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 벨로 Big 투어

양평 지평
국운을 바꾸는 승리의 땅, 아른거리는 막걸리 내음

지평은 맛 좋은 막걸리 이름 혹은 경의중앙선 전철의 종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6·25 때 나라의 명운을 바꾼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프랑스대대를 이끈 2차 대전의 영웅 몽클레르 장군이 6·25 전쟁의 분위기를 뒤집는 전승을 이뤄낸다. 지평은 고려 때는 원나라 군을 물리쳤고 구한말에는 의병이 떨쳐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국난이 닥칠 때마다 승기를 잡아준 곳, 지금 이 시점에 지평으로 간 이유다

 

6·25전쟁 때 전세를 역전시킨 2대 전투가 있다.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서 벌어진 지평리전투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때 아군은 극심한 전력 열세로 무너져 불과 한달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었다. 다행히도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며 전세를 일거에 역전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 
압록강까지 단숨에 진격해 올라가 드디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상황에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바로 이곳 지평리전투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전세를 다시 역전시켰다. 이 승리의 핵심에는 프랑스대대의 분투가 있었다. 나라의 운명을 바꾼 곳, 프랑스대대의 강인한 투지가 있던 곳 지평리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만 해오다 오늘 드디어 실행에 옮긴다.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씨와 장소  
지평 여행은 경의중앙선 전철의 종착역인 지평역에서 시작한다. 경의중앙선은 문산에서 시작해 용산을 거쳐 팔당, 용문 그리고 지평까지 56개역 134km의 긴 노선이다. 
지평역이 종착역이 된 것은 2017년 2월이다. 이전까지는 한 정거장 전인 용문역이 종점이었다. 지평역은 종착역이라고는 하지만 운행편수가 극히 드물어 하루에 4번뿐이다. 지평은 한자로 砥平이라고 쓰는데 砥는 숫돌을 뜻한다. 지형이 숫돌처럼 평평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평역에 도착해 역사 앞에 있는 안내지도를 보고 오늘의 코스를 잡았다. 우선 지평향교로 갔다가 오늘 여행의 핵심인 지평리전투기념관에 들린 다음 지평막걸리로 유명한 지평양조장, 그리고 고려 3층석탑과 지평시장의 순서로 돌아보기로 했다. 모두 역에서 멀지 않아 걸어서 돌아봐도 된다. 지평의 또 다른 볼 곳인 석불역과 구둔역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있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둘러보고 외곽지역까지 다녀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이 화창하고 날씨도 따뜻하다. 정말 자전거타기 딱 좋은 날이다.
첫 목적지 지평향교는 역에서 자전거로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다. 지평향교는 건립시기가 명확하지 않은데 대략 조선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지평은 면소재지가 있는 작고 조용한 동네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지금의 군(郡)에 해당하는 현(縣)이었으며 경기 동부에서는 사통팔달한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현감이 일하던 관아가 있었고 향교와 학당도 많이 있었다. 지평향교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대부분 문을 닫아 놓는다. 건물은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 안내문에 보니 재래식 결혼행사를 한단다. 아주 의미 있고 좋은 생각이다. 

 

기념비 앞에 선 장군과 병사  
밖에서 향교를 둘러보고 지평리전투기념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가에서 희귀한 꽃을 하나 발견했다. 흰민들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찾아다녀도 못 찾은 흰민들레를 이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그것도 한 포기가 아니고 집단으로 피어 있다. 노란민들레는 대부분이 귀화종인 서양민들레고 흰민들레는 순수한 우리 토종민들레다. 꽃부터 잎, 줄기, 뿌리까지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으뜸 약초다. 눈에 좋고 간에도 좋으며 특히 염증치료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 한 뿌리 캐갈까 하다가 참았다. 대신에 엎드려서 접사사진을 많이 찍었다. 
흰민들레를 찾아낸 김에 지금 시기에 피는 들꽃을 더 찾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근처에 자주괴불주머니, 양지꽃, 흰제비꽃, 광대나물꽃, 현호색, 각시붓꽃, 꽃다지, 꽃마리 등 흔치않은 들꽃이 몇 종류 더 있다. 바로 먹을 수 있는 돌나물은 지천이다. 들꽃 탐사여행을 와도 좋을 것 같다. 들꽃을 찾으면서 가다보니 금세 지평리전투기념관에 도착했다. 지평리는 6·25 때 지평리전투도 유명하지만 구한말 의병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전국 최초로 항일의병이 조직되어 활동한 곳이 바로 여기다. 그래서 지평리전투기념관은 이 두 가지를 테마로 자료를 보존하고 있으며 정식명칭도 항일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이다. 그러나 이곳도 신종코로나 때문에 휴관이다.  
기념관 밖에는 프랑스대대 전공비와 미2사단 전공비가 좌우로 나란히 있고 한단 위에는 큰 자연석으로 만든 전적비가 있다. 전적비 앞에는 군인 두 명이 헌화하고 묵념을 하고 있어 그분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내려오는데 보니 2성 장군이다. 부대마크로 보아 이번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부대의 사단장인 것 같다. 사단장 정도면 보통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며 떠들썩하게 움직이는데 이분은 병사 한명만을 대동하고 조용히 참배를 한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군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을 걸어보려다 그만 두었다.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계급을 강등해서 참전한 몽클레르 장군
프랑스대대 전공비를 자세히 읽어 보았다. 이 전투의 의미와 프랑스대대의 분전에 대해 적혀 있다. 만약 아군이 이 전투에서 실패해 또 후퇴해야 했다면 미국은 유엔군을 한국전에서 철수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 백척간두의 소름끼치는 상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승리가 가진 의미는 정말 크다. 프랑스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에서부터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정말이지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려주신 큰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의 전쟁영웅인 프랑스의 몽클레르 장군은 인해전술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물리쳐 지평리를 성공적으로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나라를 또 한 번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몽클레르 장군은 잘 알지도 못했던 한국이라는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6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3성 장군에서 스스로 중령 계급으로 강등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다. 프랑스가 파견한 병력이 대대 수준이라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이분은 왜 생면부지의 멀고도 작은 나라의 전쟁에 목숨을 걸고 자진해서 참전한 것일까? 그것도 직접 한국전에 참전할 병사들까지 모집해서 말이다. 정말 궁금하다. 2차대전 때 자기 조국이 독일에 유린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같은 위기에 처한 한국의 상황을 보며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전생에 강감찬 장군이거나 이순신 장군이었을까?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몽클레르 장군은 자신이 구해낸 그 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지금 이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성장한 모습을 보면 자신의 결정과 헌신에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보람이 아니겠나. 이분은 정말 우리 국민이 잊을 수 없는 큰 은인이다. 
지평리에는 프랑스대대의 전승 기념비가 오늘 본 것만 해도 세 군데나 있다. 지평역,  지평리전투기념관 그리고 구둔역 가는 길 이렇게 세 곳이다. 세 곳 모두 들러 당시 전투상황과 의미를 생각하며 묵념을 했다.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감사하다. 이런 기념비는 세 군데가 아니라 열 군데, 백 군데가 있어도 부족하다. 그분들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
지금 신종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프랑스에 마스크나 방호복이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지평막걸리의 특별한 효능?  
지평리전투기념관을 나와 지평초등학교에 있는 고려 삼층석탑을 보러 갔다. 천년 전의 석탑인데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제일 아랫단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런 석탑은 희귀해서 경기도에는 이곳뿐이란다. 천년 전 이 석탑을 만들던 사람들의 손길을 잠시 느껴보았다. 
이제 지평의 자랑인 지평막걸리 양조장으로 향한다. 지평막걸리는 1925년에 창업해서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가며 지금은 전국 5대 막걸리에 꼽힐 정도다. 제품 중에는 오랜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의 ‘지평 1925’라는 것도 있다. 보통 막걸리의 알콜도수는 6도인데 지평막걸리는 5도로 다른 막걸리에 비해 1도 순하다. 그래서인지 마시기가 편해 꿀꺽꿀꺽 잘 넘어간다. 대표 상품인 밀막걸리는 밀 특유의 껄쭉함과 텁텁함이 특징이다. 단맛이 강하고 신맛은 적은데 안주로는 파김치가 잘 맞는단다. 원래의 양조장 건물은 문화재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한참 공사중이다. 올해 가을 정도면 공사가 마무리되어 아담한 기념관으로 개장한다고 한다. 
지평 여행의 기념품인 막걸리를 사러 근처에 있는 판매장을 찾았다. 막걸리 몇 통을 사서 지인에게 선물도 하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마셨다. 집에까지 택배도 된다고 하니 주문해서 맛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고려 때 원나라가 침입했을 때도 이곳 지평리에서 야별초군이 당시 최강이던 원나라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지평에는 중국군을 격파하는 어떤 기세가 있는 모양이다. 요즘 난리인 중국발 신종코로나도 지평의 기세로 격파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 억지이기는 하지만 혹시 지평막걸리에 신종코로나를 퇴치하는 뭔가가 있지나 않을까? 눈치나 보다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것에 분통이 터지다보니 이런 생각이 다 든다. 

 

멀고 먼 구둔역 
마을 중심가에 있는 지평보리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지도를 보니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구둔역까지는 9km여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겠다 싶어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이게 고생길이 될 줄이야. 
구둔역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고개를 두개나 넘어야 하는 고된 길이었다. 첫 번째 고개에서는 호기 있게 페달을 밟아 올라가 보았다. 그러다 힘이 들어 중도에 내려 자전거를 밀면서 올랐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힘이 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고개 끝이 안 보인다. 중간에 포기할 것 같은 두려움까지 들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날씨가 왜 갑자기 더운지, 땀을 한바가지나 쏟아냈다. 
구둔역 가는 길에는 석불역이라는 작은 간이역이 있다. 역사 건물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쁘다. 석불역이라는 간판은 기이할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예쁘고 특이한 모양의 역사를 보니 재미있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건물이 하도 특이해서  그냥 상징물로 세워 놓은 줄 알았다. 직접 가서 보니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중앙선철도의 상설역이다. 석불역은 국내의 철도역 중에 가장 예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할 생각을 한 철도청도 대단하다. 
석불역에서 다시 고개를 하나 더 넘으면 구둔리가 나온다. 아까 가까스로 고개를 하나 넘어 이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더 높은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고개 앞에서 바로 내려서 밀고 올랐다. 너무 힘들어 허벅지 앞쪽에 쥐가 났다. 허벅지 앞쪽에 쥐가 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다시 돌아온 것까지 치면 오늘 고개를 4개나 넘은 것이다. 구둔역까지는 당초 생각한 30분이 아니라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는 왜 모든 길은 다 평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역시 사람은 직접 닥쳐봐야 깨닫는 모양이다. 
마을을 통과해 언덕길을 올라가면 구둔역이 나온다. 구둔역은 1940년에 개통되었으나 2012년에 원주까지 복선전철화로 노선이 변경되면서 폐역이 되었다. <건축학개론>이라는 유명한 영화의 촬영지로 알려져 지금도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역사와 철로가 잘 보존되어 있어 지금이라도 열차가 들어올 것만 같다. 
철로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기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차가 오는 게 아닌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곳까지 너무 고생해서 왔더니 정신상태가 이상해져 헛것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넘어 
잠시 쉬다 다시 지평리로 출발. 또 두 고개를 넘을 생각을 하니 걱정된다. 택시라도 있으면 자전거를 접어서 가지고 탈텐데, 택시고 버스고 아무것도 없다. 다시 자전거를 밀고 고개를 넘는데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날도 조금씩 어두워진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일본 돗토리로 배낭여행을 갔던 때가 생각났다. 
돗토리사구를 잘 구경하고 밤이 되었는데 미리 예약을 안 하는 바람에 숙소를 못 구했다. 찾아간 호텔들이 다 만실이었다. 그렇다고 노숙을 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시내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시내까지는 10km 정도인데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고갯길에는 사람도 차도 안다녔고 가로등도 없었다. 거의 완벽한 어둠이었다. 깜깜한 고개를 혼자 터벅터벅 걸어서 넘어가는 중이었다. 고개 정상쯤 갔을 때였다. 뒤에서 누가 “스미마셍”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몇 걸음 걷는데 또 “스미마셍”하고 말을 걸었다. 다시 돌아보니 역시 없었다. 온몸이 찌르르 하면서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것은 계속 말을 걸면서 5분 정도나 쫒아왔다. 환청이라기엔 너무 생생해서 혼비백산하며 간신히 고개를 넘었다. 
고개 아래에 도착하니 마침 트럭이 한대 서 있고 운전하는 분이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역까지 차를 태워달라고 했더니 “지금 정말 이 고개를 넘어왔나요?” 하면서 약간 질린 듯한 얼굴로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타라고 하면서 역까지 데려다주는데 가는 내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하니 무슨 사연이 있는 고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어쩌자고 한밤중에 그런 고개를 넘은 것인지. 지금 날이 어두워지고 차도 사람도 없으니 그때 일이 생각나 온몸이 오싹해진다. 그러고 보니 고개 모양도 비슷한 것 같다. 그냥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걸었다. 이번에는 힘든 줄도 모르겠고 쥐도 안 났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지평으로 온 까닭 
오늘 간 지평은 화려하거나 유명한 곳이 아니다. 유적이나 명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곳은 나라의 운명이 바뀐 의미 있는 곳이다. 생각지도 못한 외세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스스로 일어나기도 하고 은인들의 도움으로 심기일전해서 전세를 뒤집은 곳이다. 고려, 구한말 그리고 6·25때 이렇게 세 차례나 거의 포기하려던 시기에 회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곳이다. 지금도 이곳의 산과 들, 풀 한 포기에까지 그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가 남아 있는 것 같다.  
70년 전 우리는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의 도움을 잊고 있지는 않는지, 그분들에게 제대로 보답이라도 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금 신종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꼭 프랑스에 가봐야겠다. 가서 몽클레르 장군 묘소를 참배하고 그분이 살던 집에도 가서 자손을 만나 감사의 선물이라도 꼭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고 싶다. 너무 감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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