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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근교 새 코스 ⑦-연천읍~백마고지 26km백마는 ‘청마’가 되었으되, ‘돌격 앞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연천읍~백마고지 26km
백마는 ‘청마’가 되었으되, ‘돌격 앞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 정중앙, 지면의 화구가 폭발해 형성된 광활한 용암대지가 철원평야다. 이곳을 지칭하는 ‘철의 삼각지대’는 6·25 당시 북한군이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곳으로 전략적 요충이었다. 철원평야에서 휴전선을 아랑곳 않고 흘러내린 차탄천은 전곡 즈음에서 한탄강에 합류한다. 연천읍내에서 차탄천을 따라 백마고지까지, 안락과 풍요와 자유를 점차 등지는 북상의 길을 간다. 백마고지역까지는 경기도가 조성한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잘 나 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차탄천을 건너는 옛 경원선 철교. 1914년 완공됐다는데 여전히 멀쩡하다. 여기서 백마고지역까지는 3km 거리다

 

“돌격 앞으로!”

포탄이 작렬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적진을 향해 뛰어가며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오직 운에 기댈 뿐이다. 총알이 어디로 날아올지,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훈련소에서 ‘각개전투’ 훈련을 하면서 듣게 되는 이 ‘돌격 앞으로’는 실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모한 명령이다. 
1951년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대부분의 전투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적을 먼저 볼 수 있고 공격과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해 전략적 가치가 대단하다. 얼마나 많은 장병들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죽음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우리는 도대체 그들의 희생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 걸까. 숱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몬 ‘돌격 앞으로’가 가장 많이 울려 퍼진 곳은 아마도 백마고지 아닐까. ‘백마고지’는 6·25를 상징하는 한 전투이자 상징어가 되었고, 고지에 흩뿌려진 전사의 혈흔과 함성은 허공을 맴돌며 긴장감을 옥죄인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가장 존귀한 희생의 현장을 찾는 것은 삶을 되돌아보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백마고지로 간다. 

연천읍에서 차탄천 따라 북상
백마고지 가는 길은, 자유롭고 안락하며 풍요로운 일상을 잠시 뒤로 하는 묵언의 여정이다. 그 수많은 희생 덕분에 누리는 자유와 안락, 풍요를 심리적으로나마 잠시 유보해야 갈 수 있는, 어떤 금단의 공간 같아서다. 유유자적 음풍농월 하듯, 혹은 시끌벅적 사람들과 어울려 행락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백마고지의 유래를 기억하는 한은.        
출발지는 연천읍이다. 최전방이 지척이어서 ‘군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 가보면 여유롭고 잘 가꿔진 전원도시다. 연천군청 뒤편 주차장에서 바로 옆의 차탄천 둑 위로 올라서면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지난다. 남쪽으로는 파주를 거쳐 서울 경계의 고양시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차탄천(車灘川)은 순우리말로 ‘수레여울’이라고 하는데, 연천읍 남쪽 차탄리의 여울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고려말 이방원과 함께 수학한 이양소(李陽昭)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고려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은둔을 결심, 연천읍 현가리에 숨어 지냈다. 이방원이 이양소를 설득하기 위해 개울을 건너다 수레가 물에 빠져 ‘수레여울’ 곧 차탄천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차탄천의 ‘차(車)’는 예언적인 이름인지 경원선 철길이 내내 강줄기와 함께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철마’는 달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여기 북방의 변경에서는 온통 말이다. 백마, 철마…. 우연히도 말 같은 자전거를 탄 나 역시 말띠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단절과 재개의 부침이 극심한 철길이다. 6·25 이후 연천역 북방 15km 지점의 신탄리역에서 철길은 끊어졌다가 2012년 신탄리역~백마고지역 간 5.6km가 연장 개통되었다. 백마고지역은 최북단 역으로 관광객이 주로 찾았으나 평일에는 승객이 너무 적고 동두천~연천 간 복선전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올해 4월부터 동두천~백마고지 간 열차는 운행이 중단됐다. 21년 4월 재개통 예정이지만 다시금 철마가 끊어진 철길에는 잡초가 자라고 궤도는 하염없이 녹슬고 있다.  
읍내를 벗어나 대광리역까지 강변 둑길에는 코스모스가 산들거린다. 아직 완연한 가을은 아니어서 화사한 만개는 아니고 수줍은 듯 성기게 피었다. 
철길이 바로 곁을 지나고, 작지만 들판과 마을이 띄엄띄엄 있는데도 차탄천은 놀랍도록 맑다. 깊은 계곡의 명경지수 그대로다. 강을 따라 줄지어선 무인지경의 산에서 흘러내린 청정수 덕분일 것이다.  
자전거길에는 아무도 없다. 왕복 50여km를 달리는 동안 자전거는 단 1대 만났고 그것도 동네 주민이 잠시 지나는 순간이었을 뿐, 휴일인데도 자전거여행을 나온 외지인이 전무하다. 대신 평화누리길은 걷기 코스이기도 해서 간혹 걷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차탄천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곳곳에서 서정을 자극한다. 물은 산간 계곡수처럼 맑디맑다
둑에는 코스모스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창공을 배경으로 뻗어난 빨간 자전거길 그리고 색색의 코스모스는 가을의 채도를 더해준다
연천군 도신리 강변에 있는 자전거 쉼터에는 트레킹족을 위한 흙먼지 털이기와 자전거 공기주입기가 함께 비치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대광리역과 신탄리역 사이에 있는 작은 잠수교는 행락객들의 한가로운 쉼터다
역고드름 터널. 옛 경원선 터널에 겨울이면 고드름이 바닥에서 거꾸로 생겨난다
백마고지역에서 철마는 길이 막혔다. 백마와 철마의 동병상련인가
백마고지 전적지는 온통 태극기로 장식되어 있다

 

고드름이 거꾸로 생기는 폐터널 
한때 경원선의 종점으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절규가 팻말로 서있던 신탄리역은 백마고지역이 생기면서 이제 후방으로 한발 물러나 스쳐 지나는 곳이 되었다. 지형 따라 구불거리는 단선철길을 지척에 두고 외줄기 텅 빈 길은 계속 북상한다. 오른쪽으로는 고대산(832m)이 헌칠하고 바로 뒤에는 철원의 진산인 금학산(947m)이 하늘을 찌른다.
신탄리에서 3km 북상하면 ‘역고드름 굴’이 나온다. 처음에는 무슨 자연동굴에 생성된 ‘풍혈’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폐터널이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옛 경원선 철도가 지난 길목이다. 6·25 때 북한군의 탄약창고로 사용되다가 미군의 폭격을 받아 터널 위쪽에 틈이 생기고 북향의 골짜기 안쪽 깊이 자리한 특이한 지형 때문에 겨울에는 바닥에서부터 고드름이 자란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 터널 출입을 막아 놓고 대형 역고드름 사진만 걸어놓았다. 가만히 보니 천장에서 종유석처럼 돌출한 부위가 있는데 이곳으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역고드름이 형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역고드름 터널 바로 북쪽에는 경원선 폐철교가 차탄천을 껑충한 높이로 건넌다. 1914년 완공했다니 105년이나 되었건만 지금도 거뜬해 보인다. 여기서 차탄천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의 경계를 이룬다. 이제 강원도로 넘어가 예전에 철길이 지났을 둑을 따라 백마고지역으로 향한다.  
    

아, 백마고지 
열차가 다니지 않아 반쯤 폐역이 된 백마고지역은 버스로 가득하다. 통근열차로도 이용되던 동두천행 열차가 끊기면서 대신 버스가 운행중이다. 관광객들은 역 여기저기서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역에서 백마고지 전적지까지는 2km 거리. 백마가 앞발을 들고 허공을 휘젓는 동상이 입구에서 반긴다. 도열한 태극기가 펄럭이는 언덕길을 오르면 전몰자 이름이 빽빽이 새겨진 위령비가 처연하다. 군인은 죽어서도 계급이다. 계급별로 정리된 명단을 훑어내리는데 마지막 줄에 적힌 이병 4명에게 눈길이 멈춘다. 아마도 ‘이등병의 편지’조차 쓰지 못했을 이름들이다. 이등병 시절의 그 자멸감, 긴장감을 알기에 네 이병의 이름 앞에서 마음이 무겁다. 저 수많은 이름들 아니,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형님이자 오빠였을 저들은 왜 저렇게도 많이 죽어야 했을까.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계속됐고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판문점에서는 한참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양쪽 다 하루빨리 휴전이 성립되기만을 기다리는 시절이었다. 후방에서는 이미 전쟁을 반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 전쟁은 군인만이 하는 어떤 ‘작업’ 같은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다니. 


쌓여만 가는 ‘부채’
엄청난 인해전술을 동원한 중공군의 공격에 대항해 국군 9사단과 미군은 끝내 고지를 지켜냈다. 10일간 아군은 21만여발, 중공군은 5만여발의 포탄을 쏘아 ‘395고지’는 높이가 1m 이상 낮아졌다고 한다. 해발 기준으로 395m이지 산 아래 철원평야가 이미 해발 200m여서 실제는 200m도 되지 않는 야산 정도의 높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1만여 사상자를 냈고 아군도 3000여 사상자가 났다. 고지를 차지하면서 철원평야의 절반 정도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섰으니 저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전적지는 기념비와 기념관, 깃대 높이 50m의 초대형 태극기 등이 있는 성역화 공간이고 실제 백마고지는 2.5km 북쪽에 있다. 395고지가 백마고지가 된 것은 포탄에 산등성이가 허옇게 드러나 상공에서 보면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녹음이 짙은 ‘청마’가 되었다. 위성사진으로 보면 산줄기가 말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백마고지 오른쪽으로 당시 김일성이 올라 패배를 크게 낙담했다는 일명 ‘김일성고지’가 선명하다. 원래는 서울의 북한산, 개성의 송악산처럼 궁예가 태봉국 도성의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780m)이다. 철원을 근거지로 일어난 궁예의 도성은 하필이면 DMZ에 걸쳐져 지금은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백마고지를 뒤로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남하한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아니 67년 후 찾아온 이 후예조차도 기꺼이 생명을 헌납한 용기 앞에 어마어마한 ‘부채의식’을 감당할 수가 없다. 이래저래 수많은 빚을 지고 사는 세상… 언제나 다 갚으려나. 

 

비석을 가득 채운 전사자 명단과 위령비. 뒤쪽으로 높이 50m의 대형 태극기가 펄럭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마고지(왼쪽 바로 앞의 둔중한 산줄기). 백마고지 바로 오른쪽으로 일명 ‘김일성고지’인 고암산의 암봉이 살짝 드러났다
위성사진으로 본 백마고지. 오른쪽 길을 따라 주능선에는 아군 초소가 있고 강줄기를 낀 특이한 지형은 말을 닮은 것도 같다
전투 직후의 백마고지. 포탄을 맞은 산등성이가 허옇게 드러나 있고 아래 들판에도 수목을 찾기 어렵다
백마고지 전적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제주도 오름처럼 생긴 낮은 오리산(452m)이 철원평야의 용암대지를 이룬 분화구이다. 철원평야 전체가 미국의 옐로스톤 같은, 일종의 평지 화산인 셈이다
백마고지 전적지 일대도 온통 현무암 투성이여서 그 옛날 화산이 폭발한 지역임을 말해준다

 


김병훈 발행인  soolm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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