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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 3(서울 남산)-영원한 가객 배호그의 노래로 남산을 돌다

대중가요의 골목길 3(서울 남산)
영원한 가객 배호 
그의 노래로 남산을 돌다


배호의 열성팬들은 그의 생일이 들어 있는 4월에 술렁인다. 올해로 23회 째인 ‘배호가요제’는 그가 짧은 생을 거의 보낸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다. 29살 봄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가수의 노래가 50여년이 넘도록 대중의 노래로 애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난과 병마, 그 신고(辛苦)의 세월에 기대어 부른 절절한 노래에는 모창으로는 복사할 수 없는 눈물의 비표(秘標)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 배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의 절반 이상이다. 애국가의 남산, 목멱대왕(木覓大王) 남산을 한 바퀴 돌며 배호의 노래를 따라가 보는 길은 그를 추억하는 나만의 트레일이다. 중절모를 눌러쓴, 건방지게 멋진 배호는 여전히 팬들의 가슴에 살아 있다

 

남산 한옥촌에서 출발하는 남산 한 바퀴

충무로역에 내리자 별들이 반겨준다. 흘러간 스타에서부터 요즘 대세를 이루는 청춘스타까지 포스터 속 얼굴들은 낯익다. 대종상의 화려한 역사는 여느 곳과는 다른 이 지하철역의 여백에 자리 잡고 있다.
벚꽃이 지고나면 신록이 시작된다. 배호의 노래를 따라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출발은 ‘남산한옥촌’이 제격이다. 아랫단 충무로에서 남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가는 봄을 못 이긴 여인들이 동창회의 이름을 빌어 모이고, 외국인들은 반짝이로 변질된 한복을 입고 찍은 인증사진을 자랑하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대한극장 앞 퇴계로는 여전하다. 70미리 상영관으로 격조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다시 지어 싱싱하고, 맞은 편 진양상가는 50년 전 허우대 그대로 늙었어도 건재하다. 애완견들이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거리는 사라졌으나, 수입상들이 오토바이를 길에 도열하며 유혹하던 퇴계로는 한 블록 건너에 여전히 성업 중이다. 서울의 3대 냉면집에 드는 평양면옥과 장충동 족발촌이 이름을 날리는 거리가 끝나는 어간에 추억의 과자집 태극당이 있다. 그 길 건너편이 장충단공원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지나간 골짜기, <안개 낀 장충단공원>
평일의 장충단공원은 한가한 숲이다. 남산의 동쪽 종남산(終南山)이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골짜기로 흘러내리다 첫번째로 평평한 곳이 장충단 자리다. 장충단은 우리 근대사의 기울어가는 왕조의 끝에 만들어진 슬픈 징표다. 명성황후가 일인 자객에게 시해 당한 을미사변(1895, 고종 35년)때, 최후를 함께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졸의 영혼을 배향한 장소다. 털보 홍계훈은 최근작으로 화제를 모은 드라마 <선샤인>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골짜기의 역사와 비극은 서로 얽혀져서 시대에 따라 색깔을 달리해 왔다. 반공의 이데올로기는 타워호텔에서부터 자유센터로 이어지고, 전통의 이데올로기는 국립극장에서부터 흘러내리면서 ‘3·1 독립운동기념탑’과 ‘유관순 동상’으로 이어진다. 일제의 ‘장충 흔적 지우기’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박문사를 세우며 절정을 이룬다. 그 터에 영빈관과 신라호텔이 들어서서야 마침표를 찍는다.
가난하던 시절 만들어진 장충실내체육관은 김기수의 통쾌한 복싱 타이틀매치와 박치기왕 김일이 안토니오 이노키를 때려눕히던 순간 함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황소가 등장하는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는 체육관대통령의 원적지이기도 했다. 수십만 시민을 불러 모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1971년 ‘장충단유세’ 대결에는 나무 위에까지 청중이 올라가 박수를 쳤다. 지금 장충단은 벼랑으로 가는 정치와 안개 자욱한 이 나라의 운명을 말없는 고목처럼 지켜보고 있다.
노래로 돌아가자. 장충단을 널리 알린 공로로 말하면 배호만한 이가 없다. 안개로 수식한 장충단은 떠나간 여인을 못 잊어하는 추억의 노래로 깊이 새겨져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로 히트한 지 몇 달 뒤에 나온 <안개 낀 장충단공원>은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는 전문가의 평에도 불구하고 연속 홈런을 친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라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안개 낀 장충단공원> 
최치수 작사/배상태 작곡/배호 노래/아세아레코드, 1967


장유정 교수의 말대로 ‘지하 8층까지 내려간다는 공포의 저음’과 바닥까지 끌고 가서 밀어 올리는 절절함이 배어나온다. 몇 번을 들어봐도 배호는 ‘장춘단’이란 발음으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유제하의 ‘가리워진 길’에 등장하는 안개는 어떡하든 헤쳐 나아가야하는 진행 방향의 안개이나 배호의 ‘장충단공원에 낀 안개’는 골짜기에 자욱하게 머물러 있는 안개다. 유제하의 안개는 보일 듯 말 듯 하나 그래도 가야하는 몽롱한 불안이지만 배호의 안개는 쓰라린 이별과 연인과 함께 새긴 그 이름을 추억하는 몽환의 스모크(smoke)다.
언덕길을 오르면 ‘남산제2호터널’이다. ‘유관순 동상’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유사시 방공호 용도로 만들어진 터널은 장충단과 이태원을 연결하지만 낡고 비좁아 보인다. 자유센터의 숙박동으로 지어졌다가 타워호텔이 된 건물은 자전거로 오르기에는 조금 버거운 정상에서 맞아준다. 한때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은 청춘들이 밤을 새우는 선망의 장소였다. 이젠 휴양형리조텔 ‘반얀트리 클럽 & 스파 서울’로 다시 태어났지만 누구나 접근하기에는 역시 힘든 언덕에 있다.
남산을 감싸 안고 돌아가는 길에는 남산맨션이 낡았어도 그 뛰어난 입지 덕에 명품 아파트로 남았다. 좀 더 위쪽에 있던 ‘남산외인아파트’는 1972년 외국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지은 아파트였다. 1994년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남산 제모습찾기’의 한 부분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폭파하여 공원이 되었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남산공원이 회현동에서 올라 케이블카를 타고, 팔각정까지 올라가는 코스였다면 한적하게 숲을 즐길 수 있는 길은 힐튼에서 하얏트에 이르는 소월길 위쪽으로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남산을 제대로 조망하는 일은 이제 멀리서도 쉽지 않다. 진작부터 한남동 북단 남산허리를 잘라 들어선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조망만으로도 단연 서울 최고다. 세상이 어벙하던 시절에 선점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준다.
삼각지로 가기 위해 경리단길로 내려간다. 소위 몇 년 전만 해도 청춘들로 북적이던 ‘뜨는 길’이 이젠 ‘가라앉는 길’로 보인다. 이 내리막처럼 ‘임대중’이란 삐뚤빼뚤한 글씨가 서글픈 ‘젠트리피케이션’의 무대임을 보여준다.
녹사평에서 삼각지로 가는 길은 양쪽으로 미군 담벼락의 호위를 받는다. 미8군사령부가 평택으로 떠나고 나서도 ‘한미연합사’가 잔류하고 있으니 청나라 군대에서 일본군대까지 병영의 흔적을 지우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4강의 간섭과 분단의 비극 속에서 의지와 조력의 상관관계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에게 이 정도의 땅은 어쩌면 오래도록 조차지(租借地)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에 자리 잡은 ‘남산한옥촌’은 도심 속 한옥의 정취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어 내·외국인에게 두루 인기 있는 명소다
70㎜ 대형 스크린으로 이름 날리던 대한극장이 새로 지어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충단은 을미사변의 유공자인 구한말 충신의 넋을 기리는 제단이나 일제가 공원화 시켜버렸다

 

‘남산 제2호 터널’은 교통소통과 유사시 방공호 용도로 만들어졌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남산에 구멍을 뚫어 기가 다 빠져나가버렸다”고 한탄했다

 

사라진 서울의 명물 삼각지 입체로터리, <돌아가는 삼각지>
1967년 12월 삼각지에는 회전 입체교차로가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고, 참석을 예정했던 배호는 참석하지 못했다. 총 연장 1085m의, 이 돌아가는 공중로터리는 순식간에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 한 바퀴를 돌아가다 시골관광버스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한 바퀴를 돌면 1년을 더 산다고 해서 7번을 걸어서 돌았다는 시골 노인 이야기도 있다. 덕분에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돌아가는 삼각지>를 레코드 가게마다 틀어댔다. 해병대에서 제대한 작사가 배상태가 삼각지 근처 통술집에서 지은 가사를 이인선이 손을 보아서 공동 작사곡이 된 노래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 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돌아가는 삼각지> 
이인선·배상태 작사/배상태 작곡/배호 노래/아세아레코드, 1967


비에 젖은 사나이가 찾아온 삼각지 주변에는 선술집이 빼곡했고, 양공주도 많이 살고 있어 별의별 사연이 다 있었고, 어쩌면 근처 문배동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배상태는 잃어버린 옛 사랑이 난리 통에 헤어진 부인이거나 애인일 수도 있고, 부모형제, 자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1994년, 지하철이 지나가며 안전을 고려해 노후된 입체교차로는 철거되어 사라진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회전로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해서 ‘울면서 쓸쓸히 돌아가는’ 노랫말 속 사나이의 그림자는 더욱 서글프게 팬들의 가슴에 박혀 버렸다.

광복과 6·25의 그늘, 강인한 삶과 계단식 주택 ‘해방촌’
전쟁기념관 입구를 지나 남영역에 이르기 전에 뒷골목으로 빠지면 미군부대 담장 사잇길이다. 적산가옥 몇 채가 일인들이 살던 한 시대 용산의 마지막 징표로 남아 있다.
해방촌은 남산 자락에 매달리듯 살아가는 계단식 논을 닮아 있다. 원래가 일제 때 일본군 20사단 사격장과 일본 육군형무소, 일본군 막사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다.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청 소속이 되었다. 관리가 느슨했던 터라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들어왔고, 6·25 피난민들이 악착같이 붙어살게 된 마을이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기약 없는 짐보따리를 풀어헤친 자리였다. 오늘날 제 집 갖기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청춘들이 더디게 진화하는 독특한 마을 풍경에 매력을 느끼면서 옥탑방으로 또는 쪽방으로 찾아든다. 젊은 세대의 박탈감과 가늠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쩌면 오래전 해방촌 원주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느끼던 막연함과 닮아 있어 안쓰럽다.
용산중학교 정문에서 동남쪽을 올려다보면 그 유명한 ‘해방촌 108계단’이다. 무릎이 성치 못한 노인에게 고역일 수밖에 없는 계단에 경사형승강기가 최근에 만들어 졌다. ‘복지만세’이긴 하나 구청장 이름을 떠억 하니 새겨 놓은 꼴불견도 참아내야 한다.
자전거의 매력을 후암동 뒷골목에서 유감없이 즐긴다. 후암시장은 서울역 앞의 고층건물들 속에서 더욱 낮아 보이지만 사람냄새만은 더 물씬 풍긴다.


이별과 상봉의 원표 서울역, 보내야 할 <당신>
서울역이다. 1900년에 경성역으로 태어난 서울역은 조선호텔을 지은 일본인이 비잔틴 건축양식의 펜던티브를 이용한 중앙돔 양식으로 1925년에 지었다. 서울역 시계 아래서 근·현대사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이별과 상봉이 이루어졌다.
내가 처음 본 서울역 앞 풍경은 지금도 여전한 순화동 방향 낮은 건물위에서 돌아가던 아이디얼 미싱의 네온사인 실물 광고였다. 서울의 화려한 이미지에 끌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소년들을 벗겨 먹고 사는 족속들의 은거지도 서울역 앞이었다. 힐튼호텔 아래 카지노 자리에 있던 양동 골목에는 사창가의 희미한 불빛과 쪽방의 어둠이 오래도록 공존했었다.
서울역 철길을 가로질러 고가도로가 생겨날 때 재건 한국의 망치질이 조국 근대화를 강건하게 했다. 배고픈 사람들은 대한민국 제1호의 파출소인 서울역전파출소 북쪽 의주로에서 염천교 방향의 길가에 앉아있는 떡장수 앞을 서성거렸고, 먼 길 떠나는 이는 신문지를 잘라 만든 봉지에 담아 파는 바람떡과 시루떡을 들고 밤 열차를 타곤 했다. 이제 서울역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서울로’라는 이름의 공중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만리동 사람들의 반대도 잊혀 가고 있다. 땡볕에 그늘조차 없으니 찾는 이가 줄었다고 비난하지만 이름도 낯선 식물을 가꾸어 가는 노력만은 평가해 주어야 할 일이다.
배호가 서울역에서 부르는 노래는 어떤 곡이 제격일까. <안녕>? <굿바이>? 모두가 어디에서나 있음직한 이별이어서 너무 확장성이 큰 노래다. 배호를 생전에 만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언론인 이태호의 해설을 듣고 보니 <당신>이 바로 서울역에서 부르는 노래여야 한다는데 무릎을 쳤다.


보내야할 당신 마음 괴롭더라도
가야만할 당신 미련 남기지 말고
맺지 못할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사랑한 것이
싸늘한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의 상처 되어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당신
맺지 못할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사랑한 것이
싸늘한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의 상처 되어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당신
<당신> 
전우 작사/나규호 작곡/배호 노래/신세기레코드, 1969


그냥 불러보면 애절한 이별의 노래다. 신분의 차이이거나 맺지 못할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절함 정도의 노래로도 볼 수 있다. 시작부터 ‘보내야할‘ 당신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이란 대목은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떠나는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할 운명까지 예감한 다짐인지도 모른다.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이 광복군의 특수임무 전사였다는 점에서 이 노래를 해석하면 저 떠나는 이는 조국광복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평선은 말이 없는 북만주나 남중국 머나먼 땅으로 가야하는 <당신>일 수 있다. 남편의 무운장구를 비는 비장한 다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보는 눈물 젖은 아내의 손길, 그 기약없는 이별이 역두에서 이루어진다.

국립극장 앞에서 본 ‘반얀트리 클럽 & 스파 서울’, 옛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을 기억하는 청춘들도 이미 은퇴한 세대가 되었다
‘남산생태공원’은 도심에서 삼림욕하기에 딱 좋은 장소다. 멀리 ‘그랜드 하얏트호 텔’이 보인다
고층 건물에 가려서 남산을 조망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중이다(조용연 자료사진)
경리단길 언덕. 흥청거리던 시절도 옛말이다. ‘임대중’이란 안내간판이 상권이 살아나면서 임대료 인상을 견디지 못한, 기존 상인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실감나게 한다
전쟁기념관 광장. 참전 16개국을 비롯한 지원 국가 깃발이 펄럭이는 6·25 전쟁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서울시민이 사랑한 국민의 산 남산, <비오는 남산>
숭례문을 돌아 남산언덕으로 오른다. 남산의 정수리에는 세 개의 뿔이 심어져 있다. 남산타워와 방송·통신용 송수신 철제 탑이다. 작가 김훈은 “거대한 주사기 같은 남산타워는 인류가 대도시에 세운 구조물 중 가장 추악한 기념비”라고 혹평했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남산 정수리에 쇳덩이가 꽂히고, 속에 구멍 3개가 뚫려 있어 남산의 기가 다 빠져 나간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제 산을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바라보며 달려 내려간다. 골동품 수준의 케이블카라서 가끔 공중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1970년대에는 남산의 상징이자 남산데이트의 필수 코스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계단에는 사주팔자를 봐주고 용돈을 챙기는 노인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총 찬 놈을 만날 것’이라는 점괘를 뽑아준 덕인지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던 처녀는 군인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옛 노래들이 남산을 배경으로 삼았다. <남산 마님>(이미자), <서울의 모정>(패티김), <달뜨는 고아원>(박재홍), <남산 부르스>(오기택), <추억의 남산>(남상규), <남산 엘레지>(양부길), <남산 나그네>(명국환), <추억의 남산길>(정석풍), <남산 팔각정>(서동진), <남산의 화가>(남미랑) 외에도 더 숨어 있으리라.
우리의 배호는 남산에서도 혼자 밤비에 젖는다.


눈물을 흘려서 강물을 더해주고
한숨을 쉬여서 바를 더해져도
야속한 그대에 가버린 후에는
너무나 무정하여라
차욱차욱 추억만 쌓여진 거리 나 혼자 거닌다 
 
그 님을 불러서 메아리 더해주고
가슴을 치면서 슬픔을 더해주어도
떠나간 그대 또 다시 못 올 때
너무나 가슴아파라
주룩주룩 밤비만 내리는 남산 나 혼자 왜 왔나
<비 오는 남산> 
이인선 작사/배상태 작곡/배호 노래/아세아레코드, 1967


아무래도 사랑이란 머무르기보다 떠나가기 쉽다. 사랑의 속성이 본디 그렇다. 사랑이 완결된 환희는 이내 가정의 테두리에 갇힌 일상이 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그 미완의 테두리가 더 선명해진다. 그렇게 배호는 “나도 아프다”고 상처받은 사나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옛 동보성 자리에 들어선 중국대사관 영사부 골목으로 내려오면 퇴계로다. 불타던 대연각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은퇴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흑백텔레비전으로 일본에까지 생중계되던 대형건물의 화재, 침대 매트리스와 함께 뛰어내려 숨지는 사람들, 거기서도 살아나온 기적도 있었다. 무학성 카바레가 있던 건물에 화재가 나면서 새로 지은 건물이 대연각이었다. 두 번이나 불이 나기도 드문 일인데 그 터에는 강한 화(火) 기운이 서려 있었나 보다.
배만금(배호의 본명)이 큰외삼촌 김광수가 운영하던 무학성 카바레 사환으로 취직하여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었다. 사교춤이 광범위하게 퍼졌던 1960년대, 신문 하단의 손톱만한 광고는 모조리 ‘땐·땐·땐’ 댄스 교습광고였다. 전쟁의 상흔이 아물어가며 세상이 조금씩 여유를 찾게 되던 때에 밥을 굶어가며 드러머로, 가수로 커 가는 배호. <배호와 그 악단>을 만들고 8년간 200여곡의 빛나는 노래를 선사하고 20대에 생을 마친 가객 배호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마저 해야 하겠다.

 

해방촌은 신세대에게 신기한 예술적 심미의 공간으로 다가온다(조용연 자료사진)
삼각지로터리, 입체회전교차로가 사라진, 진짜 삼각지에 자리 잡은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용산은 미군이 오래도록 주둔하고 있는 사실상 조차지이다. 미8군이 한국가요사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해방촌 언덕으로 올라가는 ‘108계단 경사승강기’가 설치되어 주민들에겐 복음과도 같다. 구청장 이름을 새긴 표지석이 옥에 티다
석양의 해방촌은 ‘어떡하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몸으로 보여주는 계단식 논 같다
서울역 고가차도를 리모델링해 만든 ‘서울로’에서 본 서울역 풍경. 수많은 상봉과 이별이 저 시계탑 아래서 이루어졌다

 

그 시절 청년 문화의 메카 명동, <비 내리는 명동거리>
충무로 입구, 옛 본정통에 들어선다. 진고개의 시작이다. 중국대사관 앞으로 난 뒷길로 접어들면 평일에도 시끌벅적한 명동이다. 이 땅에서 값이 가장 비싼 땅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곳, 젊음은 예나 제나 명동의 불을 밝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물건을 사고, 서로의 눈길을 마주하며 커피를 마시지만 박인환이나 이봉구 시대의 명동이 주는 예술적 아취는 고사하고 오비스캐빈의 통기타와 생맥주의 분위기조차 찾기 어렵다.
국산 화장품이 차지한 길목, 손수레에 실려 나온 먹거리들이 막아선 차 없는 거리는 이미 베이징의 왕푸징거리를 닮아 있다. 사회주의 중국이 우리의 사드배치를 트집 잡아 ‘한국단체여행금지령’을 내린 여파는 명동거리의 힘을 빼기도 했지만 서서히 회복해 가고 있는 듯 보인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사나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 못하고
사나이 가슴 속에 비만 내린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
뜨거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울면서 떠난 사람아
나를 두고 떠났어도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해 잊을 수 없다
외로운 가슴 속에 비만 내린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백영호 작사· 작곡/배호 노래/지구레코드, 1970


이제 이 명동거리에는 떠나버린 사랑을 애달파 하며 추억에 가슴을 쥐어뜯는 별리(別離)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갈테면 가라지” “너보다 잘난 여자, 남자 쌓이고 쌓였다”는 마지막 막말이 엔딩으로 등장하는 쓸쓸한 시대가 우리는 낯설다.
배호의 노래 다섯 곡만으로 남산을 안고 돌아왔다. 자전거는 타는 코스보다 걷는 코스가 더 길었으나 추억에 잠기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다른 노래를 끼어 넣는다면 배호와 나만의 공감대가 끊어질 것 같아 오로지 그의 노래만을 나직이 불렀다. 배호의 노래가 하나같이 비나 눈물에 젖었다고 사랑과 이별의 비탄이 전부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그의 노래는 사랑을 깊이 새긴 마음, 이별을 녹여낸 아픔, 행복을 비는 진심의 송가다. 사나이기에 통곡 대신 어깨를 들썩이는 밀봉된 울음으로 참아야 하던 배호 그 시대의 사랑과 이별법을 우리는  따뜻하게 기억해야한다. 

길을 가다가 ‘서울로’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 보는 여인. 조율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럭저럭 칠만 하다고
서울역파출소 앞 지하도 입구에는 노숙자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오래 전에는 아낙들이 양은 ‘다라이’에 이고 나온 떡을 경찰관의 단속을 피해 팔던 곳이다
염천교는 서울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다리다. <울며 헤진 염천교>라는 영화까지 나온 이별의 장소다
퇴계로 대연각 자리에 들어선 고려 대연각타워 빌딩. 첫번째 화재가 나기 전 이자리에는 배호가 처음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무학성’ 카바레가 들어 있었다
명동거리는 평일에도 사람에 밀려다닌다. 예술이나 옛 흥취는 간 데 없고, 길거리 음식과 값싼 물건 좌판이 길을 점령하고 있다

 

 

4월 24일을 기리는 사람들, ‘배호가요제’
올해로 23년째를 맞는 <배호가요제>는 중구청이 후원한다. 중구청 강당에서 하던 예년의 행사를 장충단공원으로 끌어냈다. 예전처럼 중절모를 쓰거나 선글라스를 쓰고 나와 청중을 즐겁게 해주었던 ‘배호 따라하기’는 주최측의 제지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배호곡과 일반곡으로 구분하지만 배호의 노래가 절대적이었다. 젊은 청중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호의 추억으로 관객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전국 곳곳에서 설익은 가요제가 자치단체 주관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비하면 이 가요제는 팬들이 만들어 이끌어 왔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가요제도 상업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가요제 이후의 가수활동이나 처녀곡을 취입할 여건이 되는지 여부를 예심 이전에 미리 알아보는 단계는 그 옛날 레코드사들이 경향 각지에서 노래 꽤나 한다는 청춘남녀들 가운데  보물을  발굴해 내려는 노력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세월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려 이런 행태를 배호가 살아 돌아와 보면 뭐라고 말할까.

‘배호가요제’의 초대 가수로 참석한 안다성 선생. 이제 가요무대의 사라져가는 별이다

 


참고자료
1.배호평전, 이태호, 눈빛, 2015
2.배호평전, 김선영, 소담출판사, 2005
3.대중가요110년의 기록 <향수>, 아이넷tv
3.<노주석의 서울살이>, 남산 제1봉수대와 미군통신탑, 서울신문, 2017. 7. 21.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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