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은 나이를 잊고 감각은 녹슬지 않는다

‘만년 청춘, 천생 라이더’ 가수 김세환
정열은 나이를 잊고 감각은 녹슬지 않는다

‘영원한 청춘스타’ 가수 김세환 씨는 고희를 넘어도 언제나 밝고 활기차다. 폭염에도 우면산 업힐을 거뜬히 오르고 로드바이크로 근교를 바람처럼 질주한다. 우리 나이로 72세. 외모와 매칭되지 않는 숫자에 놀라지만 그가 젊게 사는 최고의 비결은 단연 자전거다. 80년대 중반 MTB를 타며 보급에도 큰 역할을 했고 당시부터 최근까지 관련자료도 가득 모아두고 있다. 본지 창간호에서 인터뷰를 한 지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라이더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그의 근황을 들어본다
글·사진 김병훈(본지 발행인)

구리빛의 근육질 다리를 내놓은 반바지와 헐렁한 셔츠 차림의 김세환 씨. 72세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활력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앞쪽의 자전거 트로피는 1997년 LA 근교 ‘림 노르딕’ 스키장에서 열린 MTB 대회 45세 이상 부문에서 3위로 입상했을 때 받은 것이다. 그의 라이딩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본지 2002년 6월호 창간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스탠딩 자세의 사진이 실렸다

 

미소를 머금은 부드러운 표정, 감미로운 목소리, 주옥같은 음율로 한 시대를 주름잡은 가수 김세환. 그의 노래는 지금도 전국 혹은 지구상 어디선가 울려 퍼지고 있을 정도로 히트곡과 명곡이 많다. 스키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스키 슬로프를 자유자재로 누비던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그는 자전거인으로도 유명해서 198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MTB에 입문해 수많은 코스를 개척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주변에 알린 공로는 혁혁하다.
본지 창간 준비를 하던 2002년 봄, 당시에도 그는 이미 알려진 자전거 매니아여서 당연히 첫 인터뷰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그때 55세였는데 근육질로 탄탄히 다져진 몸매로 스탠딩 포즈를 취하는 그의 사진은 많은 독자들에게 감탄과 감동을 주었다. 

30년 이상 두바퀴로 산과 도로를 누빈 열정 
그로부터 17년여… 여전히 그는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있고 심지어는 자전거 업계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도입할 때 자문을 해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근황이 궁금해졌다. 초창기부터 모아온 자전거 관련 자료가 가득 하다는 얘기도 들렸다.
오랜만의 통화인데 자전거 얘기가 나오니 소년처럼 신이 난 듯 한참 열의를 불태운다. 모아둔 자료를 좀 보고 싶다고 하자 자택으로 기꺼이 초대해주었다. 우면산 아래에 있는 그의 집을 보고는 ‘우면산 코스는 거의 김세환이 개척했다’는 소문이 이해가 갔다. 우면산을 앞마당처럼 MTB로 오르고, 로드바이크로는 양재천을 통해 수도권 자전거도로망을 쉽게 누빌 수 있는 탁월한 입지였다. 30여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말은 ‘여기만큼 자전거 타기에 좋은 곳은 없다’는 자부심으로 들렸다.
80년대 말부터 모은 미국 MTB 잡지를 위시해 다양한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펼치는 그의 자전거 예찬론은 2시간을 촌각으로 느껴지게 했다. 때로는 대단히 전문적이고 디테일해서 이론과 실천, 실력 모두를 갖춘 진정한 매니아의 모습에 감탄과 존경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풀어놓은 자전거 인생론을 테마별로 정리해 보았다.
 
MTB와의 첫 조우 
“1985년일 거예요. 한강에 나갔다가 자전거를 탄 한 미군을 우연히 만났어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더니 남산을 다녀오는 길이라기에 어떻게 자전거로 남산을 올라갈 수 있는지 놀랐지요. 그 친구는 앞 크랭크가 3단이고 뒷 기어까지 있어서 산을 올라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MTB였던 거지요. 그래서 한번 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국내에는 아직 파는 곳이 없었어요.”
당시 국내에는 뒤쪽에는 3~5단 정도의 변속기가 나와 있었지만 앞은 1단 고정이 대부분이었고 레저용은 로드바이크가 주류였다.
 
미국에서 구입한 ATB 
“그 다음해 미국 레이크 타호 스키장을 갔어요. 나는 68년부터 스키를 탔으니 거의 1세대지요.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가 자전거샵을 들렀더니 그때는 MTB가 아니라 모든 지형에서 탈 수 있다는 뜻에서 ATB(All Terrain Bike)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더군요. 스캇 볼더(Boulder)라는 크롬몰리 모델인데 시마노의 앞 3단, 뒤 7단 기어가 달려 있었어요. 한강에서 본 미군 자전거처럼 앞 3단 기어에 혹해서 덜컥 800달러를 주고 구입했어요. 그런데 호텔에 가니 방에는 못 가져간다는 거예요. 자전거를 잠시 맡겨두고 다시 샵으로 가서 공구를 사와 자전거를 분해했어요. 바퀴를 분리하고 타이어와 튜브도 분해해서 바람을 뺀 다음 접어서 방으로 옮기고, 그 다음에는 크랭크와 디레일러까지 다 분리하니 프레임만 남았어요. 타올을 사와서 프레임을 둘둘 감싸고 테이프를 칭칭 감아서 포장했지요. 귀국할 때도 옷 사이에 넣어 충격을 받지 않게 했는데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가져온 것과 비슷하지요(웃음).”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자전거를 분해했느냐고 물으니 원래 기계 만지는 걸 좋아해서 조금 살펴보면 금방 안다고 답했다. 여러 가지 재능을 타고났구나 싶다.
 
“앞에 기어가 또 있네요!”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며 혼자 조립하는데 문제없이 다 해냈어요. 근데 크랭크와 스프라켓의 미세조정이 안됐던지 변속이 매끄럽지 않아 당시 강남에서 가장 큰 가게로 가져갔어요. 내 자전거를 보더니 “이거 엄청 튼튼해 보이는데요. 근데 앞에 기어가 여러장이네요!” 하면서 놀라는 거예요. 앞에도 기어가 많아서 산에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 신기해해요. 강남 최대의 자전거가게가 그랬어요. 그 자전거로 혼자 한강으로 산으로 타고 다니기 시작했지요. 비슷한 자전거를 타는 미군을 만나면 서로 인사하면서 반가웠죠.”
 
‘한시반’ 클럽 
“그렇게 타고 다니면서 자전거 탄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자전거를 보면서 애기를 나누기 마련인데, 뭐를 달았고 뭐가 다른지 이런 게 눈에 띄거든요. “자전거 좋네요. 어때요?” 하면서 자전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게 되었어요. 내가 교회를 다녀서 일요일에 점심 먹고 고수부지로 나가면 1시반쯤 되니 자연히 약속시간을 그렇게 잡았고 그게 동호회 이름이 되었어요. 전문의류도 따로 없어서 미국 가는 길에 사이즈별로 사와서 입기도 했지요.”
‘한시반’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함께 자전거를 즐기고 있다. 자전거를 포장할 수 있는 박스도 단체로 맞추었고 17인승 미니버스까지 운영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운전을 해야 하고 도착지에서 대기해야 하는 희생이 불가피해서 지금은 전세버스를 더 선호한다고.  
 
자전거에 빠지다, 깊이 
“그때부터 자전거에 매료돼서 미국 공연을 가면 여유시간에 남들이 관광 갈 때 나는 차를 빌려 LA에서 샌디에고까지 다니며 미국잡지에 나온 샵을 찾아 다녔어요. 산타모니카 비치, 헌팅턴 비치 같이 큰 해변에 자전거샵이 많아요. 산타모니카에는 엘튼 존이 다니는 샵이 있는데 무조건 그 집에서 시작해요. 지금은 퍼포먼스 바이크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안 사도 그냥 구경하는 거죠. 그러다 트렉 모델을 구입했고 그 다음에는 조각품 같은 클라인(Klein)에 반했어요. 당시 국내에서 알루미늄 스키폴을 만들던, 알루미늄 전문가에게 클라인을 보여주니 “알루미늄으로 체인스테이를 사각으로 뽑다니 놀랍습니다. 이건 정말 조각입니다” 하고 감탄하더군요. 알루미늄은 사각으로 가공하기가 힘들다는 걸 나는 몰랐지요.”
여기서 언급한 알루미늄 전문가는 추억의 국산 브랜드 크럭스(CRUX)를 창업한 분으로, 크럭스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문 동호인 1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럭스는 알루미늄 프레임은 물론 서스펜션 포크, 크랭크 등 많은 부품을 국산화했지만 시장이 뒷받침되지 않아 90년대 후반에 결국 문을 닫고 만다. 현재의 위아위스 박경래 대표는 크럭스 창업자와 인척관계로 그 도전정신을 잇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티타늄 바엔드를 국내에서 제작  
“크롬몰리, 알루미늄을 거쳐 다음에는 티타늄 프레임이 나왔어요. 그래서 알아보니 인천에 티타늄 가공업체가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 동호회에서 단체로 바엔드 12개를 주문해서 장착하기도 했어요. 고무된 그 회사는 티타늄 자전거 샘플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다 세븐(Seven)을 봤는데 지인이 수입하면서 나도 타게 됐지요. 이후에 락샥의 서스펜션 포크가 나왔어요. 우면산에서 미군이 끼운 걸 처음 보고 얼마인지 물었더니 “쉿!” 하면서 “옆에 와이프가 있다”고 눈치를 주는 거예요(웃음). 다음에는 카본이 등장하면서 티타늄의 장점과 카본의 장점을 한데 모은 세로타(Serotta) 자전거가 나왔으니 퍼펙트한 거죠. 탑튜브와 다운튜브는 카본으로 가고 헤드튜브와 드롭아웃, 러그는 티타늄을 쓰는 거죠. 내 이름을 넣어서 하나 맞춰서 타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요.”
현재 그는 풀카본 프레임의 MTB와 로드바이크만 소유하고 있다.
 
초창기 그 시절 
“그때가 얼마나 초창기냐 하면 미국을 다녀온 한 친구가 플라스틱 물통을 가득 담아왔어요. 어디서 났느냐고 하니 시합 때 선수들이 물을 마시고 버린 것들이라는 거예요. 국내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든 전용 물통이었어요. 그 정도야 씻어서 재활용하면 되니 다들 기쁘게 나눠썼지요.”
 
미국잡지에서 배우다                    
“그때는 정보를 얻을 데가 없으니 MTB 발상지인 미국 잡지를 많이 참고했어요. 이태원에 가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를 사보다가 정기구독으로 봤어요. 지금도 그때 보던 잡지들이 가득 쌓여있어요. 화장실에도 목욕탕에도 있어서 그거 보는 게 일이었어요. 영어 공부도 겸해서 구독했는데 새 모델이 나오면 평가기사만 봐도 대략 어떤 성격이고 성능인지 알 수 있잖아요.”
인터뷰 후에 작업실에 보관해둔 옛날 잡지와 자전거 관련 책들을 보여주었다. MTB 잡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마운틴바이크 액션> 지는 제2호인 1988년 2월호부터 있었다. 그 외에도 미국의 자전거잡지 몇 종이 더 보였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까지 초창기 MTB 역사가 거기 다 있었다. 일본 책도 여러 권 보였다. 오직 자전거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미국과 일본 등 전세계 잡지와 책을 탐독한 것이다. 
 

작업실에 80년대 말 이후 자전거 관련 잡지와 카탈로그 등을 가득 모아두고 있다. 그중 오래된 것만을 골라 보여주었다. 한 종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지를 구독해 지금은 폐간된 잡지까지 있다. 1970년대 포크 열풍을 일으킨 쎄시봉으로 활약할 당시 윤형주, 송창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오른쪽에 보인다
MTB 잡지의 선구자인 미국 <마운틴바이크 액션> 지 창간 제2호인 88년 2월호
클라인의 디자인과 기술력에 반해 한때 타기도 했다. 사진은 1997년 클라인 카탈로그

 

최초 대회에서 입상 
“운동을 좋아했고 그게 또 잘 맞았어요. 보세요(그러면서 햇빛에 그을린 다리를 보여준다. 근육질의 허벅지는 단거리 스프린터 수준이다). 초창기에는 시합에도 나갔어요. 90년대 초반 열린 최초의 MTB 대회에서 우승해 티코를 부상으로 탄 사람이 권영학(전 MTB 국가대표) 씨인데 난 그랜드마스터 부문으로 몇 번 출전했어요. 이건희 회장이 말을 타는 코스에서 열렸는데 나는 1등은 못했지만 2, 3등은 했어요.”
당시 부상으로 받은 오클리 고글 얘기가 나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국인은 귀가 높은 사람이 많아서 고글이 앞으로 흘러내려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십년간 안경을 써왔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는데 일리가 있었다. 같은 오클리를 써도 박세리는 뺨에 자국이 남고 소렌스탐은 괜찮은 것도 그 때문이란다. 그는 귀를 자세히 보더니 기자는 박세리파, 동행한 부사장은 소렌스탐파라고 평가해준다. 대단히 섬세한 안목이라 놀랐다. 업체에서 그에게 제품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이유를 알만했다.
 
공간의 벽을 넘다 
“자전거는 동네에서 타는 거라고 생각하던 80년대 말 서울에서 속초까지 220km 당일 투어도 우리가 처음으로 시도했어요. 새벽 5시에 출발하면 저녁 6시에 미시령 정상에 도착했어요. 집 근처의 우면산과 남한산성에는 산악 코스를 만들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영역을 넓혔지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지리산 벽소령을 올랐을 때였어요. 북쪽으로 난 옛날 임도로 오르다가 폭우에 길이 유실되어 등산로를 따라 갔지요. 하도 급경사여서 자전거를 들면 바퀴가 지면에 닿아서 머리 위로 이어야 했어요. 그렇게 겨우 벽소령 휴게소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난리가 났죠. 뱀사골로 내려올 때는 하도 충격이 심해 서스펜션 포크가 터져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국립공원내 자전거가 출입금지이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자전거 진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건 거의 불가능한 모험이다. 벽소령은 지리산 주능선의 최저점이긴 하지만 해발 1330m에 달하고 여기서 뱀사골로 가는 길은 라이딩이 거의 불가능한 험로다. 40대 후반 때 일이라니 20여년 전에 이미 MTB로 시도할 수 있는 온갖 모험을 다해본 것이다. 수도권 MTB 동호인들에게는 성지 같은 춘천 강촌챌린지 코스도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과 함께 다니며 개척했다고 한다. 코스를 개발할 때는 5만분의1 지도와 지인이 소유한 허머를 활용했다고. 
        
전 국가대표 이미란 씨와의 청계산 라이딩 
“자전거 대열을 멋지게 이끌고 오는 여성 라이더를 우연히 만났어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는데 실력이 대단한 것 같아 함께 라이딩을 하기로 약속을 잡았지요. 청계산을 함께 탔는데 서로 놀랐어요. 여자분이 그렇게 잘 타는 건 처음 봤어요. 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오버페이스를 했는데 서로 말 없이 숨가쁘게 올라갔어요. 올라가는 건 힘이지만 내려가는 건 기술이거든요. 장애물을 휙휙 피해서 내려가는 실력이 기가 막혔어요. 스키도 엣지를 주면서 천천히 내려가는 게 더 어려운데 자전거도 마찬가지예요. 안정적이면서도 빠르게 교과서처럼 타더군요. 그런 실력에 서로 놀란 거죠. 이미란 씨도 ‘가수 김세환이 이렇게 잘 타다니’하고 감탄했다고 하더군요. 이미란 씨가 국가대표 출신이란 건 뒤에 알았어요.”
이미란 씨는 현재 케이벨로 대표이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다운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스키장의 변신을 설득
“스키를 좋아해서 스키장 회장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미국에는 비시즌에 MTB 코스로 활용한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리프트에 자전거만 싣고 올라가 코스를 타고 내려오면 되니까 간단하거든요. 다운힐, 크로스컨트리 등등 종목도 똑 같아요. 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데가 별로 없었는데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무주리조트였어요. 그 다음이 베어스타운에 MTB 코스가 생겼어요. 당시 대회가 열려 TV 중계를 할 때 내가 해설을 했는데 중학생이던 정형래 선수가 연습하다 넘어져 다치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면서 따르던 어린 선수들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보람 있었지요.”
정형래 선수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다운힐 금메달을 따낸 최고의 실력파다. 지금은 피팅전문업체 씽크웨이를 운영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전거 전파 
“내 소개로 자전거에 입문한 사람이 적지 않지요. 백남봉 씨와 유인촌 전 장관에게도 내가 자전거를 소개했고, 가수 이수만, 이문세, 김현철, 개그맨 박명수에게도 도움을 줬죠.”
다시 이분들이 자전거를 주위에 전파했으니 수십년 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예를 들어 본지에 ‘대중가요의 골목길’을 연재하는 조용연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은 백남봉 씨의 권유로 자전거에 입문했다. 조 전 청장은 또 부하 서장과 간부들에게 자전거를 전파하고, 또 이들은 그 아래에 전파하고…. 이처럼 김세환 씨의 가장 큰 공적은 자전거 보급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신제품은 꼭 테스트 해본다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이 나오면 관심 있게 보고 가능하면 직접 테스트를 해봅니다. 최근에는 1단 크랭크와 12단의 대형 스프라켓 조합이 많은데 아무래도 어색해요. 크랭크가 1단뿐이니 체인라인이 지나치게 틀어지는데다 스프라켓도 너무 커요. 앞을 2단으로 하고 스프라켓은 좀 작은 걸 써도 기어비는 충분히 나오거든요. 가장 큰 오버는 Di2 같은 전동변속기예요. 그렇게까지 전기장치가 많아지면 인력으로 움직이는 자전거 본래의 기능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로드바이크의 디스크 브레이크도 맞지 않다고 봐요. 로드는 다운힐 외에는 브레이크를 잡을 일이 많지 않거든요. 물론 디스크의 장점은 있어요. 옛날 디스크 브레이크가 나오기 전에 제동력을 높이려고 림에 세라믹 코팅을 한 적이 있어요. 지리산을 올랐다가 다운힐을 하는데 다른 자동차에서 브레이크 타는 냄새가 많이 나는 거예요. 근데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다 내려왔는데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나면서 타이어가 터졌어요. 림이 열을 받아 튜브가 팽창해서 폭발한 거죠. 우주선에도 쓰는 단열재인 세라믹을 코팅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그래서 튜브리스가 나왔고 실런트까지 등장했죠.”
이렇게 신제품에 대한 호기심을 놓치지 않아 초창기 자전거 수입사들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특히 스페셜라이즈드를 처음 수입한 자강통상 김진수 대표 이름이 나와서 반가웠다.  
 
뒤늦은 로드 입문 
“나이가 들면서 너무 헉헉대는 게 부담스러워 로드를 타게 됐어요. 로드도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단점이라면 숙이는 자세 때문에 시야가 좁고 타이어가 가늘고 가벼워서 옆바람에 취약하다는 거죠. 로드는 팔당이나 행주산성, 구리 왕숙천 방면으로 70~80km 코스를 주로 타는데 며칠 전 36도였던 날도 분당 끝까지 다녀왔죠.”
 
기억에 남는 코스 
“산악코스는 미천골(양양)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원시 그대로의 자연이 남아 있어요. 초기에는 인적이 아예 없어 일행과 완전 알몸으로 물놀이도 했으니까요(웃음). 1300고지 만항재에서 시작하는 운탄고도 코스도 멋지지요. 
해외도 많이 다녔지만 2014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유라시아 자전거원정대로 베를린 시내를 달린 적이 있어요.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출발해 의미가 남달랐어요. 2년 전에는 오키나와에서 열린 160km 코스의 센츄리런을 다녀왔는데 경치와 대회도 좋았지만 더 놀란 것은 아무도 없는데도 빨간불이면 무조건 서는 놀라운 시민의식이었어요.”
 
안타까운 시장 상황
“요즘 문 닫는 자전거샵이 많아 정말 안타깝죠. 근데 이게 스키시장과 똑 같아요. 스키라야 겨울밖에 시즌이 없고 다 렌탈로 옮겨가니 스키나 장비가 팔릴 리 없지요. 그리고 자전거는 젊은 층은 로드, 아줌마 아저씨는 MTB 이렇게 완전히 구분되어버렸잖아요. 산에 가는 것도 아니면서 값비싼 MTB로 한강을 탄단 말예요. 풀서스펜션 타는 분들도 많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하드테일이면 충분해요. 풀서스펜션은 다운힐에서나 필요한데 그런 다운힐을 할 데도 없어요. 그리고 그 정도 다운힐은 극소수 선수급이나 즐기는 거죠.”
스키처럼 시즌이 짧고 기본적인 문화와 인식부터 잘못되어 시장이 더 커지지 못한다고 그는 진단하는 것 같다.
       
영화와 유튜브를 착각 말자   
“초보자나 동호인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영화나 유명 유튜브에 나오는 사람들은 최고의 실력자들이에요. 그 사람들도 10번 시도해서 한번 성공하는 장면이 나오는 건데 그걸 따라하려고 하면 안 되죠. 레드불 렘페이지(REDBULL Rampage, 극도로 익스트림한 프리라이드 경기) 같은 거 보세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하는데도 허리, 다리 부러지고 그러죠. 그런 걸 무리하게 따라할 게 아니라 자기 분수에 맞게 즐겨야 합니다. 제가 자전거 책(행복한 자전거, 2007)을 쓰면서 강조한 게 있습니다. ‘자전거의 제일 좋은 부품은 안장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XTR이냐 XT냐 듀라에이스냐 캄파놀로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안장 위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사람이 누구냐, 안 다치고 가장 오랫동안 타는 사람이에요.”
사실 MTB로 산악코스를 타면서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는 어렵다. 그 역시 무릎과 팔꿈치에 흉터가 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어서 훈장처럼 느껴진다. 다만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져 첫마디가 조금 불편한 것이 후유증으로 남았다. 기타 칠 때 그 손가락은 쓰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웃었다. 30여년 산악라이딩 경력치고는 매우 준수한(?) 부상 경력이다.
 
스킬을 익혀야 안전하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즐기려면 기술을 익혀야 해요. 제 친구 하나도 그냥 타다가 앞으로 꼬꾸라진 적이 있어요. 브레이킹과 웨이백(다운힐이나 급정거 때 체중을 뒤쪽으로 옮기는 자세)을 몰랐던 거지요. 턱이나 홈을 지날 때는 직각으로 진입해야지 사선으로 접근하면 그냥 넘어지거든요.
자전거를 타면서 꼭 익혀야 하는 기술은 스탠딩(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는 기술)이에요. 이걸 익히면 골프에서 싱글의 경지에 드는 것과 같아요. 폼에 여유가 생기고 다른 고급 기술을 익히기도 좋아요. 결과적으로 더 안전해지는 거죠. 나는 책과 비디오를 보고 혼자서 스탠딩을 익혔어요. 아무데도 배울 데가 없었으니까요. 수십년 자전거 탄 분도 스탠딩이 안되는 사람이 많아요. 그걸 초창기에 혼자 배웠으니 사람들이 놀라워했지요.”

 ‘산소가 씹히는 기분’이란 
“‘고도원의 아침편지’라고 있는데 제가 말한 ‘산소가 씹히는 기분’을 인용한 적이 있어요. 용평인가, 다운힐을 하다가 계곡에서 잠시 쉬는데 공기가 너무 맑아서 가슴까지 뻥 뚫리는 겁니다. 그래서 ‘야, 우리 여기 산소 씹어 먹자!’고 소리쳤어요. 거기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이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산악자전거만의 묘미죠. 가을에 코스모스 길을 달릴 때 잠자리가 뺨을 때리는 그 기분은 자전거 아니면 맛볼 수 없죠.”
 
어디든 자전거로 간다 
“자전거는 가장 간편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어요. 골프나 스키는 장비를 챙겨야지, 부킹하고 이동해야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만 자전거는 그냥 타고 나가면 되거든요. 나는 친구를 만나거나 동창회, 간단한 모임, 라디오방송 같은 데는 자전거를 타고 가요. 차가 안막히니 시간도 절약하고 운동도 되니 일석이조예요. 자전거 복장 그대로 가면 오히려 부러워하죠. 대신 커피숍 같은 곳은 자전거를 볼 수 있도록 창가에 앉아요.”         
한 분야에 아무리 몰입한다고 해도 30여년 간을 한결같이 열정을 견지하는 것은 어렵고 또 드문 일이다. 이제 ‘자전거 매니아’는 평생을 함께하는 ‘김세환’의 상징이다. 고희를 넘겨서도 중년 부럽지 않은 체력과 에너지를 자랑하며 ‘만년 청춘’을 유지하는 그의 비결은 자전거가 분명해 보인다. 사람과 두바퀴의 가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동행을 그에게서 본다. 

김세환 씨와 자전거
(사진제공 : 김세환)

1986년 미국에서 구입해온 스캇 볼더. 당시는 ATB라고도 불렸다. 서스펜션은 없지만 앞 3단, 뒤 7단의 변속기를 갖추었다
2007년 티타늄 러그와 카본 튜빙을 조합한 세로타를 탈 때의 모습

 

최신 제품과 기술이 나오면 꼭 테스트를 해본다. 휠러 티타늄 모델과 함께

  

위아위스의 로드바이크와 함께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2014년)
춘천 라이딩 때 대열을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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