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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돌아온 ‘뽈락선생’ 김태진 신임 한국산악자전거협회 회장“좋아하는 자전거와 평생 함께 하고 했으니 저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뽈락선생’ 김태진 (전 코렉스자전거 대표) 신임 한국산악자전거협회 회장 
“좋아하는 자전거와 평생 함께 하고 했으니 저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태진 전 코렉스자전거 대표는 자전거 업계에서는 특별한 존재다. 코렉스자전거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까지 역임했고, 업계에서는 드물게 자전거를 취미로 즐기는 최고경영자이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도쿄사이클디자인전문학교(TCD)로 유학을 떠나 3년간 자전거 디자인과 제작과정을 배우고 왔다. 4월초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오랫동안 몸담은 한국산악자전거협회 회장으로 재추대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뽈락선생’은 어떻게 지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

 

 

업계 지인들에게는 영문 이니셜 ‘TJ’라고 친근하게 불리는 김태진(62) 전 코렉스자전거 대표는 기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본지 창간 직후이니 벌써 17년 전이다. 본지를 창간하고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자가 적이 놀라고 실망한 사실은, 의외로 자전거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자전거는 그냥 비즈니스 아이템일 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태진 코렉스자전거 상무는 자전거로 통근을 했고, 젊은 직원들과 곧잘 라이딩을 다니는 대단한 자전거 매니아였다.
큰 덩치에 언제나 푸근한 웃음을 짓는 그는 첫인상부터 ‘호인’이었고 인상 그대로 매사에 긍정적이고 관용적이었으며, 업무에서는 지시보다 직접 앞장서는 모범을 보였다. 당연히 인간적으로 그를 따르는 직원도 많았다. 

 

도쿄에서 자전거로 귀국하는 길에 들린 히로시마 이쓰쿠시마신사(嚴島神社). 자전거는 직접 만든 크롬몰리 프레임의 ‘바다미’

 

일본열도 일주, 도쿄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귀국

30년 가까운 자전거 업계에서 은퇴 후 잠시 시간을 가진 그는 갑자기 일본으로 자전거 유학을 결행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표적인 자전거기업의 CEO까지 지낸 그가 무슨 이유와 목적으로 유학을 떠나는지 궁금했다. 역시 그의 설명은 남달랐다.
“30년간 자전거 업계에 몸담아왔지만 현장에서 이뤄지는 설계와 용접, 부품 조립 과정을 내 손으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과정을 몸으로 체험하고 정확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내 자전거 인생이 온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는 최근 3년간 도쿄사이클디자인전문학교(TCD)에서 유학하는 동안 방학을 이용해 일본열도 4개 섬을 자전거로 일주했다. 귀국길도 자신이 직접 만든 크롬몰리 자전거 ‘바다미’를 타고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부산을 거쳐 서울까지 2000km를 라이딩으로 왔다.
4월 6일 서울 도착 후 바쁜 시간을 가진 그는 5월 초에 본지 사무실을 찾아왔다. 마침 한국산악자전거협회 회장으로 재추대된 지 며칠 후였다. 


― 귀국 후 바쁘셨을텐데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3월 15일 도쿄를 출발해 4월 6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아들도 제 귀국일에 맞춰 결혼식을 잡아 4월 20일에 결혼식을 치르느라 바빴지요.”
결혼식에는 기자도 초청을 받았는데 코렉스자전거 창업주인 김한중 회장, 김병철 MBS 대표 등 업계 관계자도 대거 모습을 보였다. 예전에 함께 일한 직원들도 식장을 찾을 것을 보면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 심각한 국면에 처한 국내 자전거시장의 실상에 놀라지 않으셨는지요.
“예상보다 심각해서 놀랐습니다.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제 생각에는 점점 늘고 있는 실버세대가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나마 판매가 늘고 있는 전기자전거도 실버세대와 어울리고요. 친환경과 건강, 여행까지 모두 챙길 수 있는 것은 자전거뿐이라는 걸 적극 알려야 할텐데요.”
  

― 일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일본도 자전거시장은 좋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시장이 위축되고 있어요. 일본은 우리와는 시장의 특성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자전거는 일상화되어 있어서 통근, 통학 용도로 주로 쓰이기 때문에 고정 수요가 유지됩니다. 지금도 역마다 주차된 자전거가 엄청납니다. 시장이 줄긴 했어도 레포츠 위주의 우리처럼 심각하지는 않아요.”


항상 웃고 느긋한 긍정왕 

― ‘김태진’ 하면 개인적으로는 늘 웃고 여유 있는 표정과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떠오릅니다. 일본 일주 당시에도 어려움이 닥치면 꼭 귀인이 나타나 도와주곤 했는데 그것도 대표님의 그런 마인드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저는 코렉스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모두 겪었습니다. 회사에 새로운 부서가 생길 때마다 제가 발탁이 됐는데 그러다 보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지 않으면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렇게 지내다보니 자연히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더군요.”
TJ의 긍정마인드는 이미 그와 한 몸이 되어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주위 사람도 그 밝고 믿음직한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한국인에게는 매우 드문 스타일로 그처럼 긍정적이고 관용적인 사람을 기자는 별로 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얼마 전에 한국산악자전거협회 회장으로 재취임 하셨습니다. 시장도 그렇고 협회의 상황도 좋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신임 회장으로서 어떤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계신지요. 
“한국산악자전거협회는 MTB 초창기인 1992년에 창립되었고 저는 95년에 인연을 맺었어요. 제5회 코렉스배 MTB대회 때 담당 팀장을 맡으면서 협회와 일을 같이 했지요. 협회는 영리보다는 자전거의 홍보, 캠페인, 이벤트 등을 통해 시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힘든 길이지요.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협회명도 MTB가 아니라 ‘자전거’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초기에 MTB 문화를 알릴 때 모토가 된 ‘길이 아니어도 좋다’가 상징하는 도전과 인내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회장직을 맡았지만 자전거는 저의 취미이자 직업으로 평생 함께 해왔기 때문에 자전거를 위해, 희생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협회 임원이 젊고 다양한 계층으로 물갈이 되어서 기대가 크다고 했다. 협회가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는 대회와 이벤트 사업은 지자체나 자전거 업체보다는 자전거의 친환경 이미지를 공감하는 일반기업과 공동주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201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교촌치킨 대회는 좋은 선례가 되고 있다. 

젊은 시절을 온통 바친 코렉스자전거 근무 당시
코렉스자전거 시절 아들과 함께

 

 “매일 아침 학교에 가고 싶어 가장 먼저 등교했다”

― 일본 자전거 유학 3년을 자평하신다면
“한마디로 ‘잘 다녀왔다’입니다. 자전거 인생 30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겁니다. 군생활처럼 길고 고독한 시간이었지만 즐겁고 유익했어요. 유학 초기에 후지산에 올랐다가 일본에 온 김에 뭔가 특별한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어요. 그게 일본열도 자전거 일주였는데 계획대로 다 해냈으니 그것도 큰 수확입니다.”

― 당초 도쿄사이클디자인전문학교(TCD)로 유학을 가게 된 이유와 목표는 무엇이었는지요.  
“TCD는 자전거 전문기술을 배우는 곳입니다. 한국 자전거산업의 성공과 몰락을 지켜보고 현장에서 생산관리와 품질관리를 담당한 사람으로서 자전거 자체의 메커니즘과 제작 시스템을 제대로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파이프 절단과 용접, 디자인까지 다루는 자전거 전문학교는 동양에서 TCD가 유일해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니 그동안 배운 기술로 무얼 할거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데… 글쎄요, 시기와 여건이 맞으면 제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말을 아꼈다. 협회 회장 외에 당장 자전거와 관련된 일을 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3년간 유학으로 배운 것을 활용할 방안을 내심 모색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 TCD 시절이 특별히 행복하고 유익했던가 봅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고 싶어 가장 일찍 등교했고 3년 개근을 했습니다. 등교하면 파이프를 자르고 용접하고, 부품을 만들어 조립하는 것이 힘들어도 흥미로웠어요. 학교까지는 자전거로 통근하고, 집에 와서는 자전거 미니어처를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온종일 자전거와 함께 하다보니 어서 아침이 와서 학교에 가고 싶은 겁니다. 학창시절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웃음).”

 

도쿄사이클디자인전문학교(TCD)에서 완성한 바다미
TCD에서 용접 실습하는 모습

 

동아시아 자전거산업의 도미노 현상

― 90년대 한국자전거산업의 전성기와 몰락을 몸으로 겪으셨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원인이 뭐라고 보시는지요. 
“코렉스에 있을 때 2년간 삼천리를 앞선 적이 있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어요. 연간 120만대 규모의 동양최대 공장을 가동하며 전량 수출할 만큼 경쟁력이 높았습니다. 그러다 87년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임금이 급등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자전거는 인건비 부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입니다. 당시 용접공만 120명이 있었고 자동용접기를 개발하기도 했지만 상용화에 실패해 결국 인력에 의존해야 했어요. 자전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외장이 없어 내부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용접 마무리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하고 조립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합니다. 인건비가 올라가자 수출경쟁력은 급락했고 생산기지는 우리보다 임금이 싼 대만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코리아 엑셀런트(KOREA EXCELLENT)’에서 따온 코렉스는 결국 2009년 회사가 넘어가고 김 회장은 새 인수자와 함께 잠시 공동대표로 있다가 물러난다. 2010년 코렉스는 알톤스포츠에 인수되었고 지금은 알톤의 마이너 브랜드 중 하나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코렉스는 ‘KOREA CAN DO’에서 따온 코란도(KORANDO)와 함께 80~90년대 한국공업의 한 상징이었다.


― 국가경제 규모의 큰 안목에서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
“우리나라는 정치와 경제의 밀접한 관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정부는 대기업과 중공업 육성 정책을 강력하게 펴왔어요. 코렉스나 자전거업체는 대기업도, 소기업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노동집약적 산업에다 인원은 많고 인건비가 올라가니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대만은 중소기업을 육성했고 가족기업이 많아 자전거산업에 적합했어요. 자전거에는 200개 정도의 부품이 들어가는데 각각의 부품 업체들은 모두 소규모입니다. 우리는 대구 성서공단에 있던 자전거 부품업체들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동차 부품업체로 돌아섰지요. 국가경제적으로는 자동차나 조선, 전자 같은 중공업이 유리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실제로 코렉스는 전성기에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있던 일본업체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일본이 가장 먼저 자전거산업에서 철수하자 우리나라를 거쳐 대만, 중국으로 점차 저임금을 찾아 산업의 중심지가 옮겨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국도 고임금으로 한계에 이르러 인도로 가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자전거 용어순화 교재 직접 만들어

― 코렉스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처음에는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해서 그쪽 관련 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우연한 기회에 코렉스에 입사하게 되었지요. 그때 현장 직원들이 힘들다고 불평하면 저는 ‘노가다’와 ‘공돌이’ 중 뭐가 더 힘드는지 아느냐며 되물어요. ‘공돌이’는 그래도 주말에 쉴 수 있지만 ‘노가다’는 비 오는 날 외에는 쉴 수 없어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요. 94년에 서울 판매법인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자전거를 잘 팔려면 더 깊이 알아야겠다 싶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어요. 그 좋아하던 낚시도 끊고 6개월쯤 타면서 사람들을 만나니 자전거가 몸에 익고 트렌드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95년 고급 브랜드 프로코렉스를 론칭했는데 제가 팀장을 맡아 카탈로그 문구까지 직접 썼습니다. 시장에서는 이런 제품이 인기 있다고 개발팀에 주문을 하고, 영업팀에게는 우리 제품의 장점이 이러저러 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중간역할을 했습니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표이사까지 올라간 것은 개인적 역량과 노력, 더불어 신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들려 주었다. 상무 시절, 한 영업사원이 대리점에서 ‘니기리’를 주문했는데 그게 뭐냐고 물었단다. 당시만 해도 일본어가 흔히 쓰이던 시절이라 신참 영업사원은 이 용어를 몰랐던 것이다(니기리는 ‘그립’의 일본어). 그는 당장 자전거와 관련된 용어 전체를 정리해 20시간짜리 교육용 교재를 만들었다. 이때 본지를 참조했다고. 기자 역시 당시 업계에서 일본어 용어를 사용하는데 놀라 용어 순화를 위한 기사를 계속 실었던 기억이 난다.
    

― 일본은 그나마 우리보다 시장 상황이 나은데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일본도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무엇보다 풍부한 재원이 있습니다. 자전거도 재원이 있어야 홍보를 하고 인식을 바꾸며 보급을 늘릴 수 있거든요. 일본은 경륜 수익금의 일부가 일본자전거진흥회에 들어가 자전거 문화행사, 이벤트, 시설 투자 등에 활용됩니다. 어린이날 자전거 행사, 핸드메이드 자전거 쇼 등도 진흥회에서 주관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경륜을 시행하지만 수익금은 자전거 활성화에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들은 재미있는 얘기인데, 역도산이 자전거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겁니다. 역도산이 한국출신이란 걸 모르는 일본인이 많아요. 하여튼 자전거를 좋아한 역도산은 일본산 자전거가 그의 큰 체구를 받쳐주지 못하자 이탈리아에서 치넬리 자전거 6대를 사와서 일본 업계에 주며 똑 같이 만들어보라고 했다는군요. 일본은 40년이면 어떤 명품이나 고급기술도 똑 같이 만들어낸다는 전통이 있다는데 역도산의 지원으로 일본 자전거산업이 크게 발전했다는 겁니다.”



한국은 레저위주, 일본은 일상용도

― 이번에 도쿄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귀국하시면서 양국의 자전거도로 상황이 명확하게 비교가 되셨을텐데요. 
“우리의 4대강 자전거도로는 대단하지요. 일본에는 이런 정도의 자전거길이 없습니다. 대신 일본은 접근이 좀 달라요. 일반 국도도 갓길이 넉넉해서 전국 어디든 도로를 따라 자전거여행하기가 좋은 편입니다. 우리는 강변에 멋진 자전거도로가 갖춰져 있어 레저용으로는 좋은 대신 일상생활과 다소 유리되어 있다면, 일본은 일상에서 타기 편하다고나 할까요. 우리나라는 강줄기를 따라 전국 규모의 장거리 여행을 하기는 정말 좋지요.” 
  

― 국내는 공공자전거 확산과 미세먼지, 전반적인 경기 부진으로 자전거시장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절망적인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기도 한데요.
“이 모든 게 자전거를 우습게 알고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형마트에서 미끼상품으로 가장 많이 할인하는 것도 자전거예요. 저가 중국산 자전거를 들여온 공공자전거는 원칙적으로 자전거에 대한 인식을 떨어뜨립니다. 자전거도 옷과 같아서 자기 몸에 맞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고 운동효과도 높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아이들의 통학과 장보기용으로 주부들이 주로 타는 ‘마마챠리’가 시장을 주도합니다. 아이를 태우고 장을 봐야 하니 자기 자전거가 아니면 안됩니다. 일본에도 공공자전거가 도입되고는 있지만 크게 보급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호대기중인 마마챠리에서 엄마와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참 부러워요. 아이들이 참 정서적으로 성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통학차에 태워주면 끝이잖아요. 한국에는 자전거를 못 타는 여성이 많다고 하면 일본사람은 이해를 못해요.”
일본은 어릴 때부터 엄마가 태워주는 자전거로 통학을 하고, 조금 더 크면 자신의 힘으로 자전거 통학을 하면서 자전거와 자연스럽게 친숙해 진다. 인구는 우리의 2.5배지만 자전거시장은 10배나 되는 일본의 저력이다. 반면 우리는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낮고 편견이 많아 학교와 직장은 자전거 통근에 부정적이고, 자전거 통행을 막는 경우도 허다하다.
김 회장은 안면도 솔밭길에 자전거 통행을 금지한 데 놀랐고, 자동차가 들어가는 통도사 진입로에서 자전거 통행을 막는 데는 경악했다고 한다.
“젊은층은 ‘멋’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면 멋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유명인 중에 자전거를 타는 분이 나선다면 효과가 클 텐데요. 성인에게는 ‘건강 + 절약 + 친환경’ 테마로 어필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겠지요.”
평생 자전거인으로 살아온 그는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는 국내 자전거시장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대책이 별로 없고 여건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탄식했다. 인터뷰 후에는 세태를 안주 삼아 막걸리로 회포를 푸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최북단 땅끝인 소야미사키(宗谷崎)에서 오호츠크해를 배경으로
낚시를 매우 좋아해서 ‘뽈락선생’이란 별명을 얻었다
TCD 유학시절 많은 신세를 진 정희마마(왼쪽 아래)와 지인들
귀국 길에 힘든 하코네고개를 올라 도착한 아시노코. 분화구에 물이 고인 칼데라 호수다
일본 일주의 대단원 시모노세키 칸몬대교(關門大橋)에서. 이제 부관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간다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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