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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통의 ’진고개 신사’와 가요가 머문대중가요의 골목길(14)서울 충무로

본정통의 ’진고개 신사’와 가요가 머문 
‘스카라 계곡’


진고개에 석양이 길게 누웠다. 파이프 담배를 문 신사가 어깨를 떨어뜨리고 걸어갔을 그 언덕을 내려간다.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 환도에서 만난 허무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선 여인과 나눈 추억도 사치였을까. 통기타의 젊음이 진입하기 전의 명동, 식민의 그늘에서도 흥청거리던 본정통(本町通)의 한 시절도 사라진 명동 뒷길이 한산하다. 명멸하는 은막의 스타가 커피를 마시던 다방, 대중가요가 살아남았던 ‘스카라계곡’의 선술집 자리에서 영화판과 대중가요의 무대가 너나없이 가난과 생존으로 분주했던 기억을 불러낸다. 활판인쇄기 소리 가득한 미로의 을지로에서 사라질 위기의 60~70년대의 고단했던 흔적을 다시 창조할 ‘도시재생’에 희망을 건다

 

4월이 와도 명동의 고요는 진행형이다. 코로나가 세기의 역병으로 사람 사이를 띄워놓았다. 견디다 못한 몇 사람이 정적 속으로 나와 풍경을 이룬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절대 연출할 수 없는 이 고요가 잃어버린 명동의 두어 세대 전 무대를 그려내는 데는 아주 제격이었다. 지난 호에 이어 명동을 다시 한 번 배회할 요량이다.

시인 박인환이 노래한 명동, <세월이 가면>
명동의 낭만을 이야기하자면 그 원조에는 가슴 시리게 요절한 시인 박인환이 있다. 몇 컷의 사진으로 전하는 그는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도시의 문약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52년 환도는 했으나 폐허 명동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이다. 시인과 예인들이 술 없이 저녁을 보내기에는 엄혹한 시간의 틈에서다. ‘휘가로 다방’에 모인 박인환이 즉흥시 <세월이 가면>을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동석한 나애심이 불렀다는 설에 귀가 솔깃하다.
한때 낙원동에서 ‘마리서사’란 책방을 운영하던 박인환이 시인들과 통음(痛飮)하던, 모더니즘적 시학 공간 ‘유명옥’, 문인과 예술인들이 출판기념회를 갖거나 댄스파티를 즐기던 ‘동방싸롱’, 클래식 음악을 듣던 ‘봉선화다방’ 같은 공간이 명동거리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의 육신과 정신을 싸고 있었던 전후의 환경은 맨 정신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흐르는 <검은강>, 고달픈 현실에서도 피어난 사랑이 기어이 떠나는 <이국 항구> 같은 명시를 남기고 그도 서른 고개를 막 넘기고 세상을 버렸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생략)
<세월이 가면> 
 박인환 작시, 이진섭 작곡, 전오승 편곡, 나애심 노래, 신신레코드, 1956


이 노래는 원곡보다도 박인희의 청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또 하나의 박인환의 명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시를 몰라도 그 분위기에 이끌려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우리 삶’이란 표현에 공명하곤 했다. ‘뜨와에 므와’로 데뷔한 그녀가 짧은 동안 남긴 몇 곡의 노래는 명곡이 되어 그녀에게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훈장을 주며 가요의 격을 높였다. 
박인희의 담백함은 심야방송 DJ까지 하며 잘 나가다 홀연 사라져 도미한 뒤, 간간이 미주 한인방송에서 일한다고 들려오는 소식에나 묻어있었다. 돌연 2016년 송창식과 함께하는 그녀의 리사이틀이 열린다고 한남대교 북단 육교에 붙은 광고는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청징한 목소리의 ‘35년 만의 귀환’이자 질긴 팬심이 불러낸 ‘하얀 민들레의 소환’이었다.

문인·예술인의 사랑방,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던 ‘은성’
시공관이자 옛 국립극장이었던 ‘명동예술극장’ 옆에 ‘은성’ 터의 표지석이 있다. 명동파출소 맞은편이다. 당시에는 복덕방과 구만리 주점과 나란히 있던 스무 평 남짓한 적산가옥으로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로 더 알려진 이명숙 여사가 운영하던 주점 ‘은성’은 1973년 문을 닫았다. 인천에서 홀몸으로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온 어머니가 연 술집은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어 박인환, 김수영,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천상병이 단골이었다.
<세월이 가면>의 탄생 이설 또한 재미있다. 외상술값을 독촉하자 박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근처에 있던 현인이 불렀다는 설이다. 명동백작 이봉구의 <명동>이라는 소설의 연애담에도 등장하는 이명숙 여사는 손님들이 술값 대신 잡혀놓고 찾아가지 않은 시계를 아들 최불암에게 용돈 대신 주어 팔아 쓰게 했다는 회고담도 전한다. 아무튼 은성을 접으면서 아들에게 “외상장부는 태우라”고 했다는 어머니 이명숙의 정신세계는 문우 예인의 경지를 뛰어넘은 게 분명하다.
 
건설 한국의 70년대를 상징하는 ‘삼일로’를 건너
명동성당이 있는 언덕길을 짧게 오르면 남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성령이 깃든 터전을 만들고 을지로, 청계천으로 주저앉는다. 경제부흥의 측면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은 청계천 복개공사를 반쯤밖에 못 했다. 이 땅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를 지킨 것만으로도 국부로 인정받아야 할 노정객은 불운한 시대의 배역을 맡았다. 감추고 싶었던 청계천의 남루를 복개로 덮고 그 위에 고가도로를 놓고 본류가 남산을 향해 방향을 트는 콘크리트 교각의 외길은 도심 최고의 삼일빌딩과 하이파이브를 하듯 솟아올랐다. 목숨을 건 혁명의 박정희 정권이 ‘천년 가난’을 털어내려 올라탄 건설 한국의 상징이자 롤러코스터였다.
그 시절 수원까지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로 달리게 된 유신고속버스 터미널은 저동 쌍용양회빌딩 옆에 있었다. 군청색 바탕의 일제 후소(FUSO) 고속버스에 타면 스튜어디스만큼이나 예쁜 안내양이 건네주는 엽차 한잔이 왜 그리 고급지던지.

 

신영균의 명보극장과 한국영화의 별이 된 노배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보사거리에는 대종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있어 ‘영화의 거리’를 실감하게 한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는 감독, 각본, 배우, 촬영, 조명, 소품 등 여러 분야가 어우러져야 한다. 충무로 3가에 옛 극동빌딩 옆으로 해서 중부경찰서에 이르는 길이 ‘영화의 거리’라고는 해도 이렇다 할 상징물 하나 없다. 그저 몇 개의 카메라 가게가 아직도 그 시절 영화를 기억하는 듯 늘어서 있어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다.
그 점에서 명보극장은 한국영화계의 ‘도로원표(道路元標)’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유명한 영화 <마부>의 김승호를 이어 1960년대는 기라성 같은 남자배우를 배출했다.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남궁원만으로도 가득 차는 은막(스크린)에 신영균이 있었다. 서울대 치대를 나온 엘리트가 대학 연극에서의 인연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디고 선 60년 세월에 대스타가 되었다. 1960년 <과부>를 데뷔작으로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간 300여 편을 찍었다. 전성기에는 한해 집 10채 값을 벌면서 오직 가족을 위해 스캔들 하나 없이 지나온 세월은 기록적이다, 
성실한 이재(理財)는 그에게 부(富)도 안겨주었다. ‘뉴욕’ ‘태극당’ ‘풍년’과 함께 서울 4대 제과점에 드는 ‘명보제과’를 인수해 번창시키면서 1977년에는 당시로서도 거금 7억5천만 원에 대한극장과 함께 70㎜가 상영 가능한 명보극장을 인수한다. 영화의 퇴조와 함께 문을 닫고 연극·뮤지컬 전용극장 ’명보아트홀‘로 바꿔 가면서도 충무로를 지켰다. 1969년엔 국내 연예인 납세 1위에 올랐는데 가수 1위의 무려 7배였다. ‘짜다’는 손가락질에도 근검하던 그가 500억 원을 준다 해도 팔지 않았던 명보아트홀 건물을 2010년 제주 ’신영영화박물관‘과 함께 사회에 기부한다. 올해 92세의 신영균이  “내 죽거든 내 관 속에 지금 보고 있는 이 성경책만 넣어 달라”고 했다는 말은 죽어서 사는 길을 말해 준다. 그가 없었으면 영화의 거리는 더욱 비어 있을 것이다.


반야월을 비롯한 가요인들의 삶의 둥지 ‘스카라 계곡’

부산 피난 시절을 보낸 가요계는 서울로 환도하자 당시 수도극장(스카라극장)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영화인들이 충무로에 모이다 보니 영화와 영화 주제가는 불가분의 관계여서 영화의 거리 근처에 미도파레코드와 음반도매상, 음악학원 등이 오불조불 몰려들었다. 개봉하는 국산영화 주제가는 히트의 보증수표 반야월이 휩쓸다 보니 주변의 부러움과 질시도 심해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백구몽 등 다양한 예명으로 노랫말을 지었다. 가요인들의 둥지래야 다방 한 구석이다. ‘무지개’ ’폭포수‘ ’영산‘ ’카나리아’ ‘국제’ ‘임’ 다방이 가요인들 터였고, 영화인들은 ‘스타’ ‘명’ ‘아폴로’ ‘태극’ ‘초록’ 다방에 진을 쳤다. 커피 값도 제대로 없으니 어쩌다 한 잔 시키면 온종일 죽치거나 엽차만 연거푸 축냈다. 
<울고 넘는 박달재>를 작곡한 김교성의 일화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담배갑에 단 한 개비만 넣고 나와 술이 거나해지면 다방에 들러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담배갑을 구겨 던지며 “에~고, 내 팔자야. 내가 인생을 얼마나 못 살았으면 담배 한 갑 사주는 놈도 없냐”면서 신세 한탄을 하면 후배 중 누군가가 슬그머니 나가 담배 한 갑을 사서 주머니에 넣어 줬다고 한다. 그저 호주머니가 비어 있으니 가로수에 기대앉아 담배꽁초나 주워 다시 말아 피우니 일러 ‘키노시다(木の下) 인생’(나무 밑의 인생)이라고 풍자하곤 했던 그림이다. 
그래도 저녁이면 외상술을 마시러 스카라 뒷골목 주점거리를 헤매었으니 ‘아리랑집’ ‘두꺼비집’ ‘초막집’ ‘울산집’ ‘경상도집’ ‘청주할머니집’ ‘고모네집’ ‘향원집’ ‘고령집’이 반겨주었다. 작당해 몰려다니는 주축은 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한복남, 김교성, 이재호, 이시우, 조춘영, 김부해, 전오승, 김화영, 고봉산, 나화랑, 류노완이었고, 작사가 월견초, 가수로는 유춘산이 개근이었다. 술자리는 길고 길어서 7~8차까지 가기도 했다는 반야월 선생의 회고다. 돈이 없어도 곁다리로 끼어 한 잔씩 마시고 오늘날 저작권 같은 개념도 없던 시절이니 어쩌다 작사, 작곡료라고 몇 푼 받으면 외상값 찔끔 갚고는 다 대폿잔에 날아가 버렸다. 반야월 선생이 그 뒷골목을 ‘스카라 계곡’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그 골목은 개천이었으니 계곡이 맞다. 스카라극장 앞으로는 필동천이 흘렀고, 도랑 수준이지만 남산 기슭 오늘날 서울시 소방본부쯤에서 발원하는 주자동천이 흘러내려 여름이면 명보사거리 쯤에서 넘쳐 물바다가 되기도 했었다. 
한솥밥 먹던 유랑극단 시절부터 악극단을 꾸려 전국을 순회하던 봄날이 막을 내리면서 인생사 허무가 그들을 뭉치게 하여 <스카라 계곡>이란 노래를 탄생시켰다. 가요인 동지들이 요단강 건너 저세상 가서도 만나자고 ‘만나리회’를 조직하고 <만나리회가>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저 세상에서도 모두 노래와 더불어 사시리라. 불우했던 노가수 쟈니리가 가요 인생 40년을 결산하면서 재즈풍으로 추억하는 <스카라 계곡>이 악극단과 SP 레코드 시절을 또 불러 세운다.

옛 추억이 잠긴 스카라 계곡
그 님도 떠나버린 쓸쓸한 거리
새파란 가로수도 낙엽만 지고
화려한 극장가에 그림 간판 앞에 엔
싱싱한 젊은 세대 사랑만 익어가네

스타다방 명배우들 다 어딜 가고
노래에 죽고 살던 그 가여운
지금은 어느 하얀 어느 무대에
애수의 소야곡을 목 메이게 불러도
싸늘한 밤하늘에 (싸늘한 밤하늘에)
저 별만 반겨주네
<스카라 계곡>(일명 ‘흘러가는 연예인생’) 
반야월 작사, 쟈니리 노래, 준 프로덕션, 2005

 

벌집 미로의 인쇄골목과 힙지로
명보아트홀을 끼고 골목길로 가는 길은 을지로 인쇄골목의 옛 그림자가 남아 있다. 인쇄골목 의 역사는 남산 딸깍발이 가난한 선비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비의 목표는 과거급제, 고시합격이다. 그러자니 수험서를 찍어내고 금속활자를 만들던 곳이 주자동(鑄字洞)이다. 지금도 공무원이나 입시수험서가 제일 짭짤한 품목인 것은 예나 같다. 
주자동은 죄다 길과 녹지대로 들어가고 세종호텔 대각선에 손바닥만 하게 남아 있는 동네다. 현대사에만 보더라도 영화계가 자리 잡으니 포스터 인쇄, 정치의 계절에는 선거 벽보, 유인물, 연말이면 달력 제작 등 협업의 적지로 발전해 왔다. 파주나 성수동 등지로 나가고도 2016년 통계로 필동, 광희동, 인현동 일대에만 1600개 업소가 있었다니 우리 문자 생활의 주요한 축을 담당한 셈이다. 
동남아에서나 볼 성 싶은,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 트럭만이 골목길 미로를 지날 수 있는 계체량을 통과할 수 있다. 미로의 갈래 갈래에 붙어 있는 벌집에는 제각각의 삶이 있어 저마다의 기능으로 역할을 다해 완성품을 생산해 낸다. 활판인쇄의 덜거덕거림에 시달리던 문선공과 인쇄공, 을지로를 건너면 등장하는 공구상가와 조명상가 등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모퉁이 구멍가게에서 먹던 통조림 골뱅이가 미나리와 몇 번을 주물럭거린 손맛으로 다시 태어나 하루를 위로하던 밤이 오늘날 청춘에게도 재조명되었다. 레트로를 뉴트로로 창조하는데 반짝이는 젊음을 따라갈 수 없다. ‘핫하다’는 힙(hip)과 을지로가 합성된 이름 ‘힙지로’가 그렇게 탄생되었다. 

도시재생이 기대되는 을지로 대림상가 주변과 국도극장 터
남산자락에 몰려 살던 일본인들의 기운을 꺾겠다고 이순신 장군을 동원해서 ‘충무로’라 이름 붙이고, 중국인들이 거주하던 청계천 주변에는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장군까지 불러내 ‘을지로’로 작명했다는 뒷얘기에는 20세기에 펼쳐진 조선이 그려진다.
청춘의 더듬이는 서울 도심을 가르는 세로축 ‘이방지대’까지 와 닿았다. 원래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이 구간은 일제 말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공터로 비워놓은 ‘소개공지(疏開空地)’였다. 광복과 6·25 환도 후 밀려든 피난민의 판자촌이 되었다가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지휘로 밀어내고,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 아래 최첨단 ‘공중보행교’를 겸한 주상복합건물 7개 동이 건설되었다. 세운상가 가·나 동과 건설회사 이름을 딴 ‘대림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 등은 한때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을 만들려고 철거하려다 살아남아 재생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도시의 재개발이 유산슬의 <합정동 5번출구> 노랫말처럼 ‘싹 다 갈아엎어’ 천지를 개벽하는 일이라면 도시 재생은 골격과 기능을 유지한 채로 시대에 맞는 가치를 골목에 불어넣자는 ‘뉴트로’다. 시장(市長)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통에 백년대계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못 한다. 정치가 염장 지르는 경제와 문화의 골목길에서 우리의 정신계는 더욱 척박해진다.
대림상가 2층에 내달아 붙어 있는 공중보행로는 도시 재생의 고리에서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며 창업을 꿈꾸는 공간이 길 바깥쪽에 붙어 있다. 초기 한국전자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성지, ‘세운상가’는 여전히 후줄근한 모습에다 조금씩 문화의 분칠을 하고 여전히 뭐든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대림상가 2층에서 내려다본 을지로4가 산림동 일대의 지붕은 기와, 슬라브, 양철이 저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더러는 ‘갑바’로 감싼 채 시대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 깁스를 한 부상병처럼 무표정하다. 그나마 한판에 갈아엎는 ‘재개발’이 멈춘 것은 다행이다. 
‘루이비통 트래블북 서울편’을 만든 프랑스 작가 듀오 이시노리는 “파리가 잃어버린 중세적 풍경이 서울엔 남아 있다”고 했다. 보통 서양사람들의 눈에 경복궁, 창덕궁은 중국의 자금성이나 일본의 황궁과 별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즐비한 고층빌딩만으로 서울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즉물적이다. 초고층으로 무장한 도시의 경쟁은 세계 도처에서 ‘돈 힘’을 받아 전개되고 있는 흔한 풍경일 뿐이다. 서울이 서울답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수작업을 할 수 있는 을지로 뒷골목의 풍경이 매력적이다. 밀링머신이 쇳가루를 날리고,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있는 뒷골목 미로가 있는 성수동, 문래동이 세계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에겐 또 하나 잃어버린 문화유산이 있다. <별들의 고향>을 개봉한 그 유명한 ‘국도극장’이다. 르네상스식 아름다운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의 개념이 본격 시행되기 전에 재빨리 허물고 주차장으로 있다가 이제는 빌딩이 들어서 국도의 이름만 간직한 채 ‘국도호텔’이 되었다. 개인에게 문화와 향수라는 이름으로 손해를 감내하라고 요구하기는 무리한 기대다.
1913년 ‘황금연예관’으로 시작하여, ‘경성보창극장’ ‘황금좌’ ‘성보극장’이란 이름을 거친 국도극장은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 이른바 ‘방화(邦畫)’를 줄기차게 선보인 개봉관이다. <춘향전> <피아골> <황혼열차> <육체의 길> <흙> <돌아오지 않는 해병> <미워도 다시 한번 2,3,4 연작>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 <고교얄개>까지. 그 절정은 1974년 개봉되어 47만 관객을 불러들여 을지로를 뻑적지근하게 한 <별들의 고향>이다. 여주인공 안인숙의 귀에 대고 말하는 신성일의 속삭임 “경아 오랜만에 누워 보는군….”은 시대의 명대사가 되어 성우 이강식의 목소리로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 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게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게 있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 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이장희 작사·작곡·노래, 대도레코드, 1974

 

 

그룹사운드의 핫 플레이스, 풍전호텔나이트클럽과 장욱조와 고인돌 <고목나무>
을지로에서 삼풍상가로 접어들면 아예 대로를 이어 건널 수 있는 공중보행로 작업을 하고 있는 끝 지점에 ‘호텔PJ’가 나타난다. 70년대를 서울에서 보낸 청춘들이 기억하는 건 고고클럽인 ‘풍전호텔나이트클럽’이다. 고고클럽이라는 이름을 작명한 팝 칼럼니스트 서병후도 회현동 오리엔탈 호텔과 함께 풍전나이트를 원조로 지목한다. 그룹사운드의 요람 고고클럽에는 ‘키브라더스’ ‘피닉스’ ‘데블스’ ‘파이오니아’ ‘드래곤스’ ‘템페스트’ ‘검은 나비’ 같은 10여 개 팀의 이름들이 타워, 캐피탈 등 무대를 바꾸어가며 상종가를 쳤다. 
콧수염과 비음이 어울리는 장계현의 ‘템페스트’가 ‘블루고고’로 연주 템포를 느리게 갈 때면 파트너의 귓볼 가까이에 입김이 뜨겁게 느껴졌다. “빠빠빠~ 빠빠빠~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로 시작하는 딕훼미리의 <또 만나요>가 맥을 끊으며 조명이 환해져서야 아쉽게 자리를 일어서던 뜨거운 피가 있었다. 클럽을 나서면서 만나는 리어카에서 파는 순두부를 소설가 성석제는    호호 불어가며 먹던 입속에서 뭉그러지는 식감을’ 매끄럽고, 뜨겁고, 화끈했다‘고 표현했다.
고고클럽의 그룹사운드 중 한 팀에 ’장욱조와 고인돌‘이 있다. 목포에서 상경한 가수 지망생이던 장욱조가 ‘사랑과 평화’의 드러머였던 고 김명곤의 권유로 그룹을 결성하고 가난한 연주자의 제주 신혼여행에서 뇌리에 박힌 ‘고인돌’을 팀이름으로 빌려왔다. ‘가든’ ‘백남’ ‘영동’ ‘풍전’ 호텔에서 주로 팝송을 부르며 연주했던 장욱조가 국도극장 앞에 ‘장욱조 음악실’을 내고 음악 작업과 레슨을 하게 된 것도 풍전호텔과의 인연이다. 그의 히트작 <고목나무>에 이어 <기다리게 해놓고>(방주연), <어떻게 말할까>(장미화), <잊으라면 잊겠어요>(이용복), 조용필의 <상처>, 최진희의 <꼬마인형>,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박정식의 <천년바위> 등 명곡을 만들었다.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옛사람 간 곳 없다 올 리도 없지만은
만날 날 기다리면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며 기다린 그 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반복)
<고목나무>  
조규철 작사, 장욱조 작곡, 장욱조 노래, 오아시스레코드, 1976

 

언덕을 넘는 쓸쓸한 옛사랑의 그림자 <진고개 신사>
도시 재생을 위해서 공사 중인 공중보행로 반대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그나마 손님 없어 죽겠는데, 다들 2층 길로 올라가면 우린 죽으란 말이냐”는 반대엔 할 말이 없다. 인쇄골목을 지나 충무로 영화인 거리로 가는 200m 남짓 좁은 길에 노래업소가 30개나 된다는 지적 아닌 지적에 어쩌면 이 거리가 스카라 계곡의 유전자가 제대로 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삼일로를 건너간다.
오래도록 나는 도심 속 진고개가 궁금했다. 위치조차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름도 그랬다. 진고개는 ‘질어서’ 장화를 신어야 했고, 남산 딸깍발이들이 나막신을 신어야 했다는 길이라지만 저지대도 아닌 언덕이 ‘그렇게 질었을까’ 하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긴고개(長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꿰맞추기도 했다. 경상도식 발음으로는 ‘길다’를 ‘질다’로 말한다는 것까지 동원해가면서 말이다. 그다지 길지도 않고, 이제 하수도 공사로 깎아내려 고개라고 하기도 뭣한 등성이 길가에 이현(泥峴)이란 표지까지 확인한 터니 내 생각은 틀렸다. 최희준의 <진고개 신사>는 짧은 노래로 긴 이야기를 담았다. 


미련 없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별마다 새겨보는 별마다 새겨보는 
아~~ 진고개 신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언젠가 불러주던 그 여인의 노래를 
소리 없이 불러보는 소리 없이 불러보는 
아~~ 진고개 신사
<진고개 신사> 
심영식 작사, 김호길 작곡, 최희준 노래, 오아시스, 1964

 
극작가 심영식이 사연을 담아 쓴 가사는 첫 소절의 담배연기처럼 사라지는 사랑과 인생을 노래했다. ‘안 떠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감미롭게 저음을 들려주던 최희준도 떠났다. 이 봄에 맞닥뜨린 뜻밖의 고요는 아마 다시 만날 수 없는 명동의 침묵으로 아득하게 기억될 것이다. 석양이 졸음에 겨워 내려앉는 휑한 진고개를 나도 따라 내려간다. 

 

참고자료
1. 반야월 회고록 <불효자는 웁니다>, 도서출판 화원, 2005
2. 을지로 인쇄골목 언저리, 김민식, 여성중앙, 2017. 4.
3. ‌<루이비통 트래블북 서울>을 만든 프랑스 작가 듀오 
    ‘이시노리’, 김미리, 조선일보, 2020
4. <한국가요사 1,2>, 박찬호, 미지북스, 2009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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