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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베가본드 ⑪-중남미의 소국들 –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가난과 순박한 인심은 관계가 없더라

중남미의 소국들 –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가난과 순박한 인심은 관계가 없더라


가난에 찌든 중남미 국가를 지나며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 덕분에 필자가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고마움을 느꼈다. 가난과 감성적인 국민성, 불안한 치안은 언제나 동반자 관계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면서 감정이 격화되어 결국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세계사의 황당한 선례를 남겼다. 니카라과는 입국할 때부터 나쁜 첫인상을 주었는데… 

 

280일 째
가난의 무게


엘살바도로 우술루탄 
엘살바도르의 남동쪽을 달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폭이 넓지만 물살이 빠른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자 우술루탄 주를 알리는 안내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강은 지리적으로 행정구역을 가르는 중요한 좌표이자 원주민의 삶의 중심지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미국인 자전거 여행자
다리를 건너고 유유히 페달을 밟았다. 지루할 정도로 밋밋한 평지를 달리다 보니 멀리서 희미한 물체가 서서히 다가왔다. 자전거 여행자였다. 처음에는 현지인인 줄 알았는데, 자전거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짐들을 보고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초롱초롱한 눈을 갖고 있는 미국인 절미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에서 이곳 엘살바도르까지 16개월에 걸쳐 자전거를 타고 왔단다. 캐나다에서 여행을 시작한 나와는 경로가  반대인 여행자를 만난 것이다. 절미는 내 카메라 가방의 태극기를 보고 입을 열었다.
“브라더가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해서 한국에 가봤어. 뭐더라 으죵부?”
“의정부!”
“아, 그래 의정부. 의정부에 놀러갔을 때 스팸을 가득 넣은 스프가 정말 맛있었어.”
절미는 의정부에서 먹은 부대찌개가 맛있었다며 기쁜 듯이 말했다. 이에 질세라 나는 절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를 여행할 때 먹었던 인앤아웃 햄버거를 호평했다. 두 자전거 여행자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상대방 나라의 명품요리를 추억하며 입맛을 다셨다. 헤어지기 전 절미는 지금까지 캠핑했던 좋은 위치를 나에게 일러주었다. 자전거 여행자가 전해주는 도로정보는 상당히 정확도가 높다. 세세한 지역 정보까지 알려주는 절미의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찌든 때가 낀 장비들, 찢어진 반바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슬리퍼를 신고 편안한 행색으로 유유히 자전거를 타는 절미를 보니 마치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도사 같았다. 1년 후 아르헨티나를 여행할 때는 나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난이 전해주는 것
저녁까지 자전거를 타고 도로변에 보이는 민가에 텐트를 쳤다. 자전거를 텐트에 집어넣는데 모기 대여섯 마리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가 상당히 거슬린다. 눈에 보이는 즉시 즉결처형을 시행했다. 자전거 안장에 살포시 앉아있는 모기를 향해 손바닥을 내리치자 손바닥에 피가 ‘퍽’ 하고 터졌다. 통쾌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통쾌할 것도 없다. 그 시뻘건 피는 애초에 내 피니까.
넓은 마당에 캠핑을 허락해준 집주인 살죠는 영어가 유창했다. 그는 요리한 닭다리 바비큐를 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헤이 꼬레아노(한국인), 너는 엘살바도르가 좋아?”
“응.”
나는 조금 위험한 나라지만 사람들이 친절해서 엘살바도르가 좋다고 대답했다. 살죠는 내 대답을 조금 의아해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너무도 싫다고 말했다. 이유인즉슨 시급이 1달러인 이 나라에서는 아무리 노예처럼 일을 해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엘살바도르의 2018년 국내 총생산량(GDP)은 세계 102위다). 나는 살죠에게 한국에서는 시간당 최소 8달러를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
‘가난의 대물림.’ 몇 세대에 걸쳐 서서히 굳어진 가난. 가난은 세습되고 빚은 종속된다.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 보였다. 푸념하듯 엘살바도르의 실태를 고발하는 살죠의 말투에 불만과 근심이 가득하다. 
일본 유학시절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애초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부잣집 아이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배불리 자란다. 반면, 가난한 가정의 아이는 길바닥에서 과자를 팔거나 구걸을 하며 생명을 연명하기 급급한 삶을 산다. 교육을 받을 기회는 주어지지도 않은 채 말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격차는 아이들의 삶과 소득을 점차 벌려놓는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둘러볼 자유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선진국 반열의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호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 고착화된 부와 가난의 무거운 굴레는 영영 바꿀 수 없는 것일까. 굴레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줄 순 없는 것일까.  
텐트 안에 날아다니는 성가신 모기를 다 때려잡았음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282일 째
뜨거운 축구의 나라 온두라스 

온두라스 촐루테카
과테말라부터 중앙아메리카의 종착지인 파나마까지는 대략 250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과테말라에 입국한 뒤로는 중앙아메리카를 빠르게 벗어날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이유는 중앙아메리카의 살인적인 햇살과 더위 때문이다. 뜨거운 뙤약볕에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면 팔과 다리는 검게 그을려 피부가 벗겨지고 얼굴은 화상을 입어서 화끈거렸다. 당시 나는 정말 초라한 몰골로 여행을 했다. 하루 목표였던 100km 라이딩을 마치고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쇼핑몰에 들렀다가, 노숙자로 오해 받아 경비원에게 쫓겨난 적도 있다. 
엘살바도르를 지나 온두라스에 입국하던 날. 국경에서 이민국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입국수속을 하는 이민국 건물이 너무 낡아서 국가시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권에 도장을 받고 이민국을 나오니 슈퍼마리오 같은 수염을 한 아저씨가 나에게 환전을 제안했다. 1달러 22렘피라에 돈을 교환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율이 1달러 24렘피라란다. 온두라스에 입국하자마자 가벼운 환율사기를 당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황금빛 들판은 그런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엘살바도르는 종종 소가 도로를 점령한다

총성 있는 축구전쟁
온두라스는 축구 열기가 뜨거운 나라다.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중앙아메리카 지역예선에서 만난 근접 국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축구로 인해 전쟁까지 한 사건은 유명하다. 1969년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열린 월드컵 1차 예선 경기에서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에 승리했다. 그런데 엘살바도르에서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한 소녀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로 인해 온두라스에 대한 엘살바도르인의 적대감은 고조된다. 긴장감 속에서 예선 2차전 경기가 열렸고 이번에는 엘살바도르가 승리를 거머쥔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정경기를 보러 온 온두라스인 두 명이 엘살바도르 관중에게 맞아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진다. 분노가 치민 온두라스 국민은 자국에 머무는 엘살바도르인을 향해 무차별 테러와 살인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나라는 축구로 인해 단교를 선언한다.
국가의 연을 끊은 두 국가는 멕시코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3차 예선전에 참가한다. 결과는 엘살바도르의 승리. 이에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온두라스의 원한은 엘살바도르를 향한 증오로 번졌고 테러는 점차 심해졌다. 결국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폭격을 시작한다. 일명 100시간 전쟁이라고 불리는 두 나라의 전쟁은 4일간 1만7000여 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모든 것은 적당함을 넘으면 독이 되기 마련. 축구에 대한 과한 열정이 자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온두라스의 슬픈 이야기다.
온두라스에서는 3일간 자전거를 탔다. 건조한 황무지 풍경에서 페달을 밟다가 핸들에서 시선을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면 사막에 듬성듬성 민가가 보였다. 가죽이 벗겨진 낡은 공 하나를 두고 마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어스름해지는 시야 속에서 온두라스 축구의 밝은 미래를 그려본다.

 

289일 째
니카라과를 달리다, 생각을 달리하다

니카라과 시우다드 산디오
첫인상이란 어떤 대상을 처음 마주할 때 마음속에 새겨지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번 입력된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혹여나 인식이 바뀌더라도 그것은 어떠한 계기가 필요하며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니카라과라는 나라는 나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사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지구상에 니카라과가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니카라과 시골에는 아직도 마차가 다닌다

 

출입국 수난시
온두라스 출국장을 빠져나와 니카라과에 첫발을 디딜 때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니카라과에 입국하는 현지인들이 많아서 도난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니카라과 이민국 건물 앞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짐이 많은 나를 쳐다보는 잡상인들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입국 도장을 받으러 검문소를 들어가는데 이민국 직원이 자전거는 밖에 세워두라고 엄포를 놓았다. 건물 안에 잠시 자전거를 들이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완고한 직원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질서에는 예외가 존재하면 안 되기에 하는 수 없이 직원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자전거를 건물 밖에 묶어두고 소지품만 챙겨서 검문소에 들어갔다. 꾀죄죄한 내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본 직원은 자전거 여행자는 입국 절차가 까다롭다며 나를 상담실로 데려갔다. 1시간이 넘도록 질문 세례가 끊이지 않았다. A4용지 몇 장을 채울 정도. 심문이 끝난 후에는 또 다시 대기시켰다. 입국 절차는 30분이면 끝나는 편인데 이미 2시간이 지났다. 기다리는데 슬슬 짜증이 난다. 업무처리 중인 상담실 창문을 쳐다보니 직원은 수다 삼매경이다. 결국 3시간을 기다려서야 여권에 니카라과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서둘러 이민국을 나와서 라이딩을 시작했다. 전방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이 시작되었고 역풍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과테말라 이후로 다시금 눈에 띄는 치킨버스는 난폭운전으로 나를 위협했다. 얼마나 가까이 스쳐지나가던지 버스 백미러에 뒤통수를 맞을 뻔했다. 
하루는 지나가는 트럭 화물칸에 앉아있던 니카라과 학생들이 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학생들이 비아냥거리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니카라과에 대한 나쁜 인식은 점점 굳어갔다.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Managua)가 20km 정도 남았을 때였다. 피로 누적 때문인지 왼쪽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토바이를 탄 커플이 내 앞에 등장했다. 운전자는 헬멧을 벗고 말했다. 
“오우 자전거 여행자, 어디 가는 거야?”
“마나과에 가려고.”
“마나과에 관광하러 가는 거야? 마나과에 볼 거 별로 없어(웃음).”
“며칠 노숙했더니 피곤해서. 허벅지도 파업을 해서 자전거 타기 싫대.”
“쉬고 싶은 거구나. 여행은 휴식의 여정이야. 우리 집이 바로 이 근처인데 우리 집으로 가자.”
그렇게 캐나다에서 온 제시와 라울 커플을 만났다. 그들은 오토바이 여행자인데 여행 중 남편 라울의 고향인 니카라과에 잠시 머물고 있단다. 
집에 도착하자 라울은 이곳은 너의 집이나 다름없으니 원하는 만큼 쉬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겸손하고 친절한 니카라과인 라울. 따듯한 물에 녹차 티백을 담그면 은은한 색깔이 서서히 퍼지듯 니카라과에 좋지 않은 인식들이 온화한 색을 띄며 내 안에 번지기 시작했다.

 

292일 째
알고 보면 선한 사람들의 땅 니카라과

니카라과 리바스
니카라과의 국명은 원주민 니카라오 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502년 신대륙 니카라과 땅에 발을 디딘 스페인 탐험대는 니카라오 족장을 찾아가 다짜고짜 금을 요구했다. 당시 니카라오 족장은 스페인 탐험대의 질문에 의아해하며 이렇게 반문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어찌 그 많은 금을 원하는가?”
필요에 의해서만 자연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원주민의 삶과 대조적으로 끊임없이 물질을 탐하는 스페인 탐험대를 꼬집는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진다.

필자를 중국인으로 안 현지인을 만난 날

 

순박한 니카라오의 후손들
제시와 라울의 집을 떠나는 날, 귀중품을 넣고 다니는 힙색(허리에 둘러메는 작은 배낭) 지퍼가 고장 났다. 지퍼를 닫아도 이음새가 벌어지는 상태. 이대로 자전거를 타면 핸드폰이나 지갑을 잃어버릴게 분명했다. 20km 떨어진 수도 마나과에 도착하면 수선집에 들러 고장 난 힙색을 고치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2시간 뒤 마나과에 도착했다. 스페인어로 물이 많다는 뜻의 마나과는 수도라는 명성답게 높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러기도 잠시. 휘황찬란한 고층빌딩 뒤편, 서민들의 영역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시장 한복판에서 낡은 구두가 수북이 쌓인 수선집을 찾았다. 
주인에게 힙색을 내밀자 젊은 주인은 펜치로 힙색의 지퍼를 만지작거리더니 3분도 채 안 돼서 고쳐버렸다. 기쁜 마음에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힙색 수선비는 10코르도바. 우리 돈으로 300원 남짓이다. 감사함의 표시로 주인에게 20코르도바를 더 얹어 30코르도바를 건넸다. 주인은 손사래를 치며 10코르도바만 받았다. 수고로움은 10코르도바면 충분하다며 말이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쌀밥에 콩과 고기를 곁들인 식사가 40코르도바. 그 맛 또한 일품이었다. 인건비와 물가가 저렴한 니카라과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부담이 없는 나라다.
해 지기 30분 전에 그라나다(Granada)에 도착했다. 두 번의 캠핑을 거절당한 끝에 한 민가에 텐트를 쳤다. 집주인 가족이 나를 보고 “니하오”라고 인사한다. 평소 자전거 탈 때였으면 중국인 대접은 무시하는 편인데, 이때 나는 철저한 ‘을’이었기 때문에 두 손을 모아 “쎼쎼”라고 인사를 받았다. 멕시코부터 줄곧 중국인 대우를 받아서 이런 상황은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치노(중국인)”라고 부르는 말이 듣기 싫어서 일일이 “꼬레아노(한국인)”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꼬레아 델 노르테?”(북한이냐)고 재차 묻는다. 그러면 또 다시 “꼬레아 델 수르!!”(남한)라고 2차 수정 작업을 해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중남미에서 한국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날은 오전 7시부터 페달을 밟았다. 오후에는 기온이 36도를 웃돌기 때문에 선선한 아침에 많은 거리를 이동한다. 몇 시간 자전거를 타니 콜라가 마시고 싶어서 작은 구멍가게에 들렀다. 구멍가게에서 할머니와 아이를 만났다. 학교 숙제를 하는지, 아이는 종이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물풀이 종이 밖으로 삐져나올 만큼 듬뿍. 이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지 옆에 있던 할머니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결국 할머니는 아이의 풀을 빼앗아 숙제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며 아이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할머니와 잔소리에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아이의 모습이 재밌어서 웃었다. 이내 할머니와 아이도 웃는 나를 보며 따라 웃었다. 이런 게 가족이 아닌가 싶다. 
국경에서 불쾌한 첫인상을 받고 몇몇 불친절한 현지인을 만나며 니카라과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다시금 치유 받았다. 그 옛날 니카라오 족들이 소박하게 살아왔던 것처럼 니카라과 국민들은 현재를 순수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민형 여행작가  blog.naver.com/alsgud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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