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오른쪽 날개’를 꺾고 한강방어선을 지켜내다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3)
잘 알려지지 않은 ‘김포지구전투’ 
북한군 ‘오른쪽 날개’를 꺾고 한강방어선을 지켜내다
‘김포지구전투’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시 온 몸을 던져 북한군을 저지했던 장병들의 투혼과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 역시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70년 전, 설마 넘어올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한강을 북한군이 빠른 물살과 갯벌을 극복하고 건너왔다. 국군은 급하게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북한 군의 공격을 막아섰다. 그렇게 하여 김포지구전투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적을 막기 위한 진지나 장애물은 아예 없었고, 휴대한 무기도 변변찮았다. 맨몸으로 막아서서 싸우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이중철조망은 기본, 적의 도하장비가 강을 건너 육지에 닿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용치(龍齒) 장애물도 설치해 놓았다. 적의 침투・공격을 탐지・경보하고 타격할 수 있는 수단까지 통합함으로써 물샐 틈 없는 수준으로 대비하고 있다. 70년 전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와 비교하면 ‘몇 세대(G)’ 차이가 나지 싶다. 김포지구전투는 꼭 기억해야 할 전투인데 그동안 너무 모르고, 잊고 지내왔다

 

김포반도는 한강과 조강(祖江 ;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 이후의 한강 하구를 이르는 명칭), 염하(鹽河)로 둘러싸여 있다. 한강 건너 동쪽에는 고양시와 파주시가, 염하 건너 서쪽으로는 인천시 강화군이 있고, 조강 건너 북쪽은 북한 황해도 땅이다. 김포반도 건너 땅이 북한 땅이지만 남과 북을 구분하는 선은 아무 것도 없다. 대적(對敵)하고 있는 전방이지만 휴전선이 없고, 수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NLL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김포반도를 둘러싼 강들은 간・만조를 전후하여 유속이 매우 빠르고, 간조 때 형성되는 갯벌로 인해 강을 건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되던 곳이다. 김포반도 전체가 하천이라는 천연 장애물에 의해 보호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기만 하면 높은 산이 거의 없는 평야지대라, 한강 이남의 중심지 영등포나 경기도의 핵심인 수원까지 진출하기 용이한 곳이기도 하다. 

 

김포지구전투 개요
1950년 6월 25일 04시 암호명 ‘폭풍’이 하달되면서 북한군은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서 기습남침을 감행해 왔다. 북한군은 주공부대들을 서울 북방에 집중하여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위 격멸하는데 초점을 뒀다. 이와 함께 김포축선에 투입된 6사단(-)과 춘천・홍천축선에 투입된 2사단을 기동시켜 한강 이남에서 재차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한편, 국군 예비대들이 전방으로 증원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김포지구전투란,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에 상륙하기 시작한 북한군 6사단(-)과 급하게 편성된 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7월 3일 오류동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싸웠던 8일간의 전투다. 김포지구전투의 결과로 한강 이남에서 국군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반면, 국군은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6일 간 지연시킬 수 있었다.

김포지구전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김포반도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한반도 남부의 핵심 축선인 ‘경부축선’에 이를 수 있는 최단거리 접근로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한강이라는 천연적인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다. 국군은 한강 하구의 이런 지리적 여건을 너무 믿었고, 북한군의 도하 능력을 무시한 나머지 김포반도에는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북한군은 국군의 이런 ‘허점’을 노려 이곳을 뚫고 들어왔다. 
국군은 수도권 가용 부대들을 모아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히 편성했다. 후방으로부터 증원해온 부대와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온 부대들로 김포지구사를 보강하여 북한군(6사단)의 진출에 맞섰다. 

한강을 건너고 김포반도를 가로질러 서울을 향해 진격해오다
① 개전과 동시에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개성을 방어하던 국군을 추격하여, 6월 25일 저녁 한강 북쪽의 영정포・석류포에 도달해 한강 도하를 준비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면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50년 3월에 하달했던 ‘육본 작명 38호’ 어디에도 김포반도에 대한 방어계획은 아예 없었다. 김포・부평지역 일대에는 육군정보학교, 공군교육기지사령부 등의 교육기관과 육군 공병단 등의 군수지원부대 등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김포반도 너머에 북한군이 집결한다는 정보를 접한 육군본부는 김포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육・공군의 교육・군수지원부대와 개성에서 철수한 국군 12연대 2대대, 재경지역 독립 기갑연대 소속 부대 등을 통합하여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후, 김포지구사)’를 급하게 편성했다. 김포지구사는 부대 규모와 보유 화기, 방어시설 등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26일 16시경까지 한강과 염하수로 일대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배치해 북한군과 대적하기 시작했다.
② 한강 북쪽에 도착한 북한군 6사단은 25일 저녁부터 선발대를 김포반도로 침투시켜 한강 도하를 준비했다. 26일부터 한강 도하에 필요한 교두보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27일부터는 강력한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6사단 대부분의 부대들이 한강을 건너왔다. 이로 인해 국군은 통진(월곶. 문수산 남쪽 3km)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을 건너온 북한군의 규모가 증가할수록 김포지구사 부대들은 김포반도 북단으로 부터 밀리는 속도가 가속됐다. 
③ 김포지구사는 상대적 전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김포로 통하는 도로 일대의 ‘천마산・장림’(김포 북서쪽 13km. 통진읍 도사리)과 ‘운유산’(김포 북서쪽 6km. 양촌읍 석모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하지만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양곡(김포 북서쪽 9km)을 거쳐서 김포읍 방향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김포지구사 사령관(계○○ 대령)이 부하들을 버리고 전선을 이탈하는 등 김포반도의 전황이 크게 불리해졌다. 
김포반도의 상황이 악화되자, 육군본부는 서울 북방의 의정부 축선이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증원부대의 일부를 김포반도로 투입・보강해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진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T-34전차(4대)까지 도하시킨 6사단(-)은 28일 아침부터 자주포의 지원을 받으며 김포방향으로 진격해왔고, 김포읍과 김포비행장까지 점령했다.

 

한강방어선 서측방 방호의 핵심 ‘소사-오류동 방어선’ 전투
① 김포반도 후방으로 철수한 김포지구사는 천마산・장림과 운유산 방어선으로부터 철수하는 부대들을 수습해 김포비행장을 사수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진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 소사로 철수하고 말았다. 
김포지구사의 소사 철수로 인해 영등포의 서측방이 위협받게 되자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이하, 시흥지구사)’는 부대를 철수시킨 김포지구사령관을 교체하고 김포비행장 탈환을 지시했다. 김포지구사는 29일 오전에 김포비행장 탈환을 위해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소사’로 철수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시흥지구사 : 28일부 편성, 김포지구사를 통제해 한강방어선작전을 수행). 
②영등포 서쪽의 ‘소사-오류동 선’ 일대는 한강 방어선 방호와 서울-인천 간의 연결을 보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시흥지구사는 이곳 소사-오류동 선을 확실히 방어하기 위해 고양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소사 일대로 철수해 온 18연대를 김포지구사에 증원하여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게 했으나 이번의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시흥지구사는 전방으로 증원해온 제5사단(남원) 15연대(-)를 김포지구사에 추가로 증원한 후, 7월 1일 역습을 실시해 ‘소사-오류동 방어선’(107고지 춘의산, 138고지 작동산 일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인도로를 확보해 한강방어선의 서측방을 확실하게 방호할 수 있게 되었다(15연대(-)는 최초 문산 축선에 투입되었다가 김포반도로 철수. 18연대(-)는 최초 의정부축선에 투입되었다가 고양을 거쳐 김포반도로 철수). 
③ 그러나 북한군 6사단은 7월 3일, 옹진반도 전투에 참가했다가 김포반도로 복귀한 1연대를 증원시켜 전차를 앞세우고 오류동 진지를 돌파하며 영등포지역으로 진출했다(일부는 인천항 확보를 위해 인천으로 진출). 영등포로 진출한 6사단과 전차를 선두로 한강철교를 건너온 북한군 4사단이 합동작전을 전개하면서부터 한강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퇴로 차단이 우려되자 김포지구사는 시흥지구사의 명령에 따라 안양으로 철수했다. 

 

부대와 부하를 저버린 지휘관
군에 복무하는 군인들은 국방부 훈령에 의해, 각자의 신분과 맡는 직책에 따라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 중 지휘관의 책무란 것이 있다. 지휘관의 책무는 ‘지휘관은 부대의 핵심이며, 부대의 성패에 대하여 전 책임을 진다’고 명시되어 있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부대를 지휘하여야 한다’라고도 명시되어 있다.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고 서울을 향해 공격해 올 때 김포지구사 전 장병들은 온 몸을 던져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시의 김포지구사는 같은 소속의 단일 부대가 아니라, 성격을 달리하는 수많은 부대로 급하게 편성된 부대이기에 지휘체제를 확립해 전투력을 통합・발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이럴 때일수록 지휘관, 즉 사령관의 역할이 크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김포지구사령관(계○○ 대령)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강교가 폭파되고 육군본부가 후방으로 이전하는 등 전황이 불리해진 것으로 생각해 격전중인 현장을 떠난 것이다.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부대를 무단이탈했다가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김포지구사에서는, 지휘관 부재를 대리하던 부하(김포지구사 참모장)가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가 하면,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죄책감을 느낀 후임 사령관이 자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무단이탈했던 계○○ 사령관은 체포되어 중형을 언도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시 첩보요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군 당국에 의해 풀려나 ‘팔미도작전’에 투입되어 수훈을 세웠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사면 및 복권되고, 이후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근무하다 예편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이와 유사한 배신적 행위는 전쟁 중 다른 곳, 다른 부대에서도 있었고 옛 왕조 때도 그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반복되는 현상이라서 더욱 아쉽다. 그래서 지위가 높거나 명예를 가진 사람일수록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덕목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군 군대의 지휘관들은 ‘지휘관 휘장(흉장)’을 항상 왼쪽 가슴에 패용하고 있다. 사람의 온 몸에 혈액을 전해주는 필수장기인 ‘심장’이 있는 가슴 쪽에다. 직분과 책무를 잊지 말라고.

 

제대로 평가・기억되지 않는 김포지구전투
‘김포지구사’는 6·25전쟁 초기 8일 동안 ‘김포지구전투’와 ‘한강방어선 전투’에 참가했던 부대다. 6·25전쟁 전체 국면을 통해 볼 때, 김포지구사의 기여도가 매우 컸으나 그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홀하게 다뤄진 부분이 없지 않았다. 관련 자료의 제한과 이에 따르는 연구의 부족, 연구에 대한 부족한 책임의식과 불명확한 책임소재 때문이 아닌가 싶다.
① 6·25전쟁 관련 자료는 아직도 충분하지 못한 편이다. 2000년 이전까지의 6·25전쟁 관련 연구는 한국과 미국 측의 제한된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미국 측 자료는 아직 비공개 자료가 많아 아쉬움이 크다. 한국 측 자료는 당시 참전했던 지휘관을 비롯한 참전용사의 자서전과 구술, 주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료 대부분이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서로의 의견과 주장이 일부 상충되어 혼란스런 부분이 없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2001년, 6·25전쟁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6·25전쟁 때 북한군을 조종・지원했던 소련 측 자료가 일부 공개되었다.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가 공개됨으로써 기존 연구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의문점이 해소될 수 있었다(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군사고문단장, 무관의 3개 직책을 겸임한 라주바예프 중장이 전쟁 중의 주요 국면에 대한 관련 자료를 수집해서 소련 상부기관에 보고한 자료). 김포지구전투에 참가한 부대의 규모와 북한군의 작전 기도, 실제 전투의 전개 등도 그중 하나였다(종전까지는 1개 연대가 한강을 넘어온 것으로 연구되어 왔으나, 이 보고서에 의해 6사단(-)이 넘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직접 전쟁을 수행했던 중국과 북한 측의 자료 확보도 아직까지는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향후 중국과 북한 측 자료가 더 공개되고 심층 있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기존의 연구를 보완하고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사 연구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이다.
② 김포지구전투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또 다른 이유로 ‘책임의식의 부족과 불명확한 책임소재’를 들 수있을 것 같다. 김포지구사에 편성되어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부대들이 혼합편성 되다 보니 어느 부대도 책임의식을 갖고 김포지구전투를 연구하지 않았고, 참전 지휘관 중 고위급으로 진출한 분이 많지 않아서 연구가 미진한 부분도 있었겠다 싶다(김포지구사의 지휘관 중 3명이 행방불명 또는 사망했음은 다른 전투들과 큰 비교가 됨). 
김포지구전투는 대부분 육군 부대 중심으로 싸웠다. 현재 김포반도지역에는 육군 부대도 주둔하지만 해병대 부대들이 대부분 주둔하고 있다. 해병대는 김포지구전투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연구에 관여하지 않았고, 연구할 여건도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김포지구전투에 대한 연구는 아무래도 국방부와 육군본부 차원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③ 김포반도에서 있었던 김포지구전투가 제대로 연구되고 평가되면, 이를 바탕으로 당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그분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리기 위한 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라는 한강방어선 전투에 대한 전적비나 기념비도 마찬가지다. 지난달에 찾았던 ‘춘천지구전투’가 ‘대첩’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리고, 그날의 일들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기억되는 것과 비교되는 것 같아서 70년 전 이곳에서 싸웠던 그분들에게 너무나 송구스런 마음이 든다(김포반도와 한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6·25전쟁 관련 조형물 중, 초기 김포지구전투와 한강방어선 전투 자체를 기리는 조형물은 ‘한강방어백골부대 전적비’가 유일하다. 나머지 조형물들은 현충탑, 충혼탑, 위령비, 공적비, 유공자탑, 전사자 명비 등으로 불린다).

 

미로(迷路), ‘한강하구수로’에 대한 해도(海圖)까지 공유하는 시대
한강과 염하가 만나는 곳에 ‘유도’(留島) 라는 무인도가 하나 있다. 옛날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던 세곡선(稅穀船)들이 서울(한양)까지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이 일대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그만큼 뱃길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한강의 수면 아래는 마음 놓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물밑 지형이 복잡해 좌초의 위험성이 큰 복잡한 험로였던 것이다. 조류도 빨랐다. 
그런데, ‘9·19군사합의’(2018년)에 따라 한강하구수역을 공동으로 활용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한강하구에 대해 합동으로 수로를 측량하고 관측자료를 수집・분석해 선박 항해에 이용할 수 있는 해도를 제작했다. 2019년 1월부터 남과 북은 한강하구에 대한 ‘해도(海圖)’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해도가 무엇인가. 수심과 유속은 물론, 수면 하에 있는 암초와 해저지형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선박들이 안전하게 물길을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물이자 종합안내도가 아닌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해서 형성되는 이 물길의 수면 아래에 대해서는 지금껏 우리도 북한도 잘 몰랐다. 미로였기에 장애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컸던 것이다. 그러던 한강수로가 이제는 장애물로서 얼마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반도 주변의 물길조사와 관련된 역사를 보면, ‘병인양요’(1866년)도 그 발단은 한강에 대한 수로 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전에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의 지세 정찰과 수로(水路) 탐사를 실시했다.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접근도 거의 비슷한 수순으로 진행되었고 그 종말은 무력침공이나 국토침탈이었다. 놀라운 것은 병인양요 10년 전에 프랑스함대가 동해 영흥만으로부터 서해 덕적도까지 해안 탐사를 했는가 하면,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1885년)하기 40년 전에 이미 주변 해역에 대한 탐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물길 탐사는 항상 침탈과 관련되어 왔던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한강 하구 수역에 대한 공동조사 및 자유로운 항행이 우리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수로가 여전히 장애물로서 기능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한강수로가 장애물로서의 기능이 줄어든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작전상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작전의 방법도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한강수로 공동개발의 결과가 과연 한반도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늦었지만 많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김포반도 자전거여행
70년 전 김포반도에서 있었던 ‘김포지구전투’는 대부분이 강화도에서 김포비행장을 거쳐 영등포를 연결하는 48번 도로를 연하는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당시의 많은 전투현장들은 ‘(김포)한강신도시 조성사업’으로 인해 도심 속에 묻혀버려 흔적도 알 수 없다. 6·25전쟁 당시 격전의 장소들은 관련 부처(部處)의 관심과 책임의 부재 탓인지 당시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나 관련된 기념물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포반도 전체에 설치되어 있는 철책선을 따라 한 바퀴 돌다보면 격전의 당시를 회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단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유익한 라이딩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어떠한 안내판이나 조형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지 모른다.
세(三) 개의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반도에 이르는 방법은 ‘한강자전거길’과 연결해 접근하거나, 김포공항과 양촌(김포시)을 잇는 전철(김포골드라인)을 이용해 접근하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김포반도 전체에 대한 라이딩은 ‘평화누리 자전거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평화누리 자전거길은 행주대교-전류리포구(김포시 하성면)-애기봉입구-문수산성(남문)-대명항(김포시 대곶면)을 연결하는 약 68km의 코스다. 한강과 조강, 염하 그리고 넓은 들판과 철책선 등을 보면서 달릴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다. 
김포반도에서 다리(강화대교, 초지대교)만 건너면 섬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요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다.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 고려시대 때의 대몽 항쟁의 현장, 조선말의 병인・신미양요의 흔적, 해안을 따라 즐비하게 자리 잡은 국방유적 등 볼거리가 무궁무진해서 제대로 보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내친김에 강화도 해안 일주는 아니더라도 강화대교-초지대교를 잇는 염하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큰 성취감을 줄 것이다. 더 변화를 주고 싶다면 인천으로 통하는 아라뱃길과 연결시키면 더욱 재미난 코스가 될 것이다. 

 

염하(鹽河)를 건너 역사・문화의 고장 강화도로
김포반도 내에는 김포지구전투를 기억하고 안내하는 곳은 거의 없다. 단지 전류리포구를 출발해 김포반도 북쪽을 거쳐 염하수로 주변의 대명항까지 연결되는 평화누리 자전거길에서 철책선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정도가 전부다. 북한군이 한강과 염하를 거쳐 김포반도로 건너와 발을 디딘 조강리와 누산리, 갑곶 일대를 직접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강화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군(群)이 있는가 하면,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도 있다. 그래서 강화도를 말할 때는 ‘5천년 역사를 함께 하는 고장’으로 소개된다. 
강화도는 고려 때에는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때는 임진왜란, 정묘 및 병자호란, 병인・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함께 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6·25전쟁 중에는 한반도 서부전선 중 최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북한군 일부가 강화도를 거쳐서 김포로 넘어온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에는 고려・조선시대 때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구축한 대표적인 호국시설인 강화산성과 전 해안에 걸쳐 구축된 ‘12진보(鎭堡) 53돈대(墩臺)’가 남아 있다. 이중 강화산성은 1232년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가 강화도로 건너와 대몽항쟁을 할 당시 쌓은 삼중(三重)의 방어성곽을 갖춘 도성(都城)이다. 그러나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39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강도(江都)시대가 끝나고, 강화산성도 몽골군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현재는 도심이 형성된 동쪽 부분을 제외하고 내성의 서・남・북쪽 성곽은 복원 후 잘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각종 국방시설을 보다 강화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피난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숙종 때 12개 진보 53개 돈대 체제가 정립되었고 강화산성도 개축되었다. ‘진(鎭)’과 ‘보(堡)’는 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돈대(墩臺)’는 주로 해안의 돌출부에 배치되어 외적의 침입 활동을 관측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말한다. ‘진・보’는 소규모 군사시설이었던 돈대를 3~5개 관할했다. 
진·보와 돈대는 강화도 전체 해안에 두루 있으나 강화도 동편인 염하를 연하여 잘 남아 있고, 주요 격전지를 포함해서 볼거리들이 많다. 신미양요 때의 격전지인 초지진・덕진진・광성보 등이 있는가 하면, 정묘호란 후 후금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월곶진(연미정) 등도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 터(갑곶 일대)도 있다. 강화도의 어제와 오늘을 좀 더 소상히 알고 싶으면 강화대교를 건너면 나오는 ‘강화전쟁박물관’을 관람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참고자료
* <6·25전쟁사>(제3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 <6·25전쟁사>, 합동참모대학, 2019
* <6·25전쟁사 부도>, 육군대학, 2007
*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육군군사연구소, 2013
* <우리가 겪은 6·25전쟁>(Ⅱ), 대한민국육군협회, 2012

* 부대의 ‘명칭’이나 ‘단대호’ 오른쪽이나 밑에 (+), (-), (+1), (+2), (+3), (-1), (-2) 등의 추가 표식이 있을 경우, (+) 기호는 해당 부대의 증강을, (-)기호는 해당 부대가 감소를 의미함. + 또는 - 뒤의 숫자는 해당부대에서 한 단계 하급 제대의 수만큼 증가・감소한 것을 나타냄. ‘6사단(-1)’은 6사단에서 ‘1개 연대’가 감소한 것을, ‘7연대(+2)’는 ‘2개 대대’가 증강됨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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