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한반도 10배 땅을 헐값에 판 이유는

역사적 부동산 급매물 빅딜
나폴레옹이 한반도 10배 땅을 헐값에 판 이유는

영토는 꼭 전쟁을 통해서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동산 거래처럼 영토가 매매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도 작은 땅이 아니라 한반도의 10배에 달하는 거대한 땅덩이도 정략적으로 거래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온 급매물은 역사를 요동치게 만든다

지난 달 글의 분량이 넘쳐 절반만 책자에 게재되고 전체분량은 인터넷 판으로 실리는 바람에 ‘동원력’에 관하여 뭔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기분이 들어 이를 조금 언급하고 이달 이야기로 들어가고자 한다.
언제부턴가 필자는 대단한 학자도 아니면서 ‘경제력’과 ‘동원력’을 구분하는 버릇이 생겼다. 자라온 과정에서 분명히 절약을 통한 저축이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경제측면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는 데서 상당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동원력의 구분 
굳이 ‘경제력’과 ‘동원력’을 구분하자면,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라고나 할까? 하지만 대차대조표마저도 금융부문과 자산의 평가부문 때문에 진정한 구분이 못될 것 같다. 좀 더 현실적으로 구분하자면, 평소처럼 화폐가 제구실을 하는 사회생활 측면과 전란이나 재난 등으로 화폐가 제구실을 못할 때의 자연생존 측면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면 금전적 가치에 집착한 게 경제력이요, 물질적 수량에 집착한 게 동원력이라고 구분이 된다. 
사실, 금융의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조성되어야 부가가치의 흐름을 통한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지만, 그조차도 금융에 상응하여 환가해줄 실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금융은 게임에 불과하다. 언제 어디서나 실제로 사용하는 현물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시스템에 의하여 동원력에다 금융적 부가가치라는 거품을 입힌 것을 경제력으로 불 수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북한보다 경제력이 50배라고는 하나 동원력으로는 10배가 안 된다. 이때 5배의 거품이 우리사회의 경제체제가 제공하는 부가가치라고 봐야 한다. 이 얼마나 풍성한 분배체제인가. 
 
동원력과 영토의 관계 
사실 대립하고 있는 적국의 경제력과 동원력 중에 정작 무엇을 가지고 겁내는지 생각해보면, 동원력은 경제력보다 군사력에 더 가깝다. 이는 냉전기간 동안 소련보다 경제력이 월등했던 영국이 소련에 대하여 국력의 우위를 내세울 수 없었던 데서 드러난다. 바로 소련의 동원력 때문이다. 광대한 영토에서 우러난 자원 때문에 생긴 동원력 말이다. 
이렇게 필자가 동원력을 강조하다보니 궁극에는 동원력의 생산지인 영토문제가 나오게 되는데, 국가의 동원력은 대개 국토의 크기와 비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동원조건에 맞는 조화가 있어야 크기에 상응한 동원력을 생산해낸다. 그러한 조화를 창출할 촉매는 지리적 위치, 지형적 특성, 기후적 특성, 인구의 크기와 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때문에 국가는 큰 영토를 탐내다가도 때로는 작은 지점을 탐내기도 한다. 그래서 영토의 변경에는 나름의 셈법을 따로 지니기 마련이다. 

 영토 변경이 부동산 거래?
이러한 셈법으로 빚어진 영토의 변경사례 중 일부를 필자는 부동산 거래로 보고 싶다. 영토문제는 그 변화과정이 국가 간의 전쟁에 의한 것이 대부분인데, 역사적 영토변경을 부동산 거래로 결부시킨 재미난 얘기는 더위 속에 집착할만한 흥미꺼리가 아닐까 한다. 전쟁이 아닌 국가 간의 부동산 거래 측면에서 생겨난 재미난 사례를 짚어보고 한번 쯤 달리 생각해볼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렇게 동원력의 뿌리인 영토와 관련지어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즈음 각종 세제변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동산의 관점으로 영토를 한번 바라보자.   
 
일본 땅 팔면 미국 땅 5.6번 산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극에 달하던 80~90년대 초에 회자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일본 땅을 팔면 미국 전 영토를 5.6번 살 수 있으며, 남한 땅을 팔면 미국 본토의 70%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일본 땅 귀퉁이만 조금 떼다 팔아도 캐나다나 호주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심지어 페루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본계 이민인 후지모리의 경우, 그의 일본 고향사람들이 동네의 자투리 땅 팔아서 조성해준 당선축하금만 해도 페루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기서 물어보자. 만일, 그 시절에 일본 땅 1㎢와 캐나다 땅 1㎢ 중 어느 땅을 살 것인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일본 땅을 살 것이다. 왜냐하면 매매가 빠르고 시세도 잘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짜로 줄 테니까 일본 땅 전체와 캐나다 땅 전체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캐나다 땅 가격이 일본 땅 가격의 2%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도, 캐나다 땅은 일본 같은 나라 27개를 세울 수 있는 크기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시작   
황망한 가정에서 벗어나 이젠 거래를 통한 영토변경의 실례를 보자. 먼저, 양키 동네 뉴욕에 대해서 알아본다. 
원래 뉴욕은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선장인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이 네덜란드 정부의 지시를 받아, 유럽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네시아로 가는 기나긴 뱃길을 단축시키는 동북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하다 오늘날의 허드슨 강을 발견했다. 1614년 모피무역을 위해 네덜란드가 맨해튼 남단에 식민지를 세운 이후 유럽인의 정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624년 이후 맨해튼 섬을 중심으로 항구적 식민지가 되었다. 1626년에는 지금 돈으로 약 24달러에 원주민으로부터 섬을 구입하고, 포트 암스테르담 요새가 세워지면서, 이 식민지는 나중에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불리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영국 동인도회사를 능가하여 아시아로부터의 부를 독점하게 되자 영국은 네덜란드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고, 네덜란드가 차지한 뉴암스테르담에 영국이 눈독을 들이면서 영란전쟁(英蘭戰爭,1852)이 발발한다. 1664년 뉴암스테르담은 마침내 영국에 점령되었고, 당시 영국 왕 제임스 2세(요크 공)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요크’라는 뜻으로 뉴욕이라 개칭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식민지 쟁탈전이라고 보면 되겠으나, 네덜란드가 빈손으로 순순히 물러서지 않은데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25만 파운드에 팔린 도시  
1650년경에 남미 가이아나 지역의 수리남강 서쪽에 영국인이 사탕수수와 담배농장을 세우면서 오늘날 파라마리보(Paramaribo)라고 알려진 정착지를 건설하고 영국령 가이아나가 생겨났다. 이곳에는 영국인 외에도 네덜란드, 포르투갈,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이주해왔는데, 영란전쟁 때 이곳에서도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영유권 분쟁이 불붙었다. 네덜란드는 영국령 가이아나를 비롯 인근의 영국 땅이던 바베이도스 섬까지 공격하면서 남미에선 네덜란드가 우세해 브레다조약(1667)을 통해 영국령 가이아나 지역은 네덜란드령으로 넘어가고 바베이도스는 영국령으로 남는다. 
네덜란드는 비록 영국령 바베이도스는 못 먹었지만, 이보다 훨씬 큰 땅인 가이아나를 전리품으로 뜯어가면서, 딴에는 선심 쓴다고 영국으로부터 돈을 조금(25만 파운드) 받고 ‘끼워 팔기’ 식으로 웨스트민스터조약(1674)을 체결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즉, 네덜란드는 영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영국의 뉴암스테르담 점령을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막 성장하기 시작한 설탕농업을 감안하면 가이아나의 경제적인 가치가 뉴암스테르담보다 더 높다는 판단 하에 내린, 나름대로 합리적인 거래로 평가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이는 세계제패의 거점을 그냥 날려버린, 네덜란드로선 씻을 수 없는 역사적 대실수였다.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바뀌고 나서도 계속 잔류하던 네덜란드인 때문에 생긴 말이 양키(Yankee)인데, 후일 미국 북동부 지방 사람에 대한 비칭(卑稱)으로 통용된다. 이 말의 어원은 영어의 존(John)에 해당하는 이름을 네덜란드어에선 얀(Jan)이라고 발음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필 네덜란드인 중에 존이 많았던 탓이리라. 

네덜란드가 처음 개척했을 당시의 뉴암스테르담. 이후 이 땅은 영국령이 되면서 뉴욕이 되었다

 

인구소국 수리남의 골칫거리  
영국령에서 네덜란드령으로 넘어간 남미 가이아나는 후일 우여곡절을 거쳐 1975년 수리남으로 바뀌는데, 요즈음 수리남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있다. 수리남의 국토면적은 16만㎢로 남한의 1.6배이나 인구는 56만 명으로 안양시 정도밖에 안 되어 남한의 91분의 1 정도다. 거기에다 최근 저유가 때문에 바람이 빠지긴 했어도 같은 인구소국인 인근의 가이아나와 더불어 해상유전의 발견으로 이를 전 국민에게 안분할 경우 엄청난 부가 보장될 것처럼 허파를 부풀렸던 나라다. 그런데 이 나라에 중국의 진출로 알게 모르게 중국인이 스며들더니 급기야는 인구의 10% 가까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리남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막대해지고 신문과 TV방송까지 운영할 정도이니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따른 위협이 남다르다고 한다. 요즈음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넘쳐나는 자국의 인구를 인구소국에 내보내어 단시일 내에 인구비중을 높게 점유하는 중국의 징그러운 수법 사례다. 

나폴레옹의 놀라운 제안 
나폴레옹의 역사적 실수, 급매물에 끼워 팔린 루이지애나에 대한 이야기.
미국은 1776년 독립 후 1800년대 초까지 영토가 미시시피 강을 넘지 못했다. 독립한지 얼마 안 된 것도 있지만, 초기의 인구를 감안하더라도 미시시피 강 건너 로키산맥 너머 태평양까지 진출할 비전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대 대통령인 제퍼슨에 이르러 사태의 발단이 전개된다. 
미시시피 강 동부에만 한정된 당시 미국 영토의 특성상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농산물을 동쪽으로 운반하려면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열악한 도로와 약탈 때문에 육로로 운반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래서 천연내륙수로인 미시시피 강을 이용해 바다로 나가서 동부로 운반하는 것이 더 용이했는데, 문제는 미시시피 강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땅이 ‘루이지애나’라는 프랑스령이고, 미시시피 강 하구의 뉴올리언스를 통과할 때는 통행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가자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1,500만 달러를 상한액으로 책정해 로버트 리빙스턴과 제임스 먼로를 사절단으로 보내 뉴올리언스를 사도록 나폴레옹과 협상하게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한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놀랄 만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매각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선 뉴올리언스라는 포구 한 군데 구입할 돈으로 루이지애나라는 큰 땅을 매입하니 속으론 기뻐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는데, 나폴레옹에게도 그만한 사정은 있었다. 이전 프랑스 왕조가 미국 독립을 지원하느라 소요된 전비로 인한 재정악화와 군비확보 문제, 게다가 카리브 해의 아이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루이지애나는 원래 프랑스 땅이었다가 스페인에게 빼앗겼다가(1763) 나폴레옹의 협박(1800)으로 다시 프랑스 땅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이 팔지 않을 경우 영국이나 스페인에게 빼앗겨 결국에는 프랑스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겉으론 쓸데없는 땅을 팔아버리고 군비를 확보하자는 생각이었지만, 속으론 원격지에서 미국을 영국과 대립시켜   영국의 위상을 누그러뜨리려는 심산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제안을 들은 사절단은 나폴레옹이 그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그 대신 나폴레옹은 “의회비준과 대금지불까지 6개월의 시한을 주겠다”고 못 박았는데, 시일이 흐름에 따라 나폴레옹이 번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첩보가 파리에서 날아들자 제퍼슨은 천신만고의 노력과 용기로 의회를 설득하고 대금을 마련하여 1803년 말 마침내 인계받게 된다. 
 
한반도 10배의 땅이 겨우 1500만 달러 
사실 땅을 파는 나폴레옹도, 땅을 사는 제퍼슨 그 누구도 전체 루이지애나가 얼마나 큰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후에 제퍼슨이 루이스-클라크 탐사대(48명)를 보내는 식으로 조사하여(1804~1806) 밝혀진 바로는 루이지애나는 한반도의 10배 정도(212만㎢) 되는 거대한 땅이었다. 1,500만 달러로 이 넓은 땅을 손에 넣었으니 1㎢당 단돈 7달러에 불과한 가격이었다. 그렇게 엄청나게 큰 땅이 인류역사상 가장 황당하게도 뉴올리언스라는 포구를 구입하는데 얼렁뚱땅 끼워 팔기로 팔려나간 셈이다. 중서부 대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루이지애나 획득을 계기로 본격적인 서부개척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전쟁보다는 매입에 의한 방식이 적용되어 한 세기도 안 되어 알래스카까지 매입하게 된다. 그것도 대부분 헐값에. 
어쨌든 루이지애나 획득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해 팍스 아메리카( Pax-America)라는 비전을 펼칠 생각은 아예 못하고 남미의 고만고만한 나라들처럼 존재가 부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의 실수 혹은 미래 전략?
후일 사가(史家)들은 장기적 측면에서 나폴레옹의 경솔함을 지적하는데, 옳은 말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전쟁으로 힘들게 점령한 땅보다 스페인을 협박해서 얻은 더 큰 땅을 잃었으니, 유럽에서 좁은 땅 가지고 다투느라 얼쩡대다가 먼 곳의 큰 땅을 잃은 격이다. 단기적 전술과 전쟁에는 천재인지 몰라도 장기적 전략과 협상에는 둔재였던 나폴레옹의 역사적 대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유일한 해안선인 뉴올리언스가 남에게 넘어가면 루이지애나는 바다로 통할 길이 없는 맹지가 되고, 그의 의도대로 미국의 급부상으로 영국과 스페인의 위세가 눌려 이후 프랑스가 최소한 영국과 스페인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았던 점에서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다. 
재미난 것은 역사적 급매물 빅딜에는 급전이 필요한데, 꼭 그때마다 약방의 감초로 등장하는 것이 유태인 자본이다. 루이지애나 매입 때도 유태인 자본이 한몫 끼어들었다고 한다. 
최근 미국은 조이 플로이드 사망에 따른 BLM(Black Lives Matter) 폭동 때문에 인종주의에 대한 혐오가 범람하는데, 그들 측면에서 보면 위대한 제퍼슨도 흑인노예의 성 착취를 이유로 증오의 대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인종차원이 아닌 국가차원에서, 그리고 부동산 거래 역사 차원에서는 엄청난 위업을 이룬 인물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급매물로 나온 수에즈 운하 
또 하나의 흥미꺼리, 이번엔 인공물인 수에즈운하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들 운하는 근대의 서양의 산물로 생각할지 모르나 고대에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굳이 중국 수나라의 대운하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인 춘추시대 말기에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삼강오호(三江五湖)를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했고, 이집트에도 홍해와 지중해 구간을 잇는 운하가 있었다. 홍해의 수에즈 만에서 나일 강으로 연결하는 이스메일리 운하(일명 파라오 운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퇴적된 침니로 인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때부터 이스메일리 운하와 다르게 나일 강을 거치지 않고 홍해와 지중해를 곧바로 관통하는 수에즈운하(Suez Canal)를 구상하게 되는데,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이집트 주재 프랑스 외교관인 페르드낭 드 레셉스였다. 영국의 경제적 지배와 오스만투르크의 정치적 지배 하의 이집트에서 힘겹게 공사 허가를 얻고 1859년 4월 25일 포트사이드(Port Said)에서 기공식을 한 지 10년의 공사기간 동안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운하가 시작되는 포트사이드에서 1869년 11월17일 호화로운 준공식이 열렸다. 수에즈 지협 164㎞를 관통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함으로써 세계 항해사의 판도를 바꾸어버린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것이다. 
수에즈 운하가 이런 인류사적 위업임에도 불구하고 운영초기부터 어려움에 처한다. 건설비가 당초 계획보다 두 배나 늘어난 데다 운하 이용 선박수가 처음엔 기대치 이하였기에 화려한 개통식이 끝난 후, 프랑스 차관에 의존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집트는 곧바로 재정난에 봉착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보불전쟁)에 패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갚아야 할 처지였다. 이런 프랑스에 대해 이집트는 운하의 지분 44%를 담보로 돈을 빌릴 계획을 제시했으니, 먹힐 턱이 없었다.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차지한 세기의 거래   
결국 이집트 총독은 유태인 재벌인 영국인 로스차일드(Rothchild)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를 눈치 챈 당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이집트 총독의 제의를 가로채 영국 정부와 로스차일드 사이에 대출계약을 맺어 1875년에 그 돈으로 이집트 국가소유의 수에즈운하회사 주식지분을 매입함으로써 명실 공히 수에즈운하는 영국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수에즈는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 프랑스가 작전에서 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영국은 난국에 처한 이집트 상황을 틈타 1876년에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렸고 이집트는 지긋지긋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사실, 영국은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가 갖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개통하고 보니 준공 몇 년 내에 운하를 사용한 배의 4분의 3이 영국 배였고, 식민지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통치하기도 수월해졌다. 또 통행료를 점점 인상하는데 대한 불만과 운하가 언제 막힐지 알 수 없는 불안이 누적된 데서 기회를 노리다가 유태인 자본을 동원해 하루 만에 대금을 지급하고 성취한 쾌거다. 
그후 이집트와 영국 간에는 수많은 독립투쟁이 있었고 후일에는 이집트 나세르 정부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 등 우여곡절도 겪지만, 어쨌든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차지한‘ 영국의 수에즈 운하의 지분 매입과정은 ‘세계사적 부동산 급매물 빅딜’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식민지 진출에 눈엣가시 같은 수에즈 운하를 급매물로 내놓은 것을 프랑스가 보불전쟁 배상금 때문에 신속히 조치하지 못하고 뜸 들이다 날려버린 역사적 대실수이기도 하다. 
여기에 운하관련 재미난 용어 추가하자면, 수에즈막스(Suez-Max), 파나막스(Panamax) 같은 용어가 있는데, 그냥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를 지나는 선박의 최대크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린란드와 미국  
지면 때문에 알래스카, 연해주, 간도, 대마도, 독도, 아이슬란드, 미크로네시아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며, 최근 트럼프 미 대통령이 뜬금없이 언급하는 그린란드에 대해 짧게 보태보자.
그린란드는 210만㎢ 면적에 인구 5.6만으로 거의 무주공산인데, 공식적으론 덴마크 땅이다. 요즈음 북경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과 미국발 BLM(Black Lives Matter) 폭동 뉴스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작년(2019)부터 미국이 그린란드 매입을 노린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미국은 덴마크와의 우방관계 때문에 이미 냉전시기부터 그린란드에 군사시설을 구축해 소련(러시아)의 핵미사일 방어 전초기지로 활용했는데, 최근 중국이 그린란드 자원개발에 진출하면서 땅 매입을 노리다가 미국의 강력한 제지로 주춤하고 있다. 
미국이라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알래스카 스토리처럼 부동산 거래 방식으로 구입하길 원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조지 프리드먼의 미래예측에 따르면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은 캐나다의 앨버타 주가 캐나다로부터 떨어져 나와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시작으로 야금야금 캐나다가 미국에 합병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셰일가스와 석유 때문에 상황이 바뀌어서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린란드는 몇 년 전에도 미국 합병에 관한 소식이 짧은 해외토픽기사로 간간이 들려왔다. 천연자원 같은 경제적 문제도 있겠지만, 어쩌면 오랫동안 빙하 속에 조성한, 마치 UFO 기지로 착각될 만큼 엄청난 방공시설과 잠수함 기지 같은 미군시설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북극에서 미국이 러시아를 감제하는데 최선봉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린란드에 중국의 공작에 넘어간 덴마크 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중공군 군사기지가 들어선다면 미국의 기분은 어떨까? 덴마크 정부의 태도를 항상 초미의 관심사로 관리하기가 쉬운 일일까?
미국 입장에서의 해결방법은 그린란드를 덴마크 지배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우방이라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고, 돈 주고 구입하려해도 값을 후려칠만한 대공황 같은 계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린란드를 덴마크로부터 독립시키고 이를 미국에 합병하는 건데, 그것은 바로 주민투표다. 땅을 매입하느라 덴마크 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주민을 매수하는 게 훨씬 싸게 먹힐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이 어떤 선택지를 구사할지는 모르겠다. 

청나라 채권은 중국이 갚아야?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 간의 분쟁에서 결말은 영토변경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토의 크기로 국력을 가늠하며, 영토의 위치로 전략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토변경이 꼭 거대한 전면전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위에서 예를 든 부동산거래 형식보다는 소규모 교전이나 협박․공갈로 이루어진 사례도 많고, 종종 채권을 동원한 협박․공갈 기법도 있었다. 
의화단의 난 평정으로 청나라의 영토가 조차지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식민지화 된 사례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한일합방도 그렇듯 전면전보다는 왕실 관련 소규모 교전과 위협으로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히틀러가 체코와․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때는 총알 한방 안 쏘고 협박과 공갈이라는 평화적(?) 수단을 활용한 사례도 있는데, 아무래도 뒤가 좀 구린 측면이 있다.
최근 미국에서 발견된 100년 전 청나라 채권을 두고 청나라 때 떼어간 홍콩을 현재의 중국이 받았다면 청나라 때의 국채도 현재의 중국이 보상해야 한다는 논리로 금전적 보상을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어차피 중국이 돈을 안 줄 테니 땅으로 받자는 소리도 나온다. 이는 국토의 일부를 떼이면 영원히 직접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전략적 맥락을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국이 아이슬란드에 채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언제 은근슬쩍 들이밀지 모르는 공갈용 저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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