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래가 스며든 대구, 서른 즈음에 떠난 김광석의 골목

대중가요의  골목길(15) 대구1
옛 노래가 스며든 대구, 서른 즈음에 떠난 김광석의 골목
2020년 봄이 다 가도록 대구는 고요했다. 강요된 격리 속에 달구벌이 다시 살아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숨죽인 올해의 늦봄, 대구사람들은 어떤 희망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지내는지 궁금했다. 담쟁이가 푸른 윤기를 선사하는 청라언덕에서 ‘동무’를 생각하며 부르던 우정과 희망이 어떻게 피어나고 있는가. 동성로의 청춘들은 어떻게 그 끓는 피를 견디면서 시간을 셈하고 있을까. 그건 가수 김광석이 운명을 예언하듯 남긴 <서른 즈음에>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피난 열차를 기다리던 대구역의 향수를 이제 향촌동 일대를 촘촘히 걸어가는 허리 굽은 세대의 가락으로 따라가 본다

 

2020년 늦은 봄, 대구로 가는 길은 멀다
신춘(新春), 겨울이 끝나는 즈음에 불어 닥친 우한발 역질(疫疾)의 광풍은 어이없게도 대구를 인질로 잡았다. 세기의 역병은 한 도시를 혐오와 공포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도시의 봉쇄’라는 말이 분노를 자아내지만 ‘차단의 울타리’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 바친 의료진과 국민의 성원 덕분에 대구는 신록의 계절을 경건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풀지 못한 긴장 속에서도 ‘100일 기도’처럼 대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아왔다.
허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대구로 이어지는 소도시에서의 차편은 그게 아니었다. 서울발 KTX가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정상운행과는 또 다른 폐쇄다. 새벽밥을 먹고 문경(점촌)에 차를 세운 다음 타러간 시외버스, 발차 시각을 알리는 전광판은 ‘운휴’라는 단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구북부정류장행은 2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일단 급한 대로 구미행이다. 경유지 상주에 이를 동안 ‘나홀로 전세’더니 구미터미널에서도 대구북부행은 잠정폐쇄다. 다시 택시를 타고 구미역으로, 바로 연결되는 ITX 새마을을 타고 내린 대구역, 벌써 10시다.

텅 빈 경상감영과 약전골목, ‘개점휴업’ 서문시장
인구 250만의 대구는 여느 대도시와는 도시 확장의 구조가 다르다. 부산이 바다와 산에 막혀 해안을 따라 비좁게 선형으로 땅을 넓히고, 인천이 바다에 밀려 동으로 터전을 만들어나갔듯이 신도시와 구도심의 구분이 확연한 게 보통이다. 대구는 대구읍성의 철거로 대구역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이 방사형으로 몸피를 불려 나간 도시다. 대구의 관광 안내지도에도 주로 중구에 근대문화유산이 못자리 붓듯이 몰려 있는 것도 그 한 징표다. 
북성로의 공구골목, 중앙공원이었던 경상감영공원, 따로국밥 골목을 지나간다. 약전골목도 몇 군데는 문을 열고 있지만 대부분이 닫혀서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문득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도시로 옛 노래를 찾아온 내가 무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삼남에서 가장 서민의 경기를 목도할 수 있다는 대구 서문시장으로 향한다. 잊을만하면 불이나 안타깝기도 한 시장, 정치인들이 서민소통의 현장 사진을 얻으러 기어이 찾아오는 포토존이다. 역시 문을 열어놓고 서로 안부를 묻는 상인들과 아직 천포(天布)로 씌워놓은 노점들의 물건더미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다.

청라언덕에서 내 친구를 생각한다, <동무생각>
청라언덕을 찾아간다. 역시 이름의 힘은 거대하다. 푸른(靑) 담쟁이(蘿)가 무성하게 자라면서 신록의 태양을 받아 빛나는 언덕은 대구의 힘이다. 코로나로 유폐되다시피 한 도시에서 ‘계명대동산병원’은 어두운 대구의 등대였다. 밀폐된 방역복과 안경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나던 의료진의 눈동자가 우선 기억에 새롭다. 우리나라 코로나 감염자의 64%가 발생한 현실 속에서 오늘 확진 ‘0’의 숫자를 발견하는 일은 경이로운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동산병원의 병동은 거대한 구원의 성이다. 서양인에 의한 의료선교의 역사가 펼쳐진 근대 대구의 원점이다.
청라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은 출입통제다. 사진을 밖에서 찍으면서 이만한 여유는 얼마나 다행인가를 주문처럼 외었다. 그 언덕의 끝에 선 노래비, 붉은 벽돌이 담쟁이와 조화를 이룬 선교사들의 공간, 첨탑 2개로 솟아오른 계산성당의 웅자(雄姿)를 가까이 가서 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해도 다행이다.
신록의 그늘에 앉아 ‘청라언덕’이 처음 등장하는 노래 ‘사우(思友)’를 들어본다. ‘동무생각’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던 그 노래, 학창시절의 우정을 돌아보는 그 노래다.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이 짓고, 시인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명곡이다. 후렴구의 변주까지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마성의 노래다. 4절까지 있는 이 노래를 다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청춘과 우정을 노래한 사계절의 시편이 음률에 실린다. ‘봄의 교향악이 흐르는 청라언덕’, ‘더운 여름 백사장의 저녁 조수’,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겨울밤 소리 없는 눈발’이 우정의 4계가 사는 배경이다. ‘백합 같은 내 동무’는 대구사람들이 ‘SM’이라고 즐겨 부르던 기독교재단인 신명여학교 학생을 그리면서 하얀 꽃으로 표현했다는 해설이 싱그럽다. 특히 ‘밤의 장안(長安) 같은 내 마음’과 ‘가등(街燈) 같은 내 동무’라는 표현이 가슴에 절절하다. 도시의 야경과 가로등이 있는 길목‘이라는 표현은 청라언덕에서 그리는 우정과 교복 입은 뒷모습이 어우러지는 시화(詩畫)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서릿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 금어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어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어놀 때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사우, 思友)
이은상 시, 박태준 곡, 1925

 

옛 가요를 채굴하는 유랑가객, 노래 이야기의 마법사 시인 이동순
청라언덕 동산선교사 주택에서 ‘3·1 만세운동길’을 따라 계산성당, 시인 이상화와 지사 서상돈 고택,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집’ 등 약령시 한의학박물관으로 이르는 약 2km의 길은 점점이 박혀있는 문화유산들로 ‘근대문화골목’을 이루고 있다. 전시공간이나 박물관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긴 잠에 빠져 있지만 대구 여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공간’이기도 하다.
대구의 오래된 골목, 향촌동으로 향한다. 대구역을 중심으로 좌측에 펼쳐진 북성로 일대는  가난한 시절의 땟국물이 흐른다. 골목 하나 뒤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간 세계의 흔적이 낡은 건물을 덧칠한 콜라텍이거나 싼 목로집, 연탄불고기 냄새가 골목에 배어난다. 향촌문화관(대구문학관)이나 대구근대역사관이 들어선 것도 그 자리가 서울의 명동처럼 피난 시대의 대구가 품어 주었던 화가 이중섭, 시인 구상 등 그 시절 그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요로 보면, 대구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딱 집어 이거다’ 할 수 있는 ‘대구의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 영남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이동순 시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이미 197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이 되고 1989년에 당선된 문학평론에서 검증된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옛가요의 원류와 흐름을 추적하는 데 일생을 건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흘러간 옛노래의 제단에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이다. 그의 헌신으로 흘러간 노래는 더 이상 흘러가지 않는다.
모두들 어쩐지 저급한 노래로 밀쳐버리거나 주흥이 돌아야 찾는 음악쯤으로 여기는 옛가요를 당당히 오늘의 무대로 불러 세웠다. 많은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건조하고 쟁쟁한 어조로 시대와 음악 장르 속에서 옛가요의 흥망성쇠를 논하는 것과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 <번지 없는 주막>에는 우리 옛가요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목소리에 애정이 넘쳐흐른다. 시인다운 따스한 감성이 목로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그대로다. 기억도 못 하는 유년에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를 그는 축음기판 속 이난영과 황금심이 절창하는 비련의 음색으로 찾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옛 가요 사랑은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 배경은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옛가요 470곡을 3절까지 대학노트 2권 분량으로 필사하며 외운 덕후의 경지에서 비롯된다. 커튼 뒤에서 즐기는 호사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노래하고 연주하는 ‘학행일치’의 풍류객이다. 그의 책에 소개된 한 장의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다. ‘대구지역 대학교수 풍류객’이라 이름 붙인 동호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배경에 걸린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이라는 노랫말이 키워드다.
옛가요 지킴이의 전국적 모임인 ‘유정천리’의 회장으로서도 그는 막중한 사역을 기꺼이 짊어졌다. 축음기 콘서트나 가요사 관련 자료 달력을 만들기도 하고, 이애리수, 이난영, 남인수, 이부풍, 진방남 등 옛가요 선집 CD를 발간하여 가요사의 제단에도 헌정했다. 가요유적답사를 통해 가맥(歌脈)을 잇는 작업을 하며 ‘한국가요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대학교수직을 정년퇴임한 그는 <대중가요 힐링연구소>를 운영하며 훨씬 더 대중예술인에 가까워졌다. 구수한 노래와 해설은 아코디언 반주와 색소폰 연주까지 더해져 1인 악단으로 행동반경이 넓어졌다. 경로당이든 양로원이든 심지어 종택의 족보 있는 노인들 모임까지 옛가요를 반기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 시절 그 노래를 애절하게 공감하며 선물한다. 비록 나는 한 번도 참석해 본 적 없지만 영상을 통해 ‘공연’이라 부르는 그의 노래강의를 빼놓지 않고 본다. 옛노래의 종점을 배호나 이미자까지만으로 정한 완고함까지도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말이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나리던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 허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어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이빨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사나이 한 목숨을 바다에 걸고
오늘은 이 항구로 내일은 저 항구로 
마도로스 파이프에 서리는 옛 추억 
못 믿겠네 못 믿겠네 뜨내기 사랑
(5~6절 생략)
<번지 없는 주막>
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태평레코드, 1940

이 노래는 처녀림이라는 예명을 쓴 박영호가 월북하면서 이후에 여러 개사 과정을 거쳐 재발매되어서 노래마다 가사가 조금식 달라져 있다. ‘유정천리’의 부회장으로 있는 이준희 교수 등이 노력해 최초 발매시의 가사로 복원한 선집 CD에서 노래의 원형을 발견하는 기쁨도 크다. 

 

청춘의 거리 동성로에서 되돌아보는 6·25전쟁, 오리엔트 레코드 
대구 구도심은 대구읍성을 헐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재편된다. 고읍의 성곽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되어 동네 이름으로만 남은 곳도 드물다. 대구역을 중심으로 중앙로를 뚫고 4방향으로 동성·서성·남성·북성으로 이름 붙였다. 법정동의 이름이 뒤섞여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일제 때 번화가는 서성로가 중심이었다. 약령시가 서는 약전골목도, 따로국밥 골목도 서성로에서 따로 늙어간 셈이다. 오늘날 상권은 동성로가 대구의 명동이자 젊음의 거리다. 코로나에 갇혀있던 대구의 청춘들도 기지개를 켜면서 늦봄 양광을 즐기러 나왔다. 평소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모습에야 비할 바가 아니지만 ‘코로나 해동’이 가장 먼저 동성로에서 시작된다.
자, 옛노래로 돌아가면서 동성로에 있던 한 레코드 회사의 내력을 따라간다.
대구역 앞 대우빌딩 뒤편에 있던 ‘송죽극장’과 그 건너편에 ‘자유극장’이 있었다. 현재는 송죽시어터만이 그 흔적을 전할 뿐이다. ‘오리엔트레코드’가 있던 자리다. 이동순 교수는 대구 근대사에서 빠져 있는 가요 부분을 이 거리에서 보충하고 싶어 한다. 별도의 스토리텔링도 필요없다. 지나간 가요사의 파편만 모아도 된다. 오리엔트레코드는 6·25 전란 중 대중음악인들이 대부분 피난 수도 부산에다 둥지를 틀어 가려져 있지만 이미 1947년부터 고 이병주 사장이 대구에서 문을 열었다. 6·25전쟁 중에는 가요계를 대표하는 음반사로서 진중가요의 90%가 대구에서 만들어졌다. 1951년생 <전선야곡>도 오리엔트 작품이다. 전후에 남인수의 인기를 누른 현인의 대표곡 <굳세어라 금순아>도 노랫말의 배경이 부산이라 부산출생으로 알지만 실은 오리엔트의 대표곡이기도 하니 대구산이다. 작사가 강사랑이 써온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가 맘에 쏙 든 오리엔트 문예부장 박시춘은 남선악기점 2층에, 아내가 운영하던 ‘오리엔트다방’에서 창문을 군용 담요로 가리고 녹음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피로 지킨 낙동강 전선 덕분에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4만 장이 팔린 대중음악의 명곡이 탄생했지만 휴전 후 환도한 업계의 여파를 견디지 못해 첫 음반 <귀국선> 이후 200여 곡을 남긴 오리엔트는 1958년 폐업하고 만다. 오늘은 정통 트로트의 맥을 이어가는 문희옥의 목소리로 축축하게 젖은 ‘동성로’의 서정을 함께 들어 본다.

행복했던 거리다만은 그대 떠나간 뒤에
내 마음처럼 하염없이 흐느껴 우네 
비 내리는 동성로
오늘도 타인들은 네온 속에 쌍쌍이
정답게 정답게 돌고 있는데
누군가 언젠가는 나처럼 여기서
밤비를 맞으며 울겠지 
비 내리는 동성로

대구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랑 주고 이별주고 눈물도 주는
비 내리는 동성로
오늘도 연인들은 우산 속에 쌍쌍이
정답게 정답게 걷고 있는데
누군가 언젠가는 나처럼 여기서
밤비를 맞으며 걷겠지
비 내리는 동성로
<비 내리는 동성로> 
권혁식 작사, 남국인 작곡, 문희옥 노래, 1990

 가난한 마을 방천시장과 김광석, 그의 <서른 즈음>
동성로가 끝나면서 달구벌대로를 비스듬히 건너면 대봉동이다. 신천에 쌓은 강둑길 아래 방천시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방천은 강둑의 또 다른 이름이다. 거기 우리 가요사에 남을 가수 김광석의 흔적이 아예 ‘김광석 다시 그리기 거리’로 만들어져 있다. 그의 얼굴이 방천에 기댄 벽에 파노라마로 그려져 있다. 기타를 든 김광석,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이 흩날리는 꽃비 아래 희미하게 웃고 있다. 만개를 거부하는 듯한 그의 표정은 그늘진 채 서른을 갓 넘기고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방천시장에서 태어났고,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한 서울 창신동 배호의 옛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주한 유년으로 보아 유복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8년 서울 대광고에 입학하고, 명지대학 경영학과로 진학한 그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기타를 두루 잘 연주했다. 안치환과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를 결성하고, <녹두꽃>을 부른 것을 제외하면 그는 저항의 강렬한 메시지보다 또래의 청춘들이 가지는 잔잔한 서정에 훨씬 기대어 있었다. 기타를 들고 전국을 다닌 기록은 학전소극장에서 가진, 1995년 1000회 기념공연에서 그의 짧은 생애에 대비되는 역사가 된다. 1996년 유근 시인의 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유작으로 남기고 1월 6일 새벽 마포 서교동 자택 거실 계단에서 전기줄로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대표곡 <서른 즈음에>가 암시나 한 듯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퇴장이었다. 
1990년대 마지막 정통포크 가수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지도받은 적 없는 발성에 모호함이 있어도 울음을 참듯이 떨리는 음색, 호소력 짙은 감정의 노래는 그의 비시시 웃는 웃음에 설핏 보이는 외로움에 더 어울리는 듯했다. ‘한국의 커트 코베인’ ‘한국의 밥딜런’이란 별호가 그의 노래비를 대학로에 만들고 더는 마로니에 그늘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세상을 버린 자의 노래와 남은 자들의 유산은 전혀 다른 트랙을 탄다. 저작권 소송에 그의 아내, 부모, 형의 이해가 뒤엉겨 오래도록 김광석을 아끼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노래 가사처럼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선배 가수들의 요절이 대부분 병마와의 싸움이었다면 그는 알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에 스스로 하얀 타월을 던지며 무대를 걸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KBS 음악감독을 지낸 강승원이 작사·작곡한 노래 <서른 즈음에>를 그의 대표곡으로 고른 이유도 그가 선택한 서른 고개에서 만난 청춘, 사랑, 허무, 이별을 함께 담은 꽃비가 이 계절에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하 반복)
<서른 즈음에> 
강승원 작사·작곡, 김광석 노래, 1994

 

동대구역이 관문이 된 대구, <기적소리만> 남긴 대구역
국채보상운동공원을 지나 대구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1969년 동대구역이 생기기 전까지 대구역은 대구의 관문이었다. 새마을호가 최특급 열차이던 시절에는 간이역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그나마 대형백화점이 복합건물로 들어서 지금은 ITX새마을과 무궁화호가 승객을 내리고 떠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 대구역은 여객전무에게 은하수나 거북선 담배 한두갑을 찔러주면 불쌍한 공군 일등병 무임승차를 눈감아 주던 경부선의 기억과 오버랩된다. 제목에 대구역을 넣은 노래는 무려 11곡이나 되지만 <대전부르스>처럼 가요 명곡으로는 어느 것 하나 등판하지 못했다.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라는 대전이 주는 결별과 피난살이의 청산이라는 부산의 서사가 없는 대구역판 ‘부르스’와 ‘정거장’은 그냥 유행에 밀려가고 말았다. 
하춘화가 6살에 부른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는 어린 딸이 엄마와의 이별을 눈물로 그렸다. 성인가요의 ‘최루의 문법’으로 애조를 띠지만 앳된 소녀의 비음을 감추지 못해 안쓰럽다.
그 밖에도 <밤 깊은 대구역>(강영철), <님 떠난 대구역>(시민철), <대구역 밤 11시>(오기택), <대구역 이별>(남일해) 또한 애창 목록의 근처도 가지 못한 채 희귀 음원의 영역에 잠들어 있다. 
나의 애창곡 중 하나이자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간직하고 있는 노래가 <기적소리만>이다. 대구 태생의 배성은 대륜고 2학년 때인 1969년 <사나이 부르스>로 데뷔한다. 1972년 작곡가 진남성의 <기적소리만>으로 그는 <10대 가수상>을 비롯해 가요계에 우뚝 서지만 1975년 일간스포츠에 가요계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가수 생활 6년을 스스로 접고 생선장사를 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해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그는 잠시 귀국하여 35년 만에 <가요무대>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허스키 보이스에 특유의 울음이 섞여 있다. 울음이 지나치면 질척거리지만 그의 노래에는 적당히 촉촉한 울음이 전편에 깔린다. 그가 무대를 떠난 지 4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 울음을 머금은 습윤한 노래의 끈적임이 우리의 감성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한다면 여자가수에게서는 김용임의 목소리에 담긴 울음이 근사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어느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 이미자의 ‘모정’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없는 어미의 울음이 적시고 있어 청중의 한숨과 저미는 가슴을 붙잡는다.
배성이 그대로 활동하고, 배호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 아래라면 남진, 나훈아의 양대산맥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랑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정거장
정든 그 사람을 멀리 보내고 나홀로 섰네 
사랑을 하면서도 보내야 하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겠냐만은
기적 소리만은 기적 소리만은 
내 마음 알고 갔겠지

기적도 잠이 드는 적막한 정거장
비에 젖고 젖은 가로등 밑에 나 홀로 섰네 
사나이 두 주먹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이 눈물을 알겠냐만은 
기적 소리만은 기적소리만은
내 마음 알고 갔겠지
 <기적소리만> 
진남성 작사·작곡, 배성 노래, 1972, 오아시스레코드

 

 

내가 태어난 달동네, 대구 비산동
대구역에서 중앙로를 달려 ’청라언덕역‘으로 간다. ‘대구전철3호선’을 탄다. 무인경전철은 거의 시내버스 수준으로 섰다 달렸다를 반복하며 서문시장, 달성공원, 북구청역을 지난다. 이제 고가레일 위에서 바라보는, 해 지는 대구의 풍경 속에 내 안태(安胎) 고향 유년의 대구가 있다. 6·25전쟁에 징집되어 가평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해방호’ 병원 열차를 타고 후송되어 의병제대를 맞은 선친은 낯선 땅 대구에 정착한다. 잠잘 곳이 없어 파티마병원 신축공사장 톱밥 속에서 잠을 청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의 아득한 전설이다. 
대구 비산동 산언덕에서 태어난 내가 공동우물 옆에서 놀다 동촌비행장 쌕쌕이(전투기) 소리에 놀라 밑이 뚫린 내복 사이로 물똥을 쌌다는 그곳이 지금은 어딘지 모르겠다. 산언덕 판잣집에서 달성공원이 서쪽으로 비스듬히 보였다고 어머니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버지는 타관으로 떠돌고, 포터블 축음기와 SP 판 몇 장과 빅타 레코드의 철제 통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유성기 바늘 묶음을 내게 남겼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노래, 그래도 아버지는 분명 유행가를 즐기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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