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다 원트웬티 + 벨로스타 센터드라이브 MTB, 모터 달고 다시 산으로

산청 왕산(923m) 동의보감둘레길 + 지리산 둘레길

E-MTB로 저 山에 ③
메리다 원트웬티 + 벨로스타 센터드라이브
MTB, 모터 달고 다시 산으로

가야 최후의 왕이 잠들고 <동의보감>이 잉태된 산
지리산 동북단에 첨봉으로 솟은 왕산(923m)은 높이는 낮지만 빼어난 산세와 기세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 산의 이름을 달고 있다. 감히 왕의 이름을 붙인 이 산은 가야 최후의 왕 구형왕의 전설과 무덤이 전하고,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의 스승 유의태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일명 ‘동의보감둘레길’은 왕산의 허리를 휘감는다. 주능선을 넘는 지리산둘레길을 더하면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인 지리산의 맥동을 온몸으로 만나게 된다
글·사진 김병훈(본지 발행인)

 

왕산 남쪽 사면으로 들어서면 조망이 탁 트인다. 이정표 건너편으로 웅석봉(1099m) 자락을 넘어가는 밤머리재(580m)가 옴폭하다

 

지리산 팔백리 골짜기와 능선 마다 사연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을 거쳐 동북으로 흐르던 주맥이 남강을 만나 가파르게 갈무리된 왕산(923m)은 각별하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왕(王)의 산이다.
왕산의 북쪽 골짜기에는 대단히 이채로운 돌무덤이 하나 있다. 산비탈을 따라 피라미드처럼 7단으로 쌓은 돌무덤은 높이가 7.15m에 달하는데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62)의 능으로 전해진다. 가야의 고분양식과는 판이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적석총이나 한성 시절 백제의 고분과 비슷해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일대에 내려오는 전설과 유적으로 봐서 구형왕의 무덤이 맞는 것 같다. 역사에는 그가 세불리를 통감하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복속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전설에는 이곳 왕산자락에 은거하며 저항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어린 시절 능을 지키며 무예를 닦았다는 얘기도 있다.
또 하나, 최고의 전통의학서로 불리는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곳에서 잉태되었다고 한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산청 사람이었다. 이런 전설을 토대로 산청군은 왕산 동북쪽 자락에 거대한 한방테마파크인 ‘동의보감촌’을 조성했다. 왕산을 한바퀴 도는 임도 코스에 ‘동의보감 둘레길’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높은 풍차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의보감촌

 

왕산 한 바퀴 돌고 다시 주능선 넘어
내가 왕산에 주목한 것은 ‘그래도 지리산’이고 동의보감 둘레길을 위주로 깊고 흥미로운 코스를 꾸미기 좋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촌을 출발해 왕산을 반시계 방향으로 돈 다음 향양리~수철리를 거쳐 고동재(550m)를 넘는다. 북쪽 방곡리로 내려서서 남강의 지류인 임천을 따라 가다 구형왕릉에서 다시 동의보감 둘레길에 합류해 출발지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거리는 35㎞, 오르막을 모두 합한 상승고도는 1357m나 되는 난코스다. 업힐이 많아 배터리 하나로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든다.
동의보감촌에 들어서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풍차전망대휴게소로 향한다. 코스는 풍차전망대 뒤쪽에서 시작된다. 자동차는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풍차전망대가 이미 해발 390m나 되어 먼 산줄기가 첩첩한 원경이 드러난다. 길은 400m 등고선을 따라 조금씩 일렁일 뿐 큰 업힐이나 다운힐은 없다.
3.7㎞ 가면 구형왕릉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나중에 구형왕릉 쪽에서 올라와 출발지로 갈 분기점이다. 500m 직진하면 유의태 약수터 갈림길이다. 약수터까지는 300m 정도 걸어가야 해서 생략한다. 
인적 없는 산 속의 아침은 온통 나만의 차지다. 혹시나 멧돼지가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되지만 덩치 큰 원트웬티와 나를 보고는 먼저 도망갈 게 분명하다. 8㎞ 지점의 상사폭포 분기점에서 뜻밖의 산촌을 만난다. 이 깊고 외진 산속에 4, 5채의 집이 모여 있다. 자동차는 서 있는데 인적이 없어 왜 이런 곳에 (숨어) 사는지 물어볼 수도 없다. 저 멀리 왕등재 능선 너머로 천왕봉의 고고한 절정이 살짝 드러났다.  
9.7㎞ 지점에서 주능선을 넘으면 조망이 확 트이면서 향양리, 수철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12.7㎞ 지점에서 둘레길은 계단을 통해 필봉으로 올라붙고, 자전거는 계속 직진해서 향양리의 전원주택지로 내려선다. 지대가 높기는 하지만 왕산 남쪽 자락에 안긴 마을은 포근하고 조망도 시원하다. 이제 지리산에 안겨 사는 것은 격오지의 가난이나 불편이 아니라 이렇게 편하고 분위기 있는 일상이 되었다.  

 

천하대장군 장승이 서 있는 고동재 정상. 해발 550m이지만 고도차가 커서 업힐이 가파르다

 

 

수철리에서 고동재로
전원주택지를 내려서면 59번 국도를 만난다. 우회전해서 200m 가다 국도를 버리고 수철리 방면으로 직진하다가 다시 삼거리에서 수철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수철마을회관 앞에서 개울을 건너 좌회전한다. 이제부터는 고동재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둘레길’ 동강~수철 구간과 겹친다.
수철리를 벗어나면 경사는 더욱 심해지고 본격적인 고갯길이 시작된다. 길가로 둘레길 트레커를 위한 펜션이 몇 곳 있다. 마지막 노이슈반펜션을 지나면 인가 하나 없는 적막 산길이다. 어시스트 강도를 3단까지 올려 편안하게 올라가지만 나중에 구형왕릉으로 업힐할 때 배터리 잔량이 조금 걱정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조금 늦고 힘들어도 페달링이 가능한데. 
고동재는 해발 550m 정도지만 초입의 향양리가 100m 밖에 되지 않아 체감 높이가 상당하다. 장승이 서 있는 고갯마루에서 지리산 둘레길은 주능선으로 들어가고 임도는 고개를 넘어간다. 200m 가면 삼거리인데 직진하면 오봉계곡을 거쳐 방곡리로 가고, 우회전은 곧장 방곡리로 가는 지름길이다. 원래는 오봉계곡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배터리가 걱정되어 바로 하산한다. 이제부터 임천까지는 6㎞에 달하는 다운힐이다. 
2㎞ 정도 내려가니 가현마을이 마치 산중별세계처럼 고요에 잠겨 있다. 여전히 깊고 깊은 산속인데 용케도 마을을 이뤘다. 손바닥만한 다랭이논이 고단한 일상을 떠올리지만 집들은 다들 멋진 전원주택이다.
방곡리를 지나 다운힐이 거의 끝날 무렵 소규모 댐공사가 한창이다. 산을 내려서면 작은 들판이 나오면서 임천이 눈앞에 다가선다. 갈림길에서는 우회전, 임천을 따라 금서초등학교 방면으로 향한다. 금서초등학교를 지난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면 구형왕릉 가는 길이다. 왕릉 초입에는 사당인 덕양전이 있다. 덕양전에서 왕릉까지는 1㎞를 더 가야 한다.

 

정면 높이 7.15m, 7단으로 비탈에 쌓은 구형왕릉. 아무래도 고구려나 백제 초기의 적석총과 닮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돌무덤
이 기묘한 모양의 왕릉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남향도 아니고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의 비탈에 조성된 돌무덤은 자연석을 모아 다소 어설프게 쌓은 형태여서 다급한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산속에는 구형왕이 거처했다는 왕궁터도 전한다는데 정말 여기서 신라를 상대로 최후의 저항전을 펼친 것일까, 아니면 나라를 양보하고 조용히 은둔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단양군 영춘면 사자원리에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돌제단이 있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온달산성이 가까워 그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조사결과 고분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적석총과 닮았고 온달산성도 가까워 고구려와의 친연성이 느껴진다. 혹시 구형왕릉은 신라에 저항하는 구형왕을 돕기 위해 몰래 내려온 고구려군이 쌓아준 것은 아닐까.   
왕릉 앞에서 왼쪽 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들어 1㎞ 올라가면 다시 둘레길을 만난다. 앞서 지났던 삼거리인데, 좌회전해서 3.7㎞ 가면 출발지인 동의보감촌 풍차전망대다.
내리막에서 질주하긴 했지만 고도차가 1357m나 되는 35㎞ 코스를 2시간만에 완주했다. E-MTB가 아니었다면 2배는 더 걸렸을 것이다. 다행히 배터리는 최후의 한 단계를 유지했고 체력은 여전히 가뿐하다. 지금 출발해도 저녁 전에 사무실에 도착하겠다. 

여 정
산청 동의보감촌은 산청읍내에서 4㎞ 거리다. 무료 입장이며 주차비도 무료다. 호텔과 콘도, 자연휴양림, 식당이 모여 있어 편안하게 휴식하기 좋다. 동의보감 둘레길은 동의보감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풍차전망대 뒤편에서 시작된다. 일단 코스에 진입하면 금서초등학교 인근 외에는 가게와 식당이 없으므로 식수와 행동식을 챙긴다. 비포장 노면은 무난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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