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화천

강원도 화천
‘파로호’와 ‘비목’의 그곳 
‘화천’ 하면 여전히 최전방, 산간오지의 느낌이 강하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화천이 더욱 각별한 것은, 전쟁 중 최대의 승전인 용문산전투에서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을 여기까지 밀어붙여 파로호에서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에서 파로호(破虜湖)가 되었고 중국은 아직도 이 이름이 치욕스럽다. 무명용사의 초라한 무덤을 테마로 한 가곡 ‘비목’의 현장도 파로호 상류 어느 골짜기다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된다. 6·25전쟁은 남북한만의 전쟁이 아니고 자유진영에는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참전했고 공산진영에는 중공군이 개입한, 사실상의 국제전이다. 이 전쟁에 UN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국 패배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한국군은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초기부터 정말 잘 싸웠다. 내나라를 지킨다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몇 차례나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승전이 용문산전투다. 전투는 중공군의 파상 공세를 방어하면서 시작됐으나 역습에 성공하면서 중공군을 60km나 추격해 화천 파로호에서 드디어 끝을 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6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을 흔적도 없이 궤멸시켰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 벼르고 벼르던 이곳 ‘파로호’를 찾아왔다.

‘결사’의 기백으로 거둔 대역전승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병법서를 꼽자면 단연 <손자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에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것이다. 
피치 못하게 싸워야 할 때 이기는 데도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세(勢)’이고 또 하나는 ‘절(節)’이다. 세는 기세이며 물리적인 힘보다 정신적인 사기·의욕으로서 세가 강하면 병사들이 용감해져 실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절(節)’은 독수리처럼 빠른 속도로 사냥감을 단숨에 채가는 힘을 말하는데, 전투 시에 적의 약점을 잘 포착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빠르고 정확하게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다. 활을 당기는 게 세라면 활시위에서 놓는 것이 절이다.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6·25전쟁에서 가장 큰 승전인 용문산전투도 바로 이 경우다. 
1951년 5월 17일 용문산을 지키고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앞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이 몰려왔다. 원래 이곳은 전투의 주저항선이 아니고 보조저항선이어서 6사단은 약간의 전투를 치르면서 전술상 후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악착같이 진지를 사수했다. 6사단은 모든 병사가 철모에 ‘결사(決死)’라는 글귀를 적고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 방어를 했다. 그러자 이곳을 주저항선이라고 착각한 중공군은 모든 부대를 용문산에 투입한다. 중공군의 공격은 5일간 쉴 틈 없이 계속 되었지만 끝내 실패하면서 점점 예기가 무뎌지고 피로가 쌓이게 되었다. 우습게 보았던 한국군에게서 처음 접하는 강력한 방어였던 것이다. 
5월 21일, 드디어 공격하던 중공군의 기세가 떨어져 공격을 포기하려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6사단 7연대와 19연대 2개 연대가 적의 후면으로 과감하게 우회 역습을 시작했다. 당황한 중공군은 마구 퇴각했고 국군은 방어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과감한 추격전을 시작했다. 모든 편제가 무너져 버린 중공군을 계속 몰아붙였고 가평을 지나 춘천, 화천까지 일거에 밀고 갔다. 이때 중공군은 길까지 잘못 들어 양평에서 60km나 떨어진 파로호까지 쫓겨나 마침내 퇴로가 완전 차단됐다. 추격하던 6사단은 퇴로가 막혀 우왕좌왕하던 중공군의 후미를 그대로 들이쳤고 갈 곳이 없어진 적군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일부는 파로호를 맨몸으로 건너다 익사하기까지 했다. 

파로호 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   
전투가 끝나고 전과를 확인해보니 중공군 사망자가 1만7천명, 포로는 2천명이었다. 6·25전쟁에서 사망한 중공군이 총 11만8천명인데 이 한 번의 전투에서 무려 10%가 죽은 것이다. 그 막강한 중공군 3개 사단, 즉 1개 군단이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바로 우리 국군 6사단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때 아군의 손실은 단 107명에 불과해 이 전투를 현대판 살수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이 바로 결사사수 하겠다는 ‘세’였고 적의 공격이 둔화되는 시점을 잘 파악했다가 역습에 나선 ‘절’이었다. 이 승전소식에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이곳을 방문해 호수의 이름을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의미의 ‘파로호(破虜湖)’라고 바꾸고 휘호를 썼다. 이 전사를 처음 읽었을 때 큰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길에서 휴가라도 나온 청성부대 6사단 병사를 보면 용돈이라도 주고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당시 파로호에 빠져 죽은 중공군의 시체가 너무 많아 호수 주위에 사는 주민들은 전쟁 후 10년 이상이나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비위가 상할 것 같아 여기서는 자세히 쓰지 않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파로호라는 이름에 대해 중국정부는 2018년에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이 터무니없고 오만한 내정간섭에 주민과 국민 대부분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파로호는 일제 때 전기발전을 위해 북한강 협곡을 막아 만든 화천댐으로 생겨난 호수다. 만수 때 수면 넓이가 38.2㎢이며 저수용량은 10억톤의 큰 호수다. 원래 이름은 화천저수지였고 위에서 보면 대붕(大鵬)이 날개를 펼친 모습을 닮았다고 대붕호라고도 불렸다. 

 

전쟁 내내 최전선이었던 곳   
화천에 들어서서 처음 간 곳은 파로호전망대다.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파로호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로호는 흔히 생각하던 둥근 형태의 호수가 아니다. 강을 막아서 생긴 호수여서 강 모양 그대로 길고 복잡한 형태다. 70여년 전 여기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당시 중공군이 하도 많이 죽어 피로 물든 호수 물빛이 빨간색일 정도였다는데 지금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오늘따라 날이 무척이나 화창하다. 파란 하늘과 파란 호수가 잘 어울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다. 잔잔한 호수에는 그 아픔을 이제는 다 잊었다는 듯이 신록의 산그림자가 아름답게 비친다. 한참을 머물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 이곳이 바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역사의 현장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파로호안보전시관이 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파로호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화천군은 38선이 걸쳐져 있는 지역이라 전쟁 전에 상당 부분이 북한땅이었고 지금도 휴전선이 있는 접경지역이다. 따라서 전쟁초기부터 종전 때까지 계속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화천댐전투, 사창리전투,용문산전투… 나중에는 치열한 고지전까지. 우리나라 어느 한 곳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데는 없겠지만 화천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지역일 것이다. 그 많은 전투의 한가운데 있던 주민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보관 앞에는 희생주민들을 위로하는 ‘자유수호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그 아픔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을 했다. 
전시관에서 나와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라고 쓴 친필 휘호를 기념한 파로호비에 들렸다. 파로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대승을 자랑하듯 당당하게 서 있다. 파로호(破虜湖)라는 글씨와 함께 6사단 마크가 각인되어 있다. 정말 자랑스럽다. 

물에 뜬 폰툰교  
파로호를 떠나 붕어섬으로 향했다. 붕어섬은 춘천댐이 저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섬이 된 곳인데 위에서 보면 정말 붕어 같이 생겼다. 다리가 연결되어 차로 들어갈 수 있고 유원지로 조성되어 각종 수상 놀이기구와 짚라인을 즐길 수 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방문한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다. 
붕어섬에서 나오면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폰툰교라는 부교가 놓여 있다(pontoon은 부교의 뜻). 자전거를 타고 직접 건너가 본다. 강물 바로 위에 떠 있는 부교를 자전거로 건너가는 것은 처음이다. 특이한 경험이다. 다리폭이 좁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잘못하면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이곳 강물의 흐름은 아주 느려서 고여 있는 물 같다. 덕분에 수상스포츠를 많이 즐기는 듯하고 오늘도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여유롭다. 카약을 취미로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자전거가 하체운동이면 카약은 상체운동이니 서로 보완이 되지 않을까. 이곳에 와서 두 가지를 함께 하면 아주 좋을 듯하다.

눈개승마 비빔밥 
아침 일찍 출발해 왔는데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요즘 여행기를 쓰면서 새로운 곳에 갈 때면 늘 그 지역 특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게 작은 즐거움이다. 오늘 화천에서도 특이한 곳을 미리 찾아냈다. 그중 하나가 눈개승마 비빔밥으로 유명한 삼나물 식당이다. 
‘눈개승마’라는 식물은 조금 생소할 것이다. 눈개승마는 우리나라 고산지의 반그늘이나 음지에 자생하며 7월경에 솜 같은 흰색의 꽃이 예쁘게 피어나 관상용으로 재배하고 어린잎은 식용으로 사용한다. 눈개승마는 ‘눈을 뚫고 올라오는 산나물’이라는 의미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화천군에서는 북한강의 흙탕물을 줄이고 지역 특산물도 육성하기 위해 눈개승마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대부분은 도시로 출하하고 지역에서는 몇 군데 식당에서 삼나물비빔밥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다. 인삼·두릅·고기 3가지 맛이 난다고 해서 ‘삼나물’이라고 한다. 건강에도 좋아 고혈압 등 심혈관질환과 감기몸살, 해열, 피로회복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 삼나물비빔밥을 주문해 아주 맛나게 잘 먹었다. 맛이 약간 쌉쌀해서 인삼을 먹는 느낌이기도 했다.

붐어섬으로 진입하는 붕어섬다리. 작은 하중도인 붕어섬은 유원지로 꾸며져 있다

 

기구한 다리, 구만교 
맛난 점심을 먹고 평화의 댐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지도에서 본 미륵바위에 잠시 들렸다. 이곳의 명소라고 하는데… 글쎄다. 미륵바위를 바로 앞에 두고 어디가 미륵바위지? 하고 찾을 정도였다. 다시 보니 약간 특이한 형태의 작은 바위가 6개 모여 있다.  
북한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보니 강 건너에 특이한 길이 있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길래 가 보았다. 강위에 놓인 부교로 만든 나무길로 이름이 ‘숲으로 다리’다. <칼의 노래>를 쓴 작가 김훈이 지은 이름인데 숲속 길로 진입한다는 의미란다.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과 푸른 산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길은 자전거로도 갈 수 있고 걸어서도 갈 수 있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함께 걸으면 더 화목해질 것 같다. 
다시 강을 따라 올라가면 특이한 느낌의 다리 구만교가 나온다. 다리는 기초, 교각, 상판으로 구성되는데 기초는 일제 때 일본이 만들었고 교각은 북한이 만들었다. 6·25전쟁 전에는 이곳이 북한지역이어서 그랬다. 상판은 수복 후에 한국에서 만든, 특이한 사연을 가진 다리다. 그 내력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니 마치 다리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기구한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래요?”하면서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한 맺힌 역사의 현장이다. 식민시대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한마디로 함축한 다리의 이야기다. 구만교 옆에는 해병대의 전투전공비가 있다. 해병대도 이곳 화천전투 때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구만교를 지나니 지방문화재인 ‘꺼먹다리’가 까맣게 걸려 있다. 꺼먹다리는 상판에 콜타르를 칠해서 검은 색이라 붙은 이름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상당히 운치가 있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평화의 댐 단상   
꺼먹다리를 지나면 화천군에서 운영하는 ‘토속민물고기 전시관’이 있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휴관이다. 화천의 자랑인 산천어가 전시되어 있다는데 못 보고 가니 조금 서운하다. 화천군은 겨울이 되면 산천어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아주 유명해서 전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와서 즐긴다. 외국인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산천어는 별도의 어종은 아니고 바다로 가지 않고 그냥 육지호수나 하천에 눌러 앉은 송어를 말한다.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는데 맛이 괜찮다.
이제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평화의 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다는 해산터널(길이 1.9km)을 지나면 해산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니 눈앞에 높은 산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마치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멀리 아래쪽에는 북한강 줄기가 아주 작게 보인다. 
전망대에서 나와 몇 개의 작은 터널을 지나면 드디어 평화의 댐이다. 댐을 지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댐은 높이 125m, 길이 615m의 엄청난 규모다. 자전거를 타고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주변에 평화의 종 공원, 평화아트전시관, 물문화원, 비목공원 등 의미 있고 볼만한 시설이 모여 있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금강산댐 수공에 대비해 국민의 성금으로 건설한 댐이다. 1989년에 1단계 공사가 완공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계속 보강공사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소양강댐, 충주댐에 이어 3번째로 큰 댐이다. 건설 당시에 “과잉대응이다”, 심지어는 “대국민 사기다”같은 악평도 있었지만 건설 후에 실제로 몇 차례나 일어난 북한 금강산댐의 기습 방류와 호우에 훌륭하게 대응해 제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평화의 댐은 저수량이 26억톤으로 파로호의 2배에 달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평소에는 저수하지 않는 건류댐이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준비해두면 위기가 닥쳤을 때 잘 써먹는다는 의미보다는 준비해두면 위기가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좋다. 이렇게 큰 댐을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북한도 수공을 포기한 게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당연한 게 없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도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이 댐의 이름이 왜 평화의 댐인지 이제 알겠다.

 

가곡 ‘비목’의 현장  
댐 근처에 비목공원이 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라는 가곡의 그 비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이 노래는 1960년대 후반 이곳 상류의 백암산계곡에서 군복무를 한 한명희라는 청년장교가 순찰 도중에 녹슨 철모와 이끼 낀 돌무덤을 보고는 무덤의 주인공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애절한 마음으로 ‘비목’이라는 시를 지었고 나중에 장일남 씨가 곡을 붙여 만든 가곡이다. 70년대 중반에 많이 애창되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슬프고 애절한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군 시절에 전방에 근무했었는데 진지 작업을 하느라 땅을 파면 가끔 녹슨 철모와 탄피 등이 나왔다. 그럴 때면 이 노래가 생각났고 나도 지은이와 비슷한 감상에 빠지곤 했다. 공원에는 별다른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고 비목위에 녹슨 철모를 올려놓은 전시물과 기념탑만 있지만 ‘비목’이라는 노래의 애절함을 느끼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평화의 종 공원에는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모은 탄피로 만든 평화의 종이 있다. 종의 무게는 1만관(37.5톤)인데 지금은 거기서 1관을 분리하여 날개 모양의 용뉴를 만들어 종 앞에 전시해 놓았다. 이 용뉴는 통일이 되는 날에 부착한다고 한다. 그런 날이 꼭 오면 좋겠다. 통일이 안 된다 해도 평화롭고 자유롭게 왕래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평화의 종은 500원을 내면 직접 타종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은 6·25 참전국인 에티오피아 빈민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정말 잘 생각한 일이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타종은 못한단다. 꼭 해보고 싶었는데…  코로나가 참 여러 가지를 어렵게 만든다.
댐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평화아트파크가 나온다. 이곳에는 예전에 사용했던 탱크로 설치예술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다양한 색깔로 꾸며놓은 탱크를 보니 왠지 섬뜩했다. 역시 전쟁무기라는 것은 존재의 목적 자체가 살상이다 보니 아무리 예쁘게 치장해 놓아도 그 섬뜩한 느낌은 없애지 못하는 것 같다. 불현듯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은 아기돼지삼형제 생각이 났다. 아기돼지삼형제의 엄마를 잡아먹은 늑대가 이번에는 엄마 옷으로 분장하고는 자기가 엄마라며 문을 열라고 말하는 광경이 컬러풀한 탱크와 겹쳐졌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무기는 무기일 뿐이다”라는 의미였을까? 부디 이 탱크 같은 무기들이 영원히 실전에 사용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댐 아래에서 바라본 평화의 댐 중간에는 트릭아트가 있다. 가운데가 뚫려 있고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그림인데 그림의 이름이 ‘평화로 가는 길’이란다. 마음이 애잔해졌다. 전쟁과 평화! 전쟁이 있었기에 평화의 소중함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화(戰禍)를 이겨낸 사람들 
날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갈 길이 멀어 이제 출발해야 한다. 어두워가는 해산령을 다시 넘어 오면서 오늘 여행을 정리해보았다. 오늘은 70년 전에 우리가 겪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게 목적이었다. 그 전쟁의 한가운데 있던 한 지역이 그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직접 피부로 느껴보는 것이었다. 
화천은 높은 산과 물밖에 없는 접경지역이다. 제대로 된 특산물도 없었지만 지금은 훌륭하게 발전해서 철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직접 와서 보니 이곳 주민들과 공무원들이 오랜 시간동안 애를 많이 쓴 흔적이 느껴진다. 여름에는 토마토 축제, 겨울에는 산천어 축제 등 다양한 행사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비목문화제, 쪽배축제 등 작은 도시에서 참 많은 행사를 한다. 정말 열심히들 살고 있다. 어느 곳을 가나 시설물들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화천은 전쟁의 아픔과 시련을 슬기롭게 잘 극복한 것 같다. 오늘 화천에 너무 잘 왔다.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다. 볼 곳도 많고 느낄 곳도 많다. 화천여행은 대만족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화천 토마토는 정말 맛있다. 이곳은 일교차가 전국에서 가장 커서 과일의 당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 한번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인격과 국격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격이 있다. 인격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만드는 것도 아니다. 살면서 크고 작은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넘어설 때마다 마음과 영혼에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것이 바로 인격이다.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응하고 교훈이라 생각할 때마다 좋은 인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도 국격이 있다. 전쟁, 재난 등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민들이 합심해서 잘 극복함에 따라 나라에는 좋은 국격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되고 불과 5년만에 6·25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피해도 컸지만 좋은 이웃들의 도움과 스스로 피나는 노력으로 시련을 잘 극복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뤄냈고 이제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이러면서 우리에게는 좋은 국격이 생긴 듯하다. 그러니 이후에 많은 시련이 닥쳐도 잘 극복해낸 것 아니겠나?  IMF와 금융위기 그리고 이번 신종코로나 사태까지 훌륭한 대처로 그 국격을 잘 보여주었다. 앞으로 어떤 시련에 닥쳐도 우리는 잘 대응하고 이겨낼 것이다.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는 하되 그 사실은 잊지 않고, 받은 은혜는 끝까지 갚는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에게 누가 아픔을 주었는지,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잘 생각해서 보답해야할 것은 확실하게 보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파로호에서 시작한 오늘의 화천여행은 알차고 보람 있었다. 토마토가 맛있게 익는 7월에 꼭 다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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