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천리 진주

남도 천리 진주 
대중가요의 머나먼 고향 (2)
진주에서 우리가요 1세대를 지나 다음 세대를 만난다. 진주 사람 정민섭도 부산사람 백영호도, 남해 사람 이봉조도 모두 진주에 학연과 인연을 두고 있다. 우리 대중가요사에 걸출한 작곡가 3인이다. 최근 가수 하춘화 한 사람의 노력으로 영암에 ‘트로트 가요센터’를 세운 열정에 경탄하며 든 생각이다. 진주는 ‘한국가요사’의 심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서정, 손목인, 남인수, 이재호에다 백영호, 이봉조, 정민섭까지, 아니 작사, 작곡, 노래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모두 망라한다면 진주야말로 ‘가요기념관’을 따로 만들어 풍성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한 머나먼 남쪽, 대중가요의 고향이 아니겠는가

 

 

부산사람 백영호, 진주 가까운 처가 동네에 잠들다
우리 가요사의 잊을 수 없는 별, 작곡가 백영호(본명 백영효) 선생을 진주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는 흑백사진 속에서 기타를 울러 맨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강하게 남아 있다. 부산 출신 작곡가 백영호를 진주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아들인 백경권이 진주시 상대동에 있는 서울내과 원장으로 있어서다. 그냥 병원만 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병원 안에 ‘백영호 기념관’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기념관만 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장품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진열 하나하나에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녹아 있다. 
2009년에는 ‘백영호작곡집’을 출간하고, 2016년에는 아버지 백영호 명예의 전당 ‘헌정음악회’를 열어 이를 아는 아버지들에게 부러움을 한껏 선사했다. 건반을 치면서 아버지의 노래 <동백 아가씨>를 열창하는 아들은 얼마나 멋있는가. 부산이 한국대중음악사에 빛나는 작곡가 백영호를 어쩐지 홀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아들의 이유 있는 섭섭함은 맞는 말이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대중과 함께 기억하며 음반까지 내는 아들의 열정 앞에 우리는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머지않아 부산으로 ‘대중가요의 골목길’ 여행을 떠날 때 다시 모실 백영호 선생이지만 일별이라도 하고 넘어가야겠다. 
백영호는 미발표곡을 포함해 4000여 곡을 작곡한 대가다. 작사에 반야월이 있다면 작곡에 백영호가 있다 할 만하다. 국민애창곡 <동백아가씨>는 불멸의 리메이크 곡이다. 가수만 부르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물론 세대를 건너뛰어서도 불리는 전설의 스테디셀러다. 깡마른 몸집과 얼굴에 지사적 결기가 느껴지는 백영호는 작사가 한산도와 함께 그야말로 주옥같은 가요를 만들어냈다. 
이제 <동백 아가씨>는 아껴두고. <여자의 일생>으로 넘어간다. 현대사의 질곡에서 국민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 치하의 고통, 광복 후의 혼란, 6·25사변의 폐허 위에서, 허기를 입막음하기 위해 초근목피를 삶아야 하는 가난 속에서 안살림을 챙기고, 아버지들의 가부장적 위세와 인습의 굴레 속에 살아가야 하는 여인의 삶을 노래 한 곡이 절절히 대신해 주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여자의 일생>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1968, 지구레코드

 

색소폰 선율과 살다 떠난 로맨티스트, 작곡가 이봉조
백영호기념관을 나와 진주고등학교로 향한다. 산과 강이 들어가지 않는 교가는 거의 없다. 비봉산자락에 매달려 있는 진주고는 통도 크게 지리산을 진산으로 모셨다. 남해사람 이봉조도 진주로 유학을 와 진주고를 졸업한다. 미국 재즈음악에 대한 흥미는 한양대 건축학과 재학중에 미8군 동아리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고 서울시청 토목직 공무원으로 있으면서도 8군 무대에 설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미8군 무대는 신사조 음악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꿈의 무대였다. 이금희, 패티김, 최희준, 현미, 이봉조라는 이름은 음악을 완벽히 체화한 가요세계 정점의 스타다. 배호의 외삼촌인 김광수 악단에 픽업되어 음악의 길로 들어선 그는 엄앵란의 숙부인 색소포니스트 엄토미의 제자이기도 하다. 1962년 번안곡 <밤안개>로 현미를 발굴하고 1964년에는 동양방송(TBC) 개국과 더불어 전속 악단장이 된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동명 주제가를 만든 작가 유호, 작곡가 이봉조, 가수 최희준, 배우 신성일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 노래의 인기는 신성일의 조각 미남 얼굴과 가죽 잠바를 입고 밤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에서 더 치솟았다. 반항은 젊음의 특권인가. 주먹세계의 어두움도 그 시절에는 도가 있었다. 회칼이 등장하기 전의 주먹은 사나이 결투에서 겨뤄야할 단 하나의 무기였다. 주먹잡이에게도 사랑은 힘들게 얻고 지켜내야 할 ‘마지막 꽃’이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외롭고 슬프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맨발로 걸어왔네 사나이 험한 길
상처뿐인 이 가슴을 나 홀로 달랬네
내버린 자식이라 비웃지 마라
내 생전 처음으로 바친 순정은
머나먼 천국에서 그대 옆에 피어나리
 <맨발의 청춘>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1964, 오아시스레코드

동경국제가요에 <안개>로, ‘그리스국제가요제’에 <너>로 정훈희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의 가요 인생은 절정을 맞는다. 가요곡 300여 곡을 남긴 그에게 대중가요의 고급화와 세계화에 앞장 섰다는 상찬의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다.
이봉조가 현미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고 화려한 무대의 조명을 받는 사이, 본부인과 자녀들이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인생의 서글픈 스토리를 상기하는 것은 우뚝 솟은 한 예인의 음악적 성과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의미 있는 단서가 아니다. 그 시절 아버지들에게 있어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두 집 살림’에서 그가 어떤 인간적인 고통을 겪었을지는 말을 안 해도 알만한 일이다. 내가 만난 이봉조는 차분하게 써 내려간 붓글씨에서였다. 인사동의 한정식집 <이모집>에 걸려있는 이봉조의 친필에서 정겨움을 느끼며 단골이 되었던 나의 90년대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씹을수록 먹을수록 눈물만 나네”라고 부르던 <떡국>이란 노래가 흑백 필름 속 음향처럼 아득하다.

 

부부가 너무 일찍 세상 떠난 작곡가 정민섭
일부러 제법 떨어져 있는 진주사범학교의 후신인 진주교대까지 뒷골목을 달려본다. 작곡가 정민섭을 떠올려 보기 위해서다. 이러한 공간 여행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지금 그 시절의 풍경을 기대할 수 없어도 사범학교라는 이름은 교사가 노동자를 자처하는 이 시대에는 빛바랜 수식어 같겠지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시대를 떠올린다. 사범학교가 인재의 산실이었던 것 또한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진주 사람 정민섭은 진주사범학교 2학년 때 ‘관악 5중주’를 작곡하여 문교부 주최 경연에서 특별상을 받았으니 천재성을 타고났다는 게 맞다. 1961년 경희대 음악과에 진학해서 김희조 교수의 추천으로 MBC의 음악 알바를 시작한 것이 대중음악에 디딘 첫발이었다. 드라마 주제가 <뜨거워서 싫어요>가 동양방송 가요 대상을 받고, <목석같은 사나이>, <대머리 총각>, <육군 김일병> 같은 대중적 작품을 남겼다. 대중가요 800편, 영화음악 500편의 작품은 “일제풍을 탈피하고, 한국적 애환과 정서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담겨있다고 평가된다. 노래의 장르는 만화영화 주제가에서 찬불가까지 종횡무진이다. 1970년대의 <똘이 장군>, <마루치 아라치>, <그레이트 마징가> 같은 곡이 모두 그의 오선지에서 나왔다.
무엇보다 최고 수작은 박경애가 부른 <곡예사의 첫사랑>이다. 곡마단 트럼펫과 큰북의 장단이 반주로 나오는 이 노래에서 박경애의 볼륨 넘치는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어 그만으로도 슬픔을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춘기를 넘어서는 소녀곡예사의 슬픈 사랑의 감정은 삐에로의 헐렁한 복장에 감춰진 채로 듣는이의 가슴으로 전달된다. 1978년 ‘MBC국제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곡이자 최우수 작곡상을 타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명곡의 반열에 들었다.

줄을 타며 행복했지 춤을 추면 신이 났지
손풍금을 울리면서 사랑 노래 불렀었지
공 굴리며 좋아했지 노래하면 즐거웠지
흰 분칠에 빨간코로 사랑 얘기 들려줬지

영원히 사랑하자 맹세 했었지
죽어도 변치말자 언약 했었지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

줄을 타며 좋아했지 춤을 추며 신이 났지
손풍금을 울리면서 사랑 노래 불렀었지
(이하 생략)
<곡예사의 첫사랑> 
정민섭 작사/작곡, 박경애 노래, 1979, 힛트레코드

그러나 내가 작곡가 정민섭을 다시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젊은 시절 애창하던, 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 때문이다. 지금껏 작곡자에겐 무심했다. 친구들은 술이 한 순배 돌면 내게 김상진의 모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라고 박수를 쳤다.  

이리 가면 고향이요 저리 가면 타향인데
이정표 없는 거리 헤매 도는 삼거리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바로 가면 경상도길 돌아가면 전라도길
이정표 없는 거리 저리 가면 충청도길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 없고
세 갈래길 삼거리에 해가 저문다
<이정표 없는 거리> 
이인선 작사, 정민섭 작곡, 김상진 노래, 1970, 신세기레코드

가늘면서도 고음을 바탕으로 여성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노래는 <고향이 좋아>, <충청도 아줌마>든 뭐든 다 좋아할 때였다. 탄식을 담은 그의 목소리는 애조를 한껏 간직한 채 1971부터 3년간 MBC 10대 가수에 올려놓는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호남 푸대접’ ‘충청 무대접’의 정치풍토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나는 작사가 박대림(본명 박영환)이 지리산 뱀사골이 끝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고 영감을 얻어 쓴 가사라는 정두수 작사가의 견해 쪽에 더 마음이 간다. 1970년판 앨범 자켓에는 이인선 작사라고 되어 있으나, 저작권 협회에 등록된 것을 보면 이인선, 박대림 공동 작사로 된 것 또한 그런 사연이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정민섭의 아내 양미란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걸친 당시 <범띠 가시네>와 리듬앤 블루스 스타일의 <당신의 뜻이라면> 같은 영화 주제가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한 창법에 쇳소리가 느껴질 정도의 매력이 묻어났다. 너무도 아까운 35세에 세상을 떠나버린 뒤 정민섭 또한 폐암으로 47세의 한창나이에 영면했다. 좀 더 살았더라면 대중가요사의 허리를 좀 더 넉넉하게 했을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딸 여진이 아버지가 작곡한 <미래소년 코난>의 노래를 직접 불렀고, 아들 또한 애니송의 황태자라 불릴 정도로 음악적 재능은 대물림되었다.

 

기생 아닌 기생 논개의 의암, 남강 푸른 물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다시 촉석루로 돌아온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다. 남강 언덕에 선 누각에서 발아래를 내려다본다. 죽음으로 지킨 왕조의 역사도 그렇게 흘러갔다. 강물은 예나 제나 여여하지만, 세상은 하냥 뒤숭숭하여 때를 아는 자연의 비웃음을 사며 흘러간다.
의암으로 가는 쪽문을 열어놓는 낮 동안 사람들은 강물에 다가가 사진 한 장에 의암의 기록을 남긴다. 하상의 퇴적으로 의암은 간신히 물 위에 떠있는 듯 보인다.
논개는 의기(義妓)이고, 임진왜란 중 왜적에 짓밟히는 진주성과 우리 강토에 대해 분개해 몸으로 적장을 감아 순국 고혼이 되었다는 정설이 여전히 진주성 언덕에선 주류다. 하지만 장수사람 주논개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최경회의 후실로서, 남편을 따라 기녀로 가장하여 마지막 목숨을 던져 왜적을 물속에 끌고 투신했다는 설을 그냥 이설이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냥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죽어서 사는 이치를 몸으로 이룬 사람 논개’에는 “잘난 벼슬아치의 허위와 권세를 꾸짖는 거룩한 항거 또한 들어 있다”는 주장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일이다.
1981년 <논개>를 부른 이동기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뜬금없는 집권에 ‘우국충정(憂國衷情)’은 맞아떨어지는 ‘집권 이데올로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PD가 “너는 못생겨서 가수 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라”고 했다는 그가 가요 차트 1위를 할 때 조용필의 <나는 너 좋아>가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꽃 잎술 입에 물고 바람으로 달려가
작은 손 고이 접어 기도하며 울었네
 샛별처럼 반짝이던 아름다운 눈동자
눈에 선한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아 ~ 없어라.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 위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
 피다간 그 사랑 그 사랑 영원하리.
(중략)

 큰 별이 저리 높고 아리따운 논개여
뜨거운 그 입술에 넘쳐가던 절개여
 샛별처럼 반짝이던 아름다운 눈동자
눈에 선한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아 ~ 없어라.
 (이하 생략)
<논개> 
이건우 작사, 이동기 작곡, 이동기 노래, 1981, 현대음향

이 노래는 송창식이 “꼭 히트할거다”라고 예측한 곡이라 한다. “노래 한 곡 히트하면 죽을 때까지 인기가 가는 줄 알았다”는 순진한 가수 이동기를 밤무대에서는 ‘건전가요’ 가수로 분류해 불러주지 않았다. 경찰에게 교통위반으로 걸려서 “가수 이동기인데 모르냐?”고 했더니 “잘 모르겠는데, 가수라면 힛트곡 좀 불러보라”고 해서 계속 ‘몸 바쳐서’만 반복했다는 우스개는 그의 장난기를 잘 말해준다. 한 방송에 나와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그는 “유행가 가수는 바위를 때리고 흩어지는 물거품 같은 직업이라는 가수 최희준 선배의 충고를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되돌아보았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서는 논개를 우리말 원곡으로 부르는 자존도 보였다. 현해탄을 오가면서 돈을 벌며 교도소 위문공연도 하는 그에게서는 세상의 파도를 헤쳐온 사람의 편안함이 유쾌한 입담 속에 살아 있다. 
해가 급히 기운다. 조락해 가는 가을볕 아래 진주성 초입에 서 있는 시비(詩碑)를 보며 <논개>를 읊조려 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하 생략)

수주 변영로의 논개에 대한 흠모의 정한은 우리의 마음까지 이끌고 저 남강물에 비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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