히 아름답지 않아도 애수가 넘치는 골목만으로도 따뜻하다. 본격적 유행가의 시발이라는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의 현해탄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목포사람 김우진의 걸작이다. 트로트 음악 절정의 60~70년대를 구가한 핸섬보이 남진과 이미자에 필적하는 매혹의 조미미도 목포가 생장무대다. 붙잡아도 매달려도 내님 싣고 떠나가는 ‘연락선’의 목포다. 극작가 차범석, 춤의 명인 이매방, 소설가 박화성이 유달산 정기를 빌어 태어났다. 서정시인 노향림이 가곡의 무대에 올린 <압해도> 또한 서러운 목포가 껴안고 있는 검푸른 섬이다

 

우리 가요 최초의 히트 곡 <사의 찬미>, 김우진 거리
노적봉 언저리에서 하룻저녁을 보내고 김우진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이에게 김우진은 낯선 이름일 것이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이야기하면 “아, 그 노래” 할 것이다. 그 노랫말을 쓴 사람이다.
윤심덕과 정사 스캔들에 가려진 김우진의 흔적은 유달산 자락 옥단이 길에 ‘김우진거리’로 복원되어 있다. 양동성당 하얀 건물이 있는 언덕이 오랜 역사 속에서 더 환하게 빛나는 것은 극작가 김우진이 있어서다. 장성 출신의 목포부자 김성규는 망해가는 조선의 장성군수까지 지냈지만 이미 시대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세 아들 중 장남이 김우진이다. 차남 김철진은 공산당청년연맹까지 가담했으나 전남 도의원도 역임했다. 삼남 김익진은 언어학자였다. 이들은 이른바 ‘목포 모던보이1세대 3형제’다.
<사의 찬미>는 당시로서는 1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한 우리 가요사 최초의 히트곡이다. 음악평론가 이영미는 윤심덕이 성악가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부른 찬송가 수준의 노래라고 혹평하지만 ‘현해탄의 정사’라는 사연 있는 노래로 식민 조선을 뒤집어 놓았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사의 찬미> 김우진 작사/외국곡/윤심덕 노래, 1926
 

북교동 성당 입구에 있는 ‘반딧불작은도서관’ 앞에 조성된 김우진 거리. 단출하지만 극작가 김우진의 서재 모습을 형상화했다(목원동)

 

평양출신인 윤심덕은 기독교 권사 부부의 딸로 도쿄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성악가다.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같은 ‘신여성3인방’과 같은 반열이다. 원래 홍난파의 애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생활고에 힘들어 소위 스폰서를 만난 일로 지탄받아 만주로 도피했다가 1925년 귀국한 후, ‘토월회’ 배우가 된다.
<사의 찬미>는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심덕이 귀국선에 오르면서 히트될 운명적 상황이 설정된다. 1926년 8월 3일 관부연락선을 탄 그 이튿날 현해탄에서 두 사람은 실종된다. ‘정사의 투신’이라고 언론은 대서특필했으나 김우진이 윤심덕을 사랑했다는 물증은 없다. 유서도 없다. 단지 김수산(水山)과 윤수선(水仙)이란 가명의 탑승기록부만 남기고 함께 사라졌으니 돌림자가 심증의 근거다. 영원한 사랑을 향한 자살설과 조선에 레코드를 팔기 위한 기획 살인이라는 타살설까지 난무했다. 심지어 자살을 가장해 유부남인 김우진과 처녀 윤심덕이 ‘이태리인지 다른 나라 어딘가에 잘 살고 있다더라’는 설까지도 떠돌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발매된 <사의 찬미>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뷰브강의 잔물결>에 실려 전설의 노래가 되었다.
내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두꺼운 뿔테 안경의 극작가 이서구 선생이 윤심덕을 기억하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선물로 뭘 사다드릴까요?(윤)
취입하고 돌아올 때 넥타이나 하나 사 와요.(이)
죽어도 사와요?(윤)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사서 부치고 죽어요(이)

윤심덕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 도착한 넥타이를 이서구는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사의 찬미>의 테마는 너무나 강렬해서 신성일·문희 주연의 <윤심덕>(안현철 감독, 1969), 임성민·장미희 주연의 <사의 찬미>(김호선 감독, 1991)에서부터 연극(1998), 가수 바다의 뮤지컬(2005), SBS 드라마(2018)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엘비스프레스리, 남진의 목포
목원동 언덕에서 내려오다 북교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교문보다 덩치가 큰 비석이 길손을 붙잡는다. 이 학교 30회 졸업생이 ‘고 김대중대통령’이라는 기념비다. 1907년 개교했으니 110년을 훌쩍 넘어선 학교다. 극작가 김우진, 가수 이난영, 극작가 차범석, 가수 남진도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니 그 오랜 역사에 걸맞게 자랑할 만하다.
목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진의 생가가 있다. 목포시는 이 집을 예향 목포 탐방의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목포세무서 뒤편에 있는 남진의 옛집은 그야말로 부잣집 포스가 남아 있다. 남진이 나이롱 양말이 헤지도록 트위스트를 추면서 놀았다는 2층집은 굳게 잠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귀찮게 했으면 “지금 이집엔 남진이 살지 않습니다. 남진의 기념관이 아니니 볼 것도 없고, 그저 관리하는 늙은이 한 사람 살고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쓸쓸한 안내를 하고 있겠는가.
남진이 어떤 사람인가. 1970년대를 풍미하면서 오늘날까지 서민 대중과 함께 지내온 영원한 오빠다. 남진은 호남매일신문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부친을 둔, 요즘 말로 금수저다. 압해도 톱머리로 놀러 다니던 김남진은 그 잘 생긴 얼굴과 가수가 될 끼를 숨기지 못하고, 어머니가 밀어주는 힘을 업고 상경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19살 때 일이다. 1965년, 그 스스로가 꼽은 인생의 노래 세 곡에 들어있는 <울려고 내가왔나>가 크게 히트한다.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 찾아 여기 왔나
낯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
하늘마저 날 울려 궂은비는 나리고
무정할사 옛 사람아 그대 찾아/ 울려고 내가 왔나
 
그 누구 찾어 왔나 영산강아 말해 다오
반겨줄 그 사람은 마음이 변해
아쉬웠던 내 사랑 찬 서리에 시드나
그렇지만 묻고 싶어 보고프면 또 오리다
울면서 찾아오리
<울려고 내가 왔나> 
김중순 작사/김영광 작곡/남진 노래/오아시스레코드, 1966

먹고 살길 찾아 서울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이미 ‘낯 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왔나’에서 눈물보가 터지기 시작한다. 레코드 발매 보름만에 7000장이 팔려나가는 기세는 공감 자체였다. 첫 히트작이 된 이 노래는 ‘신필림’에 의해 영화화되어 그는 주연으로 발탁된다. 프랑크 시나트라처럼 영화배우로 성공하려면 우선 가수로 데뷔해야겠다는 그의 결심이 맞아 떨어졌다. 연이어 불후의 명곡 <가슴아프게>도 히트한다. 사실 바다와 이별이 주제인 <가슴아프게>가 목포의 상황에 딱 들어맞지만 작사가가 그 노래를 만든 배경이 인천의 바다이기에 나중에  다시 조명하기로 한다.
남진은 70년대 극장쇼 무대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다. 남진과 나훈아의 대비는 그 시대 가요계 쌍두마차에 대한 당연한 비교였다. 나훈아의 <고향역>을 만든 작곡가 임종수는 “두 사람은 곡을 대하는 감정에서도 달랐다. 남진은 부드럽고도 기교 있는 목소리였고, 나훈아는 깊게 토해내는 진득한 맛이 있다”고 평했다. 

‘목포모던보이 1세대’ 3형제의 행적과 어록이 벽화를 대신하고 있다(목원동)
‘목포모던보이 1세대’ 3형제의 행적과 어록이 벽화를 대신하고 있다(목원동)
목포 북교초등학교는 개교 112년의 역사를 지녔다. 정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학교 30회 졸업생이라는 기념비가 좌측에 있다(목원동)
68년에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의 연합동우회. 목포가 큰 도시인 듯해도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좁은 바닥이라는 뜻이다(목원동)
가수 남진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정미소 자리. 붉은 벽돌에 세월은 묻어있지만 아직도 당당한 건물에는 몇 개의 점포와 2개의 콜라텍이 영업 중이다. 아마 남진의 노래도 흘러나오고 있으리라(목원동)

 

‘남진이 좋으냐 나훈아가 좋으냐’의 선택지를 두고 무대 아래에서도 호불호는 갈려서 대결은 치열했다. 팬심의 과열이 때로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현실을 위로해 주는 남진 오빠를 향한 처녀들의 황홀한 몰입은 원조 오빠부대를 탄생시킨다. 이제 그 열정의 처녀들도 조국 근대화의 고달픈 시간을 건너서 손주를 돌보며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사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남진이 고향을 떠나 상경한 시대의 청년들 또한 <서러운 타향>(김중순/김영광/남진)에서 혼자 불러보는 어머니에게 ‘왜 날 낳으셨냐’고 불효한 투정도 하면서 고달프게 살아가기에 위로와 타협이 필요했다. <돈이 최고냐>(남진), <맨주먹 인생>(남정일 작사·곡/남진)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성공을 못할 바엔 <타향에다 뼈를 묻으리>라고 다짐한다.

사나이 한번 먹은 굳은 맹세를
내 어이 잊을 쏘냐 잊을 것이냐
금의환향 못하고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어머님 이별할 때 하시는 말씀
내 어이 모를 쏘냐 모를 것이냐
한 번 빼 든 이 칼을 다시 거두면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꿈속에 어머님을 뵈올 적마다
검은 머리 백발되어 기다리시네
효도못한 자식이라 나그네라면
차라리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
<타향에다 뼈를 묻으리> 
윤일로 작사·곡/남진 노래/오아시스레코드, 1966

대중가요답게 직접적이고 비장하게 와닿는 노랫말이다. 데뷔 55년을 맞은 남진의 가요이력서는 화려한 수직상승과 서글픈 좌절 행로를 거쳐 부활하는 청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제 가요계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되었다. 그의 노래가 지나온 정거장도 꽤나 여럿이고, 차창에 서린 사연 또한 절절하다. <님과 함께>나 <둥지> 같은 노래 이야기는 우리 가요사를 따라가는 여정 속에서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게 될 것이다.
오늘 그가 태어난 자리에서 본 남진의 흔적은 한 전설이 어쩐지 괄호 밖에 서 있다는 느낌이다. 그가 마지막 기항지로 고흥을 정하고 폐교 부지를 사서 ‘남진기념관’을 짓는다는 소식은 어쩐지 쓸쓸하다. <내사랑 고흥>을 신곡으로 내놓고 팔영산과 나로도를 노래하는 그는 성공해서도 스스로 부른 노래처럼 ‘타향에서 뼈를 묻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고향 목포의 눈물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깊은 뜻을 목포는 더 넉넉하게 안아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전설도 이야기 속에서 끄집어내 역사로 만드는 판에 이난영과 더불어 남진, 조미미는 물론 그 숱한 목포의 노래를 영원히 불러 앉히는 ‘목포의 노래기념관’이야말로 적산가옥 앞을 서성이는 목포 밖 사람들에게 추억의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삼학도 언저리나 갓바위해상공원으로 가는 길목 ‘목포문학관’ 옆에 다정하게 들어선다면 문학의 지평을 넓힌 또 하나 목포의 자랑이 되지 않겠는가. 노래 가사 또한 서민대중이 사랑하는 ‘노래시’이니까.
 

가수 남진의 생가. 부지가 300평은 넘어 보이는 규모가 큰 주택이다. 그가 트위스트를 추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던 2층 방이 보인다. 대문이 굳게 잠겨 관광객들은 아쉽다(목원동)
몇 년 전 한 만찬 모임에서 같이 자리하며 찍은 남진. 노래와 더불어 그의 소탈한 인간미에 수많은 팬들이 반한 이유를 알았다(조용연 자료사진)
목포해상케이블카는 두 번씩이나 개통을 연기하면서 아직 공사를 하고 있으나 5월에는 개통한다(죽교동)
압해도 해변의 천사분재공원에 있는 노향림 시비로 가는 해변길은 적막이 온몸을 감싼다(신안 압해읍)
조선내화 목포공장. 오래전 가동은 멈췄지만 등록문화재 지정과 인접아파트 건설 등과 관련해 어떤 용도로 재탄생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유달동)

 

너무 일찍 사라진 트로트의 또 한 별, 조미미
또 한 사람 목포가 낳은 가수는 조미미(1947~2012)다. 전남 영광 태생이지만 목포 대성동에서 자라 목포여고를 나왔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유별나게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고 말한다. <떠나온 목포항>으로 데뷔하여 노랫말처럼 목포를 떠나 <바다가 육지라면> <서산갯마을> <서귀포를 아시나요> <선생님> <먼데서 오신 손님> <단골 손님> 등 55개 독집과 100여개 디스크에 1000여곡을 발표한 대가수다. 노래의 정서는 그 시대를 함께 풍미한 이미자의 섬마을과 동백아가씨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들은 목포항을 이별하고서
떠나온 지 어연간 몇몇 해인가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 우뚝 솟은 유달산
어느 때나 다시보리 그리운 목포항구
눈물로 부모형제 이별하고서
어린가슴 졸이며 떠나온 목포항
기적소리 목 메인 차창에 쓸쓸하게 기대여
성공하고 돌아오마 맹서한 목포항구
<떠나온 목포항> 
감우동 작사/김부해 작곡/조미미 노래/오아시스레코드, 1965

 

초기 조미미의 노래도 바다의 이미지라는 연장선을 떠나지 못한다. 동·서·남해가 두루 망라된 노래다. 월남이라는 이름이 외국의 전부였고, 추억의 남십자성으로 기억하는 세대에게 조미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노래의 인기만큼이나 스캔들은 버스 차부(정류장)의 가판대에서 팔려 나갔다. ‘선데이 서울’과 ‘주간 경향’, ‘야담과 실화’와 ‘명랑’ 잡지는 구석방 낡은 벽에 화보를 붙여놓고 연모하는 스타들을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연예가중계’였다. 일부러 찾아가 내 머리카락을 오래도록 맡겨온 안양 장미이발관 강승원(63) 씨는 조미미가 부른 <선생님>의 주인공이 ‘월남에서 제대하고 돌아온 남진’이었다는 그 시절 풍문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는다.
같은 시대를 누빈 남녀 가수 4인은 남진과 이미자, 나훈아와 조미미로 짝지어 대비된다. 남진과 이미자의 노래는 날씬하고 애절하다. 나훈아와 조미미의 노래는 두툼하고 구성지다. 나훈아와 조미미가 같은 오아시스레코드 전속가수라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그 깊은 맛을 구석구석 비교한 어느 가요애호가의 대비표가 조금 과장되긴 해도 인상적이다.
2012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미미의 가요인생은 너무 짧다. 조미미 또한 나의 가요여정 곳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네온의 거리에서, 쓸쓸한 갯마을에서 그녀를 다시 추억할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항구
목포역 보해상가 앞에서 자전거를 접어 압해도 송공항으로 가는 130번 시내버스를 탄다. 북교초등학교를 지나 북항으로 가는 길은 목포 구도심을 두루 거치면서 유달산 봄꽃을 멀리서 완상할 수 있게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극작가인 차범석의 고향이다.
가난을 소재로 한 일관된 현실 고발과 사상성이 녹아 있는 리얼리즘 문학의 여류 소설가 박화성과 한국문학평론의 독보적 존재인 김 현이 북교초등학교를 나왔다. 그 외에도 휴머니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천승세, 불의에 저항하는 <오적>의 김지하 시인이 산정초등학교 출신이고, 몽환적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시단의 균형주의자 최하림, 한국수필 문학의 비조로서 6·25때 납북된 <백설부>의 작가 김진섭 그리고 권일송 시인까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목포가 배출했다. 한국전통 춤의 거목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승무, 살풀이춤 2가지 명예를 보유한 유일한 춤꾼인 이매방도 목포 대성동 출신이다.
올해 5월 개통을 목표로 유달산 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다. 유달산에서 고하도에 이르는 길이 3,234m이다 중간 승강장이 유달산 정상에 만들어지고 왕복 40분이 걸린다. 유달산 아래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는 바다로 건너기 직전에 오래된 붉은 벽돌 공장, 흑백사진처럼 누렇게 바래가는 조선내화의 옛 공장 위를 지나게 된다. 아직 어떤 용도로 재탄생할지 정해진 것은 없다. 몇 년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배우 유인촌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홀스또메르>를 이틀에 걸쳐 상연할 때 400여석의 임시 자리를 꽉 채운 붉은 창고에서 받은 목포시민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나기를 바랄뿐이다. 이제 해상 156m를 지나는 시원한 풍경은 새로운 명물이 될게 틀림없어 목포는 벌써부터 설렌다.
 

목포항은 그 숱한 노래와 사연을 간직한, 오래된 부두를 가지고 있다(만호동)
목포역이라는 말은 더 갈 수 없다는 정지신호를 안고 있어 안온하기도, 쓸쓸하기도 하다(목원동)

 

압해도 사람이 보지 못하는 압해도, 시인 노향림
지금 압해도로 가는 길이다. 한 곡의 노래 <압해도>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가곡 <압해도>는 대중가요의 골목길에서는 비켜나 있다. 하지만 목포를 이야기 하면서 목포를 옹위하고 있는 압해도를 지나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장르를 이탈한다. 목포 사람들이 사랑한 신안의 섬 압해도는 시인 노향림이 널리 알린 섬이다.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서해바다 그 푸른 꿈 지나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합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압해도로 가자
하이얀 뭉게구름 저 멀리 흐르고
외로움 짙어 가면 친구여 바다 소나물(소나무) 사잇길로 가자
늘리(우리)보다 더 외로운 섬
압해도 합해도로 가자 가자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로 가자
<압해도> 노향림 시/최영섭 곡

어디 있는 섬인지도 모르면서 노래부터 먼저 배웠다는 사람도 많다는 <압해도>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유명한 최영섭 곡이다. 사람들은 3절의 ‘바다소나물’과 ‘늘리’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뒤적여도 나오지 않는 시인의 단어에 궁금해 했다. KBS에서 악보를 제작하며 실수한 오탈자였다. 가요는 대개 그 노래의 가수로 대중에게 기억되지만 가곡은 작사, 작곡자로만 기억된다. 가곡은 원창자가 없기 때문이다.
해남 산이면 태생인 노향림은 어릴 때 목포로 이사 왔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산정동 시절이었지만 끼니는 굶어도 책은 산다는 서울 중앙고보 출신의 아버지 곁에서 빅타레코드의 하얀 강아지 로고가 그녀의 유년시절 첫머리에 각인된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해서는 여고시절을 보내고 중앙대 영문학과를 나왔다.
시신을 실은 수레, 바다로 가는 수장(水葬), 콜타르 칠한 판자 울타리의 우울한 색감이 그녀의 감성을 물들였다. 문학평론가 김 현이 칭찬했다는 시 <꿈>의 배경은 어린 노향림이 복막염으로 누워 있던 6조 다다미방이다. 손혜원의 적산가옥과 비슷하게 나이 먹은 늙은 목포의 골목길이다. “압해도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 한다”며 그 섬을 사랑하고 ‘머리를 들 듯 들지 않는 섬’이라며 <압해도> 연작시 60여 편을 써내려 간다. 시인 홍신선의 아내가 되어 서로가 서로의 시를 넘겨다보는 가운데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평을 빌리자면 노향림은 ‘말이 곧 시가 되는 시인’이 되었다.
자전거를 접어 굳이 멀지도 않은 섬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은 압해대교가 자동차전용도로이기 때문이다. 슬금슬금 타고 다니기는 해도 자전거의 안전은 만들 때부터 고려하지 않은 다리다. 이 연장선에서 4월에 개통된 천사대교 7.2km 구간도 예외 없이 자전거 배제다. 일본의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가로지르는 여러 장대교와 심지어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자전거길을 설치해 수많은 관광객을 외국에서까지 불러들이는데 비한다면 꽉 막힌 안목이다.
검색이 알려준 대로 노향림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압해읍에 내린다. 읍사무소 관광 담당 직원도 ‘노향림 시비’는 잘 모른단다. 물어물어 “신안군립도서관 앞뜰에 있다” 해서 찾아가니 도서관 직원들도 잘 모른단다. 난감해 하는 나를 보고 겸연쩍은지 나이든 직원이 어딘가 본 기억이 있다며 바닷가 어디를 검색해 찾아준다. 아마도 도서관을 신축하며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옮겨 간 것이리라.
해안으로 난 이십리길은 그야말로 갯벌의 고요가 말라붙어 있다. 간척을 한 둑 위로 가는 길이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함이 오히려 시원하다. 노향림 시비는 아직도 단장을 하고 있는 ‘천사섬분재공원’ 앞 바다와 붙은 주차장 끝머리에 서있다. 외롭기는 해도 도서관 마당에 있는 것보다야 시 <압해도>에 걸맞는 위치다. 멀리 송공항과 막 개통한 ‘천사대교’가 보인다.    다시 시비를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어려운 말 하나 없는 시의 강물은 어느새 섬진강과 영산강을 지나 압해도에 이른다. 가보고 싶은 그 푸른 섬이 절로 눈앞에 어른거리게 만든다. 압해도 주민이 스스로 모금하여 1996년에 세운 시비이니 관청이 예산으로 거창하게 세운 것과는 격이 다르다. ‘시비 하나 만나러 이 먼 길을 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리라.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이내 송공항이다. 띄엄띄엄 목포로 나가는 버스에 다시 오른다. 접이식 자전거로 하는 여행의 묘미인 점핑이다.
 

‘갓바위해상공원’은 독특한 지질과 해안 침식이 만들어 낸 절경이다(목포시 이로동)

 

<비 내리는 호남선>, 그 종점이자 시발점 목포역
목포역에서 내려 서울행 기차를 기다린다. 원래 목포역은 갯물이 드나드는 바다 가운데에 둑을 쌓고 호남선 철로를 놓은 끄트머리에 있다. 목포역이 있는 색 바랜 흑백사진 속에 앞도 뒤도 갯벌인 목포는 비좁게 보인다. 목포의 역사(歷史)는 바다를 메워나간 역사(役事)와 동행한다.
하루 전날 길을 잘못 들어 목포역 동쪽 청호시장을 지나오며 “어물전이 왜 이리 많은가”싶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목포의 구도심 골목길이 제멋대로인데 비하면 삼학도까지 이어지는 연동, 동명동, 삼학동 일대가 바둑판처럼 구획이 잘되어 있는 것도 매립지에 도시계획을 한 결과이다. 비라도 내려 준다면 <비 내리는 호남선>이 제격이련만 마른 봄 하늘 저편에서 그저 어둑한 기운만 다가왔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비내리는 호남선> 
손로원 작사/박춘석 작곡/손인호 노래/오아시스레코드, 1956

 

과일바구니가 길가로 나와 있고, 집 고양이는 오가는 주민들이 안부를 묻는 한 식구다(동명동)
목포 청호시장. 유난히 많은 어물전이 오래전 바닷물이 들어왔던 흔적이다(동명동)
호남선 철도를 놓을 때 바다위에 둑을 쌓고 목포역을 만든 바다 끝 종점이다(목원동)

 

이 노래는 뜻하지 않게 정치에 휘말린 노래가 되었다.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내려가던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가 이리역(익산)을 지날 때 심장마비를 일으켜 갑자기 서거하게 된다. 바로 사흘 전 서울 한강인도교 부근 백사장에서 30만 인파가 몰려들어 환호하던 후보가 아니던가. ‘의문의 죽음’이란 설까지 나도는 가운데 이승만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하지만 노래는 해공의 추모곡이 되어 날개를 달았다. 신익희를 추모해서 ‘미망인이 가사를 붙인 게 아닌가’하는 경찰의 추궁도 이미 석 달 전에 출반된 사실이 알려지며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다.
손인호의 구성진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호남인들에게는 애환을 노래하는 <제2의 목포의 눈물>이 되었다. 어느 작가는 서울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면 호남선을 타고 영산포에서 내려 고향 장흥으로 가는 길에 곰탕 한 그릇에 막걸리 잔을 들고 흥얼거렸던 노래가 <비내리는 호남선>이었다. 목포출신 소설가 천승세는 “반드시 ‘비나리는’으로 불러야 제 맛이 난다”고 했다는 노래다. 노래 한 곡의 힘을 다시 실감한다. 두 시간이면 닿을 서울행 KTX는 나리는 비조차 튕겨나가고 말 어둠 속 고속질주를 시작한다.

참고자료
* 야화, 가요 60년사, 황문평, 전곡사, 1983
*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민음in, 2006
* 윤심덕, 나무위키
* <남진과 나훈아를 말하다>, 임종수, 아이넷tv ‘향수’
* <나의 도시 나의 인생, 목포 편, 남진>, 박은주, 조선일보, 2010. 3. 31.
* (가수 탐구)조미미와 나훈아의 공통점, 김경환, 네이버블로그 2019.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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