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가른 대결전의 무대 세키가하라

시대를 가른 대결전의 무대  세키가하라
1600년,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전투가 벌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은인자중에서 분연히 일어나 히데요시 家 타도에 나선 것이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西軍)과 도쿠가와가 이끄는 동군(東軍)은 천하의 패권을 놓고 기후현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인다. 15만 대군이 혈전을 벌였던 옛 전쟁터는 빛바랜 비석과 나부끼는 깃발로 당시를 말해준다

전투의 승부가 갈린 마지막 결전지에 ‘세키가하라 고전장(古戰場)’ 비석이 서 있다. 후와관이 있는 서쪽 산줄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다

 

해가 뉘엿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역은 한적했다. 이 역에서 내린 사람은 단 3명. 역전은 전형적인 시골 분위기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한 대가 서 있고 가게마저 없다. 이곳이 일본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또 근세 일본의 역사를 바꾼 장소라는 것은 역전에 서 있는 안내문과 어설픈 지도뿐이다.  
맥 빠진 황혼의 햇살에 물든 이부키산(伊吹山, 1377m)이 저쪽으로 웅장하다. 패장은 저 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결국은 붙잡히고 만다. 하필 왜 이곳이 전장이 되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웅거한 오사카성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성도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왜 15만 대군이 격돌하는 대결전이 펼쳐졌을까. 

도카이도(東海道)와 관문
<삼국지>에는 관우가 조조에게서 풀려나자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차례로 다섯 관문을 돌파하며 6명의 장수를 죽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옛 중국 시에 자주 회자되는 옥문관(玉門關)과 함곡관(函谷關), 조선시대 영남에서 중부로 가는 길목의 조령에는 차례로 3개의 관문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관(關) 또는 관문은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를 뜻한다. 관의 원래 뜻은 문을 닫아거는 빗장이다. 실제 관문은 요새화된 문을 설치하고 군사가 상주하며 방비와 검문을 겸했던 곳이다.
관문은 대개 고개에 자리해서 지방과 지방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관서지방, 관동지방 할 때의 관은 큰 고개에 설치했던 관문을 기준으로 했다. 관동의 관은 대관령을 기준으로 동쪽을 뜻하고(대관령 자체가 큰 관문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다), 북한지방의 관서(평안도)와 관북(함경도)은 서울~원주 간 주요길목이던 철령관이 기준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19세기말까지 수도였던 교토와 에도(도쿄)를 잇는 도카이도(東海道)였다. 도카이도 곳곳에는 관문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관문이 서쪽은 후와(不破), 동쪽은 후지산 옆의 하코네(箱根)였다. 후와관(후와노세키)이 바로 세키가하라에 있으며 세키가하라(關ヶ原)는 ‘관문이 있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우리의 읍면 정도의 행정구역인 쵸(町)이다. 일본에서 관으로 나누는 지방명은 후와관 서쪽의 관서(칸사이)와 하코네관 동쪽의 관동(칸토) 둘 뿐이다.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역전에서 자전거를 조립하고 안장에 올랐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망연하다. 세키가하라에 간다고 하자 일본 친구는 “거기 가봐야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가느냐”고 반문하던 것이 떠오른다. 420년 전의 전장에 남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근세 이후 조선은 물론 중국까지 멀찍이 따돌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부국강병의 계기가 된 현장에 꼭 한번 서보고 싶었다.
서기 1600년 음력 9월 15일, 이때 이미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이때 이 들판에 모인 군세는 15만을 넘었고, 이들이 동원한 조총은 9만정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유럽 전체에 보급된 조총보다 많은 숫자라고 하니 일본은 치열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적어도 조총 숫자에서는 유럽을 뛰어넘어 육군은 세계최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보다 불과 몇 년 전에 벌어진 임진왜란(1592~ 1598) 때 조선군과 명군(明軍)이 일본군에 압도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일본군은 이미 수많은 전란을 통해 단련되고 무장된 ‘전쟁 귀신’들이었다. 그들이 다시 엄청난 내전에 빠져든 것이다.

작은 시골역 분위기의 세키가하라역. 일대는 우리의 면 정도 규모의 쵸(町)여서 인구가 적고 관광지도 아니어서 역은 한산하다
역전에 있는 허술한 안내판. 역 서쪽에 철도와 도로가 지나는 후와관(不破關)은 여전히 교통의 요지이고, 역의 서북쪽 들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무사정권과 전국시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1464년 시작되어 100년 이상을 이어지게 된다. 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상하의 위계가 무너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치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다.
먼저 전국시대의 배경이 되는 막부(幕府)의 성립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8세기 이후 일본은 장시간 평화를 구가했으나 점차 무력을 기반으로 한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강해졌다. 이들을 사무라이라고 불렀고 타이라씨(平氏)와 겐지(源氏) 가문이 양대 세력을 이뤄 대립했다. 1159년 마침내 두 세력은 전쟁에 돌입하는데 이것이 겐페이(源平) 전쟁이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무사계급은 일본 최초로 중앙정권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처음에는 타이라씨가 승리했으나 정권을 잡은 지 20년이 지나자 타이라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도전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겐지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 朝)는 1180년 겐지의 연고지인 가마쿠라(鎌倉)를 근거지로 삼고 군사를 일으킨다. 요리토모는 승승장구했으나 동생 요시츠네(源義經)와 갈등을 빚는다. 그 틈을 타 시코쿠로 피신해 있던 타이라씨는 수도인 교토 입성을 준비하지만 요시츠네의 공격으로 시모노세키 단노우라(壇の浦)에서 멸망하고 만다. 요리토모는 동생 요시츠네마저 몰아내고 1192년 마침내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약칭 쇼균(將軍)에 임명되면서 가마쿠라막부를 열었고, 이로부터 1867년까지 근 700년에 이르는 막부정치가 시작된다. 막부는 말 그대로 전쟁터에 최고사령부가 자리 잡던 천막을 말하며, 무사의 집권을 상징한다. 신적인 존재인 천황가는 그대로 존속했지만 실권은 막부의 쇼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외교 문서도 쇼군의 명의로 발행했다. 조선이나 중국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왕은 천황이 아니라 쇼군이었다. 
이후 가마쿠라막부는 1333년까지 이어지다가 1336년에는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쇼군이 되어 교토 무로마치(室町)에 막부를 연다. 그러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패망하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막을 내리고 1603년부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도쿄)가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쇼균이 천황가는 물론 전국의 호족을 제압하고 철권통치를 펼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전쟁으로 지새우는 전국시대가 열린 것일까.   
에도시대에는 독자적인 다이묘(大名, 각 지방을 별개의 나라처럼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영주)로 성장하게 되는 슈고(守護) 다이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래 슈고는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관직으로 모반이나 살인자를 체포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관이었다. 하지만 점점 권한이 강해져 한 지역의 공물을 책임지면서 독자세력으로 커갔다. 1464년, 슈고 다이묘들이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무로마치 시대 가장 강력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죽은 후,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슈고 다이묘들이 대립하면서 시작된 내란이 11년간이나 계속된다. 이른바 오닌(應仁)의 난이다. 이때 다이묘들은 동서 진영으로 나뉘어 동군이 24개국 16만 명, 서군은 20개국 9만 명에 이르렀다. 군사는 동군이 많았으니 오우치 씨의 군사 2만이 서군에 가담하면서 지리멸렬한 지구전 양상으로 들어갔다가 전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오닌의 난 이후 막부의 권위는 급전직하 추락해 사실상 통제력을 잃었다. 슈고 다이묘의 세력이 쇼군을 능가하면서 시작된 하극상은 지방으로도 전파되어, 지방의 호족인 고쿠진(國人)이 슈고 다이묘를 쫓아내는 등 난세로 접어들었다. 힘만 있으면 위아래도 없고, 적도 아군도 없는, 파렴치와 무력만이 판치는 전국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역에서 전장으로 가는 길가에 참전 다이묘들의 문장이 도열해 있다. 오른쪽부터 동군의 총사령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임진왜란의 선봉장 중 하나였던 구로다 나가마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신이었으나 그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가담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문장이 보인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 왼쪽은 이 전투를 계기로 패권을 잡고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른쪽은 처음에는 서군 편에 섰다가 전투 중간에 동군에 가담해 대세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철저히 이해관계로 뭉친 다이묘들은 세력판도에 따라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영지의 존속과 발전에 이익이 된다면 크게 죄악시되지도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의 일본 전국 다이묘들의 세력판도. 경계선은 각 번(藩)을 나타내며, 노란색 배경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10만석 이상의 다이묘, 파란색은 세키가하라 이후의 10만석 이상의 다이묘를 뜻한다. 녹색과 빗금은 서군(이시다 미쓰나리)에 가담한 주요 다이묘, 분홍색과 점박이 무늬는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한 주요 다이묘의 영지 (출처 = 戰國合戰大全, 1998, 学硏)
세키가하라 전투 30여년 전인 전국시대 중심기에 활약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각축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 부대의 포진을 보여주는 당시의 병풍. 오른쪽이 전방으로 장창병, 궁병, 조총병, 기병 등이 정연하게 진을 친 모습을 보여준다. 세키가하라 때도 이런 식의 포진으로 싸웠을 것이다.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과 닮은 사람을 가케무샤(影武者)로 활용한 것으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오다 노부나가를 누르고 일본을 제패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을 듣는 용장이었다 (출처 = 戰國合戰大全, 1998, 1998, 学硏)

 

부활한 서군(西軍) vs 동군(東軍) 
혼란의 전국시대는 전국 패권을 노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등장으로 급변한다. 노부나가는 저항하는 다이묘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그의 총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마침내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편 도요토미 정권에 반감을 가진 다이묘들이 많아 히데요시가 죽고 나면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결국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6살 난 아들 히데요리(豊臣秀頼)가 뒤를 잇자 에도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동부지역 다이묘들이 거병한다. 히데요리 편에는 히데요시 때부터 충신이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필두로 히데요시의 거점이던 오사카성에서 가까운 서부지역 다이묘들이 집결했다. 이렇게 해서 오닌의 난 이후 140년만에 서군과 동군이 다시 결전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선봉 경쟁을 벌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편이었지만 서로를 적대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각각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졌다.    

주민들은 전투 구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교토 방면으로 진군해오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후와관을 끼고 있는 세키가하라의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서 주둔한다. 이름 그대로 ‘깨트릴 수 없는 관문’이란 뜻의 후와관(不破關)의 전설에 운명을 맡긴 것이다.
세키가하라는 후와관 동쪽에 펼쳐진 분지로 동서 4km, 남북 2km 정도의 협소한 들판이다. 이 좁은 분지에 서군 8만2천, 동군 7만4천의 대군이 집결했다. 먼저 주둔한 서군이 뒤쪽으로 이부키산 줄기를 끼고 높은 지대에 자리잡아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동군은 서군을 올려다보면서 공격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불리했다.
이날 전투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인근 주민들이 도시락을 싸고 근처 산에 올라가 전투를 구경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았으면 난리가 났다고 남부여대해서 도망가기 바쁠텐데 무슨 운동경기처럼 산에 올라 전투를 구경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 ‘전투 구경’은 전투는 사무라이의 전유물로 일반 백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대의 최하급 병사도 동원된 평민이 아니라 아시가루(足輕)라고 하는 최하급 무사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투가 있으면 병졸로 출전했는데 두 발로 바쁘게 다닌다고 해서 아시가루(가벼운 발)라는 명칭이 붙었다.  
1600년 음력 9월 15일 오전 8시경, 봉화대의 신호를 시작으로 동군의 선공이 시작됐다. 서군이 산세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진을 친 전선을 따라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개전 초기에는 양군의 군세가 비슷해 백중세였다. 서군은 동군의 허리를 치기 위해 남쪽 외곽의 산지에도 부대를 배치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서군 중에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거나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할지 눈치를 보며 전투 상황을 관망하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배신과 비겁 
동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외곽 부대에 신호를 보내 측면 공격을 지시한다. 남쪽 마쓰오산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동남쪽의 난구산(南宮山)에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각각 1만5천 정도의 군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이 동군의 허리와 후미를 협공한다면 동군은 포위망에 걸려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시다 미쓰나리의 지시에도 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리 히데모토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정오 무렵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군이 방향을 바꿔 서군의 남쪽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치명적인 배신이었다. 허를 찔린 서군은 이때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후 2시, 패배가 명확해진 상황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전장을 벗어나 이부키산으로 후퇴한다. 오후 3시, 동군의 승리로 전투는 끝났다. 끝까지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지켜보던 모리 히데모토는 도주한다. 15만 이상의 대군이 맞붙었는데 불과 하루만에 결판이 났다. 좌고우면 할 것 없이 그대로 대군이 접전을 벌인 결과였다. 전투의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설이 많은데, 동군 전사자가 약 4천명, 서군은 3만여명으로 추정된다. 실제는 더 적었을 가능성도 높다. 대군이 격돌해서 한쪽이 밀려 진이 무너지고 일패도지 후퇴하면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 나서 실제 사상자는 많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잃고 공포에 휩싸인 군사는 순식간에 진이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이부키산에 숨어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음날 붙잡혔고 이후 교토로 압송되어 처형된다. 이날 단 하루의 전투로 천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로 바뀐다.
오사카에 입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에 참가한 다이묘들의 영지를 몰수하거나 축소하고, 동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은 전공에 따라 이들의 영지를 나눠주었다. 오사카성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일개 다이묘로 격하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운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다.      
한편 동군 편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는 전공을 인정받아 히고(肥後, 구마모토) 지방의 영주가 된다. 임진왜란 때 제3군을 이끈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도 동군으로 참전해 치쿠젠(筑前, 후쿠오카)의 영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는 의외의 역사적 복병을 잉태한다. 앞페이지 세력판도에서 보듯 혼슈 서단의 현재 야마구치현(長州, 죠슈)과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薩摩, 사쓰마)은 서군의 주력으로 참전했다가 에도막부 시절 내내 차별과 핍박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런 박대는 이후 두 지역이 힘을 모아(삿초동맹)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이루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메이지유신 주역들도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인, 1598년 경 각 지역별로 동원가능한 병력을 보여주는 지도. 영지별로 1만석(쌀 생산량) 당 250명의 군사를 동원하는 기준이다(임진왜란 때는 1만석 당 600명까지 동원하라는 명령이 하달되기도 했다). 봉건시대에 각 번의 역량은 쌀 생산량인 코쿠다카(石高)로 나타냈는데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에 해당한다. 지도에 따르면 당시 전국적으로 약 46만명의 군사 동원이 가능한 경제력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기준으로 1만석 당 600명을 동원한다면 최대 110만 대군도 가능하다는 것이니 중세 일본의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짐작할 수 있다(당시 조선은 1만 정도의 상비군을 겨우 유지했다) (출처 = 戰國合戰大全, 1998, 1998, 学硏)
세키가하라 전투를 시간별로 나타낸 전황도. 파란색은 서군, 빨간색은 동군이다. 오전 8시경 개전해 정오경 고바야카와 군의 배신으로 서군이 패퇴하기 시작, 오후 2시경 이시다 미쓰나리가 도주해 동군의 승리가 확정된다. 빨간 화살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동 경로로, 처음에는 후방에 머물러 있다가 승기를 잡은 후 현재의 역 근처로 본진을 이동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왼편 아래쪽 마쓰오산(松尾山)에 주둔한 서군측의 고바야카와 히데이키 군과 오른쪽 아래 난구산(南宮山)의 모리 히데모토 군의 배신이 서군 패배의 결정타가 되었다 (출처 = 地圖で訪ねる歷史の舞臺, 2013, 帝國書院)


전쟁터에는 비석만이 남아 
세키가하라역을 출발해 철길을 건너 북서쪽으로 향한다. 마을을 벗어나면 밭이 즐비한 들판이다. 바로 여기가 격전지였다. 수많은 생명이 삽시간에 사라져간 비극의 현장이건만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하기만 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진지 앞쪽 농로 교차로에 ‘세키가하라 고전장 결전지’ 비석이 서있다. 비석 앞에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문장을 새긴 깃발이 함께 나부낀다.
미쓰나리 진지에서 1km 가량 떨어져 있던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후 이 부근으로 옮겨와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여기 어디쯤 이에야스가 서서 미쓰나리가 도망간 이부키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까. 노회한 이에야스는 권력이란 방심하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고 입장이 뒤바뀔 수 있다는 운명의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 전투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이 없었다면 속전속결이 힘들었을 것이다. 에도막부 시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의 배신을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데, 바로 여기서 배신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직접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주둔지마다 안내문이 있어 알아보기 쉽지만 해는 지고 말았다.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좀 더 돌아볼까 싶다가도 함성과 비명으로 아우성쳤을 전쟁터의 살벌한 기운이 어둠과 함께 엄습해와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꼭 살육전밖에 없었을까. 힘과 증오라는 씨앗에 야망이 불을 지르면 결국은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100년간 전투만 일삼아온 전쟁귀신들 아닌가. 힘의 발호에 이성은 설 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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