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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락선생의일본편지-도쿄~서울 자전거 유랑기 ③귀국선은 밤에 떠난다, 이별 눈물 보이기 싫어…

도쿄 ~ 서울 자전거 유랑기 ③
귀국선은 밤에 떠난다, 이별 눈물 보이기 싫어…


오사카부터 시모노세키까지는 줄곧 2번 국도를 기본으로 서향한다. 세토내해는 내내 절경으로 따라붙고 일본최고의 자전거코스 시마나미해도 초입도 지난다. 이윽고 히로시마, 그리고 일본 3대 절경이라는 미야지마를 거쳐 마침내 혼슈 최서단의 야마구치현에 들어선다. 이제 부관페리가 출항하는 시모노세키는 지척이다. 마지막날 조용히 쉬면서 3년의 일본 체류를 정리해본다. 99% 즐거웠으니 좋은 기억을 새삼 아로새긴다고 해야 할까. 귀국선의 뱃고동이 울린다. 그나마 밤에 떠나서 다행이다. 사나이 눈물을 감춰주고 있으니…

 

일본 3대 절경이라는 히로시마현 미야지마의 해상 도리이. 마지막 시모노세키까지 일본 여정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0일차 3월 24일
가코가와 ~ 히메지

꿈꾸는 히메지성
어제 밤엔 친구 평수가 전화를 했다. 자전거로 하는 여행이 힘들지 않냐, 혼자서 심심치 않냐고. 솔직히 힘들고 피곤도 하지만 쓸쓸하거나 심심할 틈이 없다. 조수석에 편안히 앉아서 하는 자동차여행도 몇시간만 지나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땡기는데 자가 동력으로 매일 100여km를 이동하는 건 결코 쉽지는 않다.
사실 몇년 전에는 끝없는 오르막 중턱에 퍼질러 앉아 왜 이 고생일까 하는 근본적인 후회도 했지만 이제는 즐기는 여유도 생겼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기관리만이 꾸준히 멀리 갈 수 있다. 주행거리는 하루 100km로 정하고 오후 5시 이전에 라이딩을 마친다. 점심은 육류 등으로 든든히, 저녁은 간단하게, 술은 딱 한잔이다. 9시에 일찍 잠자리에 들면 4시30분이면 절로 눈이 떠진다.
새벽에 일어나면 심심할 새가 없이 나름 바쁘다. 전날의 일기가 시작된다. 먼저 지도와 팜플렛으로 지나온 코스 확인, 휴대폰의 사진 정리와 간단 메모를 토대로 일기와 사진이 첨부된 블로그가 완성된다. 그리곤 오늘의 코스와 주요 포인트를 정한다. 호텔의 7시 아침식사 시간까지 마치려면 정말 바쁘다. 그래도 서둘다간 자칫 자료가 한꺼번에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 뿅~~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초보 라이더는 불안하니까 앞사람의 히프만 보다가 여행이 끝난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경력이 붙다 보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름의 해석도 생겨난다. 흔한 표지판이나 간판도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스쳐가는 풍경이 아니다. 특히 흥미있는 것이 나오면 자전거는 그냥 멈추면 된다. 그러면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저기 신호등 앞의 무표정 아지매에게 인사를 던지면 우물에 기름 한방울 떨어진 것처럼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퍼진다. 옆의 꼬마는 손만 흔들어줘도 빙그레다. 편의점에서 야끼소바를 먹고 있는 내 또래는 자전거로 동네를 돌고 있단다. 자전거 일본 일주의 꿈도 심어준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생각하지만 뽈락은 안장위에서 생각하고 오르막에서 몰입할 수 있다.
재미있는 포즈의 사진에 딸 갱이 대체 사진은 누가 찍어주느냐고 궁금해 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런 저런 폼을 잡으려면 내공이 필요하다. 순간의 쪽팔림이 영원을 기록한다.
오늘은 가코가와시(加古川市)에서 출발이다. 어제 묵은 호텔은 최악이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호텔 이름 아제리아 꽃향기 대신 아제리아를 키우는 퇴비냄새가 난다. 덩그런 침대에 욕탕 하나 있는, 서부영화의 장고가 묵었던 싸구려 호텔이 떠오른다. 그래도 잘 자고 아침도 일부러 든든히 먹고 인사도 꾹 참고 공손히.
자동차전용도로로 변덕이 심한 2번 국도와 결별하고 250번 국도를 택했다. 지도상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이라 마음에 든다. 오늘의 최대 관심사인 히메지성(姬路城)은 항구 근처에서 7km를 거슬러 히메지 시가를 지나니 보이기 시작한다. 도쿄 황궁 다음으로 넓은 부지에 주변에 높은 건물도 없어 그야말로 멀리서도 아스라하다. 흐린 하늘의 배경은 성이 꿈을 꾸는 듯, 내가 꿈결에서 보는 듯하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해자에는 나룻배가 흐르고 사쿠라몬 목재다리 옆에는 수양버들의 파릇한 잎사귀가 하늘거린다. 어슬픈 엑스트라 수문장과 한 컷하고 성으로 들어선다. 흰 회벽과 살짝 치켜든 회색 지붕선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백로의 모습이다. 중앙에 우뚝한 천수각을 중심으로 늘어선 누각들의 스카이라인이 절묘하다. 송이송이 맺혀있는 벚나무는 꽃을 피울 날을 손꼽고 있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히메지성을 둘러싼 해자는 에도시대 풍의 작은 조각배가 유람선으로 운행된다
히메지성 입구의 사쿠라몬 목재다리 앞에서 바라본 성채

 

 

11일차 3월 25일
아코 ~ 후쿠야마
숨겨진 보석들
여행은 내가 모르는 낯선 곳, 즉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또한 재미있는 영화의 장면도 붙잡고 싶어도 흘러가고 마는 것처럼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한다. 이 나이에 여기를 언제 또 오겠어? 하고 생각하면 더 절실해서 좀 더 자세히 봐서 새겨 두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자세히 보고 느껴서 머리에 콕, 가슴에 콕콕 새기려 하고 있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항상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들, 적절한 날씨와 만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그야말로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나는 보석들은 보약처럼 나의 영혼을 풍부하게 해준다.
히메지에서 시작된 250번 국도는 해안선을 따라 구비치는 길이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 있는 세토내해는 리아스식지형과 섬들이 있는 바다가 잘 어울려 국립해상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손가락처럼 들쑥날쑥한 지형을 따라 물처럼 길은 흐르고 있다. 왼쪽에 툭 터인 바다를 보면서 싱그러운 바람이 볼을 스친다. 그래서 ‘seaside road’란다. 온 몸의 세포가 춤을 추듯 반응한다. 길도 S자를 수 없이 그리며 춤을 춘다. 문득 TCD에서 자전거 휠 조립을 한 생각이 난다. 휠의 밸런스를 위해 스포크 텐션을 조정해야 하는데 좌우 조정은 비교적 쉬운데 상하조정이 어렵다. 내가 가는 이 길도 좌우로 굽이치면 커브요, 상하로 오르락내리락 하면 고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상하보다는 좌우가 많은 기분 좋은 길이다.
어제 머물렀던 효고현(兵庫縣)의 아코시(赤穗市)는 예정에 없던 곳이다. 연 3일 동안 계속되는 쌀쌀한 날씨와 누적피로에 지쳐 있는데 멀리 자전거가 보인다. 한 눈에 봐도 포스가 느껴지는 자전거 여행자의 모습이다. 아이치현(愛知縣)이 고향인 30대의 챈마루라고 소개한다. 앞뒤로 패니어를 달고 뒤에는 스페어타이어를 걸쳤다. 자전거 프레임에는 케르빔이란 반가운 데칼이 붙어 있다. 바로 TCD 곤노 선생의 회사 브랜드이다. 이 친구도 곤노상을 잘 안단다. 공통분모가 생겼으니 급 친해졌다. 지금 일본 종단여행중이란다. 2월 21일 홋카이도를 출발하여 큐슈로 가서 비행기로 오키나와로 간단다. 그래서 4월 20일경 마칠 예정이란다. 한국에 오라고 했더니 10월 아프리카 여행 마치고 생각해 보겠단다. 핸들바에 액션캠을 장착하여 인터넷 방송도 진행한단다. 어쩌면 뽈락도 방송을 탈 수 있을지~
아코시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 옛 아코성의 흔적을 보존해 놓고 있다. 깨끗한 도로와 씻은 듯이 빛나는 해송 가로수, 2층 상점이 늘어선 길을 지나면 소박한 흰 회벽과 잿빛 기와가 이어져 있는 성이 보인다. 풍경이나 내음이 흡사 해미읍성에 온 기분이다. 성안에 들어서면 건물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이나 나무판을 깔아 표시를 했고 잔디와 모래로 산책로를 만들었다. 하얀 목련이 환하게 반긴다. 주변에는 장군들이 살던 집도 있고 창고 같지만 예술품 같은 민속자료관도 서로 기대어 섰다. 이른 아침에 호젓한 바다미와의 산책은 뜻밖에 만나는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다음에 꼭 다시 오려고 팜플렛을 잘 챙겼다.
오늘은 효고현의 언덕을 넘어 오카야마현(岡山縣)에 들어와 오카야마시에서 덴뿌라소바 정식을 먹고 아찔한 고가도로, 고마운 터널, 쭉 뻗은 2번 국도를 달려 히로시마현(広島縣)의 후쿠시마 아니 후쿠야마(福山)에 도착했다. 3일 동안 80km 내외의 부진을 딛고 장장 125km를 쾌속질주한 셈이다. 이런 에너지는 모두 숨겨진 보석들이 준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효고현을 지나 오카야마현에 들어선다. 오카야마의 환영 표지석
아코시에 있는 아코성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차분한 분위기로 잘 보존되어 있다
효고현 아코시 호텔에서 새벽에 나서자 산뜻한 공기와 적막감이 반긴다
30대의 챈 마루는 인터넷 방송을 하며 2달에 걸쳐 일본 종단여행 중이다

 

 

12일차 3월 26일
오카야마 ~ 히로시마
아, 히로시마!
후쿠야마 호텔에서 토스트와 우유, 소시지로 간단히 아침을 들고 서둘러 떠난다. 히로시마까지 110km나 되고 오르막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함께 했던 2번 국도를 계속 따라간다.
오늘은 맑게 갠 푸른 하늘이다. 상쾌한 아침의 공기처럼 깨끗한 포장도로에 바다미도 즐겁다. 어느덧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에 연한 포구의 역 앞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사이클의 성지 시마나미해도의 혼슈 출발점인 오노미치(尾道)이다. 자전거 여행자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렌탈 자전거 샵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 이맘때 시코쿠 여행을 하면서 이곳의 반대쪽인 이마바리(今治)에서 출발해 바로 오노미치 코앞에서 돌아갔었는데…. 그때는 그냥 히로시마라고 알았지만 히로시마현이기는 해도 히로시마시까지는 100여km 떨어져 있다.
시마나미해도에 홀려 3일간 머물렀단 얘기를 들은 바다미는 당장 가잔다. 관광도시로 변해가는 이곳도 동네 뒷골목에는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계단식 철길 건널목 신호기는 군데군데 녹으로 세월을 말해주고, 철길 옹벽을 파서 만든 정류장 쉼터가 정겹다. 시골의 초등학교는 아이들의 꿈을 만드는 공장이다.
2번 국도에 이어 잠시 75번 지방도로 옮겼다. 지방도라고 하지만 곧 다시 합류하는 2번 국도의 연결선이었다. 아무튼 미하라(三原)에서는 다시 정상 궤도인 2번 국도를 달린다. 미하라, 다케하라(竹原) 등의 지명처럼 해안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왔지만 넓진 않으나 평원이 계속된다.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것은 없다. 화창한 날씨에 기온도 17도까지 올라 콧노래가 나올 뻔 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남서풍이 강하게 전신을 막는다. 핸들을 꺾어 반대로 돌아서면 순식간에 도쿄로 날아 갈 것 같다. 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람언덕의 저항에 뽈락이 실체임을 실감한다. 그리고 실체의 언덕을 낑낑 오르고 있다.
저 멀리 아주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다. 힘든 표정을 감추고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를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획 돌아서면서 밝게 웃으며 힘내라고 한다. 갑자기 등을 누군가가 힘껏 밀어 주는 것 같다. 화이팅!

히로시마의 그 유명한 원폭돔 옆으로 모토야스 강이 조용히 흐른다. 앙상한 골조만 남은 원폭돔 외에는 주변이 세련되고 깔끔한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주변이 깨끗해서 더욱 처참해 보이는 원폭돔  
히로시마시에 대한 첫 인상은 만점이다. 왜냐면 히가시(東) 히로시마의 길고 지루한 고개를 넘자 바닷가에 있는 히로시마시까지는 기분 좋은 내리막의 꽃길이기 때문이다. 만약 산 정상에 도시가 있다면 이와는 반대이리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조삼모사다. 아무튼 푸른 바다가 보이고 강 하구에 정박된 선박들, 넓은 도로와 싱싱한 가로수, 달팽이처럼 귀엽게 기어가는 노면 전차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히로시마시는 아름다웠다.
먼저 원폭돔을 찾았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게 빨간색 낡은 스웨터에 찌그러진 모자를 쓰고 있다. 평화의 거리로 지정된 거리는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다리도 한층 멋을 냈다. 강물도 푸른빛이 돌고 주변을 깨끗하고 깔끔하게 조성해 원폭돔을 더욱 아프고 잔인하게 연출하고 있다. 흡사 추악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엑스트라를 최고의 천사들로 배치하듯이. 당연히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피해를 보고 아픔을 느끼고서는 후회를 한다. 뒤통수 맞기 전에 겸손과 상생의 지혜를 깨달았다면 서로가 좋았을 건데….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세계적인 자전거코스 ‘시마나미해도’가 시작되는 오노미치. 도로 바닥의 자전거 표시가 반갑다
옹벽을 파내고 설치한 벤치. 살짝 그늘도 지고 인도를 침범하지 않아 기발하다
일본의 강은 대체로 짧고 얕지만 물이 대단히 깨끗하고 주변 산림이 우거져 있다
어느 녹슨 난간에 기대 잠시 쉬고 있는 바다미. “나는 이렇게 녹슬게 하지 마세요!” 하는 듯

 

 

13일차 3월 27일
히로시마 ~ 슈난
일본 3대 절경, 미야지마에서 나래를 펴다
히로시마시의 평화공원 근처 호텔을 나와 원폭돔 주변을 돌아 시가지를 달린다. 새벽 공기가 차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금방 2번 국도를 타고 오르막 램프를 오른다. 어제 긴 내리막을 즐겼으니 당연히 오르막이리라. 땀이 약간 배일만큼 올랐더니 웬걸 자동차전용도로다. 돌아가란 표시도 없고 그냥 자전거와 손수레 그림에 X자이다. 그럼 올라가기 전 입구에 표시를 해놔야지. 허당 공무원 때문에 애꿎은 서민만 헛발질이다.
조깅중인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더니 저쪽 바닷가로 내려가면 옛 2번 국도가 나올 거란다. 내리막길로 반갑게 맞이하더니 간다고 하니 평탄하게 길을 터준다. 이 착한 2번 국도는 사카에강을 건너 야마구치현(山口縣)에 들어서도 계속 평탄하여 정말 밤새 달려도 지치지 않을 듯하다. 바다의 잔잔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고 참았던 눈물처럼 넘실거리는 강물소리도 들려주며 한적한 동네 앞마당으로 안내해주는 상쾌한 길이다.

과연 일본 3대 절경답다. 미야지마는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다

 

바다위에 뜬 도리이 
동네 방파제에 산책 나온 어르신과 얘기를 나눈다. 히로시마의 역사와 지형, 걸어서 일본 일주중인 사람들 등의 이야기다. 그리고는 미야지마(宮島)에는 꼭 들리란다. 당연히 오늘의 메인 이벤트이다.
히로시마시에서 20여km 떨어진 미야지마는 일본 3대 절경으로 이미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어제 간 원폭돔 앞에도 이곳으로 가는 유람선이 있었다. 평일 이른 아침인데도 하쓰카이치의 미야지마행 선착장에는 페리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다행히 배는 여러 척이고 15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다. 바다미 왕복 승선료 200엔 그리고 뽈락 360엔이다. 짧은 거리지만 처음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나온 바다미는 신이 나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코를 벌렁거린다.
사진에서 익히 봤던 바다위에 떠 있는 빨간 도리이(鳥居)가 다가온다. 배에서 내려 바다미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짐을 내려 놓은 바다미도 즐거운지 신발을 통통 튀긴다. 밤을 기다리는 석등이 반기듯이 쭉 늘어서 있고 오랜만에 밟아 보는 마사토 흙길의 쿠션이 전해진다. 사슴들은 지가 이미 사람인 줄 알고 훌륭한 관광안내원 역할과 함께 레이싱걸의 포즈로 관광객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다.
역시 도리이 앞은 문전성시다. 바다에 떠 있는 도리이를 더 자세히 보려고 보트를 타고 접근하는 열성 관광객도 있다. 뽈락도 오랜만에 날개를 펴 봤다. 사진을 찍어 준 일본 여자애들이 재미있다면서 자기들도 그 포즈다. 봉황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감히 뱁새들이 하려 들다니….
갯벌에 다리발을 세워 지어서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이는 이츠쿠시마신사에도 사람들의 유유한 발걸음이 줄을 이어 휘돌고 있다. 어느듯 상가가 즐비한 골목에 들어선다. 넓지 않은 골목의 양쪽으로 깔끔·아담의 상점들이 상냥하게 부르고 있다. 천장에는 넓은 천을 드리워 마치 굴속처럼 아늑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손님들의 지갑을 열려고 한다. 하지만 내 지갑의 자크는 입을 앙다물고 있다. 후후.

나라(奈良)처럼 미야지마에서도 사슴이 자유롭게 다니며 거의 사람 취급을 받는다
뽈락선생, 히로시마 미야지마에서 나래를 펴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동네아저씨는 미야지마를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

 

 

14일차 3월 28일
슈난 ~ 시모노세키
내가 왔다, 시모노세키야!
이제 목적지 시모노세키(下關)까지는 100여km 남았다. 슈난시(周南市) 도쿠야마역 근처 아오야기 호텔에서 어제 이용했던 2번 국도에 오른다.
시모노세키에 얼른 가고픈 뽈락의 마음이 통했는지 날씨도 화창하고 길도 4차선으로 넓게 쫙 깔려 있다. 갓길 인심도 넉넉하고 보도에도 아스콘을 깔아 주행감이 그만이다. 이제 완연한 봄인지 아침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다. 바람막이를 벗으니 훨씬 상쾌하다.
2번 국도는 좌우, 상하로 완만한 굴곡을 그리며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 반가운 터널에는 40cm 높이의 단층에 폭 1.5m의 보도가 별도로 되어 있어 안전·안심하고 지날 수 있다. 그러나 한쪽뿐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이 내가 가는 바닷가 쪽이어서 편하다. 그러나 규칙은 항상 예외가 있다. 이번 터널의 보도는 반대쪽에 있다. 건너기에는 차량 통행이 너무 많아 금방 끝나겠지 하고 그대로 진입했다. 들어갈수록 어쭈? 가 아아! 로 변한다. 가래 끊는 소리가 웅웅거리고 슝슝하고 포탄처럼 지나가는 쇠붙이들의 위협에 긴장하여 핸들 잡은 손바닥에 쥐가 나서 얼얼하다. 희열은 순간이고 고통은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도 길게 느껴져 터널의 길이를 확인해보니 불과 1km도 안 되는데 이렇게 쫄았다.
다시 길은 평온을 되찾아 나아가다가 야마구치시 초입에서 자동차전용도로가 되어 직선으로 내닫는다. 우리는 212번 지방도를 따라 시내를 통과하여 한적한 2차선 도로옆 시골풍경에 눈을 돌린다. 역시 겨울은 북쪽으로부터 내려오고 봄은 남에서 올라오나 보다. 노란 개나리가 활짝이고 유채화도 내가 더 노랗고 화창하다고 발꿈치를 든다.

시원하게 뻗은 길 언덕에 핀 노란 유채꽃이 화사한 기분을 더해준다

 

켓세키가 안 되려고 개근했다?
넓게 시야가 트이며 바다가 보인다. 다시 합류한 2번 국도의 긴 내리막을 신나게 내려온다. 입을 크게 벌리니 상큼한 봄바람이 식도를 거쳐 오장육부를 깨끗이 세척하고 빠져 나간다. 이야호!!! 드디어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이노무세키, 시모노세키야 내가 왔다! 일본말 중에는 우리 욕 같은 발음이 있어 재밌다. 처음 일본어학교의 선생 중에 이세키 선생이 있었다. 예쁘장하고 친절해서 이세키 선생이라고 부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의 부모가 조금만 국제감각이 있었다면 이런 내수용 이름을 짓진 않았을 건데…. 그 선생이 출석을 부르다 결석한 학생을 확인한다. “바쿠상 켓세키데스네”한다. 결석이 일본어로 켓세키(缺席)니까 결석하면 무조건 켓세키가 되는 것이다. 뽈락은 외국까지 와서 켓세키가 안 되려고 기를 쓰고 출석했다.
시내 초입부터는 보도를 따라 산책하듯이 느린 페달링이다. 파란 이끼가 덕지덕지한 큰 둥치의 벚나무에는 초롱초롱 꽃들이 막 피기 시작한다. 멀리 칸몬대교가 구름처럼 높이 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아니 안 가본 금문교 말고 남해의 노량대교가 떠오른다.
다리 밑을 지나는 멋진 여객선의 풍경을 기대했는데 벽돌 같은 컨테이너만 잔뜩 실은 화물선만 오가고 있다. 역시 영화와 현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국제 여객선 부두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이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바다미와 함께 조촐한 치맥파티를 할까 하고 모처럼 KFC에 들어갔더니 마침 오늘이 니와토리의 날, 즉 닭의 날이라 행사를 하고 있다. 정말 부담스럽게 운이란 놈이 따라 다닌다. 참고로 우리의 3월 3일이 삽겹살데이인 것처럼 일본도 날짜와 비슷한 발음으로 마케팅을 한다. 28일은 ‘니와’로도 읽힌다. 15일은 이치고 즉 딸기의 날이고 29일은 니꾸 즉 정육점에서 고기 세일데이다. 아무튼 호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바다미를 객실로 초대하여 건배를 했다. 마침 침대도 트윈이다. 수고했다. 바다미! 욕봤네, 뽈락! 건배!!

터널 한쪽에 분리된 보도가 있어 안전하게 지날 수 있다
드디어 시모노세키다! 혼슈와 규슈를 잇는 칸몬대교가 멀지 않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바다미와 함께 투숙한 호텔 방
28일은 ‘니와’로도 읽어 니와토리(닭)와 통해 ‘닭의 날’이다. 치킨집마다 할인을 해준다

 

 

15일차 3월 29일
시모노세키
귀국선은 밤에 떠난다
오늘은 오랜만의 늦잠이다. 휴대폰의 알람도 꺼두고 온몸의 촉수도 내려놓고 잠 속으로 빠진 것이다. 7시30분경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깨운다.
오늘은 바다미를 쉬게 하고 50여km 떨어진 츠노시마(角島)를 열차로 다녀올까 한다. 일본 자동차 광고 1번지로 꼽힐 만큼 절경이라고 야마구치 출신 에미짱이 적극 추천해준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유유자적하기로 했다. 어제 밤에 코인 세탁기로 때 묻은 옷가지를 세탁하듯이 천천히 일본에서의 묵은 감정들을 씻어내고 싶다. 물론 3년의 일본생활 99%는 즐거웠으니 서운한 감정 따위가 남아 있을 리는 없다. 늘그막에 철이 들었는지 아니면 미쳤는지 모든 게 즐거웠고 그래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후회 없는 아니, 보람찬 세월이었으니 씻어내기보다는 아로새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끝이다! 시모노세키 시내를 돌아보고 3년 간의 일본행을 조용히 마무리한다. 99%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바퀴는 큐슈, 뒷바퀴는 혼슈에 걸치고
마감시간인 10시가 다 되어서야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선다. 번화가보다는 뒷골목을 기웃거린다. 바로 언덕이 나오고 서민들이 사는 가파른 산동네를 오르며 계단에 층층한 화분을 감상한다. 완벽한 콘크리트를 비집고 고사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복어의 고향답게 놀이터의 안내판에도 복어 캐릭터가 활개를 치고 노란 애기똥풀 옆에는 나비가 졸고 있다. 
시모노세키 시내는 자전거도로와 안내판, 대여 시스템 등 자전거 인프라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칸몬대교는 자전거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자동차만 씽씽 달린다. 그러나 우리에겐 겸손한 해저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총길이 780m. 어제 살벌했던 그 터널보다 짧다. 바다미의 몸값이 더 비싸다. 사람은 공짜인데 자전거는 통행료가 20엔이란다. 지하탄광으로 가듯 화물 승강기로 내려가니 일직선의 사각형 동굴이 나온다. 무서워하는 바다미의 손을 잡고 내리막을 간다. 중간쯤에 혼슈의 야마구치현과 큐슈의 후쿠오카현(福岡縣)의 경계가 나온다. 칸몬대교가 혼슈와 큐슈에 걸쳐 있는 것처럼 바다미의 앞바퀴는 큐슈에, 뒷바퀴는 혼슈에 걸쳐 있다.
큐슈의 바람을 맛보고 다시 돌아온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통영 해저터널이 생각난다. 한일간 터널을 건설하기 위해 실험으로 뚫었다고 들었다. 빨리 한일관계가 개선되어 현해탄 밑으로 이런 해저터널이 만들어져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는데….
근처에 있는 가라토(唐戶) 시장에서 초밥을 2400엔치나 잔뜩 사서 칸몬해협이 보이는 야외 데크에서 먹는다. 역시 생선살이 두툼하고 신선해서 폭풍 흡입이다. 참치, 방어, 연어, 전갱이, 돔 등이 들어간 배 속은 바다 수족관으로 변했다. 배가 부르면 잠을 부른다. 따스한 햇볕이 스물스물 쓰다듬어 비스듬히 꾸벅꾸벅 한다. 정신줄 챙기라고 화물선이 긴 뱃고동을 울린다.
 

이미 한국에 온 듯한 부관페리  
오후 5시경 좀 일찍 도착한 국제여객선터미널에는 8시에 출발하는 부관페리가 이미 대기해 있다. 대합실에는 울긋불긋 즐거운 단체 관광객과 한켠에서 연신 물건 정리하느라 바쁜 일명 보따리장사꾼, 초미니 무역상인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있다. 벌써 한국에 온 것처럼 낯익은 남도 사투리가 분위기를 제압하고 있다. 하긴 이곳의 각종 안내판에는 중국어보다 우리말이 우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욕심을 내면 글씨체를 좀 더 예쁘게 바꿔주고 싶다.
부산거리로 명명된 도로도 있고 실제로 한국인이 많이 오다보니 상점에서 일하는 한국인 알바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예약한 대로 1등석 표를 끊고 1000엔의 별도 승선료를 지불한 바다미는 패니어 등을 무장해제한 후 승무원이 모셔간다. 원래 1등석은 2인 1실인데 혼자만 배정되어 특실의 혜택이다.
배에 타서 방안에 들어오니 일본을 떠나는 게 실감난다. 기숙사 이사장, 학교의 선생들,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육성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만 어설픈 일본어 실력으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어 아쉽긴 하지만 다들 일부러 전화한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것 같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특별한 도움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론 지가 잘나서 그런 줄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만의 여행을 통해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을 닦아가고 있다.
부우웅~ 드디어 출항이다. 귀국선은 밤에 떠나간다.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해저터널 중간,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에 각각 바퀴를 걸친 바다미
화초로 단장한 시모노세키 뒷골목의 어느 집. 건물은 초라해도 차분한 격조가 묻어난다
시모노세키 가라토시장은 초밥으로 유명하다. 필자도 2400엔치나 사서 야외데크에서 맛나게 먹었다
국제여객선터미널에는 보따리상인들의 짐이 길게 도열해 있고 남도 사투리도 구수하다. 이제 곧 출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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