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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베가본드 ⑩-과테말라는 활화산이 투어가 유명하다.시뻘건 용암, 엄청난 굉음, 전율의 진동… 살아 있구나, 지구는

활화산 바로 곁에 서다
시뻘건 용암, 엄청난 굉음, 전율의 진동… 살아 있구나, 지구는

과테말라는 활화산이 투어가 유명하다. 해발 3600m에 위치한 아카테낭고 화산 베이스캠프에서 캠핑하며 바로 옆에 솟은 푸에고(Fuego) 화산의 분화를 조망했다. 눈앞에서 본 활화산은 전율이 일 만큼 장엄했고, 산정에서 본 일출은 다른 모든 일출 풍경을 시들하게 만들어버렸다. ‘중남미’가 위험하다는 인식은 흔한 총기 범죄 때문만은 아니다. 자전거 여행자는 도로에서 이 버스를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활화산 아카테낭고

안티구아 과테말라(Antigua Guatemala)는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건설되어 200여 년간 과테말라 왕국의 수도이자 중앙아메리카 예술, 학문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8세기 몇 차례의 대지진과 함께 도시를 둘러싼 세 화산이 분화하면서 수도를 현재의 과테말라 시로 옮겼다. 이후 사람들은 기존의 수도를 ‘고대의 과테말라’라는 뜻으로 안티구아 과테말라, 줄여서 안티구아라고 부른다.
화산으로 둘러싸인 안티구아는 당연 활화산 투어가 유명하다. 시내의 어느 숙소 게시판에도 활화산 투어에 관한 전단지가 즐비했다. 내가 신청한 투어는 아카테낭고(Acatenango) 화산 투어. 해발 3600m에 위치한 아카테낭고 화산(정상은 3976m) 베이스캠프에서 캠핑하며 바로 옆에 솟은 푸에고(Fuego) 화산의 분화를 조망할 수 있는 투어다. 활화산을 오르는 만큼 아카테낭고 화산 투어는 위험이 따른다. 2017년에 화산 폭발로 등산객 6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후로 과테말라 정부는 가이드 없이 화산 투어를 금지하고 있다.
안티구아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았다. ‘진짜 용암을 볼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트레킹에 필요한 식량을 가방에 구겨 넣었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서 아카테낭고 화산에 도착했다. 활화산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팀원은 미국, 독일, 프랑스, 덴마크, 리투아니아, 한국까지 총 12명. 가이드는 과테말라 현지인이다. 스페인어가 능통한 독일인 여행자 줄리안의 통역을 들으며 우리는 함께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화도 없이 밑창이 갈린 운동화로 가파른 흙길을 오르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백팩을 메고 산을 오르는 팀원들과 달리, 자전거 패니어와 카메라를 진 나는 매번 무리에서 뒤처졌다. 그럴 때면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처음 보는 꽃과 식물, 고산지대의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가 되자 아카테낭고 화산 옆의 푸에고 화산에서 분화가 시작됐다. 
“구그그그그…” 
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더니 화산에서 빨간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팀원들은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환호성을 질렀다. 땅에서 전해지는 진동, 귓가에 맴도는 굉음, 하늘을 뒤덮을 만큼 솟아오르는 연기. 눈앞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장관을 마주하니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이것이 대자연이란 말인가. 한동안 말없이 감동받던 나도 뒤늦게 쾌재를 불렀다.
저녁이 되어서야 해발 3600m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라고 해도 조촐하게 세워진 텐트 몇 채가 전부지만 녹초가 된 팀원들에게는 썩 괜찮은 보금자리였다. 문제는 추위. 고도가 높아진 만큼 기온이 뚝 떨어진 것이다. 장작불에 불을 붙이고 팀원들과 둥글게 둘러앉았다. 코코아 한 잔의 여유를 부리며 각자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에게 한국을 소개했다. 인구는 5천만 명이고 수도에만 1천만 명이 산다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리투아니아인 앗초가 익살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들판이 넓어서 20m 간격으로 집 한 채씩 덩그러니 있어. 옆집과 울타리로 구분하는 일도 없어서 대충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곳까지 우리 집이고 나머지는 옆집 주인 가지라고 줘버렸어.”
동유럽식 앗초의 개그는 모닥불을 둘러싼 팀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야기가 무르익는 와중에도 30분에 한 번씩 푸에고 화산은 용암을 게워냈다. 그렇게 해발 3600m의 밤은 깊어갔다.

 

절경을 마주하다
다음날 오전 4시에 눈을 떴다. 간밤의 추위에 잠을 설쳤지만 개운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야간 산행을 시작했다. 12명의 팀원 중, 나를 포함한 4명만이 아카테낭고 화산 정상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2시간쯤 지났을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가 걸어온 자리를 구름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카테낭고 화산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차갑고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머리띠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감각이 무뎌지는 두 손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간절하게 기다리는 건 다름 아닌 태양.
오전 6시20분, 동쪽 끝 구름 위로 주황빛 태양이 떠올랐다. 그제야 푸에고 화산의 입구가 윤곽을 드러냈다. 방대한 양의 화산 연기를 분출하는 푸에고 화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숭고한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고 오로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만이 감동을 느꼈다. 추위에 떨며 자리를 지켰던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가식 없이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 아침이었다. 덕분에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 이후 마주한 일출에서는 감동이 무뎌지는, 약간의 내성을 갖게 되었다.

 

 

273일 째
엘살바도르의 치안
같은 언어, 비슷한 문화의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를 지나 엘살바도르 땅에 도착해서도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길거리 음식의 가격이 다르고 국가 시설물에 꽂혀있는 엘살바도르 국기가 이색적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의 엘살바도르는 인구 640만 정도의 작은 나라다. 치안이 불안해서 자전거 여행자가 아니면 웬만한 배낭여행자는 그냥 지나치는 국가.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총기사건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엘살바도르 총성의 역사 
1981년 엘살바도르에서 군사 독재정권과 반정부 세력 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좌익세력에 대한 군정부의 탄압이 화근이었던 이 내전은 무려 12년간 지속되었다. 1992년 유엔군의 개입으로 내전은 종결되지만 약 7만5000명의 사망자와 100만 명의 피난민을 낳았다. 기나긴 내전으로 민간에 대량으로 유통된 총기류는 이후 엘살바도르에서 범죄단이 활개를 치는데 일조한다. 현재 엘살바도르 범죄단의 인구는 대략 6만 명이다. 이는 엘살바도르 전체 인구의 1%에 육박한다. 범죄단의 주요 수입원으로 마약과 총기류의 밀반입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금품갈취’가 성행한다. 권총을 들고 상인을 위협해서 금품을 훔치는 방식이다. 이러한 범죄 형태는 자전거 여행자인 나에게도 적용된다.  
대도시를 거점으로 움직이는 배낭여행과 달리, 산과 들을 따라 자연 속에서 페달을 밟는 자전거여행은 배낭여행에 비해 꾸밈없는 현지의 모습을 마주할 기회가 많다. 이는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를 피하면 비교적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 호기심이다. 위험하다는 현지인의 말은 언제나 나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엘살바도르 국경에서 만났던 현지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방문했던 사카테콜루카(Zacatecoluca). 
도시의 중앙 광장이나 시장, 은행에 들어서면 입구에 장총을 들고 경계근무를 서는 경찰과 군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나에게 카메라를 숨기고 다니라고 경고했다. 어쩌면 무장한 경찰관이 방범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카메라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품고 다니는 악인들의 표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간 사카테콜루카에 머물며 산책을 다녔다. 저녁이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광장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현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카테콜루카에 가지 말라고 했던 현지인의 조언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위험한 도시의 감춰진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말을 듣지 않는 청개구리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덤이다. 

사카테콜루카 중앙 광장

 

274일 째
위협적인 치킨버스 
미국 국경에서부터 파나마까지, 중앙아메리카를 가로지르는 판 아메리카나 하이웨이(Pan Americana Highway)는 나의 여정에 중요한 항로였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한 줄기 도로를 하루 종일 따라가다 보면 여러 종류의 차량이 눈에 띄곤 했다. 두 칸 이상 화물을 끌고 다니는 덤프트럭, ‘Over size’ 문구 위에 집채만 한 짐을 지닌 크레인, 시속 140km 이상으로 질주하는 승용차. 이따금씩 여행 장비를 가득 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여행자를 만나면 그들은 클랙슨을 울려 나에게 인사를 해준다. 고속도로 라이딩은 생각보다 평화롭고 안전했다. 
하지만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굽고 좁은 도로를 지나칠 때면 자전거를 위협하는 존재를 자주 마주쳤으니. 그건 바로 ‘치킨버스‘다. 치킨버스는 미국에서 학생들의 등하교용으로 사용되던 낡은 스쿨버스를 수입해 현지인을 수송하는 대중교통이다. 가난한 현지인들은 시장에 내다팔 닭이나 생필품을 버스에 가득 싣고 다닌다. 그 모습이 흡사 닭장을 연상케 해서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치킨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문제는 이 치킨버스가 운전을 굉장히 난폭하게 한다는 것이다. 치킨버스의 악행을 나열해본다. 일단 과속과 역주행은 기본이다. 굽은 길을 돌 때는 속도를 줄이는 법이 없어서 뒤에서 보는 사람이 아찔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운전 습관이다. 도로 가장자리를 달리는 내 옆을 바짝 지나가며 시끄럽게 클랙슨을 울려댔다.

“내 앞길 가로막지 말고 저리 비켜!”
빵빵거리는 도로 위에서 운전기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옆 차선에 여유가 있음에도 자전거를 피해주지 않는 난폭운전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중앙아메리카의 교통문화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위협적이다.

 

박쥐 똥을 맞으며 
엘살바도르 국토를 관통하는 2번 국도를 따라서 해질녘까지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를 질질 끌고 다니며 잘 곳을 찾아 산골마을을 떠돌았다. 때마침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저씨는 처음 보는 동양인 여행자에게 관대했다. 오늘밤은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 테니 성당에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2시간만 기다려 달란다. 안 그래도 중앙아메리카의 가톨릭교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선뜻 아저씨를 따라가기로 했다.

“어서와, 성당은 처음이지”
성당에 도착하니 마을사람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건물 안에서는 웅장한 찬송가가 들려왔고 건물 밖으로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요리하는 고소한 ‘푸푸사’(또르띠아 속에 치즈나 돼지고기, 검은콩 소스를 넣어 구워 먹는 엘살바도르 전통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주머니들은 내게 손짓하며 푸푸사를 권했다.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기도하는 신자들이 보였다. 간절한 기도를 끝으로 신자들은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록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마이크를 잡은 신부님의 언변은 점점 속도를 더했고 그럴수록 신자들은 음악소리와 함께 격하게 춤을 추었다.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들이 두 팔 벌려 찬송가를 합창하는 모습을 보며 잔잔한 위로를 받았던 반면, 엘살바도르의 가톨릭 신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격한 활력을 얻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가톨릭교는 뜨겁다!’ 
밤 9시까지라던 예배는 30분이 더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저씨의 집은 많이 허름했다.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건물 내벽은 암울했고 집안에 켜지지 않은 전구는 음산함을 더했다. 변기도 양동이 물을 떠서 내려야 하는 방식이다. 매일 노숙을 하며 여행하는 나는 이런 열악한 환경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벌레가 많은 어두운 창고에서 에어매트만 깔고 자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창고에는 모기가 많았고 천장에는 괴생물이 짹짹거리며 날아다녔다. 
도저히 이곳에서 잘 수 없었다. 아저씨한테 마당에 텐트를 치겠다고 말했더니 아저씨는 밖은 위험하다며 내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창고에서도 텐트를 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는 수 없이 에어매트만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에 얼굴에 무언가가 ‘툭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맡에 있는 랜턴을 천장에 비추니 박쥐가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내 얼굴에 떨어진 것은 박쥐 똥이었다. 아저씨의 집은 동굴과 연결되어 있어서 박쥐가 집안에 서식하는 모양이었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침낭을 얼굴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동이 트고 어두운 창고에 빛이 들어왔다. 간밤에 여덟 군데나 모기에 물렸다. 방충망이 달린 텐트를 치지 못하게 한 아저씨가 야속하다. 아저씨는 고집이 강하고 고지식했다. 분명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는 것은 감사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저씨의 순수한 배려가 나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김민형 여행작가  kim_min_hyeong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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