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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베가본드 ⑦-통증과 좌절감을 극복하게 해준 멕시칸의 인정통증과 좌절감을 극복하게 해준 멕시칸의 인정

통증과 좌절감을 극복하게 해준 멕시칸의 인정 
“내 집이 곧 너의 집이야. 원할 때까지 편하게 지내!” 

태평양 가까운 멕시코 서부지역은 온통 사막지대다. 40도를 넘나드는 뙤약볕 속에 힘겹게 전진하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풀어준다. 아무 조건 없이 집으로 데려가 재워주고 먹여주며 언제까지든 원하는 대로 지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무리한 라이딩으로 허벅지 통증이 심해져 좌절하고 있을 때도 짐을 빼곡하게 실은 승합차의 도움을 받았다. 눈물겨운 멕시칸의 친절과 인정… 나는 멕시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1일째

10일간의  푸에르토 리버타드
푸에르토(Puerto)는 우리말로 항구라는 뜻이다. 멕시코 북부의 작은 마을에는 푸에르토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다. 푸에르토 로보(Puerto lobos)에서 50km 떨어진 푸에르토 리버타드(Puerto libertad) 역시 항구도시다. 원래 계획은 푸에르토 리버타드는 지나치고 300km 떨어진 대도시 에르모시요(Hermosillo)를 향해 3일간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다.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내달렸다. 어느새 승용차 한 대가 클랙슨을 울리더니 전방에 멈춰 섰다. 운전자는 자신한테 오라고 손짓한다. 한창 속도를 즐기고 있는 중이라 그냥 지나칠까 고민하다 브레이크를 잡고 운전자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푸에르토리버타드에 살고 있는 운전자 웨로는 8년 전에 이스라엘 여행자를 며칠 재워준 적이 있다며, 은근히 내가 집에 놀러 오길 바라는 눈치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넘치는 자전거 여행자가 현지인의 집 초대를 거절할리 만무하다. 그의 낡은 자동차를 따라 페달을 밟았다. 

친절한 멕시칸 웨로
웨로는 컨테이너 집을 보수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 있던 웨로의 부인 마리벨과 이웃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마당에 텐트를 쳤다. 마음씨 좋은 웨로와 마리벨은 머물고 싶은 만큼 있다가 떠나라고 말한다. 부부의 배려 덕분에 멕시코의 시골을 들여다 볼 좋은 기회가 생겼다.
다음날 마리벨은 아침을 차려주었다. 멕시코의 가정식은 토르티야와 콜라가 빠지지 않는다. 아침부터 콜라라니, 굉장히 내 스타일이다.
정오가 되면 마을사람들이 웨로의 집을 찾아온다. 하루는 장난기 많은 아저씨가 찾아와서 유리병에 든 작은 열매를 나에게 권했다. 별생각 없이 몇 개 집어서 씹어 먹는데 입안이 폭발하는 매운맛이 느껴지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둘러 수돗가로 달려가 혓바닥을 찬물에 씻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가족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먹었던 열매는 멕시코 고추 할라페뇨. 그 속이 얼마나 맵던지, 한동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당을 빙빙 맴돌았다.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과자를 사먹던 구멍가게 아들 가브리엘은 유독 나를 잘 따랐다. 가브리엘과 권투를 하며 놀았는데 5살짜리 꼬마의 주먹이 어찌나 맵던지. 장난으로 몇 대 맞아주다가 어느새 가브리엘의 주먹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나를 발견한다. 
해가 지는 시간에는 카메라를 메고 동네를 산책했다. 처음에는 낯선 동양인을 신기해하더니, 며칠 마주치니 먼저 인사해준다. 현지인들은 다양한 일상을 보여주었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그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할아버지, 유모차를 끌고 흙길을 걸어가는 모녀,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일을 마치고 땀을 식히던 아저씨. 저마다 일상을 채우는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가치 있는 인생의 주인공이다.
동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리벨은 나를 반겨주었다. 열댓 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저녁을 준비해놓고 말이다. 그러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웨로의 친구들이 맥주를 들고 찾아온다. 저녁은 곧 파티로 이어지고 밤늦게까지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웨로는 항상 나에게 말했다.
“미까사 에스 뚜까사(Mi casa es tu casa).”
‘내 집이 곧 너의 집이다’라는 뜻이다. 그의 마음은 나에게 가감 없이 전해졌다. 덕분에 그의 집에 지내며 멕시코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었다.

 

136일째
에르모시요,  멕시코를 되돌아보다
사막에서 화물차를 얻어 타고 에르모시요(Hermosillo)로 향했다. 미국 국경에서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르모시요는 멕시코 북부 소노라 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다. 
화물차 운전수는 도시 변두리에 자전거를 내려주었다.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그의 말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에르모시요 도심으로 향하는 길, 도로변 건물에는 프랜차이즈 음식 간판이 즐비했다.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음식 사진에 입맛을 다시며 페달을 밟았다.
값싼 모텔을 찾아서 밤늦게까지 바퀴를 굴렸다. 하룻밤에 300페소(약 17달러)하는 모텔을 발견했다. 물가가 비싼 캐나다, 미국을 여행할 때는 숙박시설을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저렴한 물가의 멕시코는 장기여행자에게 부담이 없는 편이다.

에르모시요의 시장 풍경
모텔에 도착한 다음날은 환전소를 찾았다. 환전소 문 앞에는 ‘1달러 16.5페소’ 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었다. 환전소 주인에게 미화 1달러를 17페소에 환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주인은 조용히 계산기에 16.7을 적었다. 계산기에 적힌 숫자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가려는 시늉을 하니 환전소 주인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16.9페소’
최종낙찰가격이다. 역시 흥정은 아쉬운 것 없는 자가 이득을 보는 법이다. 
돈을 환전하고 시장을 걸어 다녔다. 시장 중앙 분수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걷다보니 정육점이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父子)가 함께 돼지를 해체하고 있는 광경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앳된 얼굴의 아들은 기껏해야 10살도 채 안 되어 보였지만, 고기를 자르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심히 지켜보는 나에게 미소를 짓는 여유도 보여주었다. 
‘이 아이는 프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시장을 나오자 전방에 성당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건축양식은 유럽에서 건너온 정복자에 의해서 지어졌다.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맞이한 유럽에서는 세계를 향한 식민지 확보가 중요한 시기였다.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멕시코 역시 유럽 열강의 표적이 되었다. 시대의 파도를 거스를 수 없는 약소국들은 하나 둘 유럽의 국가에 종속된다.
멕시코로 이주해 온 스페인 귀족들은 원주민의 노동력을 이용해 은광,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고 300년 넘게 지속된 식민지 정책 속에서 멕시코 원주민과 스페인 백인 사이에서 혼혈인 ‘메스티소’가 태어났다.
식민 정책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 나라의 영토를 빼앗는 것은 물론 언어, 풍습, 민족의 정서까지 서서히 좀먹는다. 같은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만난 멕시칸은 대부분 스페인을 좋아했다. 미개한 자신들의 나라를 스페인이 발전시켜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이 믿고 있는 상식이 진리일까? 
식민지의 라틴어 어원인 ‘콜로니아’의 뜻을 살펴보면 이렇다. ‘인간이 오래 거주하던 땅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 곳의 토지’. 단어의 뿌리에 이미 스페인 침략자의 야심이 스며들어있다. 과연, 침략자들은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는 약소국가의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왔을까.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터전 곳곳에 녹아있는 역사를 마주칠 때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이 떠오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나간 과거를 성찰해야 비로소 지금을 바르게 살고 밝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143일째
끝없는 사막
사막이다. 사막을 달리고 있다. 멕시코에 입국한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멕시코의 사막은 자전거로 종단하기에 정말 큰 땅덩어리다. 이 사실은 내 경험에 비추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건 산 카를로스(San Carlos)에서 만난 현지인 에드가의 집에서 6일간 쉬며 여독을 풀었던 것이다. 
길을 떠나던 날 에드가는 트럭에 자전거를 실어 80km 가량을 배웅해주었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안장에 올라 유유히 페달을 밟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사막 위에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우다드 오브레곤(Ciudad Obregon)이라는 곳이다. 
물만 채워서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를 거스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치킨집 앞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더라. 노릇노릇한 치킨을 먹으며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오늘 날씨는 몇 도예요?”
주인아저씨는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103℉’
핸드폰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숫자. 그렇다. 이날 역시 섭씨 40도를 웃도는 날씨였다. 어쩐지 왁스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굳더라니. 미국에서부터 40도의 폭염에 몇 번 자전거를 타다보니 이제는 ‘이런 더위면 40도 정도 되겠다’는 체감이 든다. 꽤 정확도 높은 오감센스가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해질녘까지 100km 주행을 마쳤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는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드넓은 농장이 펼쳐진 시골의 흙길을 걸으며 캠핑을 허락받고 다녔다. 시골 동네를 돌아다니면 똥개들이 나를 반겨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목청이 떠나가라 짖으면서 쫓아오는 통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이목은 나에게 집중된다. 이 날도 인심 좋은 아저씨에게 초대받았다. 아저씨는 마당에 텐트를 치겠다는 내게 선뜻 빈방을 내주셨다. 아저씨는 땀에 찌들어 하얗게 얼룩이 남은 내 옷을 보며 재밌어했다. 짐을 방으로 옮기고 그늘에 앉아 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가 꼬레아노(한국인)가 찾아왔다며 동네에 알린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나를 보기위해 왔다는 동네 사람들이 아저씨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짧은 스페인어로 그들에게 물었다. 
“형제들이야?”
“응!”
모두가 동시에 대답했다. 내게 빈방을 제공해준 아저씨는 8남매 중 장남이었다. 큰형의 부름에 동생과 조카들이 한 걸음에 집에 찾아온 것이다. 
“북한에서 왔니?”
“누구더라… 정은 킴은 네 친구니?”
“한국음식은 무슨 맛이야?” 
형제들은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 질문들에 답해주는 동안 밤은 깊어갔다.
다음날 다시 뜨거운 세상으로 들어섰다. 전날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던지 주행거리가 30km를 넘어가면서부터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늘에 앉아 허벅지를 주무르며 라면을 끓였다. 웃통을 벗은 채 라면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현지인이 나타나서 허락 없이 초라한 내 모습을 사진 찍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불만을 토로할 힘도 없어서 무시하고 라면을 삼켰다. 
이윽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10km 정도 달렸을까. 도로변 이정표에 쓰여 있는 지명 치라호밤포(Chirajobampo)를 읽고서야 내가 지구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호스를 들고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는 아줌마가 보였다. 갈증에 넋을 잃었던 나는 아줌마에게 달려가 물을 뿌려달라고 했다. 아줌마는 피식 웃더니 나에게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옷을 입은 채 길바닥에 서서 샤워를 한다.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입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온몸이 흠뻑 젖어도 걱정할 건 없었다. 어차피 20분이면 다 말라버리니까.

 

156일째
트렁크에 실려  남쪽으로
멕시코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마을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Adolfo Ruiz Cortines). 멕시코 47대 대통령인 코르티네스는 재임기간 중인 1955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멕시칸의 인권옹호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힘썼단다. 
내가 이 마을에 머물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허벅지 통증 때문이었다. 뜨거운 날씨에 자전거를 타면서 이따금 근육에 쥐가 났는데 통증을 무시하고 라이딩 하다가 탈이 난 것이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얼음찜질을 하다가 현지인 키미를 만났다. 얼굴만큼이나 마음씨가 고왔던 키미의 보살핌을 받으며 며칠 간 그녀의 집 마당에서 지냈다.
3일째 되던 밤, 키미의 전 애인 줄리오가 나를 찾아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마을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다는 이야기였다.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내가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유언비어. 다시 말해 몇몇 사이코 같은 녀석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게 줄리오의 주장이었다.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내 질문에, 나를 때리고 협박해서 금품을 갈취할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마을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만날 때마다 언제 떠날 거냐고 줄곧 물어보던 줄리오가 나를 마을에서 떠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이튿날 아침에 짐을 꾸렸다. 집 앞에서 작별을 했던 키미의 가족이 마을 출구까지 쫓아와서 손을 흔들어주었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30km 떨어진 옆 마을 과사베(Guasave)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끌기를 반복했다. 10km를 걸어서 도착한 다음 마을. 분위기가 좋지 않고 현지인의 무심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슬럼가처럼 휑한 골목길에서 무장한 경찰을 만났다.
“여기는 위험한 곳인가요?”
“응, 마피아가 많아서 위험해. 밤에 여기서 캠핑하면 마피아가 너를 위협할지도 몰라.” 
경찰은 근엄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지레 겁먹은 나는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마을을 벗어났다. 저녁 즈음 목표했던 과사베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진통제를 챙겨먹고 얼음찜질을 하며 몸을 추스린다. 제발 이번에는 허벅지 통증이 재발하지 않길. 

낯선 이의 구원의 손길, 히치하이킹
며칠 뒤 뜨거워지는 아침 공기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이윽고 허벅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50km도 이동하지 못하고 통증이 재발한 것이다. 도로위에 주저앉아 좌절했다. 자전거 여행자의 연료인 다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너무 속상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어디든 좋으니 하염없이 걸으리라. 30분 걸었을 즈음 승합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선다. 터프해 보이는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말을 건넸다.
“도움이 필요한 거야? 어디가 아픈 거야?”
“다리가 아파서요. 어디까지 가세요?”
“콜리마(Colima). 탈래?”
운전자 액터는 1000km 떨어진 콜리마로 간다고 했다. 절박한 상황에 만난 조력자 액터. 아저씨는 흔쾌히 트렁크 문을 열었다. 문제는 트렁크가 가득차서 짐을 실을 곳도, 내가 앉을 곳도 없었다.
“제가 앉을 자리가 없잖아요.”
“음, 자전거는 차 위에 묶고 너는 트렁크에 쭈그려서 타.” 
그렇게 나는 만난 지 5분도 안된 낯선 이의 차에 몸을 실었다. 짐짝 위에 구부정하게 드러누우니 꼬리뼈가 쓸려서 얼얼하고 오른쪽 허벅지는 욱신거렸다. 게다가 낮에 먹은 상한 음식 탓에 뱃속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균형 잡힌 고통의 삼박자를 느끼며 납치된 듯 트렁크에 실려서 멕시코를 달린다. 

해질녘 멕시코 시골풍경

 


김민형 여행작가  kim_min_hyeong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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