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둑길 No. 49 한강6(서울·고양·파주·김포·강화)

한국의 강둑길 No. 49 한강6(서울·고양·파주·김포·강화)
한강의 끝은 김포가 아니다

1300리 물길을 따라온 한강도 아라뱃길 초입을 지나면 허리띠를 푼다. 철조망으로 봉쇄된 강둑의 긴장과는 사뭇 다르게 느긋하다. 바다가 밀고 당기는 시간에 맞춰 갯벌이 속살을 보이고, 강물로 이불을 덮는다. 뿌연 서울 하늘과 선명한 개성 송악산을 한강 언덕에서 다시 본다. 한강이 유도(溜島)에서 끝난다는 정의(定意)는 아무래도 틀렸다. 짠물이 아무리 소용돌이치는 바다라도 염하(鹽河)라고 이름 붙여 한강의 지류로 만든 옛 사람의 지혜는 탄복할 만하다. 연백평야를 마주하고, 벽란도로 들어가는 예성강 하구쯤에 와서야 한강과 작별할 수 있다

 ‌기술·용품협찬 : 태능한성바이크  02-971-7206
 ‌자 전 거 협 찬 : 알톤 전기자전거 STROLL

  

서해와 염하로 가는 한강의 길목이 제비꼬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연미정. 평화소가 구조되었던 유도와 왼쪽으로 황해북도 개풍군이 보인다

  

비에 젖은 한강 철책선,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이 애처롭다. 왼쪽으로 황해북도 개풍군 관산포가 보인다

  


사라진 저자도압구정의 영화 
봄은 남산자락보다 한강에서 빠르다. 남산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전에 한강변에는 자전거 꽃이 먼저 핀다. 중앙선 열차(원래는 경원선)가 벼랑 아래를 지나가는 입석대의 개나리가 언덕을 노랑물감으로 칠한다. 
자전거길을 따라 한강의 마지막 구간 여행을 시작한다. 두모포 앞 저자도(楮子島)라는 이름도 토박이가 아니면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물속에 가라앉은 섬이기 때문이다. ‘무동도(舞童島)’ 또는 닥섬’ 이라고도 했다. 홍수로 일그러진 저자도 모래를 퍼내 강 건너 압구정동의 공유수면을 매립한 것이 1972년이다. 압구정은 한명회가 권세를 누렸듯이 지기(地氣)가 남아서일까 오늘날 신귀족들이 사는 특구가 되었다.
서호는 서강으로 개명됐고, 동호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1969년 크리스마스 날 개통된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되면서 수도와 지방을 이어주었다.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꾸어도 그 시절 청춘의 우상인 혜은이가 율동과 함께 신바람을 부추기는 이름은 역시 ‘제3 한강교’다.

자전거로 강남·북을 이어준 잠수교고맙다
다리 하나를 지나면 또 다리다.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상판을 얹은 잠수교는 한강의 다리 중에서 가장 물에 가깝다.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져 아예 장마 때는 물에 잠기는 걸 전제로 만든 튼튼한 다리다. 유람선 통과를 위해 상판을 들어 올린 곡선미에 건축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자전거가 한강을 건너가려면 곡예를 해야 했던 2004년, 서울경찰청 교통지도부장이던 나는 서울시를 억지로 꼬드겨 잠수교에 자전거길을 냈다. 마지못해 냈던, 좁은 인도위의 자전거겸용도로는 이제 다리의 절반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2층 다리의 효용을 제대로 본 셈이다. 천천히 가도 되는 차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이 낮은 다리에선 허용된다. 
이 다리를 지날 적마다 꿈꾼다. 햇볕이 따가운 여름 휴가철 한 열흘 만이라도 이 다리에 차량을 얼씬도 못하게 하는 발상은 어떨까. 휴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달빛무지개 분수를 감상하는 여름밤은 어떨까. 비가 내리더라도 2층 다리 아래라 젖을 염려도 없다. 교통체증을 걱정한다고? 천만에…. 휴가철에는 시내 전체교통량도 줄어들 뿐 아니라 반포대교가 충분히 소화하고도 남는다.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한 파리 시민을 위해 세느강에 인공백사장도 만든다는데 이것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다.

 

자전거가 늘어나면서 사고도 급증하고 있다. 안전하게 타야 오래 탈 수 있다(서울 용산)

  

잠수교 자전거길, 다리 상판의 절반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서울 용산)

  

성산대교는 트러스트 철물구조가 아름다운 한강 교량이다(서울 마포)

  

한강 자전거의 행렬은 끊임이 없다. 일행이 아니다(서울 마포)

  

절두산, 잠두봉은 한강의 명소다. 지금은 사라진 강 건너 선유봉까지 그대로 있었으면 좋으련만(서울 마포)

  


동빙고와 서빙고한강 얼음이 돈이 되던 시절 
얼음을 만들 수 없었던 시절, 겨울 한강은 바빴다. 강이 4치(12cm) 이상 얼면 사각으로 잘라 소달구지로 둔지산(이태원 일대) 빙고로 날랐다. 동빙고는 왕실제사용으로, 서빙고는 정2품 이상 고관대작용이었다. 조선조 광해군 때는 빙계(氷契)만이 얼음채취권을 독점하자, 얼음으로 먹고 살던 상인들이 반발했다. 결국 정조 때 와서 격쟁 끝에 합정동 하류는 일반에서, 상류는 빙계에서 채취하는 것으로 길을 터 주었다.
동부이촌동 앞 한강백사장은 넓고 넓어서 아낙들이 시내에서부터 이고 온 옥양목 이불빨래가 하루 종일 모래 벌에서 펄럭거리며 말랐다. 1956년 5월 3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해공 신익희의 유세에는 25만 인파가 그의 유세를 들으려 백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이틀 뒤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그가 갑자기 서거한다. 막 발표되었던 신곡 ‘비나리는 호남선’은 해공의 추모곡처럼 공전의 히트를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해공이 살았더라면 이 땅의 정치는 어디로 갔을까. 
은회색 한강대교는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트러스트 구조이나 한 많은 다리다.
6·25 전란 때 국군의 손으로 폭파했던 한강대교는 1917년에 일제의 손으로 놓은 다리다. 전쟁이 터지자 치안국 감찰계장 김종삼이 국고를 죄다 현찰로 바꾸어 트럭에 싣고 도강 일보 직전에 다리가 끊겨버렸다. 경찰관들이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지고, 트럭도 나머지 돈도 버린 채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지시로 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대령은 사형 당했고, 1962년에야 원혼에게 무죄가 선고된다. 

 

 

아라뱃길 입구 또한 주말 라이딩의 명소여서 북적거린다(서울 강서)

 


마포종점과 여의도 비행장의 불빛 
마포대교 아래를 지난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 마포는 종점이었고, 여의도는 비행장이 있는 모래섬이었다.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가사는 모두 한 시대의 풍경을 그렸다. ‘너(汝)나 가져라’라는 얘기를 씨앗으로 품고 있는 섬이 오늘날 금융과 방송의 중심이 되었다. 안창남의 비행에 구름같이 몰려오던 식민지 백성의 환호도 역사일 뿐이다. 여의도를 떠난 비행장은 성남으로 옮겨가 서울공항이 되었다. 
1968년 나룻배를 만들던, 밤섬 주민 78가구 443명은 강 건너 창전동 와우산 자락 연립주택으로 이주하고, 마포구 율도동은 완전히 사라졌다. 여의도를 제대로 된 섬으로 만들려면 한강 폭 1,300m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해 뒤 무너져 내린 와우아파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들은 지금도 동제(洞祭)를 지내며 향수를 달래는지 궁금하다. 폭파된 밤섬 화강석 4만 트럭분은 여의도 윤중제를 16m 높이로 쌓는 데 들어갔다. 해마다 4월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여의도 벚꽃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바다를 이룬다.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국회의사당을 애써 외면해 보지만 보통사람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귀빈들의 카퍼레이드는 마포를 통하여 서소문으로 들어오며 꽃가루 세례를 받았다. 정부는 낙후된 도화동, 공덕동 큰길을 ‘귀빈로’라고 이름 붙이고, 외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빌딩을 짓도록 권장했다.
한 시절 마포대교 아래는 분주했다. 투신한 사람의 시신을 건지기 위해 돈을 받고 일하는 머구리(잠수부)들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수색은 지지부진하고, 흥정이 붙기까지 했다. 모터보트 한 대를 가지고 파견 나와 있던 경찰관은 직속상관으로 부임한 외근계장에게 관내를 설명한다면서 밤섬 안으로 배를 몰았다. 7만평 남짓한 밤섬은 그때도 새들의 낙원이었다. 홍수에 떠내려 와 걸린 버드나무가 숲을 이뤘고, 물가 풀 섶에는 새 둥지가 지천이었다. 사람이 쫓겨난 자리에 자연이 주인이 되어있었다. 한강에 유골을 뿌리는 나룻배는 수시로 강을 오르내렸다. 잉어를 방생하는 굿판이 강 위쪽에서 벌어지고 나면 토정 이지함의 초막이 있던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강 아래쪽 소(沼)에서는 다시 고기를 잡는 어부의 그물질이 부산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예비역 해병사령관에게 하는 경례에도 절도와 동질감이 묻어난다(김포 월곶)

  

강화해안일주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조만간 더 편하게 북녘 땅을 접할 수 있으리라(강화 송해)

  

속가의 선친 묘소에서 제례를 지내는 스님. 조상을 위로하는 경로잔치인 셈이다. 한판 춤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건넸다(강화 송해)

  


절두산과 당인리화력발전소의 변신 
잠두봉은 자연으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다. 양화진 나루가 바로 앞이고, 멀리 선유봉이 보이는 풍경은 한강의 풍광 중에서도 백미라고 전한다. 그러나 ‘절두산’이란 이름으로 부르면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피가 그대로 흐르는 기분이다. 구한 말 ‘제4의 헤이그밀사’로 활약했던 헐버트처럼 조선을 모국만큼이나 사랑한 외국인들이 대를 이어서 영원히 잠든 곳이기도 하다.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내력도 간단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군대에 묻어온 중국인이 조선 처자를 사모하여 눌러 앉았는데 그 처자가 경상도 한 부자의 첩으로 시집가버렸다. 부자가 죽자 본부인에게 구박을 받고 돌아온 여인을 중국인은 그때까지 기다리다 결혼하고 아들딸 낳고 살았다는 당인리(唐人里)다. 검은 석탄 연기를 내뿜는 발전소 때문에 상수동 일대 가난한 판자촌은 그나마 빨래조차 내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화력발전시절은 모두 지하화 되었다. 베이징 따산즈의 798공장예술구처럼 살아있는 공장갤러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상수동은 살아 있고, 하수동은 사라졌다.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기찻길은 사라진지 오래되었어도 홍대 앞 문화 거리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 미술대학의 전설인 홍익대 발 자유분방함이 한류가 가지는 상상의 바닥을 지탱하고 있다.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의 흔적은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을 바꾸어도 끈질긴 지명으로 살아 숨 쉴 것이다.
 

 

김포 신도시 근처 한강변에 세워진 ‘김포에코센터’, 어린이와 함께 놀아줄 수 있는 교육공간이다(김포시)

  


해발 100m 인공 산난지도의 추억 
성산대교를 지나면 강변도로도 강물에서 멀찌감치 돌아간다. 넉넉한 둔치가 생겨났다. 한강난지공원이다. 그야말로 그늘막이라도 쳐놓고 좀 쉴 수 있는 곳, 강변 야영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한강의 귀한 공간이다. 월드컵 공원 전체를 당초 설계한 최광빈(58) 서울시 푸른도시국장의 말이다. “난지골프장을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가족공원으로 돌려놓은 것은 보람 있는 일이지요. 특히 노을공원에 만든 150 사이트 야영장은 가슴이 뻥 뚫리지요. 아마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느낌이 들겁니다.”
사실 강변북로 오른쪽에 성처럼 서있는 해발 100m 산 푸른 숲은 경이롭다. 난지도가 있던 자리니 말이다. 한 시절 난지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쓰레기매립장은 떨쳐버릴 수 없는 이미지다. 1986년 난지도는 마포경찰서 외근계장의 소관이었다. 서울시내 쓰레기가 밤낮 없이 밀려들었다. 쓰레기를 쏟아낸 청소차가 빠지고 나면 고물을 캐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달라붙는다. 그것도 자리가 있어 제일 먼저 고르는 사람을 ‘앞벌이’라 불렀고, 재탕을 하는 사람은‘ 뒷벌이’라 했다. 달동네 쓰레기보다는 강남 쓰레기에 권리금이 덧붙어 있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잦았고, 암묵적인 관할이 정해졌다. 
‘물랭이’라 불린 요구르트 병 같은 플라스틱 용기들은 근처 선별공장에서 대강 세척을 하고 컨베이어벨트를 지나 재생공장으로 직행했다. ‘재활용’이란 말이 없던 시절, 재건대의 거친 노동 덕에 고물상 사장은 벤츠를 타고 다녔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일하는 수녀님들도 쓰레기더미 속에 살았다. 폐 버스에서는 쓰레기 속에 파이프를 박아 분출하는 메탄가스로 끓여낸 우동과 라면을 팔았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엉덩이를 맞대며 저녁상을 차려야 하는 일자형 하모니카집에서 난지도 사람들은 옆집의 숨소리까지 함께 하며 살았다. 월드컵공원이 된 쓰레기산은 영원히 썩지 않을 시대의 타임캡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책선 가까이 달리면서 바라보는 북녘 땅은 긴장감으로 감회가 남다르다(김포 월곶)

  


밤 깊은 김포가도마곡들판은 변신 중
가양대교를 건너면 이내 마곡벌판으로 이어진다. 마곡지구는 서울에 마지막 남은 대단위 개발지다. 또 30년 전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김포공항경찰대장이던 송인성 총경은 절대로 풀리지 않을 듯이 보이는 마곡들판의 절대농지(진흥지역) 일곱 마지기(1,400평)을 갖게 된 사연을 말했다. 일찌감치 분가하면서 경상도 산골짝 봉화에 있는 문전옥답을 아버지에게 미리 상속해 달라고 졸랐단다. 아버지가 조건을 달았다. “반드시 서울에 가서도 논으로 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봉화 논 일곱 마지기가 고스란히 마곡 들판에 같은 평수로 옮겨 앉아 꿈쩍도 않고 있다고 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양반 성품에 마지막 수용될 때까지 그 논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홍도평을 아시나요? 
행주대교를 지나 아라뱃길 초입으로 들어서면 길이 좀 낯설다. 강 건너 김포 쪽으로 가야하는 코스를 잡는 데는 한참을 궁리해야 한다. 일제 때 미곡증산을 위해서 세운 신곡리양수장을 지나면서부터 한강은 철조망 안에 갇힌다. 어촌계의 작은 강화플라스틱(FRP) 배는 썰물에 속살을 드러낸 갯벌에 얹혀 조업을 기다린다. 작가 김훈이 ‘무한감’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김포평야는 더 이상 ‘광활’을 붙일 자격을 잃어버렸다. 
김포서 경비과장으로 근무하던 1982년, ‘홍도평’의 전략적 가치와 위험요소를 수없이 되뇌었다. 북한군은 레이더에도 포착되지 않는 AN-2기의 강습착륙지로 홍도평을 꼽았다. 바로 김포에 들어서는 아파트가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는 김포시 걸포동과 고촌읍 향산리 일대다. 누산리를 지나 하성면 전류리까지 김포시가 도로의 여백에 자전거길을 만들고 있어 다행이다.

한강의 마지막 이름 할애비의 강조강’ 
전류리에서 오늘은 동행과 합류한다. 천안함 사건 당시에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이홍희 예비역 중장, 자전거여행가 차백성 편집위원, ‘자전거생활’ 김병훈 대표가 일행이다. 겨울이 벗겨지지 않은 비도 함께 했다. 해병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철조망 너머 한강의 종점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전류리는 한강의 최북단 포구다. 조강포, 마근포, 시암리, 후평리 포구는 통일되는 그날까지 모두 기능정지다.
비를 맞은 철조망 금속 재질이 어둑한 배경 앞에서 번질거린다. 시암리는 임진강을 끌어안은 한강이 좌향좌로 물길을 트는 끄트머리다. 물이 썰면 황해북도 관산포까지 1.3km라는 말이 더 애달프다. 여기서 한강은 마지막 이름 ‘할애비의 강’, 조강(祖江)이 된다. 
비에 젖은 대남방송은 낮은 포복으로 강을 건너와 더 또렷하게 들리다 말다 반복한다. 우리의 대북스피커가 출력을 양껏 높이는 지점은 충돌하는 맞불집회의 함성처럼 ‘웅~웅’거릴 뿐 소리의 행간을 식별할 수가 없다. 새 단장에 들어간 애기봉전망대 출입을 허락받아 일어서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오랜만에 헐떡이는 심장으로 봉우리에 선다. 비안개 속에 흐릿한 북녘이 아득하다. 세곡선이 들락거리던 조강포도 남북으로 갈라져 환갑 진갑을 다 넘겨 버렸다.

 

북녘 땅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날도 일 년 중 그리 많지 않으리라(강화 송해)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 기념촬영. 언제 개성까지 함께 달려볼 날이 오기는 올 런지(강화 양사)

  

해병장교의 배웅인사도 군인답다. 든든하다(강화 양사)

 


한강의 끝은 김포가 아니다 
조강리에서 보구곶리로 돌아서면 염하가 한강에 짠물을 보태는 지점에 유도가 있다. 1996년 홍수에 떠내려 와 유도에서 야위어 가던 북한 소를 해병이 구했다. 김포시는 제주도 암소와 신방을 차려주어 이후 100여 마리의 후손을 보았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에 동행하여 1001마리의 소가 북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문소 초병의 인사는 깍듯했고, 해병의 DNA는 세대를 건너서도 흘러 넘쳤다. 일행은 느긋한 일정으로 문수산을 한 바퀴 돌아 해병청룡회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미세먼지가 걷힌 맑은 시야를 선물 받았다. 어제 빗길 행군 덕분이다. 우리 해군사관학교의 원조 격인 ‘통제영학당’의 옛터가 강화대교 아래에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라는 열강세력과의 충돌 그 현장인 바다를 염하라 이름붙인 것은 옛 사람의 혜안이다. 아무리 짠물이라도 이 강은 한강의 지류일 뿐이라는 뜻이다. 연미정에 올라서 보는 눈앞의 유도, 북한 땅 개풍군이 한 눈에 들어오는 한강과 염하는 하구풍경의 백미다.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과 소금배가 물때를 기다리던 곳, 족히 500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는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 굴욕의 강화조약을 맺은 인조의 눈물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송해면 숭뢰저수지를 지나 승천포 돈대 앞으로도 해안일주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북녘 땅을 손에 잡을 듯이 달릴 수 있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어쩌면 끊임없는 자동차 행렬만으로도 북을 향해 살아있는 자유대한의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의 언덕을 오르는 코스는 자전거 탄 젊은이들조차 “허벅지가 쫄깃쫄깃하다.”고 말한다. 북녘 땅 개성 송악산이 어제 내린 비 덕분에 더 가깝다. 예성강이 사라지는 물돌이동에 벽란도가 있고, 북한 곡창 30%를 차지하는 연백평야가 한강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에워싸고 있다. 아무리 봐도 한강의 끝은 김포반도의 끄트머리가 아니다. 

참고 자료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강화군, 뿌리깊은나무, 1989 
2.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3. 한강이 말 걸다, 서울특별시, 2014 
4. 남한강 수운의 전통, 이정재 김준기 등, 한국학술정보, 2007
5. 서울지명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10 
6.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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