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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골목길-서울 명동-쎄씨봉과 오비스캐빈이 품어준 70년대의 청춘야곡대중가요의 골목길(13) 서울 명동

대중가요의  골목길(13) 서울 명동
쎄씨봉과 오비스캐빈이 품어준 70년대의  청춘야곡

쎄시봉은 1970년대 포크송 문화를 키운 인큐베이터다. 전후 혼란의 허무를 딛고 선 재건의 사조와는 다른 트랙으로 팝송과 통기타의 어울림 속에서 청춘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비어홀이 즐비한 청계천변 무교동 언저리에 쎄시봉이 생겨난 것은 이단이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가 있어 70년대의 대중음악은 미8군의 군복을 벗고 한국적 포크의 한 갈래를 형성하게 된다. 쎄시봉의 무교동 시대가 가고 오비스캐빈의 청춘무대가 명동시대를 연다. 순수한 음악적 열정이 ‘쎄시봉 시대’라면 상업적 음악의 개화는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다

 

 

2020년 ‘3·1절’은 고요했다. 태풍보다 더한 코로나19가 대한민국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태극기가 상기시켜 줄 그날의 함성은 순식간에 휴대폰 속 유튜브로 빨려 들어갔다. 전염병은 아무도 해산시킬 수 없는 군중을 뿔뿔이 지하로 흩어버렸다. 1960년대 청춘음악의 아이콘 쎄시봉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이 을씨년스러워졌지만 옛 자리의 흔적은 궁금했다.

이럴 때 서울내기 아닌 게 티가 난다. 물론 내가 서울로 올라온 1972년에 쎄시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명동 오비스캐빈의 생맥주 한잔도 마셔보지 못했다. 친구들은 경향 각지에서 상경해 근근이 올라오는 ‘향토장학금’으로 생멸치와 고추장 반찬으로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학교도서관에서 살아내야 하던 시절이니 언감생심 명동행 낭만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호사였다. 
이렇게 ‘대중가요의 뒷골목’을 찾아 헤맬 줄 알았더라면 일탈일망정 좀 기억의 끈을 한 줄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조영남, 이나리가 지은 ‘쎄시봉시대’는 정말 귀한 교과서이자 무궁한 에피소드의 장독대다. 그 시절을 공유하지 못한 나의 텅 빈 청춘의 탱크에 통기타와 청바지의 시대를 주유해 준다.


밤에야 더욱 빛나던 무교동, 쎄시봉의 흔적을 찾아서
쎄시봉(C’est si bon)이라는 말은 불어에서 ‘좋아요. 멋져요’쯤으로 번역된다. 국내에서 이름의 원주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1953년 충무로에 문을 연 음악감상실이 나온다. 음악다방의 원조격인 쎄시봉의 주인은 기독교방송 성우인 천선녀였고, 그녀의 남편이 미군사고문단 소속 외국인이어서 다양한 팝송 판을 구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이후 1960년 종로 2가 YMCA 뒷편으로 옮겼다가 1964년 서린동 지금의 SK빌딩 자리(종로구 서린동 115번지)에 둥지를 튼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음료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새로운 청춘의 보금자리가 탄생한 것이다. 행사도 다양해서 박목월, 서정주, 박재삼에다 아마추어 시인까지 초대한 <시인만세>. 김대중 전 대통령, 두꺼비 만화가 안의섭 등 <명사초청>, 심지어 ‘빨간구두 아가씨’를 부른 남일해(본명 정태호)의 여동생 정강자의 전위예술까지 버라이어티한 공연무대가 펼쳐졌다. 무엇보다 정신적 리더는 팝과 최신 서양음악 사조에 밝은 경음악평론가 이백천과 ‘그룹사운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정홍택이었다. 여기에 서울대 음대생 조영남을 비롯한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민기, 김세환 등 한국포크 음악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끼 넘치는 문하들이 몰려 들었다고 해야 한다. 쎄시봉의 주인 이흥원조차 아예 열쇠를 맡길 정도였으니.
쎄시봉은 그들의 단순한 출연 무대라기보다 생활근거지이자 삶 자체였다. 그들뿐이 아니다. 전설적 연출가 오태석이 연세대 철학과 재학생으로, 스탠딩 개그의 선구자인 <조약돌>의 박상규와 극작가 정하연, 홍대 미대 이두식 교수, 작곡가 문호근(배우 문성근의 형), 한예종 총장을 지낸 이건용 등 모두 20대의 대학생들이 술과 음악과 인생 사이에서 인연을 맺어갔다.
총각 냄새 풀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에피소드인들 없었을까마는 쎄시봉 문지기 용출이의 단벌 양복을 몰래 잡히고 술을 마시던 박상규도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1969년 5월 쎄시봉은 230만 원에 세든 집세를 내지 못해 17년을 마저 채우지 못하고 집달리에 의해 폐업하고 만다. 트윈폴리오가 해체되던 해에 쎄시봉도 사라져갔다.

청계천 모전교, 설명이 필요 없는 고요다(무교동)

 

정통성악과 가요가 신들려 만나는 접점, 조영남의 <불 꺼진 창>
지금 쎄시봉의 기억은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이 기억을 쏟아내 만든 책 <쎄시봉 시대>를 중심으로 추적해 간다. 우선 미8군쇼 무대를 더듬어야 한다. 쎄시봉 멤버 가운데서 미8군 시대를 경험한 가수는 조영남뿐이다. 그의 가난과 천재적 음악성이 8군 무대와 인연을 맺게 했겠지만 1960년대를 풍미한 대형가수 이름이 명멸한다. 패티킴, 한명숙, 현미, 이금희는 이름만 들어도 트로트의 음색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냇킹콜 ‘최희준’, 한국의 후랑크시나트라 ‘유주용’, 한국의 바비다린 ‘위키리’, 한국의 페리코모 ‘박형준’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한국의’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악단장들 이름을 들어볼까. 이봉조, 김희갑, 김강섭, 김호길, 김인배, 김대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까지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미8군 전문연예인 용역사가 실력을 바탕으로 수시 오디션과 등급제 급여로 피 말리는 경쟁을 시키며 배출한 많은 쇼단 가운데서 ‘A추레인’ 소속의 가수가 최희준, 이석, 조영남이다.
조영남의 천재성과 돌발성에 대한 에피소드는 넘친다. 그의 솔직함과 천재성은 보편의 질서를 뛰어넘어 때론 거북하기도 하나 그 또한 대중성에 기초하며 철저히 계산된 일탈이라는 평가가 있다. 클래식을 전공하고 팝송을, ‘대중가요를 저렇게 매력 있게 부를 수 있다니’ 하는 힘이 그에겐 있다. 노래만 잘 부르면 되지 글 솜씨도 프로작가를 넘어선다. 저술만 해도 여러 권이다. 게다가 그림마저 잘 그린다니 질투 나는 일이다.
하지만 ‘화투’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 그의 그림 행진이 의외의 복병을 만나 법정다툼까지 가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생계형 성가대 활동과 타고난 목청으로 다져진 노래는 쎄시봉의 무대에서 빛을 발하면서 무대가 더 익어간다. 나중에 TBC ‘쑈쑈쑈’ PD가 된 조용호도 쎄시봉 멤버여서 “I saw the light on the night that I pass by the window (어두운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 창문에 비치는…)”으로 시작되는 톰 존스의 ‘딜라일라’를 보고서 삼손과 데릴라의 복수에 불타는 절규, “저건 바로 ‘조영남의 노래’다”라고 했다. 두 개의 논평을 인용하면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조영남의 노래는 레코드나 테이프에 나오는 소리와는 달랐다. 살아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가 어렸을 때 본 고향의 황혼빛이 배어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조영남이 데뷔하기 전 부른<고향생각>이란 가곡을 듣고 이백천이 한 말이다.
“조영남은 트로트와 록은 물론, 팝과 옛노래, 민요나 가스펠(성가)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원곡자 입장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할 정도로 무대마다 노래를 제각기 구사한다. 민요를 재즈로, 트로트를 타령으로, 동요를 솔로곡으로 <최진사댁 셋째딸>, <물레방아 인생>, <내고향 충청도>는 번안곡이나 우리나라 노래같이 느껴질 정도다.” 그게 가요평론가 박성서가 말하는 조영남의 롱런 비결이다. 음악 밖의 일로 그를 말하는 것은 췌사다. 이장희가 뽕끼(뽕짝리듬)를 버무려 만든, 한때의 엉뚱한 금지곡 <불꺼진 창>을 들어본다.
    

지금 나는 우울해 왜냐고 묻지 말아요
아직도 나는 우울해요 그대 집 갔다 온 후로
오늘 밤 나는 보았네 그녀의 불 꺼진 창을 
희미한 두 사람의 그림자를 오늘밤 나는 보았네

누군지 행복하겠지 무척이나 행복할 거야
그녀를 만난 그 사내가 한없이 나는 부럽네
불 꺼진 그대 창가에 오늘 난 서성거렸네
서성대는 내 모습이 서러워 말없이 돌아서 왔네

누군지 행복하겠지 무척이나 행복할 거야
그녀를 만난 그 사내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네
불 꺼진 그대 창가를 오늘 난 서성거렸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말없이 돌아서왔네
<불 꺼진 창> 
이장희 작사·작곡, 조영남 노래. 1974, 성음레코드


한국의 싸이먼과 가펑클,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송창식의 쎄시봉 시대는 윤형주와 묶어서 이야기해야 한다. 대중가요의 골목길 인천2편(2019년 9월호)에서 송창식의 배경은 얼추 더듬었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홍대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던 ‘70년대를 제패한 순수음악인’이라는 문장을 얻게 되는 그에게 쎄시봉은 둥지다. 쎄시봉의 ‘성점감상실’은 가수의 신곡 무대에 별(★) 점수를 매기는 제도로 신인 탄생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다. 클래식밖에 아는 게 없어 그걸 불렀다는 말은 순수 그대로의 송창식을 보여준다. 말라붙은 남루, 까진 워커, 허수아비풍, 알 수 없는 웃음, 낡은 기타, 그가 인천에서 왔다는 뿐 아무도 아는 것이 없었다. ‘부잣집 아들설’, ‘부친 납북설’, ‘천애 고아설’에다 재수생 같기도 하고, 홍대 미대생 같기도, 때론 서울음대 작곡과 학생처럼도 보였다는 그다.
여기서 만난 윤형주와 ‘트윈 폴리오(Twin Folio)’를 결성한다. ‘두 장의 악보’라는 뜻이다. 생장 배경이나 음악이 거의 대척에 설 만큼 다른 두 사람의 화음 결합이 여고생들을 까무러치게 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만들었다. 자연적, 은둔적, 토속적, 성악을 기초로 한 송창식의 정직한 소리와 모던한, 팝에 능숙한, 서울내기의 사교적, 교회음악의 경건한 윤형주의 소리가 조화를 이룬 것이다. 트로트 일색의 가요계에 가뭄 속 단비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윤형주가 정형의 삶을 따라가느라 ‘포스트 트윈폴리오 시대’에 홀로 설 때, 송창식은 탁월한 작사, 작곡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조영남이 붙여준 ‘중국영화’라는 설명만큼이나 그는 공중부양의 세계로 남들을 놀라게 한다. 그의 음악은 이후 의도했든 아니든 70년대의 암울을 떨치고 일어서야 하는 청춘 세대의 배경음악으로 깔리기도 했다. <토함산>, <선운사>, <가나다라> 처럼 ‘우리 것’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천착, <푸르른날> <우리는>처럼 시를 육화시킨 노래를 선보이기도 하며 대중가요사의 한 갈래에서 빛난다.
나나무스쿠리 원곡에 조용호 TBC PD가 노랫말을 붙인 <하얀 손수건>은 트윈폴리오를 한국의 싸이먼과 가펑클이라는 호칭을 붙어주면서 소녀들의 “와아~”하는 함성의 원조가 되었다. 가요 평론가 박성서의 말처럼 “가요계의 마이너리티 10대를 메이저 반열로 끌어 올렸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2절 반복)
<하얀 손수건>
조용호 작사, 외국곡, 트윈폴리오 노래, 1969, 지구레코드

 

자연 속 자기를 이룬 예인 이장희,  끊임없이 손짓하는 <그건 너>
쎄시봉에 가장 늦게 입소한 것으로 보면 이장희다. 알고 보니 조영남의 용문고 밴드부 동창생 이영웅의 조카가 이장희였다. 낙산 근처 친구집에서 기타 칠 적 안면이 있었다. 삼촌 친구 조영남에 대한 이장희의 깍듯함은 남다른 우정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는 동력이 된다. “이장희야말로 아무나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샘플이다”라고 반농을 섞었지만 조영남의 사랑이 담긴 예측은 틀렸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에다 베이비붐 세대의 감성과 페이소스를 담아 ‘마셔버리자’를 외치게 한 <한 잔의 추억>까지 연이어 안타를 친다. 음악을 접고 다른 길로 가서 성공한 시인 랭보나 김민기처럼, 무교동에서 반도패션 옷가게를 차리던 그 시절의 이장희는 청바지와 콧수염으로 기억되며 청춘의 저항이 묻어나는 이미지다. 
이장희가 트로트를 가미하여 선보인 <불 꺼진 창>이 조영남의 또 다른 대표곡이 된 건 싱어송라이터로서 이장희의 재능을 보여준다. 서울 도심의 대표적 달동네인 ‘창신국민학교’에서 여배우 문희와 윤여정이 동기동창인 이장희는 명문 서울고를 나와 연세대 생물학과로 진학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LA에서 ‘라디오 코리아’로 성공했음에도 그의 자연에 대한 끝없는 동경은 찜통 사막, 다른 우주처럼 느껴지는 ‘데스밸리(Death valley)’의 편안함에서 마음을 정한다. 타고난 모험가로서 아마존강, 잉카, 마야, 알래스카, 남태평양이 그를 사로잡았다.
“나도 이런 일을 겪는구나”하는 이혼의 회한과 “나는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는 독백이 그를 뜻밖에도 울릉도에 정착하게 한다. “형, 울릉도에 나 땅 사고 집 사놨어.”라고 조영남에게 한 말은 환갑 줄에 들어서면 누구나 꿈꾸지만 꿈이 되어 날아가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실천한 부러움을 산다. 
음악 세계로 돌아가 보면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가사로, <한잔의 추억>은 ‘술 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불꺼진 창>은 ‘불륜을 조장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던 시대를 넘어선다. 이장희는 가요 가사에 언문일치를 도입한 최초 가수라고 평가된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정미조의 <휘파람을 부세요>, 우순실의 <잊혀지지  않아요>, 김완선의 <이젠 잊기로 해요>가 이장희가 만든 노래다. ‘청와대가 모이라 해도 안 모인다’는 연예인들을 다 끌어 모으는 흡인력이 이장희에겐 있다. 이제 그의 꿈은 허무, 허전, 쓸쓸함을 담아 노래 한 곡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머리까지 깎아버려 반승반속의 처사처럼 보이는 그는 어느 시대의 이장희보다 편안해 보인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어이해 한 자도 뵈이질 않나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그건 너 허~
<그건 너> 
이장희 작사·작곡, 이장희 노래, 1973, 성음레코드


아침이슬 같은 남자, 맹갈 김민기의 <친구>
이 서브 타이틀은 ‘쎄시봉 시대’에 적힌 그대로를 표절한다. 김민기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는 어려워서다. 그는 쎄시봉의 막내다. 조영남의 말이다. “불멸의 노래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지만 그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곡을 어찌 만들어 누구에게 준다고 부산을 떨지도 않지만 조용하다 못해 등장 자체가 미스터리다.” 김민기에게 레코드판을 만들어준 사람은 바닥을 기며 성공한 기독교방송 PD 김진성이다. 엉성하고 포스트모던한 디자인의 이 판에 명곡 <아침이슬>과 <친구>가 담겨 있다.
“김민기는 추수를 다 끝낸 농부가 텅 빈 들판에서 허수아비를 수거할 때 허수아비 꺾어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형님, 글쎄 제가 사상 불순한 가수랍니다. 핫핫핫!’하고 고장 난 경운기 떠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미대 출신 김민기는 조영남의 첫 전시회를 열어주며 미술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가 미술을 포기한 것은 뛰어난 기타 연주와 노랫말을 만드는 솜씨 때문이다. 이백천이 구두닦이로 오해할 법하다고 한 김민기였지만 갈현동 본가를 가본 조영남이 “고아원 빨랫줄 같이 생겨 먹은 녀석이 그렇게 잘 사는 집 아들이야?”라고 했다니 설명이 필요 없다. 3박4일을 먹어도 끄떡없는 호주가(好酒家) 김민기가 스스로 부르는 이름은 ‘김맹갈’ 좀 맹한 놈이란 뜻이다.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이름이다. 그가 결성했던 듀엣팀 ‘도비두’도 ‘도깨비 두 마리’란 뜻이니 그의 언어 감각은 캔버스에 가는 붓길 만큼이나 가사에서도 빛난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후렴 반복)
<친구> 
김민기 작사·작곡, 김민기 노래, 1971,  대도레코드

 

자전거 위에서 빛나는 7순의 진짜 오빠,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
김세환은 원로배우 김동원의 아들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반듯하게 자란 이미지는 그의 노래에도 나타난다. 조영남은 “노래 실력보다 웃기는 실력이 더 좋다. 쎄시봉에 웃기는 사람 둘을 꼽으라면 창작을 잘하는 고영수와 모창과 흉내를 잘 내는 김세환이다”라고 했다. 그의 노래는 쎄시봉에 합류하면서 영향을 받는다. 1971년 ‘MBC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데뷔한다. 송창식의 <사랑하는 마음>(1974), 윤형주 곡 <길가에 앉아서>(1973), 이장희 곡 <좋은 걸 어떡해>(1973), 체코 민요 스토돌라 품파(Stodola Pumpa)를 리메이크한 <목장길 따라>, <어느날 오후>(1980), <옛친구>(1972) <터질 거예요> 등이 있다. 
김세환의 얼굴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를 자전거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1980년대에 이미 미국 네바다주 타호 호수에서 산악자전거를 보고 직접 사서 들여온 우리나라 ‘MTB 1세대’다. 2007년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두 바퀴 이야기>란 책을 내기까지 했고, 나 또한 처음 산악자전거를 배울 때 그와 함께 남한산성을 오른 추억이 있다. “어떻게 하면 싱글트랙에서 안전하게 탈 수 있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산 쪽으로 넘어지면 된다”고 했다. 단순하지만 명쾌하다. 벼랑 쪽으로 굴러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이니까.
최근 그가 발표한 <사랑이 무엇이냐>(심양구·정기수 작사, 정기수 작곡)는 드물게 트로트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통기타뽕’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나 그 특유의 ‘soft & mellow’보이스도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걸
밀려오는 그 마음보다 포근한 건 없을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행복
억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걸
짜릿한 건 없을 걸 짜릿한 건 없을걸
<사랑하는 마음> 
송창식 작사·작곡, 김세환 노래, 1974, 신세계레코드


대한민국 유행1번지 명동, ‘오비스캐빈’과 ‘마이하우스’ 시대
1969년 쎄시봉이 폐업하고 오비스캐빈이 문을 연 것은 무교동시대를 마감하고 명동시대가 열리는 신호였다. 명동 유네스코빌딩 뒷편 4층 건물이 통째로 음악빌딩이었다. 트윈폴리오가 날리고 조영남이 ‘쑈쑈쑈’에 등극할 때 송창식, 양희은 서유석이 노래 부르던 곳이었다. 주간에는 차를 팔고, 야간에는 맥주를 파는 ‘주다야싸(주간다방 야간싸롱)’ 개념이었다. 지하 1층은 맥주를 팔고 악단이 연주하던 ‘마음과 마음’, 1층은 팝음악에 경양식을 팔던 ‘오비스캐빈’, 2층은 30개 남짓한 테이블에 생맥주에 통기타 음악이 있던 ‘코스모스 살롱’, 3층은 록밴드 라이브가 있던 ‘코스모스 룸’, 4층은 칵테일과 팝가수 라이브를 하던 ‘파라다이스 라운지’가 성업한 술 파는 살롱형 대형업소였다.
이 시대의 키워드는 청바지, 맥주, 생음악, 미니스커트, 장발이었다. 통기타 가수들의 생업터전은 주로 2층 코스모스 살롱이었다. 신입사원 월급이 1만8천원 할 때 양희은이 아르바이트로 20만원을 벌었으니 대단했다. 조영남, 트윈폴리오가 출연하면 데이트 온 여성은 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남자를 삐지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홍민, 장현, 양희은, 쉐그린, 강세화, 최헌, 방은미, 유리자, 이은하, 채은옥, 히식스, 정성조와 더 메신저스, 영사운드, 영시스터즈, 새롬 트리오, 화니걸스의 이름이 2층에서 명멸했다. 3층은 신중현과 히식스의 김홍탁이 활약하고, 펄시스터즈, 김추자, 이정화, 박인수 등이 빛났다. ‘히파이브’ 보컬이자 불세출의 가수 장세정의 둘째 아들 한웅이 실연의 아픔 속에 <정주고 내가 우네>를 남기고 미국으로 떠나간 뒤의 일이다.
술이 아니라 진짜로 노래를 좋아한 사람들은 서소문에 있던 ‘코러스 다방’의 단골을 자처했다. 부부 듀엣 ‘바블껌’의 이규대가 운영하던 업소 입구에서 나눠주는 노래책을 듣고 처음 만난 사람 옆에서 스스럼없이 싱얼롱을 하다, 사이사이 신인들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도 했다. 첫 반주자는 요들송의 선구자 김홍철이었다.
또 하나 명동의 대형업소는 사보이호텔 뒤편에 있던 ‘마이하우스’였다. 역시 ‘주다야싸’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오비스캐빈과 달리 트로트, 민요 가수에 원맨쑈, 코미디까지 멀티스테이지였다. 이미자, 김세레나, 서영춘, 백금녀, 문주란, 리타 김, 백남봉, 찹스틱, 은방울자매까지 다양했다. ‘500cc 생맥주 130원, 안주 250원 균일’이라 광고하던 업소가 1977년에는 카바레 퇴폐업소 단속에 걸렸다는 보도로 보아 춤과 노래가 질펀하게 펼쳐진 모양이다. 
이제 뷰티샵과 옷가게로 도배한 명동에서 그 시절 명동을 떠올리는 것은 무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전에 일었던 ‘쎄시봉시대’의 열풍은 단순히 레트로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희를 넘긴 그 시절의 통기타가 베이비부머 언저리 세대에게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감성의 심지에 불붙인 착화탄이었던 셈이다.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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