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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일본행④ 나라일본 고대사 최고의 미스터리, 전방후원분의 고향

일본 고대사 최고의 미스터리, 전방후원분의 고향
나라~아스카 역사가도 ‘야마노베노미치’

8세기를 상징하는 고도 나라(奈良)와 일본 최초의 통일왕국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터 잡은 아스카(飛鳥)를 연결하는 야마노베노미치(山の辺の道)는 고대부터 있던 자연보도다. 나라 동쪽의 카스가산(春日山)에서 아스카의 미와산(三輪山)을 연결하며 산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이는 약 23km로 텐리(天理) 시를 기점으로 남북 코스로 나뉜다. 여기서는 텐리에서 출발해 아스카로 이어지는 남쪽 코스를 따라 간다. 길가에는 고분과 고찰, 전설이 즐비해서 발걸음은 가다 멈추다를 거듭한다  

1500년 동안 숱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모여 자연스럽게 길을 만들어낸 야마노베노미치. 이곳을 배경으로 읊은 일본의 고대가요집인 <만엽집(万葉集)>의 노래비가 곳곳에 서 있어 역사의 향기를 더해준다

 

옛길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사람들의 선택이자 수많은 족적의 기념비다. 누군가는 첫 걸음을 떼며 그 길을 개척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가장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행로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 옛길이다.

최초의 길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질 뿐 머릿속의 상상이나 지도상의 계획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숱한 경험과 판단의 축적물, 그 길에 사연과 전설과 생의 희노애락이 묻어 있으니 그 길을 걷는 것으로 옛사람과 저절로 동감하게 된다. 우리의 옛길에 남은, 그 허술한 짚신 바닥에도 닳고 달아 맨질맨질해진 바위를 보면서 이 길을 걸었을 사람들의 심사에 가슴 울컥하며 시간을 꿰뚫고 동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길은 그 자체로 삶이 각인된 영원의 기념비다.

힘들고 느리게 가는 길
일본에 가장 오래된 옛길은 ‘산기슭 길’이라는 뜻의 야마노베노미치(山の辺の道)다. 1000년 이상 사람들의 족적으로 만들어진 자연보도다. 고도(古都) 아스카와 나라를 잇는 이 길은 굳이 편하고 가까운 들판을 피해서 산록을 따라 구불구불 힘들고 느리게 나아간다. 걸어가는 것이 기본이지만 마을길과 농로를 포함한 옛길이라 일부 험로를 제외하고는 자전거도 갈 수 있다. 
나라 동쪽의 카스가산(春日山)에서 아스카의 미와산(三輪山)을 연결하며 길이는 약 23km이다. 중간의 텐리(天理) 시를 기준으로 남북 코스로 나뉘는데 남쪽 구간이 볼거리가 많고 운치도 낫다. 텐리역에서 출발하면 아스카 사쿠라이(櫻井) 역까지 16km 정도다. 나도 이 길을 갈 것이다. 
텐리역에 내리니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天理敎’라고 쓰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텐리가 천리교의 본고장인 줄은 역에 내려서야 알았다. 텐리라는 지명도 천리교에서 따왔으니 한마디로 텐리는 천리교 종교도시다. 천리교는 이 지역 출신 여성인 나카야마 미키(中山美技, 1798~1887)가 창시했으며 교리는 신도(神道)와 기독교가 혼재한 느낌이다. 일본에 235만, 우리나라도 37만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야마노베노미치로 가는 길목에 천리교 본부와 대학 등 천리교 관련 시설이 모여 있는데 전통 사찰과 비슷한 건물들이 대단히 웅장하다. 잠시 경내로 들어섰는데 참배 행렬도 대단하다. 역시 일본은 신과 종교의 나라다. 신흥종교의 본부가 이렇게 거창하다니 천리교를 다시 보게 된다.
텐리역에서 2km 정도 가면 이윽고 산 속으로 접어들면서 남북 야마노베노미치의 중간거점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이 나온다. 일반 신사와 달리 명칭에 신궁(神宮)이 붙으면 천황이나 황족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소노가미 신궁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가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물은 볼 수 없지만 신사 입구에 칠지도의 사진과 함께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칠지도는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금으로 새겨진 금상감(金象嵌) 명문을 발견하면서 알려졌고,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길이 74.9cm로 도신에 7개의 칼날이 붙어 있는 특이한 형태로 실전용이 아니라 의례용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런 칼로 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창으로 보기에도 칼날이 너무 많고 길다. 특별한 디자인과 기술로 제작한 위세품으로 백제왕이 지방의 영주에게 하사하는 금동관과 같은 성격일 것이다.
명문은 60여자가 확인되었지만 해석에 대해서는 한일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아무리 명문을 읽어보아도 백제 왕세자가 왜의 후왕(侯王)에게 하사한다는 기본적인 뜻은 분명해 보인다. 간단하고 평이한 문장이어서 한문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시기를 나타내는 연호의 명문이 ‘태(泰)’ 하나만 남아 있어 언제 누가 누구에게 보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신궁의 안내문에는 칼 뒷면의 마지막 문장이 ‘전시후세(傳示後世)’로 확인되었는데도 ‘전시후’ 세 자가 여전히 판독불능인 것처럼 빈 칸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문장만 보아도 ‘후세에 전해 보여라’는 하대문임을 알 수 있으니 일부러 뺀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제작시기는 3세기부터 6세기까지 다양한 설이 있는데 지난호에 살펴본 곤지와 무령왕의 예에서 보듯 백제가 왜에 본격적으로 왕족을 파견한 시기를 감안하면 5~6세기경이 아닐까 싶다.
고의든 아니든 참 희한하게도 한일 고대관계사는 이처럼 비밀의 문 직전에서 항상 혼란에 직면하고 만다. 광개토왕 비문도 결정적인 위치의 글씨가 마모되어 온갖 논쟁을 부르고 있듯이. 

야마노베노미치 중간 쯤에 자리한 텐리(天理) 시는 천리교의 발상지다. 총본산을 교회본부라고 부르는데 대학교까지 포함한 일대의 건물 규모가 으리으리하다
한일고대사의 한 열쇠인 칠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이소노가미(石上) 신궁. 입구 안내판에 칠지도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문만 공개되고 있다. 이곳이 야마노베노미치 남북 구간의 기점이 된다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시작되는 남쪽 방면 야마노베노미치. 울창한 삼나무 숲속으로 흙길이 포근하다. 역사를 음미하며 여유롭게 걷는 노인들이 다수 보인다
나라분지 동쪽 산기슭을 따라 난 야마노베노미치. 사진의 지도는 길가에 있는 만엽집의 옛 노래나 유명한 하이쿠의 노래비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출처 日本歷史旅行地&#22259;帳)
일본 특유의 짧은 단가인 하이쿠(俳句)의 명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가 젊은 시절 이곳을 찾아 지은 시비가 길가에 서 있다. 극도로 짧은 시를 직역하면 “우치야마 산사에 외지인은 모르는 꽃이 한창” 정도일까. 그때의 절은 빈 터만 남았다
흔한 일본 시골아주머니 복장을 한 허수아비가 정겹다


전방후원분 미스터리 
이소노가미신궁에서 남쪽으로 난 숲길이 야마노베노미치의 시작이다. 간혹 계단이 나오지만 자전거를 타기에는 큰 불편이 없다. 숲과 작은 산간마을을 지나면 밭 사이로 난 소로가 이어지고 다시 숲과 작은 마을을 지난다. 산간마을인데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길에는 요소마다 이정표가 있어 길 찾기는 어렵지 않고 간혹 답사를 나선 여행객들도 보인다. 여행자는 대부분이 노인이다. 객지생활에 지치면 고향을 찾듯이 일본 노인들은 이 길을 마음의 고향처럼 느끼는 것 같다.
곳곳에 사소한 전설과 유적, 유물, 사찰과 신사가 즐비하지만 하나하나 찬찬히 돌아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역시 나의 발길을 붙잡는 것은 길가에 바로 붙어 있는 거대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들이다. 사실 내가 이 길에 끌린 것도 초기의 전방후원분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고대사 최고의 수수께끼 유적은 바로 이 전방후원분이다. 
일본 고유의 묘제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은 일본역사에서 ‘고분시대’라고 따로 분류할 정도로 4~7세기 나라분지와 오사카평야를 중심으로 거의 일본 전역에서 축조되었다. 앞쪽은 사각형의 방형이고 뒤쪽은 원형을 이뤄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쇠구멍처럼 생긴 특이한 형태는 물론, 거대한 규모에서도 단연 눈길을 끈다. 오사카평야 한가운데 자리한 다이센(大仙) 고분은 4세기말의 닌토쿠(仁德) 천황릉으로 비정되는데 전체 전방후원분 중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분구의 길이가 486m, 원분의 직경 245m, 높이 35m로 바닥면적 기준에서는 중국 진시황릉(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76m)에 이은 세계 2위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147m로 가장 높기는 하지만 바닥면적은 한변 230m의 정사각형이다. 오래 전 시마노 본사로 출장을 갔다가 이 고분을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계적인 자전거부품업체 시마노 본사가 이 다이센고분 바로 옆에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과 일본 고대사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이센 고분이었다.       
원래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의례는 대단히 전통적이고 의식화되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열도에서 느닷없이 4세기중반부터 이 희한하게 생긴 거대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가야와 백제계 도래인이 열도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초기 왕조를 열었다고 한다면 묘제가 비슷해야 할텐데 전혀 다르니 일본은 물론 국내 학자들도 이 전방후원분의 미스터리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수많은 발굴과 조사가 이뤄졌지만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초기 고구려와 백제에는 사각형의 방분이 있었지만 가야와 신라는 원분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묘제가 종합된 것일까. 일본 고대에는 앞뒤가 모두 사각형인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과 방분, 원분 등 무덤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하필이면 왜 전방후원분이 주류가 되었는지 실타래는 더욱 엉켜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영산강 유역에서도 전방후원분이 13기나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토유물로 보아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시기적으로 일본의 초기 전방후원분보다 뒤지고 규모도 40~80m로 작아서 전방후원분의 한반도 유래설은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일본 전방후원분의 출토유물은 가야와 백제와 관련된 것이 많고 후원부 정상에 있는 매장지는 수직으로 파내려가 돌로 벽을 장식한 수혈식 석실묘(또는 석곽묘)로 가야의 묘제와 흡사하고, 후기에는 백제계통의 횡혈식 석실분도 나타나 한반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내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열도에서 건너온 왜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누구인지, 왜 한반도 남부에 전방후원분으로 묻혔는지는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다. 

일본은 마을 중간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묘지가 있다. 중세시대 절은 종교시설이면서 주민의 출생·사망 신고를 겸하는 일종의 관부 역할도 했다. 때문에 마을의 절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묘지가 형성되었다
길에서 처음 만난 안돈야마(行燈山) 고분. 실질적인 야마토 조정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스진(崇神) 천황의 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실존 자체도 분명치 않다. 길이 242m의 대규모임에도 해자까지 두르고 있어서 가까이서는 전모를 보기 힘들다
오사카부 사카이(界) 시에 있는 다이센고분. 4세기말에 재위한 닌토쿠(仁德) 천황릉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자 안쪽의 분구만 길이 486m, 높이 35m로 면적에서는 세계 2위의 어마어마한 규모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거의 똑 같은 것이 출토되어 백제와의 연관성이 주목된다
안돈야마 고분 바로 남쪽에 있는 시부타니무카이야마(澁谷向山) 고분. 제12대 케이코(景行, 재위 71~130) 천황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가 300m에 이르며 능선을 활용해 산기슭에 비스듬히 축조되었다
구글어스로 본 안돈야마 고분(위)과 시부타니무카이야마 고분. 오른쪽 미와산 자락이 흘러내린 능선 끝단을 활용해 능을 축조한 것이 확연해 보인다
미와산 서쪽 자락, 야마노베노미치 일대에 분포한 고분들(출처 前方後圓墳の出現と日本國家の起源, 2016, 角川文化振興財團)

 

최초의 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과 관련해 최근의 일본 학계 연구성과를 봐도 축조시기와 분포, 형태 분석이 정밀화되었을 뿐 총체적인 미스터리 해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각 무덤의 주인도 정확히 몰라 추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왕릉급 무덤은 천황가를 관리하는 궁내청에서 ‘누구의 무덤으로 인정한다’는 식으로 밝히고 있는 정도다.   
일본 학계는 대규모 전방후원분은 크기와 부장품으로 봐서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의 무덤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다만 일본 최초의 야마토정권이 자리한 오사카평야, 나라분지 등 키나이(畿內) 지방 외에 규슈와 혼슈 동부까지 넓게 분포하는 이유는 아직 중앙집권체제가 갖춰지지 않아 각지방을 지배하는 수장급 호족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형식으로 동경(銅鏡) 등의 위세품을 하사하며 전방후원분의 묘제를 같이 쓰는 것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본에서는 이를 ‘수장(首長) 연합체제’라고 부른다. 우리의 가야연맹이나 백제의 담로제와 비슷한 지방분권체제다. 
그렇다면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생겨난 계기는 무엇일까. 3세기중엽 키나이지방에 갑자기 엄청난 권력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덤의 규모와 화려함은 피장자가 살아생전에 누렸던 권력 혹은 그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공포심과 비례하기 마련이다. 이는 피라미드와 진시황릉 같은 초거대 고분에서 공통된다. 일본 원주민들에게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던 정복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고대에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정복자는 공포정치를 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반란을 막고 복종을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소노카미신궁에서 야마노베노미치를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는 나라분지가 광활하고 왼쪽으로는 당시 주민들이 숭앙했을 미와산(三輪山, 467m) 줄기가 풍성한 볼륨의 능선을 흘러내린다.
길은 밭두렁을 지나기도 하고 작은 산촌도 거쳐 간다. 이윽고 먼저 나타난 안돈야마(行燈山) 고분은 실질적인 야마토 조정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스진(崇神) 천황의 능이라고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일본 고대사를 말할 때 ‘결사팔대(缺史八代)’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계보는 있지만 행적이 없어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1~9대 천황을 말한다. 스진천황(재위 BC 97 ~ BC 29)은 제10대 천황으로 실존한 최초의 천황으로 보거나 제1대 진무(神武) 천황과 같은 인물로 여기기도 한다. 사실 이 능이 스진천황의 무덤인지도 분명치 않다.
전방후원분 형태의 무덤은 길이가 242m로 규모가 상당하다. 가만히 보니 산에서 흘러내려온 자연능선을 활용해서 축조한 것이 분명하다. 바로 위쪽에 있는 쿠시야마(櫛山) 고분도 같은 능선을 잘라서 축조했다. 이렇게 능선을 활용해서 축조한다면 훨씬 공역을 줄이면서 규모는 크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대는 오야마토 고분군이라고 해서 대소 10여기의 전방후원분이 모여 있는데 그중 4기는 산 능선을 활용한 것이 분명하고, 고분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만들었을까 궁금했는데 초기에는 이처럼 자연구릉을 최대한 활용해서 만들어 상대적으로 축조가 쉬웠을 것이다. 봉분을 쌓는다기보다 능선을 깎아내고 다듬으면 되기 때문이다. 
스진천황릉에서 남쪽으로 500m 거리에는 마치 서로 마주보기라도 하듯 비슷한 규모의 대형 전방후원분인 시부타니무카이야마(澁谷向山) 고분이 또 있다. 제12대 케이코(景行, 재위 71~130) 천황의 능이라고 하지만 케이코 천황 자체가 실존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길이가 300m에 이르며 역시 능선을 활용해 산기슭에 비스듬히 축조되었다. 마주한 두 릉의 방향이 각기 다른 것은 능선의 방향에 따르느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후기로 갈수록 전방후원분은 남북방향을 이룬다.
이처럼 자연지형을 활용한 거대 고분은 중국에도 있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乾陵)은 평지에서 200m나 솟은 피라미드형의 산을 활용해 거대한 무덤으로 축조해 도굴을 대비했다. 다만 중국의 이런 거대무덤은 묘실을 찾기 어렵지만 전방후원분은 원분 정상부에 묘실을 두고 있어 도굴 방지 목적은 아닌 듯하다. 묘실의 위치가 분명한 대신 해자를 파서 접근을 막은 것 같다.    
케이코 천황릉을 한 바퀴 돌며 다시 한번 이처럼 거대한 무덤을 누가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궁금증이 더한다. 흔한 원분이면 이해가 갈텐데 도대체 원분 앞에 붙은 각진 둔덕은 무슨 용도란 말인가. 시신은 원분 정상에 있으니 전방의 둔덕은 제단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원분에 제단을 붙여 만들면서 점차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나 싶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최초의 전방후원분을 보면 될 것이다. 그 역시 이 길 가까이에 있다. 나는 야마노베노미치에서 벗어나 서쪽의 들판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라분지 한가운데 있는 백제 마을과 백제사가 다음 목적지다. 도중에 최초의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진 하시하카(箸墓) 고분을 지나간다. 3세기 초의 여왕 히미코(卑彌呼)의 무덤으로 전해지며 길이 290m, 후원직경 157m의 대규모다. 중국 위나라 역사서인 위지(魏志) 왜인전을 보면 히미코는 일종의 ‘무당(샤먼)’이었던 것 같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샤머니즘은 중앙아시아~동아시에 걸친 유목민족 사이에서 절대적인 종교이자 일상의 신조였다. 신라와 가야 초대 왕들은 모두 샤먼으로 제정일치 사회였음은 익히 밝혀진 바다. 고대 일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히미코가 왕이었던 소국 연합체의 대표격인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은 규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여튼 일본 학계에서는 시기적으로 볼 때 하시하카고분을 히미코의 무덤으로 보는 것 같다. 위지 왜인전에는 히미코가 죽자 직경 100여보의 큰 무덤을 만들고 노비 100여명을 순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미코는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설화와 연계되어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아달라왕 20년(173년) 조에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앞서 <삼국유사>에는 아달라왕 4년(157년)에 그 유명한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연오랑이 바다를 건너가 일본의 왕이 되고, 뒤따라 세오녀 역시 일본으로 가서 왕비가 된다는 설화다. 이 세오녀가 히미코가 아닐까 하는 설인데 어차피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뭔가 연결고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시하카고분의 주변 지형을 볼 때 이 역시 들판 깊숙이 내려온 산줄기 끝자락을 활용해서 축조한 것이 분명하다. 전방부는 산줄기를 완전히 끊어내 원분으로 만들기보다 능선을 다듬어 제단으로 활용하면서 전방후원분의 형태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어쩌면 순장된 100여명의 노비를 묻기 위해 딸린 무덤으로 구상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방부에서 순장묘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한반도 남부인 영산강 유역과 전남 해안 지역에서 13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다. 사진은 광주 월계동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국내에서는 장고를 닮았다 해서 ‘장고분’이라고도 한다)
3세기 왜국 최초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하시하카(箸墓) 고분. 길이 290m, 후원직경 157m의 대규모로, 지금은 희미하지만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를 활용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시하카의 모식도. 단층이 져 있고 후원부보다 낮은 전방부는 제단 혹은 순장지로 추정된다

 

백제마을 
지도를 보고 대략 방향을 가늠해서 들판을 가로지른다.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들판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어느 길을 가더라도 걱정이 없다. 계속 가다보면 소가강(曾我川)이 나올 것이고, 소가강만 따라가면 강변에 있는 백제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라분지를 적시는 수많은 물줄기는 모두 야마토강으로 모여 오사카만으로 흘러든다. 소가강은 분지 남단에서 발원해 중심부를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야마토강의 지류다. 소가(蘇我)는 한자는 다르지만 6~7세기 일본 왕실을 좌우한 권력가 집안의 성씨다. 백제계로 알려진 가문의 성씨는 이제 강 이름으로 남아 천년을 더 흐를 것이다.
위치로 봐서는 케이코 천황릉에서 정서쪽으로 쭉 가면 되는데 도중에 지그재그로 오가서 막상 소가강을 만났을 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구글지도를 켜고 내비게이션 기능을 활용하면 간단하지만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나치게 편리한 이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방향을 스스로 가늠하고 길도 알아서 찾아가야 이 땅과 한층 깊고 은밀한 대화가 가능하다. 마침 지나는 촌로에게 물어 방향을 잡았다.
저편으로 높직한 목탑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니 3층탑이고 백제사(百濟寺)라는 안내문이 서 있다. 백제라는 이름을 여기서 만나니 우선 반가움이 앞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39년 죠메이(舒明) 천황 때 백제천 옆에 백제대사를 짓고 9층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에는 백제궁을 지어 이사했고, 641년에는 백제궁에서 붕어했다고 되어 있다. 이 정도로 백제에 집착한 것을 보면 죠메이천황은 백제계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
하여튼 소가강의 원래 이름은 백제천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탑은 가마쿠라 중기(13세기)에 만든 것이고 다른 곳에서도 큰 절터가 발견되어 이곳이 원래의 백제대사 터가 맞는지는 분명치 않다. 절이 있는 마을 이름도 백제(구다라)라고 하고 주변에는 ‘백제’가 들어간 지명이 흔하다. 죠메이 천황은 이 일대에 제2의 백제를 만들려고 구상한 것만 같다.
백제를 일본어 훈독으로 ‘구다라’라고 읽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일본인도 모른다. ‘없다’ ‘아니다’는 뜻의 접미사 나이(ない)를 붙여 ‘백제가 아니다’라는 뜻의 ‘구다라나이’라고 하면 ‘볼품없다’는 뜻이 되어 구다라가 ‘고급’ ‘상품’의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 문화를 전해준 상국이었으니 구다라는 ‘큰나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그럴 듯해 보인다.
다시금 의문이 든다. 도대체 백제는 고대 일본과 정말 무슨 관계였단 말인가. 오사카만부터 여기 나라분지까지 곳곳에 있는 백제의 흔적과 유적, 일본 역사서에 수없이 등장하는 내용까지, 상식으로 생각해도 두 나라는 단순한 동맹을 넘어서는 것이 분명하다. 

백제사 방면으로 가기 위해 나라분지 들판으로 내려섰다. 일본 고대사의 신비를 간직한 미와산(三輪山, 467m, 오른쪽)이 저만치 물러섰다
나라분지 한가운데를 흐르는 소가강 강변에 서 있는 백제사(百濟寺) 3층탑. <일본서기>에 따르면 639년 죠메이(舒明) 천황 때 백제천 옆에 백제대사를 짓고 9층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는 소가강이 아니라 백제천으로 불렸던 것 같다

 

미미나리산의 저쪽  
소가강을 따라 계속 남하한다. 목표는 저 멀리 평야 가운데 마치 대양의 섬처럼 떠 있는 미미나리산(耳成山, 139m). 미미나리산은 아스카시대(538~645) 직후 도읍이 있던 후지와라쿄(藤原京, 694~710)가 진산으로 삼은 곳이다. 높이는 낮지만 평야지대에 홀로 솟아 있어 이목을 끌고 어딘가 특별한 느낌을 준다. 나라분지가 이미 해발 70m 정도여서 실제 높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미미나리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우네비야마(畝傍山, 199m), 동쪽에는 아마노카구야먀(天香久山, 152m)가 삼각형을 이루며 후지와라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세 산은 야마토삼산(大和三山)이라고 특별히 대우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본다면, 진산이 되어야 할 미미나리산이 너무 작고 남쪽은 높은 산악지대가 가리고 있어 배산임수의 기본기도 갖추지 못해 휑한 느낌을 주지만 직전의 도성인 아스카에서 가까워 이곳에 도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미미나리산을 뒤로 돌아가니 궁궐터만 들판 가운데 공허하다. 일부 건물터는 초석에 기둥 아랫동만 빨갛게 칠해 복원해 놓았다. 후지와라쿄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미미나리산을 포함해 야마토삼산을 외곽선으로 삼으면 그 안쪽의 영역이라야 동서 2km, 남북 3km 정도다. 한쪽에서는 발굴 작업이 진행중인 것을 보면 아직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고대사에 민감한 일본에서는 의외다.
우네비야마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인이 이 산을 특별히 신성시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재위했다는 전설적인 제1대 진무천황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신화속의 가공 인물로 보지만 이렇게 버젓이 무덤과 그를 모시는 가시하라신궁(橿原神宮)까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태도로 참배도 한다. 어쩌면 역사와 신화를 혼동하는 것은, 아니 신화를 역사로 믿고 싶은 것은 어느 민족이나 당연하다. 진무천황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분은 한 변이 120~133m의 완벽한 사각형 방분(方墳)이다. 형태로 보면 초기 고구려나 백제의 방형 적석분과 흡사하다. 무덤 주위는 일본숲 특유의 음침하면서도 어딘가 귀기가 어린 듯한 분위기다.  

보지만 이렇게 버젓이 무덤과 그를 모시는 가시하라신궁까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태도로 참배도 한다. 고분은 한 변이 120~133m의 완벽한 사각형 방분(方墳, 오른쪽 사진)이다. 형태로 보면 초기 고구려나 백제의 적석분과 흡사하다

 

아스카, 아스카    
이제 후지와라쿄의 남단에 있는 작은 언덕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로 향한다. 저 언덕 주변이 바로 일본 역사의 여명기를 연 아스카(飛鳥) 지역이다.   
아스카는 사실상 일본의 고대사가 잉태된 곳이다. 나라분지의 남쪽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한 터는 약간 좁고 북면을 하고 있어 방어적인 입지다. 세토내해를 건너온 도래인 세력은 오사카만에 처음 자리 잡았다가 바다로부터의 침략에서 다소 벗어난 나라분지로 옮겨왔을 것이다. 처음에는 분지 중심부로 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밀린 백제의 공주 같은 임시수도처럼 방어에 유리한 남단의 산자락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이렇게 7세기 이전 일본 문화의 여명이 밝아온 터전이 바로 아스카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를 바탕으로 최초의 통일국가 야마토(大和) 정권이 수립되었으니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어딘가 우리와 연이 닿아있는 것만 같다.
나르는 새(飛鳥)를 아스카라고 읽는 데는 ‘나라’처럼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새’ 하면 그 모양을 형상화한 우리의 솟대가 먼저 떠오른다. 솟대는 일본에서 신성한 장소를 알리는 도리이(鳥居)로 변형되어 보편화되었다.  
아스카는 한자로 ‘明日香’ ‘安宿’이라고도 쓰는데, 일본어로 아침이 ‘아사’이고 명일이 내일이니 내일의 땅이란 뜻일까. 안숙도 ‘안슈쿠’로 읽다가 ‘아스카’로 되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편안히 머물 수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하지만 현대 일본어에서 안숙은 ‘야스야도’로 읽어 ‘값싼 숙소’의 의미로 와전되었다.     
아스카 여정의 기점으로 잡은 아스카역은 요란하지 않고 소박해서 마음이 푸근하다. 행정구역상으로 아스카는 우리의 면에 해당하는 촌(村)에 불과하고 인구는 5500명 정도다. 그래도 유명한 고도인데 역사는 거의 간이역 수준이고 역전에는 가게도 몇 곳 없는 완연한 시골이다.
훌쩍 가까이 다가선 나지막한 산들은 일본 특유의 표독한 산세와 달리 풍만하고 넉넉해서 꼭 우리의 산야를 보는 듯하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주축이 된 당시, 이 땅을 수도로 잡은 이유를 알만하다. 내가 지금 느낀 그대로 그들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아스카는 일반적인 단체 관광보다 자전거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어 역전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고 역에는 간단한 코스 지도도 비치해 두었다. 물론 걸어서도 가능하지만 20km 정도 되어 보행으로는 당일로 어렵고, 자전거로는 하루 일정에 최적이다. 나는 주요 유적의 설명까지 곁들인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아스카를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길과 농로를 오가면서 하나하나 유적을 찾아보는 것은 노천박물관의 보물찾기 같아 흥미를 더해준다. 가장 먼저 간 곳은 고구려 무용총을 닮은 벽화가 있는 타카마쓰(高松) 고분. 백제 외에 고구려도 아스카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에서는 성인으로 모시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태어났다는 타치바나데라(橘寺)의 화려함과 그 맞은편으로는 회랑 주춧돌만 남은 카와하라데라(川原寺)의 폐허가 대비된다. 발 닿는 곳마다, 구비를 돌 때마다 등장하는 유적에 설렘이 가시지 않는다.
아스카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아스카의 석조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이시부타이(石舞台) 고분이 장중하다. 봉분은 사라지고 230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곽만 남았다. 아스카시대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소가(蘇我) 씨 가문을 처음 일으킨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백제계로 알려진 소가노 우마코의 권력이 얼마나 엄청 났으면 왕릉을 능가하는 이런 무덤을 쓸 수 있었을까. 원래는 한변 60m의 사각형 방분이었다니 초기 백제의 왕릉과 같은 맥락이다.        
다시 아스카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들판 가운데 우물과 건물의 바닥돌만 남은 이타부키궁(板蓋宮) 터를 지난다. 당시에는 왕들이 거처했을 텐데 이렇게 건물터가 작은 것은 그만큼 초창기 왕권이 미약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름부터 ‘나무판자로 덮은 궁전’이니 아주 질박한 건물이었던 것 같다. 4대 54년 간 외척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린 소가 씨가 최후를 맞은 곳도 여기였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고쿄쿠(皇極) 천황 면전에서 살해당한 현장이다(을사의 변, 645). 이후 왕을 정점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대화개신(大化改新)도 이곳에서 이뤄졌고, 이를 계기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오사카만의 나니와로 천도하면서 아스카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타부키궁에서 500여m 내려가면 소가노 우마코의 발원으로 창건된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가 길가로 소박하다. 지금은 작은 절이지만 원래는 면적이 210×320m의 대규모였다. 절 옆에는 소가노 이루카가 죽을 때 그의 목이 날아와 떨어졌다는 머리무덤(首塚)이 있다.
이제 저 앞에 보이는 아마카시 언덕에 올라 아스카와 나라분지를 내려다볼 것이다. 언덕 아래에는 소가노 우마코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아스카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게 되는 이름은 소가씨와 쇼토쿠태자인데, 쇼토쿠태자도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다. 소가씨는 도래계가 확실해 보인다. 선대로 올라가면 나오는 소가노 마치(일본어:蘇我満智)는 백제의 권신인 목만치(木滿致) 또는 목협만치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이상한 것은 후대의 이름이다. 소가노 마치의 아들은 소가노 가라코(蘇我韓子)이고, 손자는 소가노 코마(蘇我高麗)다. 이후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우마코-에미시-이루카로 계보가 이어진다. 만지(滿智)는 백제계 이름이고, 한자(韓子)는 가야, 고려(高麗)는 고구려를 뜻하니 한반도 삼국이 이름에 다 들어가 있다. 카라코와 코마는 각각 가야와 고구려 며느리에서 난 아들이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럴듯하다.
언덕 위에 오르니 남쪽으로는 아스카 일원이 산자락에 아늑하고, 북쪽으로는 드넓은 나라분지가 광활하다. 이곳에서 보는 석양이 특히 아름답다고 해서 일부러 기다렸더니 사진기를 든 사람들 몇몇도 나처럼 서성인다. 아스카까지 돌아보아도 심증은 더욱 굳혀지지만 여전히 확증은 없어 미로를 헤매는 듯 마음이 명쾌하지 않다. 일본인들이 굳이 인정하지 않고 혹은 숨기려드는데 우리가 매달려 한일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만들어봐야 무슨 소용일까도 싶다. 그러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사실로서의 역사는 함께 직면해야 한다.        
오사카만과 나라분지를 가르는 카츠라기산(葛城山, 959m) 능선 위로 태양은 서서히 내려앉고 분지 곳곳에는 아스라이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국의 나그네는 천년의 사향(史香)을 그윽하게 드리운 들판을 눈에 익은 듯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경주에서, 부여와 공주에서 보았던 바로 그 풍경 그 느낌 아닌가.

백제사 주변에는 백제라는 이름이 흔하다. 백제들판을 볼 수 있는 전망코스(뷰로드)라는 안내문이 소가강 둑길에 서 있다
나라분지 남쪽 우네비야마에는 기원전 7세기에 재위했다는 전설적인 제1대 진무천황의 무덤이 있다. 신화속의 가공인물로
아스카시대(538~645) 직후 도읍이 있던 후지와라쿄(藤原京, 694~710)는 공터로만 남았다
아스카 대표적인 유적인 이시부타이(石舞台) 고분. 봉분은 사라지고 230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곽만 남았다. 아스카시대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백제계 소가(蘇我) 씨 가문을 처음 일으킨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한변 60m의 사각형 방분이었다니 초기 백제의 방형 적석총과 유사하다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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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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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5 15:39:35

    쿠다라나이가 백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설에 불과한 거죠.
    그 이전 부터 사용되어 왔던 말이라고 합니다.
    3가지의 설이 있는데
    1. 위(아마도 왕)에서 관동으로 보낸 술이 아닌 관동의 맛 없는 술(下る)
    2. 본문의 백제 관련
    3. 불교의 다라(ダラ)라는 아홉개(九つ)의 가르침에 해당되지 않는 행동
    3도 그 이전 부터 사용되어왔던 말이라 하나의 설에 불과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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