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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에 뜬 달반야월과 불후의 사모곡 ‘비 나리는 고모령’대중가요의 골목길(16)대구2

팔공산에 뜬 달 반야월과 불후의 사모곡 ‘비 나리는 고모령’
역질이 돌아도 나무에 새순은 돋고, 신록은 유폐된 우리를 불러낸다. 대구의 근대문화가 시작된 낙동강 사문진 나루에도 미루나무는 손을 잘게 흔든다. 이제 대구의 외곽을 더듬어 가요의 흔적을 따라간다. 능금꽃이 지천으로 피던 벌판은 이제는 추억 속에나 남아 있는 사과의 고장이다. 대구를 분지로 만든 팔공산 아래 반야월을 거쳐 
<비 내리는 고모령>의 무대로 돌아오는 한 바퀴, ‘대구에 노래가 없다’는 말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코로나19’, 노래가 위안이다

뜻밖의 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인질로 삼은 지 반년이 되어 간다. 계획은 헝클어지고 유폐된 시간 속에서 지쳐가고 있어도 꽃향기는 스며들고, 신록은 날 보란 듯이 짙어간다. 연전에 ‘한국의 강둑길’ 여행을 하며 만났던 낙동강으로 간다. 낙동강은 한반도의 종심을 훑어 내리지만 대구를 동쪽에다 두고 만곡(彎曲)한다. 금호강이 횡선이고 낙동강이 종선을 이루는 오른쪽이 대구다. 이른 아침부터 사문진 나루터로 발길을 재촉한다.
 
우리나라 첫 피아노가 들어온 ‘사문진 나루’
사문진은 낙동강이 금호강물을 강정고령보에서 넘겨받아 당겨진 활처럼 굽이치는 언저리에 있는 나루터다.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와 달성군 화원면을 잇는 곳에 1993년 사문진교가 놓였다. 물류창고인 ‘화원창’과 왜인들의 물건 창고인 ‘왜물고’가 있었으니 1940년대까지는 낙동강 주운(舟運)의 중요 거점이자 대구의 관문이었다. 사문진 나루의 상징은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대구로 부임하는 미국 선교사 사이드 보텀과 함께 낙동강을 따라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물건이 내는 소리에 ‘귀신통’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수군거렸다.
최근 유키 구라모토(倉本裕基)와 김동규가 협연한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의 현장이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수령 500년의 팽나무 아래에는 ‘나루깡’이라는 장터가 열려 주로 농산물을 거래하기도 했고, 홍수가 지면 나무에 배를 묶어놓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이젠 역사가 된, 우리나라 무성극영화 최고의 걸작 <임자 없는 나룻배>의 촬영지가 사문진이다. 1932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영화의 감독이 대구 출신 이규환이다. 한 농부(나운규)가 도회로 나가 인력거꾼이 되고 억울한 옥살이 끝에 아내는 바람이 나버리고, 딸과 함께 낙향해 뱃사공이 된다. 딸을 능욕한 다리 건설기술자에게 항의하다 열차에 치여 죽는 주인공과 화재로 사망하는 딸(문예봉),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임자 없는 나룻배’는 향토색과 저항정신이 어우러져 이 민족의 숙명을 상징한다고 평한다. 변사의 눈물 빼는 솜씨가 더해져야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의 리얼리즘 영화다.
2013년 4대강 사업으로 없어질 뻔한 사문진의 흔적을 달성군이 옛 나루의 정취를 살려 ‘사문진 주막촌’을 만들어 놓았다. 이 또한 세월의 이끼가 덮이면 유적이 되리라. 
사문진에 옛노래는 없다. <시계바늘> <잠자는 공주> 등을 부른 신유가 2016년 출반한 <사문진 나루터>와 2018년 <곰배령>의 조은성이 부른 <사문진 나루>가 있다. 떠나간 연인, 님 실은 나룻배를 기다리는 마음은 강과 나룻배가 주는 보편적 소재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신유는 가수였던 부모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누나 부대’로 불리는 아줌마 팬을 몰고 다니는 트로트계의 아이돌이다.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활동도 다양해 뮤지컬 출연에다 걸그룹 여친과 콜라보 무대까지 가질 정도로 흥행의 조건은 다 갖췄다. 재능만큼 가수로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신웅이 음반제작자로 나서면서 아들의 뒤를 밀어주고 있으니 복 많은 아버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루터야 나루터야 사문진 나루터야
낙동강 굽이돌며 속삭이는 물소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움에 젖게 하네
나루터에 정을 두고 떠나버린 사람아
보고픈 내 마음을 알고 있겠지
바람에 밀려갔나 안개에 가려있나
사문진 나루터에 님 실은 나룻배가 
다시 올까 기다려지네
(2절 반복)
<사문진 나루터>
곽치근 작사, 신 웅 작곡, 신 유 노래, 2016

 

사과밭이 떠나간 달구벌 고향,  패티김의 <능금꽃 피는 고향>
천내천 둑방을 달려 대구지하철 1호선 종점 설화명곡역으로 향한다. 대구 교통의 중심지 반월당을 지나가는 1호선의 동쪽 끝은 안심역이다. 공교롭게도 옛노래의 사연들이 우선 1호선 언저리에 남아 있다. 
이름도 예쁜 ‘아양교’ 역에서 내린다. 옛 대구선 열차가 지나가던 아양교는 수명을 다한 다리를 보행전용교로 만들면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옮겨온 듯한 컨셉트로 금호강 한 가운데에 쉼터를 마련했다. 세계의 다리와 영화 속 다리를 조명해 보는 ‘디지털 다리박물관’이 잠시 쉬어가라 한다. 다리 끝에 노래비 하나가 보인다. <능금꽃 피는 고향> 노래비다. 이 노래는 1971년 길옥윤 작사 작곡으로 패티김이 부른 대구의 애향가이자 서울의 찬가 복사판이다. 행진곡만큼이나 밝고 씩씩하게 부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부산·대전·목포 같은 도시처럼 ‘대구’ 하면 이 노래다, 하고 딱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는 반증이다. 부산갈매기가, 남행열차가 자연스럽게 한 도시의 응원가로 자연스럽게 매김한 것과 달리 설계된 대구의 응원가다. 
사과밭의 북방이동은 청송을 시작으로 문경·영주·영월 심지어 휴전선 아래 양구까지 자연스럽게 서늘한 기운을 찾아 올라갔다. 그 자리에는 대추밭이 들어서거나 도시로 개발되어버렸다.
능금이란 단어는 사과에 밀려났다. 신맛이 강한 능금이 재래종이고, 단맛이 기기묘묘한 사과는 외래종이다. 에덴동산에 등장한 금단의 열매는 여러 품종으로 개량되어 여전히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한입 덥석 베어 문 사과 ‘애플’ 역시 디지털 지구촌을 지배하는 상징이 되었다.
2013년 노래비 제막식에는 작곡자 길옥윤과 친분 있던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초청해 패티김이 직접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능금꽃 향기로운 내 고향 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해 뜨는 거리
그대와 나 여기서 꿈을 꾸었네 
아름답고 정다운 꿈을 꾸었네
둘이서 걸어가는 희망의 거리 
능금꽃 피고 지는 사랑의 거리
대구는 내 고향 정다운 내 고향

끝없는 그리움을 말하여 주는
금호강 푸른 물은 흘러만 가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가도 
사모하는 마음은 변치 않으리
둘이서 걸어가는 희망의 거리
능금꽃 피고 지는 사랑의 거리
대구는 내 고향 정다운 내 고향
<능금꽃 피는 고향> 
길옥윤 작사·작곡, 패티김 노래, 1971, 신세기레코드


배호의 맺지 못한 인연, 대구아가씨 옥이 <능금빛 순정>
아양교에서 동쪽으로 옛 대구선의 동촌역이 있다. 지금은 국제공항으로 된 대구공항은 원래 군사용 비행장 K-2뿐이었다. 동촌유원지도 강 건너로 마주 보고 있다. 배호의 흔적이 여기도 있다. 68년, 69년 영남일보가 주최하는 제2~3회 서라벌가요대상 최우수남자 가수상을 연거푸 타게 된 배호는 동촌카바레의 골든타임에 이른바 ‘두 탕’을 뛸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돌아가는 삼각지>의 인기몰이에 개런티가 이미자를 웃돌았다고 전한다. 
배호의 목에 화환을 걸어주며 팬심으로 다가온 처녀, 동인동 청수장에 묵고 있는 동안 ‘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장님 딸 여대생과 밀애도 즐겼지만 1970년의 배호는 이미 병세가 깊었다. 약혼녀라고 주위에 소개하던 그녀는 배호가 이후 몸이 급격히 나빠졌을 때는 은행까지 그만두고 상경해서 극진히 그의 곁을 지켰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나와 있으면 네가 불행하다”며 억지로 정을 떼며 준 마지막 선물이 배호가 손에 차고 있던 은장의 고급시계 ‘파텍스’였다고 한다. 
손을 잇고 싶었던 배호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도 사라져 버렸다. 영관장교였던 형부의 손에 이끌려 떠나간 그녀, 그야말로 두 사람은 능금빛 순정이었다. 배호의 히트곡 상당수를 작곡한 배상태는 두 사람을 머리속에 두고 음율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천천히 달려가는 철길 옆으로 사과밭이 도열해 있던 동촌, 사과꽃이 손 흔드는 방촌, 둔산 대구는 없다.

사랑을 따려거든 손짓을 해요
말 못 할 순정은 빨간 능금알
수줍어 수줍어 고개 숙이다
조용히 불러주는 능금빛 순정

사랑을 따려거든 손짓을 해요
꽃바람 지며는 빨간 능금알
외로워 외로워 눈물 흘리다
말없이 떨어지는 능금빛 순정 
<능금빛 순정> 
조흥열 작사, 배상태 작곡, 배호 노래, 1969, 아세아레코드
 

반야월이 없는 반야월, 그래도 <공산명월>
동촌에서 반야월로 가는 길은 금호강을 따라 난 자전거길을 즐기면 된다. 강의 모퉁이를 두 번 돌고 나면 지하철 1호선 반야월역이다. 찾아가는 목적지 반야월역이 아니다. 옛 대구선 반야월역이 옮겨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다. 지금은 안심읍 한가운데가 된 옛 철길의 노반은 더러는 택지가 되고 공원부지로도 남아 있어 반야월 시장 부근에 있던 구 반야월역에서 1km 동쪽으로 옛 건물을 옮겨지었다. 
눈 밝은 독자는 눈치를 챘겠지만 ‘반야월(半夜月)’이라는 그 이름에 홀려서 애써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옛노래에 명멸하는 별들 가운데 작사가 반야월을 빼놓고는 한국대중가요사의  징검다리를 건너갈 수가 없다. 반야월이라는 지명 이야기로 우선 돌아가 보자. 
대구사람들이 조산(祖山)으로 여기는 팔공산에서 비롯된다.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공산에서 후일 태조가 되는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한 판 붙는다. 간신히 살아남은 왕건이 황황히 패주하는 밤길을 그마다 비춰주며 길잡이를 해 준 달이 ‘반야월(半夜月)’이다. 이에 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장수가 전사한 패전을 새기며 공산동수(公山桐藪)라는 산 이름도 ‘팔공산(八公山)’으로 바뀐다. 반야월이 팔공산의 달이었기에 대구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 이름도 ‘반월당’으로 지었을 것이다. 불운의 연속일까, 1937년 연달아 생긴 화재로 보잘것없는 상가로 운영되다 1981년 철거되고 말았다. 건물도 사람도 다 가고 나도 이름만은 남아 반월당은 대구교통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다. 뱅뱅 청바지는 한물갔어도 서울의 뱅뱅사거리가 여전히 살아있듯이….
그럼 반야월 선생은 왜 ‘반야월’이라는 예명을 가수 진방남보다, 본명 박창오보다 더 애착을 가졌을까. 육성으로 남긴 사연을 인용한다.
“나는 종종 왜 ‘반야월’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수로 따져도 절반이라 50점에 머무는 ‘반쪽 인생’이다. 그래서 100점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인생은 반에 기준을 두고 있지 않느냐. 죽느냐, 사느냐, 행복하냐, 불행하냐 이 모두가 반반이다. 달도 온달이 되면 기울게 마련이고 반달은 둥근 달이 되기 위해 게으름을 피울 틈이 없다. 밤하늘에 뜬 새파란 반달은 칼날같이 날카롭다. 반면 과년한 여인의 버들눈썹처럼 다정다감한 데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름값을 한 모양인지 반월과 같은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이름풀이 마따나 뭐 하나 잘났다 할 게 없다. 가만히 바라보는 손바닥에 내가 앓았던 인생의 시름만큼 잔주름이 많다.” 달관한 인생관이 묻어나는 대가다운 작명의 변이다.
역시 코로나로 닫혀 있는 ‘반야월역 작은도서관’ 참, 아쉽다. 옛 역사의 박공지붕을 살려 이축하리만치 애착을 가진, 어쩌면 근대문화유산에 들 수도 있는 건물이 도서관이라는 용도로 쓰이기에는 아쉽다. 적어도 반야월의 스토리텔링을 손에 잡히도록 하는 데 대중가요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 건물은 ‘반야월옛가요박물관’으로 특화되어 다시 만들면 좋겠다. 반야월 선생 생전에 제천시가 박달재에 ‘반야월가요박물관’을 만들려고 자료까지 기증받았다가 흐지부지된 바가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진짜 ‘반야월’이 안심읍에 살아 있지 않는가. 
이동순 시인의 꿈처럼 동성로의 오리엔트레코드와 대구의 노래, 반야월의 노래가 있는 반야월역, <비 내리는 고모령>이 있는 고모역이 서민의 노래로 이어가는 ‘대중가요탐방코스’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화투장에 등장하여 우리를 즐겁게 하는 공산명월의 가치는 허공(空)에 걸린 달이요, 사위(四圍)에 교교한 만월의 향연이다. 연모의 정으로 달을 보며 눈물짓던 반야월의 노래로 잠시 쉬어간다. 

공산명월 밝은 달아 님의 사창에 비친 달아
님 홀로서 누었드냐 사서삼경을 읊었드냐
날개 있는 기러기면 날아서라도 가련만은
어이 나는 긴긴밤을 님 그리며 눈물 짓나

야월 삼경 달도 지네 후유 한숨이 절로 난다
들창밖에 낙엽소리 장장 추야를 어이 할까
이별 이자 왜 생겨서 일천 간장을 태우는가
나도 언제 님을 만나 눈물 없이 살아보나
<공산명월> 
반야월 작사, 배상태 작곡, 김세레나 노래, 1968, 아세아레코드

 

노래의 가치보다 덜 알려진 가수, 방운아의 경산   <마음의 자유천지>
반야월에서 금호강을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면 경산 땅이다. 대구선이 선형개량을 하면서 경부선 대구 외곽에서 갈라져 나오고, 고속철도가 교차하면서 만든 고가와 철로 노반이 기하학적 조형미를 선사한다. 경산 남매공원을 찾아간다. 대중가요를 좀 안다 해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 가수 ‘방운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남매공원은 경산시 동쪽의 남매저수지에 만든 공원이다. 3km 남짓한 둘레는 이미 도시공원이 되어 제대로 된 허파 역을 하는 곳이다.
경산시보건소 뒷마당에 방운아의 노래비가 있다. 가수 방운아를 좀 더 살펴본다. 본명 방창만(1930~2005), 방태원이라는 이름으로 된 앨범도 발견된다. 경산에서 태어나 난리통인 1951년 오리엔트 전속 가수 콩쿠르에 입상하여 가수가 된다. <일등병 일기>   <해운대 엘레지> <오백년 고려성> <나룻터 고향길> <여수야화>, 영화주제가 <한 많은 청춘> <두 남매>가 있으나 역시 대표곡은 <마음의 자유천지>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첫 소절을 들어보면 “아하!” 하는 노래다. 
대구를 떠난 방운아는 부산에서 작곡가 백영호를 만나면서 운명의 인생곡 <마음의 자유천지>를 부르게 된다.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유명한 노래 <봄날은 간다>를 작사한 손로원의 노랫말이다. 물질보다 삶의 평화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는 철학에서 출발한 노래다. 당연히 생과 사의 갈림길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전쟁세대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된 곡조였다.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흙냄새 땀이 젖은 베적삼만 못하더라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속에
내 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세상을 살 수 있는 황금을 준다 해도 
보리밭 갈아주는 얼룩소만 못하더라
희망에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 속애
내 맘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마음의 자유천지> 
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방운아 노래, 1955, 빅토리아레코드

음악을 전공한 딸에게 이 노래를 분석해 보라고 했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옛노래가 그에게 어떤 느낌으로 와닿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멜로디의 첫 음인 저음 라(A)에서 이 곡의 2/4박을 모두 채우고 한 마디를 넘어가기도 전에 첫음보다 8도 높은 한 옥타브 위의 라(A)음으로의 급격한 도약은 현대 대중가요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기법 중 하나다. 왜냐하면 성악적 발성법을 사용하는 가수들이 흔치 않고 대중가요로 부르기에 불편할 수 있음에도 방운아는 자연스럽게 마디마디 연결되는 도약들을 부드럽게 이어받고 있다. 음폭이 좁은 저음에서의 2도, 3도 등으로 진행되는 선율의 흐름 또한 건조하지 않을 뿐더러 특유의 음색은 매우 경쾌하면서도 그 울림의 깊이가 남다르다. 특히, 잘게 움직이다가 90마디에 이르러 급격한 저음으로 받아 내리는 음정 또한 흔들림 없는 것을 보면 저음, 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폭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91마디의 마지막 음정 미(E)에서 다음 마디 라(A)음으로 가는 하향도약은 라장조의 이 곡이 가진 밝은 멜로디 선율과는 대조적인 단조풍의 낯선 저음으로 잠시 떨어져 조바꿈의 착각이 들 정도다. 노래 부르기에 조금은 불편한 음정의 조합이지만 방운아는 명쾌한 음색과 한이 서린 듯 풍부하고 편안한 비브라토로 곡을 마무리하여 이 곡의 매력을 더한다.”
 
놀랍게도 음감의 느낌을 문장으로 표현해도 내 귀에 와닿는 노래 그대로 생생하다. 이동순 교수가 <가수 방운아와 한국가요사>란 주제의 책을 낼 정도로 애착을 갖는 것도 대구라는 공간적 연대감도 있겠지만 애환의 공감도 큰 몫을 차지한다. 방운아는 모두 122곡밖에 남기지 않은 과작(寡作)이지만 남인수류 창법의 옛 가요 문법을 그대로 따르는 마지막 세대였다. 자료사진을 보면 <마음의 자유천지>가 새겨진 노래비 뒤로 대나무숲이 우거졌었는데 나중에 들어선 보건소를 위해 다 잘려나가 대머리가 되고 말았다. 대중문화에 대한 조금의 배려라도 있었더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되돌아보는 영마루의 어머니 그 절절한 사모곡, <비 내리는 고모령>
경산 시내를 빠져나와 ‘고모로길’로 언덕을 넘는다. 이내 ‘고모역’이다. 붉은 벽돌에 박공 지붕형태는 간이역의 기본적인 설계다. 코로나로 접근을 막아놓았지만 들여다보이는 안은 <비 내리는 고모령>의 컨셉트에 맞게 정비한 배치가 눈에 들어온다. ‘고모역복합문화공간’으로 별도 관리를 받고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의 대표곡이다. ‘KBS 가요무대’에서 많이 불린 순위로도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백난아)>에 이어 3위에 기록되어 있다. 인기 극작가 유호가 ‘호동아’라는 이름으로 작사하고, 밀양 권번집 아들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는 꺾기가 없어도 옛가요가 이렇게 절절할 수 있다는 것을 들려준다. 기타로 대중가요를 배우는 사람들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이 노래의 멜로디다. 전주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모정의 애상으로 빠져들 준비를 저절로 하게 된다.
고모역 정문에는 시인 박해수의 <고모역> 시비가 서 있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고 했다. 문인수의 <고모역 낮달>은 아들이 떠나간 뒤 희멀겋게 넋이 반쯤 나간 낮달이 어머니 얼굴을 하고 있다. 역 구내에는 대구로 피난 나와 있던 시인 구상의 시비<고모역>이 기다린다. “38 이북에 두고 온, 생사조차 모르는 어머니가 고모역까지 나와 기다리신다”고 절절한 사모(思母)를 시로 새겼다.
고모령에 얽힌 전설은 고모령의 유명세만큼이나 형제간의 재산 다툼 등 몇 가지 버전이 존재하지만 독립운동에 연루된 아들 형제 버전이 제일 그럴듯하다. 일제 때 경산지역에 아들 형제를 키운 홀어머니가 살았는데 형제가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늘 면회를 하고 해 질 무렵 돌아왔는데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고개를 내려가면 볼 수 없는 아들 생각에 석양을 뒤로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보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고모역에 붙어 있다.
고모(顧母)는 되돌아 볼 고(顧), 어미 모(母)다. 대부분의 해설은 어머니가 되돌아보면서 눈물 흘리는 주어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되돌아보는 주체는 어머니가 아니라 먼 길 떠나는 아들이다. 징용이든 학병이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아들이 노랫말의 첫 소절처럼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아들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못 볼지 모르는 어머니의 얼굴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며 눈물 흘리는 사모곡이다. 어머니가 되돌아볼 리가 없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져 눈물을 흘릴 뿐이지 먼저 되돌아갈 리가 없는 존재 아닌가. 아들을 태운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서서히 먼 산모롱이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할 존재다.
그리 보면 김용임이 다시 부르는 이미자의 노래    <모정>은 애간장 녹는 어머니가 주어이고, 태진아가 목청을 찢어가며 부르는 <사모곡>은 어매 품을 그리는 헌사이자 주름진 어머니가 목적어다.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는 고모역에서도 다시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가야 하는 동촌유원지 초입 ‘만촌체육공원’에 세워져 있다. 모든 노래는 노래 속 그 배경에 그대로 서서 부르거나 들어야 제맛이 난다. 이동순 시인이 충무 바다 뱃전에서 들은 이미자의 <삼백리 한려수도>를 오래도록 가슴에 안고 사는 것처럼.
노래비에 달린 재생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거의 빈사 직전처럼 작게 들려 현인 특유의 노래 맛을 느끼기에 부족하다. 그 한구석에 조그만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29세 청년인 한국일보 기자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취재하다가 그만 열차에 치어 순직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비문이라 더욱 슬프다. 이럴 때 유튜브는 유용하다. 스페인 밀레니합창단이 부르는 <비 내리는 고모령>을 다시 들어본다. 푸른 눈의 서양인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합창하는 옛 가요는 이미 명곡의 반열에 들어선 때문일까, 단조의 선율 속에 더 애틋하다. SP판 자락 3절에 숨어있던 망향의 시적 감흥이 눈물에 가려 더욱 아롱거린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래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빡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 본다 망향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현 인 노래, 1949, 럭키레코드

 

이 노래 한 곡으로 주름진 어머니 얼굴과 거친 손을 생각한다.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부질없는 사랑도 아득하기는 매 한가지, 침 묻혀 적어가는 설운 사연 ‘부모님 전상서’ 위에 떨어지는 눈물도 처마 밑 장명등 아래 흐릿하다. 나훈아든 장사익이든, 이미자든 주현미든 버전 나름대로 맛이 각기 다른 노래지만 그래도 현인이 “비나리는”이라고 떨듯이 부르는 고모령이야말로 흑백필름에 담겨 오래도록 불려질 자격이 충분한 원전(原典)이자 한 시대의 풍경이다. 

 

 

 


조용연 편집위원  choy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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