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의 골목길(17) 서산 태안

대중가요의  골목길(17) 서산 태안
포구의 서정 <서산갯마을>과  해변가요제의 고향 ‘연포’
서산과 태안은 바닷가 모두가 갯마을이다. 오랫동안 궁금했다. 조미미의 명곡 <서산 갯마을>의 무대가 어디였을까. 이름도 어여쁜 가로림만(加露林灣) 작은 포구 왕산포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학암포도 만리포도 십수 년 전의 기름 범벅에서 부활했다. 온 국민의 노력으로, 성원으로 다시 돌아온 갯마을 풍경, 똑딱선이 기적을 울리며 바다를 가로질러 인천으로 가던 서산 사람들의 향수도 불러 세운다. 단 한번으로 끝난 ‘제1회 해변가요제’가 열렸던 연포바다에서 여름날의 사랑을 복원시켜보는 일은 그 또한 바닷바람에 어울리는 삽상(颯爽)한 회고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서산 갯마을>의 무대
올여름이 유난히 더울 거라는 예보는 코로나에 갇힌 마음을 더 달군다. 그래도 이럴 땐 바다다. 차가운 동해도 좋지만 갯내음이 풍기는 서해의 해수욕장은 갯마을의 삶이 가까이 있어 더 발길이 간다. 
서산과 태안으로 행선을 정한 것은 순전히 조미미 노래의 역할이 8할이다. 지리에 웬만큼 밝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왕산포에 <서산 갯마을> 노래비가 있다니 찾아가지 않을 수 없다. 휴일에도 간간이 바다낚시를 하러 온 몇 사람만 보일 뿐 한산하다. 물때가 맞지 않아 바닷일을 못 나간 몇 사람이 점방 앞에 앉아 막걸리로 낮 술잔을 나누고 있다. 노래비 뒤 언덕 정자에서 바라보는 가로림만은 잔잔한 바다의 서정이 파노라마다. 정자에서 서산 갯마을 노래를 들으며 바라보는 반짝이는 물비늘은 ‘윤슬’이란 곱고 단아한 이름만큼이나 정겹다. 
<서산 갯마을>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31개 항·포구를 지닌 서산 태안이니 어디든 서산 갯마을일텐데…. 노랫말 속 ‘요놈의 풍랑이 사나운’ 바다는 가로림만의 내해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태안을 빼놓고 서산의 바다에서 찾다 보니 왕산포가 적지였으리라.
1965년 동아방송 ‘가요백일장’을 통해 <떠나온 목포항>으로 데뷔한 조미미가 서해에서 <서산 갯마을>을 부른 것은 절묘하다. 노래비의 연고로만 봐도 경주 동해바다에 <바다가 육지라면>까지 세워지면서 그녀의 바다의 가요 연작(連作)은 큰 틀을 완성한다.
갯마을의 고단한 삶이 표현된 노래에는 갯마을 처녀의 소망이 살짝 드러난다. “잔잔한 바다로 출어해 만선의 깃발이라도 올려야 시집이라도 갈 수 있을텐데” 하는 갯마을 처녀의 안타까움이다. 사나운 바다만 바라봐야 하는 어부의 한숨과 아낙네들 오지랖은 자신의 눈물만을 닦는 도구가 아니다. 새끼들 콧물까지 닦아주는 앞치마의 남루가 어미의 정과 범벅이 되는 풍경이 그려진다. 이 노래보다 4년 앞서 남미랑의 <서산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었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고, 조미미는 서산 갯마을의 속편처럼 1971년 <갯마을 처녀>(정진성 작사·곡, 오아시스레코드)로 그 시대 아가씨들의 이별 구조를 판박이한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된다.
2010년 서산 갯마을 노래비가 왕산포에 세워지고, ‘왕산포 노래자랑’이 열린 2014년부터는 ‘서산갯마을뻘낙지 먹물축제’까지 열리면서 서산 갯마을의 이미지는 구체화 된다.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눈이오나 비가 오나 서산 갯마을
쪼름한 바다바람 한도 많은데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아낙네들 오지랖이 마를 날이 없구나
<서산 갯마을> 
김운하 작사, 김학송 작곡, 조미미 노래, 1969, 성음제작소

 

태안의 북쪽 끝 학암포
이제 태안군의 서북단에 있는 학암포로 향한다. 거기도 서산·태안판 ‘아가씨’ 시리즈의 노래가 있다. 왕산포에서 학암포만 가려 해도 40km를 훌쩍 넘는다. 가로림만 바닥을 긁듯이 돌아서 가야 한다. 사실 가로림만은 서산 갯벌의 절정이다. 개발신화 신봉자들은 항아리 같은 바다의 거센 조수를 가만두지 않았다. 태안군 이원면 만대와 서산시 대산읍 벌말 사이 2km의 호리병 주둥이를 막아 조력발전소 건립 청사진을 띄웠다. 20대의 조력 발전기가 돌아 친환경 전기를 생산한다는 계획은 실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맞바꾼다는 속내는 감춘 일이었다. 동네의 여론은 찬반으로 갈라지고 진도는 안 나가고, 공사비는 눈덩이로 불어나는 속에 2017년 해양수산부가 조력발전소 건설고시를 백지화하면서 가로림만은 살아남았다. 
가로림만 해안선 162km에는 항아리 모양의 8000ha 바다 속에 4개의 섬이 있고 팔봉면 소속의 고파도는 구도항에서 여객선이 운행한다. 구도항은 인천으로 연락선이 오가던 포구였다. 일제 때는 경찰주재소가 설치될 만큼 주요한 목이었다. 서산·태안 사람들이 인천을 가려면 홍성을 거쳐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종일 가야 하는 길이지만 똑딱선일망정 바닷길은 질러간다. 느림보 칠복호는 7시간이 걸렸고, 엔진 성능이 좋은 은하호로는 4시간이면 인천역 근처 고철하역부두 근처에 닿을 수 있었다. 인천에서 국회의원이나 구청장이라도 꿈꾸는 사람들은 인천 인구의 3할도 더 된다는 ‘충남향우회’에 밉보여서는 곤란하다는 말도 거기서 생겨났다
학암포는 지금은 작은 어항이지만 얕은 수심에 갯벌체험과 해수욕을 겸할 수 있어 관광지가 되어있다. 과거에 중국과 질그릇을 교역하던 분점(盆店)포구가 원래 이름이다. 1968년 해수욕장을 개장하면서 용낭굴 위에 있는 학모양의 바위 이름을 따서 학암포라 개명하고 촌스러운 옛 이름을 버렸다. “할아버지의 꿈속에 날아온 학이 깨어보니 바위가 되어있더라”는 전설도 한몫하며 속닥한 휴양해변이 되었다. 
강혜란이 부른 <학암포 아가씨>는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늙어버렸다. 순전히 타이밍을 잘못 골랐다. 여러 가수의 여러 곡이 담겨 있는 컴필레이션판 B면 맨 끝에 자리 잡았는데 A면 첫 곡이 하필이면 조미미의 <서산 갯마을>이었다. 솔직히 노래의 순도라는 면에서도 비견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사든 작곡이든 ‘한큐’에 와 닿는 그 무엇이 부족한, 기다리는 ‘아가씨 시리즈’의 일부일 뿐이다.

잔잔한 학암포에 노을이 지면
돌아오는 고동소리 부푸는 가슴
갈매기도 그리워서 날아드는데
그대는 아시나요 그대는 아시나요
오늘도 학암포에 기다리는 순정을

정다운 학암포에 노을이 지면
반겨주는 파도소리 구슬픈 사연
해당화도 못잊어서 다시 피는데
그대는 잊었나요 그대는 잊었나요
그리운 학암포에 기다리는 순정을
 <학암포 아가씨> 
이병수 작사, 심형섭 작곡, 강혜란 노래, 1969, 성음제작소

 

 

기름범벅의 기억, 만리포 앞바다 그리고 <만리포 사랑>
학암포를 나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사구가 있는 신두리를 잠깐 들렸다 만리포로 향한다. 뇌단층 촬영을 해놓은 듯한 태안의 해안선은 그 길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돌출과 함몰을 거듭한다. 넓기도 넓은 땅이다. 육로로 가는 것은 더 그렇다. 원래 서산과 태안은 각기 나뉘어 읍성을 가졌지만 오래도록 한 몸처럼 여겨졌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보든 토끼로 보든 앉은 자세로 보면 넓적다리를 곧추세운 관절 마디에 해당하는 곳이다. 근세에 와서는 서산군 서부출장소가 태안에 설치된 것만 봐도 서산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만리포해수욕장은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의 대표적인 여름철 관광지다.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는 원래 연조 깊은 포구였다. 이 항구도 중국과 연관이 있다. 조선 세종조 안흥항으로 입항하려다 바다가 사나워 천리포 막동으로 들어온 중국 사신들이 귀국할 때 풍광이 좋은 만리포에서 전송받길 원했는데 맹사성이 ‘수중만리(水中萬里) 무사항해(無事航海)’라고 송사(送辭)를 한데서 이곳을 ‘만리장벌’이라 했다는 유래다. 1955년 소원면장 박노익의 노력으로 ‘만리포해수욕장’이 생기고, 1956년에는 전란 직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만리포-인천 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었으며, 여름철에는 인천-제주 간 여객선이 만리포에 들렀다 가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만리포를 널리 알린 공은 노래 한 곡, 1958년에 발표한 박경원의 <만리포 사랑>이다. 노래비는 해수욕장 초입에 멀뚱하니 서있다. 명랑·쾌활한 가사와 곡조에도 불구하고 K-pop의 리드미컬한 볼륨에 묻혀 맥을 못 춘다. 널리 알려진 명소답게 외국인 오토바이 여행자들까지 코로나에 갇혔던 몸과 마음을 다시 충전한다. 
<만리포 사랑>은 6·25 전란 후의 가난한 삶 속에서도 낭만을 찾는 청춘의 여름날 포토그라피다. 똑딱선을 타고 찾는 만리포의 출발 역시 인천항이다. 인천과 서산의 바다 건너 지리적 인연이 만든 항로는 인천 출신 가수 박경원의 연고감도 한몫한다. 박경원은 사실 <이별의 인천항>과 <만리포 사랑>이 양대 히트곡이나 마찬가지다. 박경원의 노래는 슬픔을 털어내듯이 이별마저도 경쾌한 곡조다. 만리포 사랑의 작곡자가 김교성인 것은 콩쿠르 대왕인 그가 을지로 계림극장에서 ‘전국남녀 가요콩쿠르대회’를 열 때 동국대 경제과 2학년생이던 박경원이 1등 당선된 인연과 맥이 닿는다. 노랫말 가운데서 ‘점찍은 작은 섬을 도는 구십리 뱃길’이 안흥항인지 학암포 기점인지 웬만큼 지리감에 밝은 나로서도 도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반야월 선생이 안 계시니 여쭤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그립고 안타까워 울던 밤아 안녕히
희망의 꽃구름도 둥실둥실 춤춘다

점찍은 작은 섬을 굽이굽이 돌아서 
구십리 뱃길 위에 은비늘이 곱구나
그대와 마주 앉아 불러보는 샹~송
노젓는 뱃사공도 벙실벙실 웃는다
<만리포 사랑>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경원 노래, 1958, 센추리레코드

 

만리포의 또 하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한 ‘태안 원유유출사고’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이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를 들이받으면서 원유가 쏟아져 내린 국내 최악의 해양오염사고다. 2007년 12월 7일 아침, 만리포 해상 5마일 지점에서였다. 마침 그 시각에 나는 충남경찰청장으로서 초대를 받아 공주 마곡사 주지 진산식(취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대통령선거 막바지라 이명박 후보도 참석해 요사채로 자리를 옮겨 공양 자리에서 이재오 전 의원과 마주해 숟가락을 드는 순간 “만리포 앞바다에 기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1차 보고가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해를 구하고 시냇가에 엔진을 끄지 않고 있던 헬기를 돌려 만리포로 향했다. 
만리포 앞바다는 해무가 잡고 있었다. 해상 5마일, 조종사에게 그래도 나가보자고 했다. 바다 위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 충돌위험은 없다 했다. 안개가 걷히고 바다 위에 뜬 거대한 유조선에서 그야말로 콸콸 기름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긴급히 출동한 해경정도 속수무책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헬기 위에서 눌렀다. 현장은 해경 관할이었지만 만리포는 충남경찰청 구역이었다. 해경청장보다 현장에 더 먼저 달려갔을 터이다. 굳이 안개 속을 뚫고 가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해경이나 기상청은 쏟아진 원유가 해안 쪽으로 붙는데 1주일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일펜스를 넘어선 새카만 원유, 그 찐득한 화석의 잔해가 만리포 인근 해역부터 덮기 시작했다. 이틀반 만에 북으로는 가로림만 입구까지 남으로는 신진도, 안흥항 근처까지 달라붙었다. 2007년의 마지막 날에는 전남 영광해안에서까지 원유 타르가 발견되었으니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10년 아니, 수십 년이 지나도 바다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 속에 전국에서 자원봉사의 행렬이 이어졌다. ‘제2의 금모으기’처럼. 행정력이 모자라 자원봉사 지원자의 구역을 배당하는 일도 순조롭지 못했다. 정작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열정의 자원봉사였지만 원유 냄새가 코를 찔러 마스크를 써도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띵해져 찬 공기를 쐬고 쉬어가며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검은 타르의 해안을 배경으로 하얀 방재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홍보물을 뿌려야 하는 대권주자와 종자의 행렬이 밀려들었다. 정작 경찰의 고민은 편도 1차로 도로의 차량 통제와 소통이었다. 그야말로 초기 한 달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나도 팔자에 없이 무려 24일간을 대전에서 만리포로 헬기 출퇴근을 했다. 계룡산 근처를 지날 때 에어포켓에서 툭툭 떨어지는 기체의 두려움도 나중에는 익숙해져 코를 골며 달게 잘 정도였다. 그때 과로로 복용하기 시작한 고혈압약은 이제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일일이 몽돌과 바위를 닦은 정성은 빠른 자연의 회복으로 보답이 돌아왔다. 지금 저 갈매기 노니는 금모래 은모래의 바다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잠들어 있다.

 

‘해변가요제’의 고향, 연포 해수욕장
만리포에서 마지막 답사지 연포로 가는 길은 태안반도의 외해 쪽이다. 태안 최대의 항구 안흥항으로 가는 길목에서 채석포로 빠진다. 채석포에서 솔숲 언덕 하나를 살짝 넘으면 또 하나의 여름 해수욕장 ‘연포’다. 노래와 관련된 연포의 역사는 제법 연조가 길다. 활처럼 휜 백사장, 그림 같은 솔섬이 쪽빛 바다와 배경을 이루고 난류의 영향으로 가장 긴 개장기간을 가진 천혜의 해수욕장이었다. 청춘의 낭만에는 어울리는 호젓함도 있어 1970년 발매된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가 딱 어울렸다. 일본곡을 번안해 작사·작곡이 불명해 대법원까지 간 끝에 재일교포 이철이 저작권자가 된 이 곡은 청춘들의 입맛에 맞았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를 부르던 건전가요풍의 교과서적 낭만은 애초부터 잽이 되지 않았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느낀 불타는 그 입술”의 황홀한 자극은 ‘선데이서울’ 권중부록의 수영복 스타만큼이나 주체할 수 없는 가슴을 태웠다. 월남 간 삼촌이 사 들고 온 야외전축(야전)을 몰래 가져와 모래밭에 틀어놓고 고고, 소울에 맞춰 밤새 춤추며 이 노래도 불렀으니 캠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모래가 들어가 고장 난 야전을 들고 전파상을 전전했던 날이 그 시절 청춘의 공유기억이다. 1964년에 이미 결성되어 ‘한국의 비틀즈’를 표방했던 키보이스, 이제는 할아버지 목사님이 된 드러머 윤항기, 유희백, 옥성빈, 차도균과 조용필이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상찬한 김홍탁까지 원년의 멤버들은 자켓 속 나팔바지와 로만칼라의 멋에 ‘오빠’ 소리만 지르지 못했지 선망 그 자체였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2절 생략)
<해변으로 가요>
이철 작사·작곡, 키보이스 노래, 1970 

뭐니뭐니 해도 전국에 연포를 알린 것은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였다. 한 해 전 <MBC대학가요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TBC가 놓은 맞불이었다. 그 이전에도 1973년에 해수욕장 개장개념으로 ‘전국보컬그룹경연대회’를 열기도 했으니 전혀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1회로 끝난 해변가요제는 18세 이상이면 고졸도 참가할 수 있었다. 기성곡, 창작곡, 외국곡도 가리지 않았다. 그 다음 해부터는 가평으로 옮겨 <강변가요제>로 맥을 이었다.
해변가요제는 캠퍼스 밴드 배출의 원조격이었다. 대상은 한양대 4인조 혼성 ‘해바라기’의 <여름>이었고, 이제는 홈쇼핑에서나 볼 수 있는, 풋풋한 대학생 왕영은이 연예계로 발돋움하는 시발이 되었다. 수상자 명단에는 홍익대의 블랙테트라, 항공대의 런웨이 배철수, 휘버스의 이명훈, 벗님의 이치현까지 스타 탄생의 연포였다.
그래도 대중가요의 골목길 대주주는 트로트이니 <연포 아가씨>를 빼놓을 수 없다. 갯마을 아가씨, 학암포아가씨에 이어 ‘서산아가씨’ 완결편이다. 노래에 지명만 바꾸면 어느 바다에도 들어맞을, 기다리는 아가씨의 눈물로 얼룩진 가슴앓이가 전부다.

오늘도 님 기다리는 연포 바다엔 
쌍돛대 외돛대 배도 많은데
한 번 가신 그 님은 소식도 없고
물새만 울어 울어 세월 흐르니 야속한 생각
눈물에 젖는 눈물에 젖는 연포 아가씨

오늘도 갈매기 우는 연포 바다엔 
금모래 은모래 변함없는데
사모하는 그 님만 간 곳이 없고 
파도에 씻어가듯 세월 흐르니 그리운 정
한숨에 젖는 한숨에 젖는 연포 아가씨
<연포아가씨>
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하춘화 노래, 1972, 지구레코드

 

교회에서 만난 뜻밖의 노래 두 곡, <어머님 은혜>와 <여름 냇가>
서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하려는데 지인으로부터 ‘어머님 은혜’에 대한 동요비가 있으니 취재해 보라는 얘길 들었다. 즐거운 장르 이탈이다. 장소는 서산 시내에 있는 교회 마당이라는 것이다. 교회? 왜 교회가? 서산제일감리교회는 서산시청 건너편, 옥녀봉 자락에 있었다. 협소한 마당이라 둘러보았더니 노래비가 무려 3개나 있다. 
“나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  (<어머니 마음>,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로만 알던 가곡이 아니라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바로 그 동요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노래였다. 작사를 한 윤춘병 시인은 목사였다. 평안남도 중화 출생인 그가 1946년 월남하면서 동구 밖 노송 언덕까지 따라 나와 전송하던 어머니, “이제 가면 언제 보냐”시던 어머니의 눈물과 고향의 하늘가를 더듬으며 쓴 사모의 노래다. 이젠 어버이날의 또 하나 주제곡이 되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어머님 은혜>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1946, 국민학교 3~4학년 음악교과서

이 노래는 원래 찬송가였다. 주님의 은혜까지 노래한 3절은 종교색을 이유로 잘린 채 2절 노래만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작곡자 박재훈 또한 북한 땅 강원도 김화 태생으로 동경국제고등음악학교를 나오고 대광고 음악교사를 거쳐 숙명여대와 한양대 음대교수를 지내 1,000여곡의 찬송·성가곡을 작곡한 한국종교음악계의 거장이며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 박수근 화백의 부인 김복순 여사와 어릴 때 죽마고우였다는 인연까지 색 바랜 사진 속 인연이지만 따뜻하다. 또 하나의 동요비는 “시냇물은 졸졸졸졸…”로 시작하는 <여름 냇가>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버들가지 한들한들/ 꾀꼬리는 꾀꼴꾀꼴
금빛 옷을 차려 입고/ 여름 아씨 마중 왔다
곱게 곱게 차려 입고/ 시냇가에 빨래 왔다
<여름 냇가> 
이태선 작사, 박재훈 작곡

황해도 사리원 태생의 이태선 시인이 노랫말을 지었다. 역시 박재훈 곡이다. 두 분의 노래비가 이 서산의 한 교회 울타리에 세워진 배경은, 시차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목사가 되어 1950년대(이태선), 1960년대(윤춘병)에 각기 담임목사를 이곳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해마다 ‘이태선·윤춘병기념예술제’까지 열어 기리는 서산사람들이 다시 보인다. “펄~펄 눈이 옵니다~”로 시작하는 입에 익은 동요 <눈>까지 이태선의 작사라니 감탄이다. 
나직이 소리 내어 부르며 비석을 감상하노라니 교회담장이 더없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대중가요를 찾아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뜻밖의 위로이자 또 다른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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