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 벨로 Big 투어-충남 예산

충남 예산
추사의 본향, 예당호 호반의 여유
어감부터 부드러운 예산은 역시 슬로시티답게 산천과 마을에는 차분한 문화적 기품이 어려 있다. 조산말의 석학이자 명필인 추사 김정희의 본향이고 더 오랜 옛날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열혈 투사들이 항전한 곳이다. 가난하면서도 서로 몰래 돕고 지낸 ‘의좋은 형제’ 전설도 이곳에서 실존했다. 광활한 예당호 호반을 여유롭게 산책하고 천하일미의 광시한우를 맛보는 행복한 여정이다

 

 

“여행이란 여기의 행복이다”라고 누가 이야기했다. 잘 풀이한 것 같다. 여행은 미리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가든, 아니면 생각날 때 훌쩍 떠나든 즐겁고 행복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특히 요즘같이 답답한 상황에서 그냥 훌훌 털고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 도착하면 우선 기분이 묘하다. 그곳에서 나만 외지인인 것 같고 사람들은 모두 내 행동을 주시하는 것만 같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에 처음에는 몸이 단단히 굳어진다. 차문을 열고 내리는데도 용기가 필요할 정도다. 그러다 몇 군데를 돌아보며 그 고장의 공기와 풍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처음의 어색함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눈 녹듯 사라진다. 이런 과정은 여행을 할 때마다 항상 반복된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그런 과정과 나의 감정상태가 변해가는 것이 재미있어 즐기는 수준까지 되었다. 사람을 만나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먹했다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면 이 좋은 사람을 왜 이제야 만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것과 똑같다. 왜 이제야 이곳을 찾았지? 나는 그동안 뭐하고 살았지?

모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는 충청도 예산을 찾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김정희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도 몰랐다. 심지어는 까마득한 옛날의 위인으로만 알았을 정도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추사체,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해독한 사람 정도였다. 그것도 시험에 나오니 밑줄 그어가며 외웠을 뿐이다.
장마철이라 비 예보가 없는 날을 골라 아침 일찍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오늘의 핵심인 추사 김정희 고택이다. 오기 전에는 단순히 고택만 있겠지 했는데 도착해보니 예상과 달리 작은 규모의 테마파크다. 김정희기념관, 체험관, 추사고택, 화순옹주 집터 그리고 천연기념물인 백송과 백송공원까지 있다. 이렇게 잘 정리된 장소에 들어서면 작은 행복을 느낀다. 새롭게 얻을 지식이 참 많겠구나 하는 기대감과 설렘 덕분이다. 김정희기념관은 잘 지어진 2층 건물로 추사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9시 개장인데 도착한 시간은 8시반. 머뭇거리고 있으니 안내하는 분이 웃으며 “일찍 오셨네요. 들어가셔도 되요.” 하며 흔쾌히 문을 열어준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쓰여 있다. 초산 유최진이라는 분의 말이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정말 그렇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다. 추사체의 김정희라고 하면 다들 알지만 그분의 생애나 어떻게 추사체가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이제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아주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추사선생은 1786년에 태어나 1856년에 7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불과 160년 전이다. 이렇게 가까운 과거에 그런 대가가 있었다니…. 
추사선생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해 박제가 선생이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청나라의 서예 대가인 옹방강의 서체와 중국의 예서체를 깊이 연구해 특유의 추사체를 창조해 냈다. 추사체는 말년에 제주도에 9년간 유배됐을 때 완성했다. 추사체를 처음 보았을 때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추사체를 평할 때 ‘졸박청고(拙樸淸高)’라고 한다. ‘필체가 서투른 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는 의미다. 

 

‘세한도’ 이야기  
전시관 안에 또 하나 감동적인 글이 있다. 추사선생이 직접 한 말인데,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벼루 1천개를 밑창 냈고 붓 1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이게 진리다. 세상에는 노력을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원래 타고난 천재성에 이런 엄청난 노력이 더해져서 창조된 것이 바로 추사체다. 그러니 사람들이 추사체를 보면서 다른 서체에서 느끼지 못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추사선생 하면 또 생각나는 게 있다.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다. 이러한 그림을 문인화라고 한다. 세한도는 사실 원근법도 맞지 않고 그림 속 오두막집은 거의 낙서같이 그리는 등 잘 그렸다고는 볼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을 알고 보면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한편의 이야기로 읽혀진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世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글에서 따왔다. 의미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어려워졌을 때 참된 우정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친구고 지인이고 다 연락을 끊어 외롭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이때 유독 제자 이상적만이 변함없이 연락하고 좋은 책을 구하면 선생에게 보내주는 등 극진한 정성을 다하는 데 감동하여 그림에 담아 제자에게 선물한 것이 세한도다. 이 내용을 알고 그림 앞에 서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도 유배생활은 아니지만 현업에서 은퇴했는데도 변함없이 옛상사분들과 동료, 후배, 거래선 사장님들이 늘 연락하고 걱정해준다. 일로 만난 사람들인데 일이 끝나도 그 정이 변함없다.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다. 나야말로 세한도를 100장은 그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추사기념관 1층에 있는 기념품 매장에서 추사고택의 사계절 모습이 담겨 있는 마그네틱 카드를 몇 개 샀다.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다닐 때마다 사온 마그네틱카드를 주방 한쪽벽면 철판에 붙여두고 식사 때마다 보면서 거기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 하곤 한다. 이제 식사 때 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길 것 같다. 
추사의 손때가 묻은 고택과 백송 
기념관을 나와 추사고택으로 향했다. 추사고택은 흔히 생각한 대궐 같은 그런 집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검소하고 아담하다. 면적은 80평 정도로 작은 전원주택 크기다. 고택은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그리고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으로 구성된다. 한 바퀴 돌며 이곳이 대가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라는 생각에 벽이며 마루며 추사가 직접 만든 해시계를 한번씩 쓰다듬어 본다. 바로 여기에 그분의 손길이 닿았겠지? 추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다. 
추사고택에서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는 곳까지는 자전거로 갔다. 추사가 걸었을 길이다. 페달을 밟으니 코끝에 상쾌하게 느껴지는 아침공기가 참 좋다. 이곳의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백송은 중국원산으로 어릴 적 성장이 아주 더디고 이식율이 많이 떨어져 중국 외의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희귀수로 관리되고 있다. 청나라 유학시절 백송을 즐겨 찾았던 추사선생은 백송을 키우고 싶어 귀국 길에 씨앗을 몇 개 가지고 왔다. 씨앗은 고향집 뒷동산에 있는 고조부의 묘지 앞에 심어 놓고 틈날 때마다 보았다고 한다. 그 백송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다. 백송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데 단순히 큰 줄기만 흰색이 아니고 이파리가 나있는 작은 줄기까지 모두 흰색이라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밤에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거대한 예당호 
추사고택에서 예산의 자랑인 예당호까지는 차로 약 20분 거리다. 예당호는 면적이 9.9㎢. 둘레 40㎞의 큰 저수지다. 예산군과 당진시에 걸친 넓은 홍문(鴻門)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었다. 1929년 4월에 착공했고 8·15광복 전후에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46년부터 공사가 재개되어 1963년에 완공되었으니 축조에만 30년 이상 걸린 셈이다. 
예당호의 새 명물은 출렁다리다. 국내최장인 402m로 관광목적으로 작년에 완공되었다. 말이 출렁다리지 엄청 단단해서 웬만큼 쿵쾅거려서는 꿈쩍도 않는다. 
다리 중간에 있는 3~4층 높이의 전망대에 올라가니 예당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호수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출렁다리에서 돌아 나와 호반을 따라 나 있는 산책용 나무데크를 걸어본다. 산책로는 이곳에서 중앙생태공원까지 무려 7㎞나 된다. 
예당호는 산 사이에 자리해서 호숫가의 경사가 아주 심하다. 그 심한 경사를 극복하고 나무데크로 멋진 산책로를 만든 것이다. 과장하면 거의 중국의 잔도 수준이다. 이 길을 내느라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 것 같다. 이 산책로를 왕복하면 2만보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 살면서 매일 이 산책로를 걸으면 굳이 다른 운동을 안 해도 아주 건강해질 것 같다. 
주차장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라떼를 한잔 사들고 조금씩 음미하면서 여유를 즐긴다.

 

실존했던 ‘의좋은 형제’ 
‘의좋은 형제 공원’이라니…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어릴 때 교과서에서 읽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이 이야기가 그냥 동화나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화일 줄이야. 참 흥미롭다. 의좋은 형제 공원은 고려 말 조선 초, 예산군 대흥면에 실존한 인물로 형(이성만)과 그 아우(이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조성되었다. 공원 입구에는 추수를 끝내고 서로의 집으로 볏단을 옮기는 의좋은 형제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미담으로만 알고 있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연산군 3년(1497)에 세워진 ‘이성만 형제효제비’가 1978년에 마을에서 발견됨에 따라 실존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의좋은 형제 공원이 있는 대흥면은 전국에서 6번째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예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마음이 여유로웠나보다. 그래서 형제들 간의 우애도 자연스럽게 좋았던 게 아닌가 싶다. 여유롭게 둘러보고 나서려다 바로 앞에 있는 학교에 기념비가 있어 가보았다. 개교 100주년 기념비여서 조금 놀랐다. 이 학교가 100년이 넘었다고? 확인해보니 대흥초등학교인데  1911년에 개교했다고 한다. 대단하다. 
의좋은 형제 공원 바로 옆에 있는 중앙생태공원 연밭에는 이제 막 하얀 연꽃이 피기 시작했다. 몇 주 후면 이곳에도 연꽃이 활짝 필 것이다.

광시한우 
아침부터 열심히 다니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오기 전부터 꼭 가보려고 미리 정해둔 곳이 있다. 바로 광시한우거리다. 광시한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큰 규모의 우시장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기를 취급하는 음식점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광시에는 한우전문점이 50곳 정도 있다고 한다. 고기의 질이 워낙 좋다 보니 어느 곳에 가도 다 맛있을 것 같다. 지역주민들이 자주 간다는 식당을 찾았다. 
지역의 명물인 육회비빔밥을 주문했다. 사실 등심·안심 이런 고기도 먹고 싶었지만 대낮에 혼자 고기를 구워먹는 것이 어색해서 간단히 육회비빔밥을 먹기로 한 것이다. 주문하자 바로 앞에 있는 조리대에서 아주머니가 즉석에서 고기를 썰어준다. 바로 나온 육회는 색깔부터 아주 신선하다. 양념과 고추장, 밥을 넣고 잘 비볐다. 한입 넣어보니 입속에서 살살 녹는다. 육회가 밥알을 둘러싸면서 씹히는 식감이 아주 좋다. 고기가 살살 녹는다는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에는 가족과 함께 와야겠다. 다만 한우가격이 아주 저렴한 편은 아니다. 아주 비싸지도 않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할 딱 그 정도다. 
사실 세상에는 싸고 맛있는 곳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식재료 때문이다. 좋은 식재료를 써야 맛도 좋은 법이다. 따라서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곳을 찾아야 그게 합리적이고 보람 있는 선택이다. 
식당의 커피자판기에서 달달한 커피를 한잔 뽑아들고 황새공원으로 향했다. 예산황새공원은 천연기념물 제199호 황새의 자연 복원을 위해 예산군이 조성해 2015년 6월 문을 열었다. 황새문화관, 생태습지, 오픈장, 사육장, 트리하우스, 황새 먹이주기 체험장 등의 시설이 있다. 
황새는 원래 우리나라의 텃새였으나 자연환경훼손으로 거의 멸종상태까지 갔던 조류다. 예산군은 이곳에서 자란 황새 8마리를 2015년 9월에 전국 최초로 자연 방사했고 이후에도 황새의 안전한 자연 정착을 위해 매년 자연에 돌려보내고 있다. 올해만 해도 41마리를 부화시켰고 지금은 총 184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2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넓은 사육장에는 10마리 정도의 황새가 거닐고 있다. 사실 황새는 말로만 듣거나 사진으로만 보았지 이렇게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처음 본 황새는 뭐랄까, 아주 기품이 있고 매력적이다. 희귀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새의 태생 자체가 그런가보다. 걷는 것도 우아하고 웬만한 소음에는 아예 반응도 않는다. 마침 관람객이 나 혼자라서 휘파람도 불고 “황새야!” 하고 소리도 쳐보지만 눈길 한번 안주고 끔쩍도 않는다. 독수리 같은 맹금류와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풍긴다. 황새를 한참 바라보다 한 마리 키우면서 매일 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백제 부흥군의 거점, 임존성 
이제 예산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임존성으로 향한다. 해발 484m의 봉수산 정상부에 조성된 임존산성은 백제가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망했을 때 의자왕의 사촌동생 복신과 승려 도침, 흑치상지 장군 등이 4년여 동안 백제 부흥운동을 펼친 거점이다. 안쪽의 흙을 다지고 밖에는 돌을 쌓은 석성으로 성벽이 산정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특이한 것은 성벽 안쪽에 호를 파서 물을 모았다가 적의 공격 때 물꼬를 터뜨려 1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적이 당황하는 사이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구조다. 이 기상천외한 수공전략이 전투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여러 차례 나당군의 공격을 막다가 항전한지 4년만인 664년에 결국 함락되었다. 나라가 망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며 끝까지 싸운 곳이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에 서있으니 당시 이곳 사람들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병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숲속에서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임존산성은 둘레가 2450m, 현존하는 성벽의 높이 2.5~4m, 폭 3.5m다. 서쪽 성벽은 상당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성벽은 산의 7~8부 능선에 있으며 바로 아래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게 도로가 나있다. 아마 성벽의 복원과 관리를 위해 만든 도로인 것 같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 되어 있지만 폭이 좁아 차 한대가 간신히 통과하는 수준이고 피항지도 거의 없어 만약 다른 차를 마주치면 아주 곤란할 수 있다. 실제로 나도 올라갈 때는 혼자였으나 내려가다 올라오는 차와 마주쳐 난감했다. 서로 조금씩 움직여 가까스로 비껴가기는 했는데 바로 옆이 절벽이라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질 것 같아 아찔했다. 

비 오는 호반의 여유  
임존산성 성벽 위에는 최근 지은 것 같은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서니 사방이 다 조망된다. 오늘은 꽤 더운 날인데도 바람이 잘 불어 아주 시원하다. 정자 앞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바라보며 한참을 쉬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바람도 강해지는 게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서둘러 하산하니 아니나 다를까 내려오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점점 거세졌다. 
예당호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호숫가에 있는 전망 좋은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며 비 내리는 호수를 바라보니 꽤나 운치가 있다. 정말 여유롭다. 여행은 여럿이 가도 좋지만 혼자 가는 여행도 참 좋다. 고독을 즐기는 것, 그것은 외로움과는 다르다. 고독은 상태지만 외로움은 감정이다. 낯선 고장에 도착해 자전거로 천천히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바라본다. 그러다 점점 그 곳에 익숙해지면서 그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느낌. 나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오늘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의좋은 형제의 고장,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황새의 고장, 슬로시티 예산을 돌아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예전부터 잘 안다고 믿었지만 결코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푸루스트의 말이 생각난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땅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오늘 진정한 발견의 길로 들어선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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