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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골목길(8)진주-남도 천리 진주남도 천리 진주, 대중가요의 머나먼 고향

대중가요의 골목길(8)진주
남도 천리 진주, 대중가요의 머나먼 고향 (1)

3도 5군에 걸친 지리산의 정기는 남강으로 녹아 흐른다. 남강이 있어 진주는 서부경남의 수도가 되어 자존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한국대중가요사를 장식하는 불후의 명곡이 진주 예인 의 손과 입을 통해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에서 시작해 백영호, 이봉조, 정민섭이 진주와 인연으로 불멸의 가요인으로 남게 된 것도 예혼을 키워준 남도 천리 진주의 넉넉한 품이 있어서다. 고희를 앞둔 ‘개천예술제’를 즈음해서는 남강의 푸른 밤을 수놓는 ‘유등축제’가 불을 밝히고 그 황홀경을 찾아온 사람들 발길로 진주는 더욱 따뜻해진다

남도 천리 진주의 시월은 ‘개천예술제’와 ‘남강유등축제’로 달아오른다.

 

태풍 ‘미탁’이 막 지나간 아침, 천리 길 진주를 찾는다. 유난히 태풍의 방문이 잦은 올해다.   남강댐은 수을 열어 지리산 골짜기를 훑고 내려오는 물을 토하듯 쏟아낸다. 하늘이 남색으로 더 진해가는 것은 시린 가을이 거기 얹혀서 이리라.

대중가요의 고향, 진주를 찾으려고 1년을 기다려온 것도 ‘하늘이 열리는’ 개천예술제가 시월에 있고, 남강 푸른 물에 유등을 띄워 밝히는 축제 또한 1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진주를 대중가요로 사랑하는 팬들은 해마다 남강변 가을밤을 수놓던 <가요무대>를 기억한다.  한 도시가 그렇게 자기 도시 출신의 대중가요만으로 무대를 꾸미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진주 야외무대의 <가요무대>를 만날 수 없다.
친일의 프레임 속에서 진주의 대중가요도 자유롭지 못하다. 올해처럼 유난하게 현해탄(玄海灘)사이로 이름 그대로의 검은 물결이 세차게 흐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나온 일제강점기를 친일의 확대경만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우리 예술의 한 줄기는 뭉텅 잘려나가고 말게 될 것이다.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세 사람에게 있어 친일대중가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들을 빼놓고 ‘가요 110년’의 한국대중음악사를 말하기도 어렵다.
진양호공원에 들어서자, 관광을 온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남인수 선생을 뵙고 올라오는 길”이라며 힘이 들어도 유쾌한 표정이다. ‘가요황제’ 남인수의 동상은 진양호 물가 언덕에 서 있다.  

불세출의 가요황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전설적 가수다. 고향집 뒤편 대나무밭에서 발성 연습을 하던 그는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하여, 이듬해 오케레코드로 옮겨 불후의 명곡<애수의 소야곡>을 부른다. <눈물의 해협>과 <애수의 소야곡>은 이명동곡(異名同曲)이다. 미성이지만 옹골찬 기운을 가진 그는 가는 목소리로 고음과 저음을 3 옥타브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노래의 천재성은 성악가들조차 그와 같은 무대에 서길 주저했다는 데서 엿볼 수 있다. 
1000여 곡에 이르는 취입곡이 그를 빛낸다. 광복 전의 800여 곡은 민요조가 섞인 트로트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세상사 서글픔과 식민 유랑의 비애를 때론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시대를 위안했다. 광복 후 악극단 소속으로 스테이지 중심의 가수가 되어 6·25 전란과 전후에는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을 비롯한 200여 곡을 남겼다.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남인수라는 예명을 가진 강문수는 원래 하동사람 최창수였다. 어머니의 개가(改嫁)로 다시 얻은 성이 강(姜) 씨였으니 이름에서부터 인생이 파란만장하다. 10대 때 ‘목포가요제’에서 만난 가수 이난영과 사랑이 싹텄다고도 했다. 이난영의 남편, 작곡가 김해송의 월북과 아내 김은하와의 이혼이 6·25전란 후에 이루어졌고, 1960년 마흔두 살에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 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고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것만은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며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애수의 소야곡> 
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37, 오케레코드


1996년 ‘개천예술제’ 기간에 만들어진 ‘남인수 가요제’는 친일인명사전에 남인수가 오르면서 2008년부터는 ‘진주가요제’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작곡가 이름을 딴 가요제도 생겨나는 마당에 대중가요의 큰 별을 무대에서 다시 잃고 말았다.
영남대 교수 출신의 시인 이동순이 이끄는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가 270여 곡의 확인된 노래를 12장의 CD로 펴낸 것은 남인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헌정하는 최고의 존경이다. 아코디언을 직접 켜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수한 경상도 말로 해설하는 이동순의 모습은 “아, 진정으로 사랑하면 저런 찬사와 경탄이 절로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자료를 찾다 보니 남인수(본명 최창수)의 월북한 친형 최창도의 딸 최삼숙이 북한에서 2600여회 공연을 한 인민배우이자 가수였다는 사실과 그녀의 딸이 2016년 탈북하여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의 깊은 뜻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한 곡으로 아쉬워 살짝 민요풍에 동요의 느낌마저 풍기는 나의 애창곡 <낙화유수>를 노랫말로나마 다시 음미해보고 넘어가자. 아무리 살펴도 거기에는 절망의 먹구름이 뒤덮은 일제의 현실에서 이상향을 찾아가는 소시민의, 가난한 예술인의 ‘소극적 저항이 담겨 있는 희망가’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낙화유수>
김다인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 1942, 오케레코드

 

진양호반에 있는 가요 황제 남인수 선생 동상 앞에 서니, 주옥같은 노래가 절로 나온다(판문동)
태풍 ‘미탁’이 막 지나간 뒤라 남강댐 수문을 열어 지리산 골짜기의 물을 토해내고 있다(판문동)
촉석루에서 내려다본 남강의 풍경. 조선 3대 누각으로 불릴만하다(본성동)
가을빛은 따갑기도 해서 누각 마루에 앉아 쉬는 시민들의 표정에도 시원함이 넘쳐 흐른다(본성동)
가장행렬을 기다리는 학생들. 시민의 일원으로 좋은 추억이다(성북동)

 

한국 대중가요의 슈베르트, 작곡가 이재호와 <불효자는 웁니다>
남인수 동상에서 멀지 않은 ‘진양호동물원’ 입구에 이재호의 노래비가 서 있다. 1940년 발표된     <남강의 추억>(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고운봉 노래)은 진주 촉석루와 논개의 충정을 노래한 명곡이라서 이 자리에 진주사람들이 1972년 세웠다. 진주 출신 시인 설창수는 헌시에서 “그의 노래는 동포의 마음속에 스며 흘러 강이 되었고, 한이란 바위에 사무쳐 선율이 되었다”고 읊고 있다. 이재호를 말하면 “그가 누구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흔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작곡자는 일단 노래에서 대중에게 한걸음 비켜나 있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그의 작품을 말하면 사람들은 “아하~” 하는 반응이 나온다.
본명 이삼동, 예명 ‘무적인’, ‘남촌인’으로도 쓴 그는 일본 고등음악학교 본과를 나온 바이올린 전공자였다. 귀국하여 진주중학교 음악교사를 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의 서정과 서양음악의 반주를 조화시킨 작곡자로 짧은 일생(41세)을 예견한 듯 다작(多作)을 남겼다. 20세부터 작곡을 하여 태평레코드의 달러박스 역을 했다. 백년설, 이재호, 반야월이 ‘태평레코드 3총사’였다. <나그네 설움>, <복지만리>, <어머님 사랑>과 작사가 반야월이 가수 진방남으로 출세하게 해준 <꽃마차>, <대지의 항구>, <불효자는 웁니다>도 명곡이다. 백난아의 <황하 다방>, <갈매기쌍쌍>, 이인권의 <귀국선>,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 송민도의 <아네모네 탄식>,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까지 힛트곡 퍼레이드다. 광복 후는 몸이 병들어 마산요양원에 입원하고 있던 1956년에도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손인호의 <울어라 기타줄>을 작곡해줄 정도의 열정을 가졌다.
그 가운데서도 <고향에 찾아와도>나 남인수가 부른 <산유와>는 가곡으로 만든 것을 보면 클래식 음악을 배우고 음악교사를 했던 흔적이 묻어 나온다.
그는 가요 인생의 거의를 반야월과 동고동락하며 술과 함께 스카라계곡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이목구비가 오뚝한 그는 미국 배우 타이론 파워 못지않았다고 황문평은 전한다. 전당포를 들락거려야 했던 대중음악인의 삶이 오죽했으랴. 진주여고 출신의 무용수와 결혼하고 6·25때는 부산방송 경음악단장도 역임했다. 이재호가 죽고 난 뒤 부인은 다방 마담이 되어 생계를 이어갔는데 맏아들이 “어머니 화장이 진하다”고 불평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재호의 부인은 “애들 아버지 죽은 후 나는 이 세상에 없다. 오로지 돈 버는 일밖에 없다.”고 모진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스폰서가 생겨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 명소가 된 성북동 ‘대연각’ 요정을 운영하기도 했다는 소문도 남아있다.
오늘 나는 그의 노래 가운데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러온다. 명절이 다가오면 더 절실해지고, 남북 이산이 불혹을 맞은 잔인한 분단의 배경음악으로 이보다 더 애간장 끊어지는 노래도 없으리라. 두고 온 고향산천도 아버지 어머니 없는 고향집은 그대로 텅 빈 추억만 남은 자리다. 이 세상 누가 불효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니 이 노래는 부모를 선산에 묻은 자식들의 주제가가 되어 스산한 가을바람에 더 애절할 수밖에 없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악극의 단골 소재다. 절대로 망할 수 없는 뮤지컬이자 신파의 리메이크로 대중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1998년 초연된 뒤, 2015년 버전에는 김영옥과 박준규, 이덕화, 오정해가 열연했고, 전원주 심양홍, 고두심, 안재모가 출연한 2016년 버전도 있다. ‘효’가 빛이 바랜 세상이라고는 해도 우리네 삶의 영원한 주제가 담겨 있어서다.
북에 두고 온 부모님을 사무치는 한으로 부르던 희극배우 김희갑의 불효자도 흑백필름 속에 살아있고, 아흔이 훌쩍 넘어서도 ‘어머니’를 외치는 불효자 송해는 오늘도 ‘전국노래자랑’의 무대에서 100세 행진을 하고 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니여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님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에 우는 자식 내몰라라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오고
산소에 엎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 진방남 노래, 1940, 태평레코드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작곡가 이재호 선생 노래비. <남강의 추억>은 1940년에 발표된 그의 절절한 애향가이다(판문동)
바다 건너 제주 오현고에서 가장행렬대회에 참가했다(성북동)
진주여고 동창회가 교복을 입고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춤추는 모습을 보니 ‘줌마파워’를 흐뭇하게 실감할 수 있다(성북동)
역시 키다리 피노키오의 풍선은 축제에서 인기 만점이다(중앙동)
기녀의 분장을 한 아낙네들의 뒷모습, 짧은 치마가 우습다(성북동)
박경리의 <토지> 속으로 들어가 길상과 서희의 혼례를 재현하는 진주여고 후배들(중앙동)

 

우리 가요의 노신사, 손목인의 <타향살이>에서 스윙음악까지
손목인의 빵모자(베레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남인수와 이재호의 노래비가 있는 남강댐 언저리에서 가요계의 노신사 손목인의 노래를 마저 더듬고 넘어간다. 본명 손득렬에다 양상포, 임원이라는 예명도 있다. 역시 진주 태생이나 일찍이 부유한 한의사 집안이라 서울 재동소학교, 중동고를 나와 동경 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1934년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시작으로 <사막의 한>, <짝사랑>, <뗏목2000리>를 작곡했고, 광복 후에는 방송가요인 <아내의 노래>, <슈샤인 보이>, <아빠의 청춘> 등을 냈다.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 지휘자를 하다가 6·25 전란 중에는 일본에 밀항해 쓰카사준기치(司潤吉)라는 일본명으로 영화 ‘하와이의 밤’의 주제가를 작곡하기도 했고, 스에요시 켄지(末吉賢次), 구가야마 아키라(久我山明)란 이름으로 음반활동을 하면서 <카스바의 여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7년 밀항 신분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강제 출국당해 귀국했다.
그는 ‘목인(牧人)’이라는 예명이 바로 ‘목동’을 뜻하듯 목가적인 삶에 대한 강한 희구가 있었다. 친일의 불명예가 그를 따라다닌다고는 해도 그 없는 우리 대중가요사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1964년에 ‘음악저작권협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67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일가족이 건너가 미국에 정착하려 했으나 1982년에 영구 귀국하고 말았다. 1989년에는 가요작가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지냈으니 ‘저작권’이 무시되던 시대, 배고픈 가요인들의 삶에 사후 70년이라는 ’저작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준 선각자로서 공은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말년에는 재즈풍의 스윙 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대중음악의 신사조의 수평도 넓혔다.
한국과 일본에서 가요 1000곡, 뮤지컬 50곡, 영화음악 70편을 남겼고, 2013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손목인 가요인생> 개정판이 나왔으니 그의 음악 인생은 풍년이었다 해도 무방하겠다. 술 한 잔 걸치고 나면 생각나는 노래, 나의 애창곡 <해조곡>이다.


갈매기 바다 위에 울지 말아요
물항라 저고리에 눈물 젖는데 
저 멀리 수평선에 흰 돛대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가신님은 아니 오시네
쌍고동 목이 메게 울지 말아요 
굽도리 선창가에 안개 젖는데 
저 멀리 가물가물 등대불 하나
오늘도 아~아~아~아~ 동백꽃만 물에 떠가네
바람아 갈바람아 불지 말아요
얼룩진 낭자 마음 애만 타는데
저 멀리 사공님의 뱃노래 소리
오늘도 아~아~아~아~ 우리님은 안 오시려나
<해조곡>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7, 오케레코드

 

역시 아이들의 관심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공룡이 제일이다(신안동)
축제의 밤, 한 잔의 맥주가 가을을 더욱 와닿게 한다(신안동)

 

가장 오래된, 최고의 지방축제 ‘개천예술제’와 ‘남강유등축제’
올해로 ‘개천예술제’는 69회를 맞이했다. 일주일간 열리는 규모도 그렇지만 성화채화에서 제향에 이르는 서제(序祭) 행사에서부터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연예, 음악, 시조경창까지 예술경연의 총집합이 다채롭다. 뮤지컬, 각종 전시, 국악에서부터 진주오광대, 아이돌, 실버무대, ‘진주가요제’까지 축하, 어울림 행사도 다양하다. 특히 진주대첩 재현행사와 전국가장행렬경진대회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한곳에 앉아서 2시간반을 지나가는 수많은 팀의 가장행렬의 별별 볼거리를 다 즐길 수 있다.
‘진주여고동창회’가 주관한 학창시절 교복을 입고 벌이는 행진은 ‘줌마파워’를 보여주면서 서부경남 여학생들 가운데 수재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가을볕에 유감없이 펼쳐진다. ‘박경리의 토지’를 중심으로 한 서희와 길상의 혼례를 재현한 것도 진주여고 대선배이자 위대한 소설가 박경리에 대한 존경을 기본으로 했다. 뒤따르는 행렬단의 깃발도 재기발랄하다. 김연자의     <아모르파티>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그 가사 가운데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내용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필수’라고 재기 있게 꼬집으면서 저출산 시대를 걱정하는 어른스러움도 보여주었다. 대로를 막아놓고 심사위원단이 포진하며 현장에서 점수를 매겨주는 축제, 시민이 유등을 하나씩 사고, 창작등을 만들어 남강 위에 띄우는 행사를 통해서 진주는 하나가 된다.
진주 남강의 유등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에 연원을 두고 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유등을 띄워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 전술로, 또 성 밖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이었다. 어쩌면 구국의 일념으로 순국한 민관군의 7만여 애국 고혼을 위한 진혼의식인 셈이다. 촉석루를 가운데 두고 남강은 진주의 동서를 흐르며 남북을 나눈다. 강폭도 유등축제를 할 만큼 적당하다. 한강처럼 너무 넓어 아득하지 않다. 강을 사이에 둔 사람들의 함성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남강 푸른 물이 그대로 무대가 된다. 유등의 종류와 크기는 천차만별이고, 상징 또한 자연과 역사를 아우른다. 모터가 달린 배가 움직여주는 유등은 스토리가 있는 ‘유등쇼’를 가능하게 한다. 해마다 시월 전국의 축제 마니아들이 ‘진주라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진주남강유등축제’가 강퍅해져 가는 우리의 가슴을 적셔주는 가을밤의 씻김굿 같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남강의 야경은 ‘남강유등축제’의 주무대로서 다른 지방이 흉내내기 어렵다(본성동)
등불이 있는 터널에서는 사랑의 느낌이 훨씬 더 잘 전달된다(강남동)
용의 싸움은 유등의 정적인 느낌을 넘어 ‘진주대첩’을 떠올리게 한다(망경동)

 

참고자료
1. ‌한국가요사 1,2, 박찬호, 미지북스, 2009
2. 야화 <가요60년사>, 황문평, 전곡사, 1983
3. ‌<불후의 명곡시대-한국을 울린 다섯 절창> 신승민, 월간조선 2018년 7월호
4. ‌“KBS가요무대 진주공연, 친일파를 미화했다” 윤성효, 오마이뉴스 2018. 10. 4.
5.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의 인생찬가”, 박성서, 뉴스메이커 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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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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