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바다 해운대, 백사장과 동백꽃의 향연

잠들지 않는 바다 해운대,  백사장과 동백꽃의 향연
 

‘부산에 가자’는 말은 ‘해운대로 가자’는 말이다. 해운대는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자유와 청춘의 속살까지 태우는 백사장이 있다. 피서 인파의 절정이 보도되고 나서야 해운대의 그해 여름은 끝난다. 오륙도와 동백섬이 콤비를 이루는 풍경은 사랑으로 타오르는 연인의 바닷가를 묘사하기엔 더없는 장소다. 조용필이 무명을 딛고 일어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식민과 전쟁, 분단과 이념으로 갈라진 재일한국인이 동포의 이름으로 화해하는 노래가 되었다. ‘눈물의 관부연락선’이 ‘환희의 귀국선’이 되는 그 부산항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동백꽃 핀 조망대가 해운대다

 

부산역 앞으로 나서면 두 갈래 길이다. 용두산 방향으로는 텍사스 골목이 나 있고, 초량초등학교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부산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구봉산 아래 산줄기로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한때 남루를 달고 살았던 마을로 가늘 길에는 사연이 많기 마련이다. ‘초량이바구길’이다. 언덕을 지루하지 않게 벽에 걸린 청마 유치환과 여성정치인 박순천의 얼굴이 맞아준다. 이제는 장년의 개그맨이 된 이경규와 음악인이자 방송인 박칼린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초량의 자랑은 가요의 황제 ‘나훈아’다.
나훈아의 야성미는 국민학교 앨범에서 오려낸 아이 최홍기(나훈아 본명)의 얼굴에도 담겨 있다. 야구선수였던 중학교 시절, 이미 노래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났고, ‘정리조’라고 불려 골목의 정의파로 기억된다. 70~80년대 ‘극장쑈’ 전성기를 주름잡던 라이벌 남진과의 대비는 집안 형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남진이 목포의 정미소와 신문사를 하던 부잣집 아들이어서 2층집에 살았기에 나훈아의 집은 산비탈이 아닌 초량의 귀한 평지에 살 정도로 보통 이상은 되었지만 아무래도 기운다. 서울 서라벌고등학교로 진학하고 1학년 때 <내 사랑아>라는 첫 노래에 이어 오아시스 레코드 손진석 사장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인정받았던 가창력은 공식 데뷔곡인 <천리길>로 가요계에 선보인다. 1966년의 일이다.
“신인 시절이 별로 없었다”는 기린아 나훈아는 2600여 곡의 취입, 200장의 앨범, 800여 곡의 자작곡을 만들어 냈으니 전설의 가수로서뿐 아니라 싱어송라이터로서도 대단한 기록이다.
그의 목을 지나오는 소리는 울림과 꺾임의 반전이 예상을 뒤엎는다. 다들 그의 노래를 맛깔나게 부른다고는 해도 모창으로 끝나고 마는 독특한 ‘나훈아’ 창법에 가요계는 가장 높은 자리를 늘 비워두었다. 개인사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팬덤은 더 두꺼워졌다. 2006년 돌연 무대에서 사라져 은둔하며 보낸 세월을 “꿈을 잃은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나훈아는 그의 무대를 갈망했던 대중들에게 해명했다. 

“11년 노래를 굶었다”는 말과 함께 2017년 다시 등장한 그의 야성미는 수염이 하얗게 변한 것 말고는 노래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나훈아의 공연을 보기 위한 ‘효도티켓 전쟁’으로 그의 건재는 증명된다. 이제 그는 <남자의 인생>처럼 고단한 삶의 비탈길을 걸어온 남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로 보듬는다. 초량 언덕의 168계단으로 가는 삶처럼…. 불세출의 가요황제가 출발점에서 부른 데뷔곡 <천리길>을 들어본다.

돌뿌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길
반겨 주실 님을 찾아 강을 건너 천리길
여울진 추억 속에 마음 변해 시든 사랑
울며 갈길 왔던 내가 잘못이련가
옛정을 생각하며 님을 찾아 천리길
슬픈 마음 달래주신 사랑 찾아 천리길
캄캄한 밤하늘은 아픈 사연 울리는데
울며 갈길 왔던 내가 잘못이련가
<천리길> 
손석 작사, 유현석 작곡, 나훈아 노래, 1966, 오아시스레코드

168계단은 처음 부산을 찾는 사람에게는 <용두산 엘레지> 속의 164계단과 헷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산의 계단은 산록의 아랫배를 둘러난 길로 올라가는 매우 흔한 지름길이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두런두런 이바구를 하면서 올라갈 수 없는 급경사다. 젊은 사람들이 재미 삼아 가위바위보를 하며 오르내리는 걸 빼곤 최근에 설치된 모노레일로 모두 올라탄다. 길손에게는 낭만이지만 주민들에겐 만만찮은 일상의 기울기를 올라간다. 고도가 오를수록 부산항과 부산항대교는 하나의 풍경 프레임 안으로 더 빨려 들어온다.
산복도로 망양로를 달려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심해 자전거 바퀴를 적당히 간섭해 줘야 그나마 안전하다. 순식간에 지하철 초량역이다.
 

 

조방앞과 서면, 추억어린 부산의 이름 ‘현철과 벌떼들’
좌천역에서 범일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간다. 조방앞은 옛 조선방직 자리에서 비롯된 오래된 거리다. 고향의 부모님을 떠나와 오빠,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희생한 이 땅의 처녀 직공들 수천 명이 모여 살던 곳, 부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경남·북 일대에서 모여들던 곳, 호텔에 딸린 국제나이트, 금호나이트는 서면의 백악관과 더불어 부산의 청춘들이 광복동, 남포동과 함께 기억하는 유흥의 불야성이다. 또 다른 부산의 가수 현철의 무대다.
구수한 트로트가수 현철이 동래구 홍보대사도 했지만 강상수(현철 본명)가 태어난 곳은 낙동강 건너 대저2동 월포다. 김해공항 언저리 맥도강의 포구마을이다. 일제 때 동래군 사상면 관할이었으니 그 뿌리가 깊기도 하다. 이미 조방앞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던 현철은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으나 남진·나훈아 시대에 밀려 1974년 부산으로 내려와 ‘벌떼들’을 만나 ‘현철과 벌떼들’로 활동한다. 이때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이었던 멤버가 유명 작곡가 박성훈이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지금도 ‘딩동댕’ 실로폰을 치며 활동하는 심사위원이다.
1982년 다시 상경한 ‘현철과 벌떼들’은 앨범을 내고 1986년 박성훈 곡으로 <내 마음 별과 같이>가 뜨며 얼굴 없는 무명가수 20년 설움을 청산한다. “닐리리야~ 곡조에 나오는 민요 창법을 차용해 높은 ‘미’음에서 꺾어지는” 현철 창법은 유독 숨김없는 부산 사투리와 함께 그를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가수 태현철의 이름으로 발표한 데뷔곡 <무정한 그대>가 유튜브의 한 구석에서 발견된다.

사나이 가슴을 때려놓고
떠나가는 무정한 님아
괴로움을 잊으려고 애를 써봐도
찢어지는 내 아픔은 참을 수 없어라
그래도 당신만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미련 없이 보내주리
사나이 마음을 울려 놓고
떠나버린 무정한 님아
괴로움을 지우려고 애를 써봐도
찢어지는 내 아픔은 참을 수 없어라
그래도 당신만을 죽도록 사랑했기에
행복하길 빌어주리
<무정한 그대> 
월견초 작사, 김종유 작곡, 현철 노래, 1969, 아세아레코드

서면은 서울의 청량리와 함께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어디 못지않은 번화가다. 5거리로 몰려오는 교통, 금융의 중심지로 늘 북적였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금정산 동쪽 7번 국도를 따라 동래를 지나오는 차량은 서면을 거쳐야 부산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오죽하면 운전면허를 따서 서면 로타리를 무사히 통과하면 ‘더 이상 연수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까. 구서IC에서 수영만으로 이어지는 도시고속도로로 물동량을 분산시켜도 여전히 서면은 번잡하다.
남천동으로 넘어가는 옛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해운대로 가는 버스도 없고 그저 민락동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의 길이다. 해안을 따라 선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부산은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를 만들어 영도, 남항대교를 지나 서부산으로 가는 교통량을 소화하게 되었다. 비로소 산비탈에 매달려 있는 부산의 야경을 바다에서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꽃피는 동백섬 만개한 동백꽃, <돌아와요 부산항에>
동백꽃이 활짝 핀 동백섬은 해운대의 풍경을 그려낼 때 조선비치호텔과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2005년 APEC 정상회담이 열렸던 누리마루는 이제 해운대를 찾는 사람들이 꼭 한 바퀴 둘러보아야 할 ‘그곳’이 되었다. 여기서도 자전거는 ‘출입금지’ 찬밥이다.
명상음악에 맞춰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지도자에게 “파룬궁은 종교인가” 물었다. “종교가 아닌데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있다”고 했다. 명동 입구에서도,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서도 파룬궁 수련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나는 명상에 공감하나 그 핍박의 진실은 알지 못한다.
동백섬은 고양이들의 천국이다. 무거운 사료 가방을 든 캣맘이 부르자 동백숲 속에서 귀신같이 알고 몰려나온다. 고양이의 조심성과 오만함은 여기서도 본능적이다. 혼밥족 시대의 신생 가족이 된 개와 고양이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다. 개는 밥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여겨 알랑거리지만 고양이는 친구로 알고 먹을 것만 먹으면 데면데면해 진다. 적당한 간격을 아는 도도한 매력이다.
동백섬을 온 국민은 물론, 일본까지 널리 알린 공은 단연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정작 조용필 본인은 그다지 탐탁스러워 하지 않았다는 곡이 그의 인생곡이 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원래 작곡가 황선우는 작사까지 해서 통영 출신 가수 김성술(예명 김해일)에게 준다. 그는 통영에 맞는 가사로 개사해서 <돌아와요 통영항에>(1970)를 부르고 1971년 겨울,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대연각호텔 화재로 사망하며 빛을 보지 못한다. 곡이 아까워 황선우가 다시 손을 보아 1972년 조용필에게 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4 남북공동성명과 1975년 재일조총련동포 모국방문과 함께 부산의 새벽다방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서울로 상륙한다. ‘님’을 ‘형제’로 바꾸면서 연모의 노래가 애족의 노래로 승화된다. ‘눈물의 관부연락선’이 ‘환희의 귀국선’이 되어 돌아오는 조국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지금 우리 귀에 익숙한 이 노래는 1976년 안치행이 록 리듬으로 편곡하여 100만 장을 돌파한 버전이다. 같은 제목으로 두 번 영화가 제작되었고, 일본의 이미자 미소라히바리(美空ひばり)와 김연자를 비롯한 20여 명의 일본 가수가 불렀으며, 엔카 가수 아쓰미지로(屋美二郞)는 <나미다노 하도바>(눈물의 부두)로 번안하여 돌아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여인을 노래했다. 일본어 가사 끝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만은 한글 발음으로 불러 부산태생의 노래임을 증명했다. 가사의 의미도 김성술이 떠난 님을 노래했던 원곡 버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노래의 인기 탓일까 고 김성술의 모친은 가사의 저작권을 들어 황선우에게 소송을 제기해 3000만원의 합의로 마무리한 사연도 있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아섰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황선우 작사·작곡, 조용필 노래, 1976, 서라벌레코드
‘부산에 가자’는 말은 ‘해운대로 가자’는 말, <해운대 엘레지>

해운대는 잠들지 못한다. 빛의 축제가 열리고, 이 한겨울에도 ‘북극곰 수영대회’가 열린다. 해운대해수욕장의 인파가 기록적이었다고 빽빽한 화면이 보도되고 나면 그 여름 피서 시즌은 막을 내린다. 이안류의 내습으로 적잖은 물놀이 사고가 나지만 해운대에 와야 피서객은 서로의 젊음을 확인한다. 비너스의 곡선을 맘껏 뽐내고,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사내다움도 해운대의 모래 위에서는 더 황홀하게 빛난다. 아베크 남녀는 이 바다를 찾아와서 사랑을 약속하고, 이 바다를 떠나면서 사랑을 잊어버린다. 누구는 다시 찾고, 누구는 기억 속에, 새 사랑 속에 묻어 버리고 해운대 바다는 그 많은 사연을 알고도 모른 체 하리라.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는 <해운대 엘레지>를 부르면서도 공연무대에 서지 않은 것은 공보처 영화녹음기사의 공무원 신분 때문이었다. 이미자, 백설희 저마다의 버전은 늘 다른 맛이 난다.  유독 <용두산 엘레지>(고봉산), <해운대 엘레지> <부산 엘레지>(방운아)처럼 ‘엘레지’라는 단어에 부산이 잘 어울리는 것은 바다와 낭만과 애수의 종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뉴트로 음악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민요 천재 소녀 송소희가 이제는 성숙한 여인의 한을 감아 목 놓아 부르는 <해운대 엘레지>는 생황과 거문고, 해금의 반주 속에 애절하다 못해 전율이 돋는다.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게나’하는 마무리에 이르면 청중은 숨조차 멈춘 채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다. 가요의 국악적 해석이 흘러간 노래의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는 셈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서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더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울던 물새도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흐르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는 가련다 떠나 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게나
<해운대 엘레지>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손인호 노래, 1961, 빅토리레코드

백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 가사 가운데 2절의 ‘조각달도 흐르고’는 ‘기울고’가 맞고, ‘잘 있게나’는 ‘잘 있거라’를 잘못 새긴 것이라고 손인호 선생이 확인해 주었다는 말도 있으나 잘못되었다는 가사가 오히려 더 정감이 있다. 무려 28곡의 해운대 노래가 명멸한다. 이미자의 <비 내리는 동백섬>(1968), 태현철(현철)의 <추억의 해운대>(1971), 부산 토박이 작곡가 김종유의 <해운대 연가>(1970), <해운대야 말해다오>(1970) 등 해운대 시리즈가 줄을 잇는다. 같은 한산도 작사여서 그랬을까, 문주란의 <찾아온 해운대>는 옛사랑의 흔적과 미련에 다시 흐느끼며 부르는 <해운대 엘레지>의 속편처럼 들린다.

그대 얼굴을 그대 모습을 눈시울에 그리며
나 홀로 왔네 찾아서 왔네 추억 맺힌 해운대
물새 소리도 파도 소리도 그 옛날과 같건만
그리운 님은 가고 없더라 찾을 길이 없더라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연 백사장에 남기고
못다한 사랑 저주하면서 헤어지던 그 날 밤
생각을 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미련에
저 달을 보고 저 별을 보고 밤을 새워 울었소
<찾아온 해운대> 
한산도 작사, 고봉산 작곡, 문주란 노래, 1968, 지구레코드

 

 

이제 해운대는 부산의 외진 해변이 아니다. 특급열차 통일호를 타고 일생일대의 신혼여행을 오는 관광지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2시간 남짓에 와 닿는 남쪽 해변일 뿐이다. “부산 가자”는 말은 “해운대 가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K-POP의 위력은 깍두기 머리를 한 중국 사람뿐 아니라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까지 해운대의 너른 바다를 찾도록 했다.
어느새 해운대를 방풍림처럼 둘러싼 마천루의 경쟁이 진행 중이다. ‘센텀’이란 이름이 붙으면 아파트는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마린시티’, ‘엘시티’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신흥부촌 해운대가 되었다. 일본이 지진과 태풍의 자연재해로 시달릴수록 바다 건너 일본의 가네모찌(갑부)와  전염병과 미세먼지의 기습으로 혼비백산한 중국의 호방한 수퍼리치들은 해운대의 로얄층을 찜한다. 내국인도 마찬가지다. 사는 날부터 애물단지가 되는 별장 시대가 아니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최고급 레지던스가 유혹한다. 보유세로 때려잡으려는 권력과 적당한 이격거리를 유지하기 쉬운 최신식 ‘나만의 성채’다.
38층 풀에서, 스파에서 내려다보는 해운대 바다. 파라다이스 호텔 뒤 송도탕 옆 부산 양탕장에서 길어 올린 해운대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발아래 저 수많은 인파를 거느린 듯한 착각은 환각이다. 상위 1%의 사람들이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 속에서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 ‘끼리끼리의 하이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된다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사교계가 따로 없는 우리 현실에서 ‘신귀족’이 된다는 ‘으쓱함’은 높은 분양가가 문제가 아니다. 발아래 세상을 깔고 보는 우월한 ‘하이엔드’ 문화가 어찌 유혹이지 않으랴.
다시 찾은 해운대, 달맞이 고개, 문탠로드의 낭만
해운대의 동쪽 미포에서 달맞이 고개로 올라선다. 높은 빌딩은 고개보다 훌쩍 웃자라 있어 달맞이고개가 낮아 보인다. 에피소드 한 토막이 전한다.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던 9홀 골프장이 있었는데 해운대 조선비치에 묵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서민 아파트를 지으라 해서 15평짜리 AID차관 아파트가 들어섰고, 오늘날 부산칸트리가 된 골프장은 금정산 근처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가 온갖 민원을 일으키며 들어선 53층 초고층 아파트군이다. 해안 방풍림 해송만 아니라면 장산이 흘러내리다 와우산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이 고개는 알아 보지 못할 지경인 카페촌으로 변해 있다. 정상 조금 아래에 춘원 이광수가 쓴 ‘해운대에서’가 새롭다.

(전략)
누우면 산월(山月)이요 앉으면 해월(海月)이라
 가만히 눈 감으면 흉중(胸中)에게 명월(明月)있다
오륙도 스쳐 가는 배도 명월 싣고
어이 갈거나 어이 갈거나
이 청풍(淸風)이 명월 두고 내 어이 갈거나
잠이야 아무 때나 못 자리 밤새도록

춘원 이광수 같은 명사도 해운대 바다에서 설레어 잠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젊은 청춘들이야 밤을 꼴딱 새워도 모자랄 판 아니겠는가. 청사포로 떨어지는 길목에서 ‘첫사랑’ 소녀를 못 잊어 가슴앓이하던 기억을 불러내며 끝까지 눈을 감고 읊조리듯 부르는 이 노래는 최백호의 <청사포>로 가는 예고편처럼 들린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그때 그 미소가 그때 그 향기가
빛바랜 바다에 비춰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마주 본다
부산에 가면
<부산에 가면> 
에코브릿지 작사, 에코브릿지 작곡, 최백호 노래, 2013
동해남부선이 어깨동무 하던 바다, 이름도 예쁜     <청사포>

 

 

달맞이 고개를 내려와 바다로 향하면 청사포가 그림처럼 보인다. 그곳에 어항 청사포를 오브제로 하는 사진 프레임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여기서 청사포까지는 내리닫이 길이다.
부전역을 출발한 동해남부선이 달맞이 고개 아래를 벼랑에 붙어 미포 바다를 피하듯 돌아 나온다. 레일바이크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자전거가 차지해야 할 터널을 지나는 아름다운 길 하나를 빼앗겼다. 급한 기울기로 해서 산 너머 해운대도, 언덕 너머 장산과도 차폐된 듯 보이는 청사포에는 카페가 된 옛 건물 옆으로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운대를 가려고 해도 동해남부선을 타야 했던 시절, 부산 사람들에게 청사포는 기차도 그냥 지나치는 그저 그런 어촌이었다. 해운대의 명성에 가려 최백호의 <청사포>가 아니었더라면 부산, 양산 사람이나 호젓하게 찾는 조그만 포구였을 터이다.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최백호는 6·25가 나던 해에 태어나 예명 같은 본명 ‘백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2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밑에 자라면서 다닌 일광국민학교는 그에게 바다가 일찍이 들어와 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군을 제대하고 음악 살롱을 전전하다 하수영과 맺은 인연으로 1977년 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석 달 만에 6000장이나 팔리며 대학가 청춘들의 우상이 된다. 1980년 첫 번째 결혼과 <영일만 친구>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타고, 이어 <고독>으로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대상을 수상한 1983년까지가 ‘제1 전성기’다.
이후 미국 이민까지 잠깐 갔다 오며 방황하다 맞은 ‘제2의 전성기’는 1996년 위세당당한 대발이 아버지가 주인공인 ‘목욕탕집 남자들’에 <낭만에 대하여>가 삽입되면서부터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뒷모습이 유리에 반사되는 걸 보고 만들었다는 운명곡으로 그는 흰머리와 제대로 깎지 않은 듯한 수염까지 청재킷에 잘 어울리는 영원한 가객이 된다. 꼭 같은 연애인데도 최백호가 노래 부르는 쉰 듯한 목소리는 저 가슴 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을 길어 올린다. 불현듯 잊혀진 여인까지도 불러 낼 듯한 마성의 노래로 청사포의 ‘그날 밤 그 바다’를 추억한다.

해운대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언제부터인가 푸른 모래는 없고
발아래 포구에는 파도만 부딪히어
퍼렇게 퍼렇게 멍이 드는데
해운대 지나서 바다와 구름언덕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청사포를 내려보면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이는데 찰랑거리는데
순정의 첫 키스 열정의 그날밤 수줍던 너의 모습
이제는 바람에 흔적마저 찾지 못한 청사포
사랑한다고 나만 사랑한다고 철없던 그 맹세를 
내 진정 믿었던가 목메어 울고 가는 기적소리여
해운대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청사포를 내려보면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이는데 찰랑거리는데
<청사포> 
최백호 작사, 작곡, 노래, 2003 
 
그 후로 <청사포의 아침해-제1악장>(김기수), <청사포의 밤>(주호), <청사포 아가씨>(강펀치), <추억의 청사포>(차태준) 같은 노래들이 줄지어 태어나고 있다.
고운 이름 청사포, 최백호가 노래 불러 더 어여쁜 이름의 청사포를 해운대의 마천루가 넘겨다  보고 있다. 

참고자료
1. <부산의 대중음악> 김종욱, 호밀밭, 2015
2. <한국가요사2>  박찬호, 미지북스, 2009
3. 가요앨범 리뷰 ‘최백호’, 최규성, 한국가요연구소, 네이버 전재
4. 류승훈의 부산돋보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생각하며
5. 강희태가 증언하는 ‘부산 현대사의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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